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흠

덤프버전 :



조선 영의정

인조 ~ 경종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60420, #b82642 20%, #b82642 80%, #960420); min-height: 31px; color: #fff"
[ 펼치기 · 접기 ]


제101·102대

이원익

제103대

윤방

제104대

신흠

제105대

오윤겸

제106대

윤방

제107대

김류

제108대

이홍주

제109대

최명길

제110대

홍서봉

제111대

이성구

제112대

최명길

제113대

신경진

제114대

심열

제115대

홍서봉

제116대

김류


제117대

홍서봉

제118대

김류

제119대

김자점



제120대

이경석

제121대

이경여

제122대

김육

제123대

정태화

제124대

김육

제125대

이시백

제126대

김육

제127대

이시백


제128대

정태화

제129대

심지원

제130대

정태화



제130대

정태화

제131대

홍명하

제132대

정태화

제133대

허적

제134대

정태화

제135대

허적

제136대

김수흥

제137대

허적



제137대

허적

제138대

김수항

제139대

남구만

제140대

김수흥

제141대

여성제

제142대

권대운

제143대

남구만

제144대

류상운

제145대

서문중

제146대

최석정

제147대

서문중

제148대

최석정

제149대

신완

제150대

최석정

제151대

이여


제152대

서종태

제153대

이유

제154대

서종태

제155대

김창집




신흠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조선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신흠
申欽 | Shin Heum


파일:신흠 묘.jpg신흠의 묘

출생
1566년 2월 27일[1]
(음력 명종 21년 1월 28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사망
1628년 7월 29일 (향년 62세)[2]
(음력 인조 6년 6월 29일)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묘소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 산12-1번지
<-2><bgcolor=#fff,#1f2023><color=#373a3c,#ddd>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문정(文貞)
본관
평산 신씨 (정언공파 20세)

경숙(敬叔)

상촌(象村),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
학력
추파 송기수의 문하 (1572 - 1585)
규암 송인수의 문하 (1572 - 1585)
청강 이제신의 문하 (1570년대1580년대 사이)
식년시 생원시 급제 (음력 1585년 8월 24일)
식년시 진사시 급제 (음력 1585년 8월 24일)
문과 별시 병과 급제 (음력 1586년 9월 19일)
공훈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 一等, 1605)
붕당
서인
저작
《상촌집(象村集)》
《상촌야언(象村野言)》
《승국유사(勝國遺事)》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황화집령(皇華集令)》
부모
부친 - 신승서(申承緖)
모친 - 은진 송씨
형제자매
누나 - 평산 신씨(1566년 이전 ~ ?)
누나 - 평산 신씨(1566년 이전 ~ ?)
남동생 - 신감(申鑑, 1570 ~ 1631)
배우자
전의 이씨
자녀
장남 - 신익성(申翊聖, 1588 ~ 1644)[1]
차남 - 신익전(申翊全, 1605 ~ 1660)[2]
장녀 - 박호(朴濠)의 처
차녀 - 양주 조씨 조계원(趙啓遠)[3]
3녀 - 반남 박씨 박의(朴漪)의 처[4]
4녀 - 강문성(姜文星)의 처
5녀 - 이욱(李旭)의 처
경력 ||{{{-1
[ 펼치기 · 접기 ]
#!end성균관 권지 학유
함경도 경원 훈도
광주 훈도
사재감 참봉
예문관 검열
예문관 대교
예문관 봉교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양재역 찰방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
사헌부 지평
성균관 직강
명나라 통보 전담
사헌부 지제교
이조 좌랑
원접사 이항복의 종사관
이조 정랑
승문원 교리
문사 낭청
사헌부 집의
승문원 참교
성균관 사성
주청사 윤근수의 서장관
군기시 정
순안 어사
성균관 사예
종부시 정
의정부 사인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
평산 부사
양주 목사
내자시 정
사섬시 정
예빈시 정
승문원 참교
접반사 신점의 종사관
장악원 정
세자시강원 필선
홍문관 교리
홍문관 응교
성균관 전적
사옹원
홍문관 전한
동부승지
형조 참의
승문원 부제조
우부승지
승문원 제조
예조 참의
대사간
병조 참지
이조 참의
홍문관 부제학
의금부 동지사
예조 참판
충무위 부호군
부총관
병조 참판
예문관 제학
춘추관 동지사
세자시강원 우부빈객
홍문관 부제학
세자시강원 좌부빈객
성균관 대사성
병조 참판
도승지
한성부 판윤
예문관 제학
영위사
병조 판서
예조 판서
상호군
오위도총부 도총관
경기도 관찰사
예문관 제학
정헌대부
한성부 판윤
의금부 지사
대사헌
의주 영위사
성균관 동지사
중추부 지사
세자 책봉 주청사
숭정대부
실록청 부총재관
예조판서
경연 동지사
이조 판서
우의정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좌의정 세자부(世子傅)
영의정 세자사(世子師)}}}}}} ||}}}}}}}}} ||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기
2.2. 외가와 척을 지고 서인이 되다
2.6. 최후
3. 평가
4. 허균과의 관계
5. 기타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관료, 외교관, 군인, 문장가.


