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헤나(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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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tagena
카르타헤나
파일:카르타헤나.webp
파일:카르타헤나8.jpg
파일:카르타헤나항.jpg

국가
스페인

무르시아
면적
558.08km²
인구
213,943명[1]
시간대
UTC+00:00(서머타임 적용)
링크
카르타헤나 행정 사이트
1. 개요
2. 역사
2.1. 중세
2.2. 스페인 해군 기지
2.3. 카르타헤나 칸톤
2.4. 근현대
3. 출신 인물
4. 자매 도시



1. 개요[편집]


스페인 동남부의 도시. 무르시아에서 동남쪽으로 35km, 로르카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해안에 입한다. 인구는 22만명으로, 무르시아의 외항이자 스페인 해군의 주요 기지가 위치해있다. 역사적으로도 유서가 깊어 고대에는 카르타고령 스페인 및 동로마 제국령 스파니아의 치소였고, 근현대에는 칸톤 반란 및 카르타헤나 봉기 등의 사건을 겪었다. 휴양지까지는 아니지만 카탈루냐안달루스 사이의 적당한 기후를 지닌 해안 도시라 관광객이 많은 편이다. 구도심의 거대한 로마 시대 극장 유적도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이다. FC 카르타헤나의 연고지이다.

2. 역사[편집]


파일:카르타고노바.jpg
카르타고 시기의 성벽 유적
파일:카르타헤나 6.jpg
로마 제국기 극장 유적의 기둥 부분

청동기부터 사람이 산 흔적이 있다. 본격적인 도시는 기원전 400년경 타르테소스에 의해 마스티아란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기원전 228년 한니발의 매형인 잘생긴 하스드루발이베리아 반도 정복의 거점으로써 대대적으로 개발하고는 Qart Hadasht (신도시)라 명명하였다. 한니발 집안의 거점이기도 하다. 이후 카르타고령 히스파니아의 총독부가 되어 번영했으나 기원전 209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함락되었다. 로마 지배 하에서 지명은 '신 카르타고' 혹은 '새로운 신도시'인 카르타고 노바 (Carthago Nova)로 바뀌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콜로니아 (식민도시)로 지정되어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서기 298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행정 개편 당시 카르타고 노바는 카르타고 스파르타리알 개명되어 신설된 카르타기넨시스 주의 주도가 되었다. 인근의 은 광산 덕에 로마 시기에도 번영하던 도시는 5세기 초엽 반달족의 약탈 후 쇠퇴하였다.

2.1. 중세[편집]


파일:카르타헤나7.jpg
로마 극장 옆의 중세 성당 유적

409년부터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던 도시는 551년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을 통해 동로마 제국령 스파니아 속주의 주도가 되어 중요성을 회복하였다. 다만 624년 서고트 왕국이 재차 점령하였고, 714년에는 우마이야 왕조령이 되었다. 이미 어촌 마을로 전락하여 카르타얀나트 알-할파로 불리던 도시는 후우마이야 왕조 (756-1031)를 거치며 중소 도시로 회복되었다. 이후 데니아 후국 (1031-76), 사라고사 후국 (1076-81), 토르토사 후국 (1081-96), 무라비트 왕조 (1092-1145), 무와히드 왕조 (1145-1229), 무르시아 후국 (1229-45)을 거쳤고 1243년 알카자즈 협정에 의거하여 수륙 양면의 포위 공격 끝에 카스티야 왕국령이 되었다. 스페인식 지명인 카르타헤나로 명명된 도시는 1270년 산타 마리아 데 에스파냐 기사단의 본부가 되었고, 1296년 아라곤 왕국에 할양되었으나 1305년 카스티야 령으로 회복되었다.[2]

2.2. 스페인 해군 기지[편집]


파일:카르타헤나 항구.jpg
요새화된 1786년의 카르타헤나 모습

이후 중소 지방 도시로 유지되었고, 1643년 9월에는 인근의 카보 데 가타에서 프랑스-스페인 해군 간의 카르타헤나 해전이 벌어져 전자가 승리하였다. 그리고 1728년 스페인 해군 지중해 함대의 기지로 선정됨과 함께 기존의 무어인 카스바가 병영과 무기고를 지닌 근대적인 성채로 개조되었다. 해군 기지화와 함께 중요성을 회복한 도시는 인구가 1만에서 5만으로 급증하였다. 7년 전쟁 중인 1757년 2월, 프랑스 해군이 카르타헤나 군항으로 피신했으나 추격해 온 영국 해군에게 격파되었다. 1771-92년에는 '카를로스 3세 성벽'이 더해져 도시 전체를 감싸게 되었다.

2.3. 카르타헤나 칸톤[편집]


스페인 제1공화국의 혼란기인 1873년 7월 도시는 파리 코뮌과 유사한 지방 자치주의 성향의 카르타헤나 칸톤에게 장악되었고, 발렌시아알리칸테 등의 도시들도 동참하였다. 하지만 1873년 11월 정부군이 카르타헤나를 포위하였다. 포격에 시달리던 끝에 이듬해 1월, 무기고가 폭발하고 3백여 사망자가 나온 후 항복하였다. 미국 측에 합병 의사까지 밝혔던 5백여 카르타헤나 칸톤의 지도부는 프랑스령 알제리로 망명하였다.

2.4. 근현대[편집]


파일:카르타헤나 1.jpg
좌측, 성벽 내부가 군항.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당시 카르타헤나는 스페인 제2공화국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고, 공화국 해군의 본부가 있었다. 공화국 측 패색이 짙어가던 1939년 3월, 카르타헤나에서 공화파의 내분을 틈타 친프랑코 세력이 항구를 점거하기도 했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다만 그달 말엽 카르타헤나는 발렌시아, 무르시아와 함께 거의 마지막으로 프랑코 정권에게 넘어갔다. 1950-80년대 공업화가 이루어졌고, 인구는 11만에서 17만으로 늘었다. 90년대 들어 정체되어 있던 도시는 21세기 들어 관광업의 흥성과 함께 재차 성장 중이다.

3. 출신 인물[편집]


로베르트 산체스: 축구선수.


4. 자매 도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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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계인구, 2018년 기준.[2] 이를 체결한 엘체 조약으로 발렌시아 왕국과 무르시아 왕국의 경계는 확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