존 F. 케네디/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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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한계
2.1. 대외 정책
2.2. 대내 정책
3. 옹호
3.1. 대외 정책
3.2. 대내 정책
4. 현대 공화당원 사이에서의 인기



1. 개요[편집]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에서 배출해낸 가장 위대한 대통령들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뉴 프런티어 정신으로 대표되는 젊고 도전적인 이미지, 베를린 연설 등에서 보여준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완벽에 가깝도록 아메리칸 드림을 구현해낸 가족의 모습[1],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과감함과 신중함을 겸비한 지도력으로 핵전쟁 위기를 극복해낸 공로, 스푸트니크 위성과 가가린의 유인 우주비행 등으로 소련보다 불리한 상태를 역전시키기 위한 달 착륙 사업의 착수,[2] 베트남 전쟁,오일쇼크로 엉망진창이 되기 직전 미국의 황금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국 민주당의 정치인들, 특히 대선 주자급 인물들에게 케네디가 상징하는 이미지, 즉 '젊고 도전정신이 강한, 개방적인 지도자'상은 가장 선호받으면서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대의 빌 클린턴, 200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중반까지 재임한 버락 오바마.[3]

케네디는 부유한 집안과 특이한 아버지, 정치적 비주류에 가까웠지만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점 등 여러 에피소드기록들이 많기에 현재까지도 미디어에 심심찮게 등장하며, 냉전 시절을 적절히 관리하고 미국내 흑인민권운동을 비롯한 여러 민권운동에 관심을 표명한 점과 그의 재임 중에 큰 실책은 없었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힌다.

다만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활동하다 암살되었기에 실제 업적에 비해 과대평가되었다는 비판적 시각 역시 존재하며, 케네디 시절 성인이었던 인물들이 이제 평균 수명을 넘었기에[4] 미국에서도 예전만큼 회자되진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그런걸 떠나 그가 내세웠고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들이 그만큼 일반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소리도 되고, 그런 리더가 있었으면 좋겠다는거라 후대인들의 의식 구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여전히 미국사에서 가장 많은 인기, 화제의 대상이 되는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극적인 인생 때문인지 존 케네디와 그의 정권은 '카멜롯(그 유명한 아서 왕의 근거지)'에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5] 실제로 35살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6]를 비롯해서 백악관 참모진 상당수가 3~40대의 아이비리그 출신 동부 엘리트들이었다. 게다가 32살의 막내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는 상원의원.

2. 한계[편집]


재임 기간이 짧아서 그런 점도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 업적 대비 후광이 과한 대통령 아니냐는 평가도 받는다. 젊고 잘생긴 대통령, 진취적인 가치를 부르짖은 타고난 언변과 극적인 죽음, 아름다운 아내 등의 여러 좋은 이미지가 겹쳐 상당히 미화되었다는 것. 미국 내에서도 케네디가 업적과 성취, 정책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는 점을 몇몇 정치학자들이 거론하기도 한다. 때문에 대중적 인지도나 인기 측면에선 수위권에도 드는 양반이 정치학자들의 대통령 업적 평가에선 10위 중후반권까지 떨어지기도 한다.[7] 미국 대통령이 46명인데 10위 중후반권까지 떨어져도 높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루스벨트 이후 미국 대통령의 국내외적 권한과 위상이 과거보다 비약적으로 커졌고 덕분인지 FDR부터 LBJ까지 20세기 중반에 재임했던 대통령들이 대체로 평가 최상위권~상위권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케네디의 순위는 엄청 높은 순위라고 할 수는 없다.


