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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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사르데냐 왕국의 2번째 왕.
2. 상세[편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오를레앙의 안 마리[1]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형 비토리오 아메데오(Vittorio Amedeo di Savoia 1699~1715)가 피에몬테 공[2] 이어서 아오스타 공작으로 봉해졌으나 형이 1715년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후계자가 되었다.
아버지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보상으로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시칠리아를 받아 시칠리아 왕이 되었으나 1720년 사르데냐와 반강제로 교환했고, 사르데냐 왕이 되었다. 후계자 시절 그는 부왕의 총애를 받지 못해 군사 분야 외에는 좋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말년에 우울증에 빠졌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730년 그에게 양위했으나 퇴위 이후에도 샹베리에서 거처하면서 아들에게 계속 간섭하였고, 몬칼리에리 성으로 이주하여 복위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르데냐 왕국 귀족들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집권을 지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왕실 평의회를 소집하여 아버지를 토리노 근교 리볼리 성에 감금하면서 왕권을 바로세웠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장인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지원했다. 이 전쟁에서 만토바를 노렸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고, 대신 토르토나(Tortona), 노바라 등을 얻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원하여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전쟁을 수행했다. 초창기에는 니차를 잃는 등 고전했으나 1746년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알레산드리아, 아스티를 모두 탈환했고 1747년 아시에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듬해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에서 협상가로서의 자질을 드러내어 니차와 사보이아를 모두 되찾았고 포 계곡의 다른 영토들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1750년에 후계자 비토리오 아메데오를 스페인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시키면서 스페인과의 관계도 회복하였다.
7년 전쟁에서는 참전하지 않고 내치에 힘썼다. 특히 사르데냐의 열악한 환경을 바꾸고자 사사리 대학교와 칼리아리 대학교를 복원하였다. 1773년 토리노에서 사망했으며 수페르가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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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와 영국의 헨리에타 앤의 둘째 딸로 루이 14세의 조카딸이다[2] 사보이아 가문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로 사보이아 공국 시절부터 사용되어 사르데냐 왕국, 이탈리아 왕국으로 계속 이어졌다. 영국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유사한 성격의 칭호였다.[3]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여동생. 여담으로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로렌의 엘리사베트 테레즈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를 외할아버지로 둔 사촌지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