2. 생애[편집]



2.1. 생애 초기[편집]


1566년 1월 28일 아버지 신승서(申承緖, 1531. 9. 1 - 1572. 8. 15)와 송기수(宋麒壽)의 딸인 어머니 은진 송씨(1532 - 1572. 4. 3.)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572년 7세일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서 남동생 신감(申鑑, 1570 - 1631)과 누나들과 함께 외가의 집에서 지냈다. 이때 외조부 추파 송기수와 6촌 규암 송인수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청강(淸江)이제신(李濟臣)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외조부 송기수의 집에는 경전(經傳), 자사(子史), 상위(象緯), 율력(律曆), 산수(算數), 의복(醫卜) 등의 책들이 있어서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는 것을 잊을 정도로 책 읽는 데 시간을 보냈다.

과거 시험 공부를 할 때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과 김성립과 친한 친구들과 함께 집을 얻었다. 신흠은 송기수의 외손자이자 김성립의 이종사촌이다. 김성립과 친해서인지 그의 아내 허난설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다음은 <동국시화휘성>에 기록된 신흠의 이야기이다.

내가 젊었을 때, 김성립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같이 했다. 한 친구가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고 근거 없는 말을 지어냈다. 계집종이 이를 듣고는 난설헌에게 몰래 일러바쳤다. 난설헌이 맛있는 안주를 마련하고 커다란 흰병에다가 술을 담아서, 병 위에다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다.

낭군께서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한다는 이는 어찌 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그래서 난설헌은 시에도 능하고 그 기백도 호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동국시화휘성> [출처1]

20세 되던 1585년(선조 18) 식년시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2등 3위, 1등 3위로 입격하여 승사랑(承仕郞:종8품 문관의 품계)에 올랐다. 이듬해인 1586년(선조 19) 별시 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였다. 김제남과 같이 1585년 식년시 진사시에 급제해서 김제남이 선조의 장인이 되기 전까지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이후 계축옥사 때 연루되어서 고문을 받았다.


2.2. 외가와 척을 지고 서인이 되다[편집]


1583년 율곡 이이가 삼사의 탄핵을 당하자 당시 대사간이자 신흠의 외삼촌 송응개(宋應漑)가 율곡 이이를 탄핵하는 글을 신흠에게 보여주었는데 신흠이 "율곡은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는 분인데 이처럼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해서 송응개가 매우 괘씸하게 여겼다.# 신흠의 외가의 외4촌 형제들이 신흠이 이이를 옹호한다고 크게 비판했는데 신흠의 외삼촌 송응개는 동인의 강경파이자 선봉장인 허봉의 친한 동료이자 마찬가지로 동인 소속이었고 신흠의 외가도 자연스럽게 동인 소속이 되었기 때문이다.[5] 이후 외삼촌 송응개는 이이를 비판해서 귀양을 갔고 신흠은 계속 이이를 옹호하며 서인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흠은 북인 뿐 아니라 남인에게도 미움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1604년 기자헌이 신흠이 좀더 벼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는데 남인의 영수인 류성룡이 “신흠은 계미년(1583년)에... 송응개(宋應漑)를 무함하여 귀양가게 하였으니 사람됨이 무상(無狀)하여 트이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반대했다.#


2.3.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행적[편집]


임진왜란이 터지고 나서 양재역 찰방에 임명되었다. 이때 신립의 군대와 함께 동행했는데 신흠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해서 강화도로 간 다음 도체찰사 정철과 합류했다. 이후 정철의 종사관이 되어서 병무 관련 일을 맡았다.

이때 정철과 친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1594년 2월 7일 정철이 병사하자 "스승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한다.#

명나라 군이 주둔할 때 관련 문서를 처리하고 명나라 관리를 만나는 등 외교 활동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덕분에 이후 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 一等, 1605)이 되었다.


2.4. 계축옥사 전후[편집]


1599년 장남 신익성정숙옹주와 결혼해서 부마가 되자 "옛 집이 좁고 누추하다고 하다"말했는데 신흠이 “집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예를 행하기에는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이후 집 침실이 있는 처마가 기울어지자 집안사람들이 고치자고 말했으나 신흠이 “나라 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집안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빈곤하게 살면서도 욕심없이 검소하게 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친한 친구였던 김성립, 김제남 등이 죽고 나서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과 어울려 찾아가려 하지 않았다.#

1606년(선조 39) 병조판서예조판서에 각각 제수되었다. 1608년 선조가 붕어했을 때, 당시 영의정 유영경, 우의정 한응인(韓應寅), 평안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 경기도 관찰사 서성(徐渻), 예조판서 허성, 사헌부 대사헌 한준겸(韓浚謙) 등 6명의 대신들과 함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유교(遺敎)를 들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 즉위 후 집권 세력인 대북에 꾸준히 미움을 받았고[6], 결국 1613년(광해군 5) 김제남과의 친분 때문에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형신을 받았다. 이어 1616년(광해군 8) 인목대비에 대한 '폐모론'이 불거지자 이전에 이미 처형되었던 류영경김제남과 한 패라는 이유로 강원도 춘천도호부에 유배당했다.