2.1. 대외 정책[편집]


케네디는 생의 마지막 몇 달간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잘못된 판단을 고집해 상황이 심각해진 카스트로의 쿠바에 대해서도 노선 선회를 고려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철군을 추진하면서도 승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쿠바 문제에서도 피델 카스트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CIA 주도의 사보타주 공작을 다시금 재가했다. 카스트로에 대한 케네디의 이중적 태도는 결국 라틴아메리카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와 다를 바 없었다. 케네디는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면서도 억압적인 독재자들을 계속 지원했다. 심지어 1963년 3월에는 과테말라 군사 쿠데타를 지원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526

피그만 침공 작전 실패는 당시엔 의외로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사실 선거가 있었다면 당선 여부와도 연결될만한 병크였고[8], 당시 까딱했으면 커다란 국제 분쟁으로 확전될 가능성도 높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군부와 척을 진 케네디의 이미지 때문인지 젊은 지도자의 시행착오로 인한 사소한 실수 정도로 가볍게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 역시 일이 커진덴 케네디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 막상 오늘날엔 일이 커지고 나서 케네디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는 측면만 부각되고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소련의 입장은 미국 케네디가 터키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핵무기를 배치했다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쿠바에 핵미사일을 설치했다는 것이었다. 소련의 입장을 틀린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미국이 먼저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도 더 많은 군사적 행위에 착수했던 주체는 소련이 아닌 미국이었고, 소련은 미국의 위협에 대응하는 수준이었다. 즉 그러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케네디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케네디가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가하는 선에서 끝내려 했던 베트남 전쟁도 그의 책임을 회피할 수가 없다는 비판도 강하다. 우선 남베트남에 미군사고문단을 파병하며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를 지원하는 행위 자체가 1954년에 맺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사례였다. 어째됐건 아이젠하워 시기 1,000명도 안되는 규모의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1961년 900명에서 1963년 1만 6,000명으로 급증했다. 단순히 군사고문단의 숫자만 증가한 것이 아니고, 군사고문단 파병과 더불어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사용과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고 불리는 치명적인 고엽제 살포 또한 허가함으로써 인권이라는 측면에서도 치명적인 선택을 했다.[9] 이를 통해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APC와 같은 장갑차량과 헬리콥터 그리고 각종 장비 및 적잖은 무기를 남베트남에 지원해줬다.

또한 당시 케네디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마라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도와 이른바 남베트남 농민들을 강제로 소개시키는 전략촌(Stragic Hamlet) 계획을 실행하여 역으로 남베트남 민중이 베트콩을 지지하게 하는 전략적 실책을 저질렀다. 비록 케네디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의지를 떠나서 군사고문단의 급격한 증가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기 전 그 중간단계였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10] 또한 케네디 정부가 지원한 남베트남 정부는 전혀 민주적이지도 않았으며, 반대파 탄압과 언론 탄압 그리고 학살과 구금이 빈번히 일어나는 독재체제였다. 또한 자국민을 수십만 명을 감시하여 감옥 및 준 수용소에 가두는 체제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케네디 정부의 그러한 물적인적 지원이 남베트남 정부를 안정시켰다고 보기도 힘들다. 당시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에게 엄청난 양의 물자와 장비를 지원해주었지만, 1963년 1월 사이공 인근에서 벌어진 압박 전투에선 우수한 장비와 화력에도 불구하고 베트콩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아래의 인용문은 프랑스의 대통령이던 샤를 드 골이 케네디의 베트남 개입에 대해 평가한 것이다.

나는 케네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이 지역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당신은 끝없는 미로에 빠질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한번 눈을 뜨고 궐기한 다음에는 아무리 강대한 외부적 세력도 그 의사를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부 현지 지도자들이 순전히 이기적인 이유와 목적에서 당신으 섬길 생각이라 하더라도 민중은 그들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더구나 당신을 원치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인도차이나 민중은 당신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를 당신의 지배욕과 동일시할 것이다. 당신이 그곳에서 반공주의를 내세워 깊이 개입하면 할수록, 민중은 공산주의자를 더욱 따르고 지지하게 될 것이다. 불행한 아시아와 아시아의 민족들을 위해서 우리나 딴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그들 민족이나 국가의 살림살이를 우리가 떠맡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나 전횡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을 낳게 하는 원인인 인간적 고통과 욕된 상태에서 그들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11]


2.2. 대내 정책[편집]


그의 좋은 이미지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복지 정책 역시 과중한 예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재임 기간 중엔 의회를 통과하지도 못하고 사장될 뻔 했다. 그러나 후임 린든 존슨 대통령의 정치적 수완으로 극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케네디 본인은 복지 정책을 내놓고 의회 통과를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별로 기울이지 않았지만, 후임자 린든 존슨은 다선 의원 출신답게 의회에서의 오랜 경륜을 살려 의원들 개개인을 직접 설득하고 갈군[12] 끝에 전임자의 정책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이러한 복지 정책이 70~80년대 미 정부의 막대한 재정 문제를 초래했다는 시각도 있다.[13]

