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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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문신이다. 조선 역사 중 짧은 시기 중 하나인 경종 시기의 영의정. 더불어서 해주 최씨 가문 출신 중 유일한 영의정이며 조선시대 기준으로 유일한 배향공신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경종 초기 소론의 영수. 서인이 노소로 나뉠 때 소론의 소장파로 활약했으며 최석정의 파직을 막고 남인에 맞서 장희빈의 책봉을 반대하는 데 앞장 섰다. 병신 처분으로 노론이 득세함에 낙향했으나, 경종이 즉위하자 우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고 연잉군의 청정을 막는 등 소론의 영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신임 사화의 주역 김일경과 달리 완론의 입장을 펼쳤으며, 고령인 데다가 경종 말년에는 낙향해 정치 일선에 물러난 덕에 최석항, 유봉휘와 달리 영조 즉위 후 노론의 탄압에도 무사했다.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박필현 등이 난을 일으키자 사전에 정보를 입수, 같은 소론임에도 고변해 완론 소론을 보호하고 역신 이인좌와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천명했다. 그 공으로 영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1] 숙종 45년(1719년) 기로소에 소속된 원로대신들을 대상으로 국가가 직접 주관해 큰잔치를 열었고 그들의 초상화와 잔치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잔치에 참여한 인물은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1648-1722, 72세), 영중추부사 이유(李濡, 1645-1721, 75세), 판중추부사 김우항(金宇杭. 1649-1723, 71세), 행판돈녕부사 최규서(崔圭瑞, 1650-1735, 70세), 행사직 이선부(李善溥, 1646-?, 74세), 홍만조(洪萬朝, 1645-1725, 75세), 지중추부사 황흠(黃欽, 1639-1730, 81세), 한성부판윤 정호(鄭澔, 1648-1736, 72세), 우참판 신임(申銋, 1639-1725, 81세), 지중추부사 강현(姜鋧, 1650-1733, 70세), 임방(任埅, 1640-1724, 80세) 등 열한 명이었지만, 최규서는 서울에 없었기 때문에 모든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초상화를 따로 남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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