2.5. 인조반정 이후[편집]


1623년(인조 1) 3월 12일 인조반정 직후 복권되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의정부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가 인목대비를 호위해서 강화도로 가라고 명했으나 "분조를 하면 안된다"고 반대해서 다같이 공주로 피난갔다.#

1626년(인조 4)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종1품)를 거쳐 이듬해인 1627년 좌의정이 되었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를 받들고 분조와 동행했는데 소현세자에게 적을 토벌하는 방법에 대해 글을 두 번 올렸다. 이후 같은 해 영의정에 올랐으며,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포목을 내어 군수(軍需)를 돕게 하고, 솜옷을 내어 옷이 없는 서로(西路) 백성들에게 나누게" 했다.# 병이 있어서 사임했으나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2.6. 최후[편집]


1628년 7월 29일 병에 걸려서 한성부 집에서 요양하다가 죽었다.

영의정 신흠이 졸하였다.

신흠의 자는 경숙(敬叔)이고 호는 상촌(象村)이며, 평산인(平山人)이다. 흠은 사람됨이 장중하고 간결하며 문장에 뛰어나 어려서부터 유림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선조의 인정을 받아 정경(正卿)에 이르렀다.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보호하라는 유교(遺敎)를 받았는데, 광해군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이것으로 죄안을 삼아 춘천(春川)에 유배하였다. 반정 초에 먼저 서용되어 이조 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으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그런데도 더욱 근신하여 왕실과 혼인을 맺고서도 청빈함을 그대로 지켰다. 국사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자주 변경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조를 본받으면 다스리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저술로 《상촌집(象村集)》 60권이 세상에 전한다. 조정에 있은 지 40년 동안에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쳤으나 일찍이 헐뜯는 말이 없었으며, 위란(危亂)을 겪으면서도 명의(名義)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이 때문에 중하게 여겼다. 증시(贈諡)는 문정(文貞)이고 신묘년038) 에 묘정에 배향(配享)되었다.

ㅡ 《조선왕조실록》 신흠의 졸기 #



3. 평가[편집]


관직 생활을 할 때 당색이 서인에 가깝고 율곡 이이를 지지하고 정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다 보니 율곡 이이의 당파라고 동인, 특히 북인에게 탄핵을 자주 당했다.

7살 때 부모를 여의고 자란 외가 은진 송씨와는 당색이 달라서 척을 지게 되었다.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인 것으로 보인다. <월사집> 44권의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은 신흠을 "천품이 고매하고 도량(度量)이 화아(華雅)하였으며, 장중(莊重)하고 간결(簡潔)한 동시에 영특한 자질이 숙성(夙成)하였다고 한다. 태어나면서 모습이 남달랐고 눈동자는 샛별처럼 빛났으며 어릴 때 노는 것도 범상치 않았다."고 묘사했다.#

생전에 글재주가 아주 뛰어나서 월사(月沙) 이정구,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 4대가로 손꼽힌다. 이들의 호를 따서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도 흔히 부른다.


4. 허균과의 관계[편집]


<성소부부고>와 <어우야담>에 의하면 1606년 허균이 1605년 탄생한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장손에 대한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을 영접하는 원접사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에 가는데 음력 3월 4일 동행한 신흠이 허균이 날마다 고서를 입으로 외우는 것을 들었는데 유교,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의 책들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아래와 같이 탄식했다.#

"는 사람이 아니다. 생김새 또한 좋지 않으니 필시 여우, 뱀, 쥐 등의 정령일 것이다."

<어우야담>

신흠은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이종사촌이며, 김성립은 허균의 매형이다. 즉 허난설헌과 김성립을 알게 되면서 허균도 전부터 알고 지냈을텐데 허균이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다만 허균은 신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허균은 저서 <성수시화>에서 "신흠이 청량함은 미치지 못하나 농후함은 낫다"고 평했다.


5. 기타[편집]


  • 생전 매우 검소하게 살면서 산나물과 좁살밥(脫粟飯)을 즐겨 먹었다 한다.

  • 신흠이 계축옥사로 관직에서 물러나 김포에 머물러 있던 시기에, 아들인 신익성으로부터 사인검을 선물받자[7] 기쁨에 넘쳐서 지은 '사인도가'라는 시가 있다.


[1] 율리우스력 2월 17일.[2] 62년 5개월 12일 / 22,8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