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파 하프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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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국민군의 지도자
칼리파 하프타르
خليفة بلقاسم حفتر


파일:칼리파 하프타르.jpg

이름
칼리파 벨카심 하프타르
(خليفة بلقاسم حفتر)
출생
1943년 (80 ~ 81세)
이탈리아령 리비아 아지다비야
약력
리비아-차드 전쟁 사령관
토브룩 정부 리비아 국민군 사령관(2015년 3월 2일 ~ )
종교
수니파 이슬람
가족
최소 5명의 자녀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령 리비아 - 파일:리비아 국기.svg 리비아 왕국 -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파일:리비아 국기.svg 리비아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리비아의 군인이자 리비아 국민군의 지도자.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943년 아지다비야에서 태어났고, 1961년~1964년 사이에는 교육을 위해 데르나로 이주했었다. 이후 1964년 벵가지로 이주해 벵가지 왕립 군사대학에 입학했고 1966년 졸업해 육군 장교가 됐다.


2.2. 왕정 붕괴와 제4차 중동전쟁 참전[편집]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무아마르 카다피와 함께 리비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이드리스 1세를 축출시킨 뒤 리비아 아랍 공화국을 설립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후 초고속으로 승진했고, 1973년 최고 군 장교 중 한명이 되어 제4차 중동전쟁에 참전하여 이스라엘 전차 수십대 격퇴라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외에도 나세르주의자로서 카다피주의의 발전도 도모했다.

1970년대 말 소련이집트에서 군사 훈련을 더 받았다.


2.3. 리비아-차드 전쟁 참전[편집]


카다피의 신임을 얻은 하프타르는 최고 군 통수권자가 되었고, 차드를 주도적으로 공격했다. 하지만 포로로 체포되었고, 카다피는 리비아에 돌아오면 영웅으로 떠오를 하프타르를 견제하기 위해 하프타르만이 반인륜적으로 겨자 가스등을 살포했다고 그를 버렸다. 이 이후로 동지였던 둘의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으며 1996년 소규모 봉기를 일으킨 뒤 실패하자 하프타르는 CIA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망명했다.


2.4. 제1차 리비아 내전 참전[편집]


리비아 국민군의 지도자격으로 참전하여 카다피 사살에 큰 공을 세웠으나, 과도위원회와의 방향이 달라 마찰을 빚게 되었다.


2.5. 제2차 리비아 내전 참전[편집]


ISIL 소탕에 큰 공을 세웠다. 반 무슬림 형제단 성향의 아랍에미리트이집트의 지원을 받으면서 친 트리폴리 정부 성향의 무슬림 형제단을 견제한다고는 하지만 둘은 긴밀히 협력 중에 있다.

동부 지역을 빠르게 함락해나가면서 토브룩 정부의 사실상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며, 에마뉘엘 마크롱, 보리스 존슨 등과 회담을 맺는 등 외교적인 측면에도 힘쓰고 있다. 리비아 국민들에게는 강한 리더십의 강력한 힘을 가진 새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독재를 연상시키는 행동과 리비아의 안정을 위협하는 반인륜적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차기 대선에 출마할 예정이다.


3.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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