케네디의 또 다른 대표적 업적이라는 우주개발계획 역시 그가 직접적으로 한 일이라곤 60년대 안으로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포부를 밝힌 것이고, 아폴로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의 재임기에 실제로 추진한 것은 별로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케네디의 이 발언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이고 무모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소련이 먼저 인간을 우주로 보내자 당황한 케네디가 10년 안에 인간을 달로 보내겠다고 일단 질러버린 것에 가깝다는 반응이 많았다. 실제 케네디도 어렵다는거 아는데 일단 해보자는 식이였으니.. 이런 무모한 계획을 정말로 실현시킨 것은 천재 로켓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과 후임 대통령 린든 존슨의 구체적인 실현 의지 덕분이었는데, 당시 존슨 대통령은 막연한 구상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던 달 착륙을 실현시키기 위해 아폴로 계획과 이에 수반된 제미니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시켰고, 이를 위한 막대한 예산을 지원해줬다. 이쯤되면 이 문항은 린든 존슨 재평가 항목일지도

우주 개발에 있어서 케네디의 역할이 지나칠 정도로 띄워진 것은 NASA마케팅빨이 크게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폴로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필요했는데, 이 막대한 예산을 따내기 위해선 여론의 지지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기 때문. 그래서 NASA는 케네디 前 대통령의 유훈이었다는 점을 내세우며 시민들의 향수를 자극, 우주 개발 및 아폴로 계획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NASA는 로켓 발사기지가 위치한 플로리다주의 케이프 케네버럴(Cape Canaveral) 인근 동명의 공군기지 이름도 케이프 케네디 공군기지로 바꾸어 속된 말로 오버하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14] 이렇게 보면 케네디가 재임기보단 사후 미국의 우주개발계획에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준 측면은 있을듯.

케네디의 중요한 업적으로 내세워지고 있는 인종차별 완화 정책 역시 케네디의 업적 중 하나임은 분명하나,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 이미 아이젠하워 시절 인종차별 완화를 위한 노력들이 많이 있어 왔는데,[15] 전임 정권의 업적까지 가져와 케네디의 업적으로 포장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 물론 더 뒤로 가면 트루먼 시절도 있긴 하다만.

개인사에서 보듯 여성 편력 건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3. 옹호[편집]


요약하자면 케네디의 업적 자체는 짧은 임기로 인해 한계가 있었지만, 진보적인 생각과 능력 자체는 뛰어난 대통령이었다. 그에 대한 향수와 동경 역시 단순한 이미지만이 아닌 "저런 능력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대통령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에서 나온다고 봐야 옳다. 케네디에 대한 반감도 마찬가지로 저런 아쉬움과 그를 동반한 케네디에 대한 열광의 반작용에서 나오는 부분이 많지, 케네디의 능력 자체에 대한 의심은 적다.

정치학계에서도 역시 케네디가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지적은 할지언정 케네디가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실제로 휴스턴 대학교코펜하겐 대학교의 합동 연구진이 2018년에 미국정치학회(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의 행정부 연구부문 회원 학자 320명에게 역대 미국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하게 한 결과(170명이 응답하였다), 현직을 포함한 44명의 대통령 중 케네디의 순위는 16위였다.[16] 2017년 CBS에서 91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8위를 기록하는 등 전문가들에게도 최소한 평타 이상은 하는 대통령이었다고 평가받는다.


3.1. 대외 정책[편집]


쿠바 사태를 일으킨 책임은 별개로 보더라도[17], 케네디와 미국 행정부가 보여준 외교적 유연성, 노련함은 높히 평가 받아야 한다. 실질적인 해상봉쇄(blockade)를 진행하면서도 검역(quarantine)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는 조심스러운 모습과 동생인 법무장관 RFK를 포함한 다수 매파의 압박에 맞서 외교적인 실마리를 고집해 사태를 해결한 것 모두 케네디의 역량이라고 봐야 한다. 단어 선택 하나가 무슨 큰 의미가 있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서독의 국방장관과 수상을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는 본인의 회고록 "인간과 권력(Menschen und Mächte)"에서 그 부분을 콕 찝어 이야기해 "소련 지도부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뤄냈다"고 고평가했다. 말 한마디가 정세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게 바로 외교기 때문.

실제로 상단에도 적혀 있는 피그만 침공못 막았다라는 것이 비판으로 적힌다는 것은 당시 미국 상황을 무시하고 현대적 시각으로 재단한 결과이다. 쿠바 혁명은 케네디는 취임하기 전인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의 일이고,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 + CIA와 국방부에 대처 방안을 요청해 놓은 상태에서 케네디에게 정권을 넘겨줬다. 그 상황에서 국방부는 쿠바와 케네디를 불신했고, 어떻게든 전쟁하려고 여념이 없었다. 국방부가 얼마나 미쳤는지는 노스우즈 작전 문서로 충분하다. 이 상황에서 CIA에서 올라온 것이 피그만 작전이다. 그리고 피그만 작전이 실패하자 국방부는 다시 몽구스 작전을 통해서 전쟁 각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네디는 전쟁을 모르고 유약하다고 언플을 하면서, 강경 노선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노력했다. 무엇보다 피그만 침공을 주장했던 인사들은 정작 해당 작전이 실패하자 자기는 그런 적 없다고 나서서 케네디만 독박을 쓰게 된다. 노스우즈 작전 보고서가 제복군인들을 모두 통과해서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까지 올라온 것이나, 피그만 침공 이후 강경파들의 말 바꾸기를 본 케네디는 정보 부처와 주요 장성들을 모두 불신하게 된다.

그래서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1962년 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녹음 장치를 설치했으며, 이 사실은 그와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단 둘만이 알고 있었다.[18] 케네디 사후에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지시로 248시간 분량의 회의 기록, 12시간의 전화 통화 내역이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사태 부분인 43시간의 녹음 부분은 1983년, 2001년에 나뉘어 공개됐다. 이 녹취 대화록에서 케네디는 소련과 쿠바에 강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쿠바 공습과 관련한 직접적인 문제에서는 매우 이성적인 모습이 나타났기에, 케네디의 국무 능력이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엔 사태가 해결된 후 자신이 비둘기파였다고 주장한 다수의 사람들이 사실은 매파였다는 것과 당시 군부가 얼마나 전쟁을 주장했는지도 담겨져있다.

우방들에게도 그의 진취적이고 리버럴한 모습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런 부분은 간과되기 쉬운데, 21세기 들어 "소프트 파워"가 강조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의미 있는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한 헬무트 슈미트의 회고록 역시 케네디의 이미지과 그에 대한 독일인들의 열광을 설명하면서 "그가 부탁한다면 독일인들은 우방으로서 더 많은 것을 희생할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베를린 연설 때 미국 대통령을 향한 독일인들의 열광은 전례가 없었을 정도. 케네디 역시 이런 부분을 중시해서 임기 중에 평화봉사단(Peace Corps)를 창설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개도국에 봉사 활동을 떠나는 것을 장려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외교관의 길이나 학자의 길로 들어선 미국인이 상당히 많은데, 한국과 인연이 깊은 인물로는 크리스토퍼 힐 前 주한 미대사, 캐슬린 스티븐스 前 주한 미대사, 카터 에커트 하버드대 교수 등이 있다.


3.2. 대내 정책[편집]


대표적인 흑인 민권 단체인 NAACP[19]의 수석 변호사 출신인 서굿 마셜을 연방 판사 자리에 임명하고, 필요에 따라 주 방위군을 연방정부 지시에 놓고 흑인 학생들의 보호를 명령하는 등 흑인 민권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케네디의 이러한 전향적인 모습과 후임자인 린든 존슨의 정책들을 기반으로 민주당은 이후 흑인 집단의 지지를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게 된다. 이는 당시 민주당 텃밭이던 남부 보수파들에 대놓고 어그로를 끄는 행위였기에[20] 단순히 표 때문에 한 것도 아니었다.

우주개발사업도 공헌도에 갑론을박은 있지만 실제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킨 대통령인건 사실이라, NASA의 우주선 발사장은 지금도 케네디 우주센터다. 애초에 우주공학 연구같은 대규모 과학 정책들은 못해도 몇 년 이상의 기간을 잡아야하는 장기 프로젝트가 많아서[21], 이 정책을 처음 추진하고 기반을 다져놓은 것만으로도 역사서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다. 그 점에서 케네디의 업적은 결코 작은 게 아니다. 그 외에도 케네디 이름이 붙은 곳은 제법 있는데, 뉴욕의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나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 등이 대표적. 그 유명한 하버드 대학에도 행정 전문대학원으로 케네디 스쿨이 있다. 여담으로 이는 물론 대통령의 업적도 있지만, 원체 부호 가문 출신이기 때문에 집안의 기부금 역시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이런저런 점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은 케네디와의 접점을 부각하려고 노력한다. 1992년 전국적으론 아직 인지도가 적던 빌 클린턴은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하면서 10대 시절 케네디를 만나서 악수하는 사진의 포스터로 도배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케네디를 만나면서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워왔다"고 썰을 풀었다. 2004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한 존 케리는 선거운동 도중 뜬금없이 이니셜을 JFK로 바꾸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였다. 2008년 오바마 역시 '블랙 케네디'라는 표어를 대놓고 밀었고, 결국 당시 케네디가의 수장이자 민주당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지지를 이끌어 내면서 민주당 대선 후보 자리를 쟁취했다.


4. 현대 공화당원 사이에서의 인기[편집]


케네디가 민주당 대통령이었고 흑인 민권운동 등 진보 정책을 야심차게 추진했기 때문에 미국 보수파 사이에서는 인기가 없을 것 같지만, 사실 케네디는 현대 공화당원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 중 하나이다. Yougov의 여론조사에서 존 F. 케네디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공화당원의 비율은 80%에 달했는데, 일반적으로 케네디에 비해 훨씬 평가가 좋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61%의 호의적 평가를 받았음을 고려하면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존 F. 케네디가 비록 진보주의자이긴 했지만 소련, 쿠바, 공산주의에 대해 강경했다는 이미지가 있고, 또 아폴로 계획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인식이 있기에 공화당원 사이에서도 인기가 나쁘지 않다. 이는 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민주당원들의 인식이 해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이 때문에 Qanon의 세계관(?)에서도 존 F. 케네디 주니어가 비밀을 파해치는 "Qanon"의 정체라는 설이 널리 퍼져있고, 많은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존 F. 케네디 부자가 "부활"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복구시켜줄 것이라는 기대에 케네디가 암살된 댈러스 광장에 모였다가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이는 로버트 F. 케네디 부자도 마찬가지인데,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는 반백신 정책도 있지만 "케네디"라는 이름값만으로도 상당수의 공화당 지지층을 대선 여론조사에서 잠식하고 있다.
[1] 단, 이것은 대외적인 이미지일 뿐, 실제 케네디는 부인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건강 문제도 있었다. 후술된 가족과 개인사 참조.[2] 비록 케네디의 생전에는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약속한대로 1960년대를 넘기기 전에 암스트롱 등의 아폴로 11호가 최초의 달착륙을 성공시키며 현실화되었다.[3] 클린턴과 오바마는 모두 40대 중후반의 나이로 대선에 출마하여 젊은 지도자 이미지를 십분 활용, 선거에 승리하였다. 또한 클린턴은 자신이 어린 시절 백악관에 초청받아 케네디와 악수하는 사진을 공개하며 자연스럽게 케네디의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 활용했다. 그리고 오바마는 케네디의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친딸 캐롤라인 케네디를 비롯한 케네디가의 공개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케네디의 후광을 누렸다.[4] 케네디는 1960년대 초반에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고 1963년에 암살당했다. 즉, 이때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거의 전부 평균 수명 이상이다. 대표적으로 현 미국의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현 시점 80대 노인으로 유명하지만, 그는 케네디 집권기에 아직 사회에 나오지도 않은 대학생이었다.[5] 영어에서 '카멜롯'은 이상적인 지도자와 정부를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요즘 식으로는 '드림팀', '올스타', '어벤저스' 정도에 해당하는 의미.[6] 다만 이런 여파로 훗날 대통령은 자신의 친족을 공직에 앉혀서는 안 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다.(...)[7] 물론 조사마다 차이는 있어서, 2017년 CBS에서 91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8위를 기록하기도 했다.[8] 다만 이건 승인한 케네디가 최종 책임을 지는건 맞지만, 당시 OK만 하면 쿠바 다 점령할 것처럼 설레발을 떤 CIA와 군부가 먼저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긴 하다. 특히 당시 군부는 이거보다 더한 노스우즈 작전 등을 승인하지 않는 케네디가 유약하단 식으로 그야말로 명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일단 전쟁부터 하자는 식으로 안달난 모습을 보였다.[9] 실제로 이런 고화력 무기들과 장비들은 응오딘지엠 정부가 베트콩 토벌을 명분으로 적잖은 무고한 농민을 희생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즉, 양민 학살이 케네디가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10] 거기다 케네디는 195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방문했고, 디엔비엔푸 전투 시점에서 프랑스를 비판하고 호치민을 일정부분 옹호했던 적이 있다.[11] 사실 샤를 드 골은 과거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전쟁에서 미국과 똑같은 실수를 했기에, 이런 얘기를 한 것이다.[12] LBJ는 그 거대한 체구를 살려(…) 의원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린든 존슨 항목 참조.[13] 사실 이건 복지보다 베트남전의 폐해가 더 큰 측면도 있었다. 또 이런 와중에 당시 공화당 정부는 재정 문제를 거론하며 의료민영화를 추진하는데, 이게 지금까지도 탈 많고 말 많은 미국식 의료보험으로 내려오고 있다.[14]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자세히 서술하자면, 플로리다주에 40년대에 세워진 Cape Canaveral Air Force Station(CCAFS)이 있어 초창기(50년대까지) 로켓 발사를 이 공군기지에서 했다. 60년대 초 부지를 확장하며 바로 옆에 별도로 NASA Launch Operation Center(LOC)를 세우게 된다. 케네디 암살 직후 린든 존슨이 대통령이 되면서 LOC를 케네디 우주 센터(KSC)로 CCAFS를 케이프 케네디 공군기지(CKAFS)로 개명하게 되는데, 후자가 반발을 불러오게 된 것. 이후 1973년 CKAFS는 CCAFS로 돌아오게 된다. KSC와 CCAFS는 다리와 둑길로 연결되어 있고, CCAFS가 살짝 더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관할이 미 공군이란 것이 다르지만 발사장은 NASA와 일부 공유하고 있다.[15] 유명한 리틀록 사건이 아이젠하워 때 있었던 일이다.[16] https://doi.org/10.1017/S1049096520000177 참조. 유료논문이니 Sci-Hub를 이용할 것[17] 임기 초반 케네디가 보여준 피그만 침공의 병크, 빈회담에서의 유약한 모습을 바탕으로 흐루쇼프가 미사일 배치를 강행했다.[18] 그런데 웃긴건 정작 로버트 케네디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매파였음에도, 언론엔 자기는 비둘기파였다는 식으로 주장했다가 이 녹음 기록으로 훗날 들통이 났다는 것.(...)[19] 전미 유색인종 지위 향상 협회(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1909년 성립돼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이다. 현재도 미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민주당 대선후보들은 NACCP 정기총회에서 연설하는게 필수 코스이다.[20] 실제 이들은 이후 공화당 지지자가 되고, 지금도 남부는 공화당 텃밭으로 남아있다. 19세기랑 비교하면 지지층이 완전 뒤바뀐 셈.[21] NASAESA가 공동으로 추진했던 프로젝트인 카시니-하위헌스 탐사선도 첫 발사가 1997년 10월 15일이고, 탐사선을 토성 대기에 충돌시켜서 계획을 종료한 때가 2017년 9월 15일로, 근 20년 동안 꾸준히 진행된 연구 계획이다. NASA에서 실시하는 천문학 연구 계획은 이 정도가 거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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