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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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한국의 토기
2.1. 신석기 시대
2.2. 청동기 시대
2.3. 초기 철기 시대
2.4. 원삼국 시대
2.4.1. 북부 지역
2.4.2. 중부 및 서남부 지역
2.4.3. 동남부 지역
2.5. 삼국 시대
2.5.1. 고구려
2.5.2. 백제
2.5.3. 신라
2.5.4. 가야
2.6. 남북국시대
2.6.1. 발해
2.6.2. 통일신라
3. 외국의 토기
3.1. 그리스
3.2. 중국
3.3. 일본
4. 토기 고미술품 목록
4.1. 국가 지정 문화재
4.2. 시도 지정 문화재
4.3. 일반 동산 문화재
5. 같이보기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흙을 구우면 단단해지는 변화를 터득해 그릇을 만들고, 식량을 저장했습니다. 가장 빠른 신석기 토기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한 무늬 없는 갈색 토기입니다. 그 뒤 무늬 없는 토기 위에 덧띠를 붙여 만든 덧무늬토기 (隆起文土器)가 나타나는데, 김해 시산리 조개더미에서도 확인됩니다. 신석기시대 중기가 되면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본격적으로 등장해 한반도 전역에서 유행합니다. 빗살무늬 외에 자돌무늬(刺突文)나 누른무늬(壓印文)도 있습니다. 후기나 말기에 이르면 겹아가리토기(二重口緣土器) 및 짧은빗금무늬토기(短斜線文土器)가 나타납니다.

국립김해박물관 공식 소개 문구


토기(, earthenware)는 을 빚어 5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시켜 만든 용기를 말한다. 고고학에서는 800도 이상의 온도에서 구워진 것을 도기(), 1000도 이상 올라가고 유약이 발린 것을 자기()[1]라고 하지만 통상적으로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까지는 토기, 고려~조선시대에는 유약이 발린 것을 자기, 그렇지 않은 것을 도기로 보는 경향이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토기'라는 말은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원래 우리나라나 중국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단어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도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토기라는 단어가 정착되어 많이 사용된다.[2] 미술사 연구자들은 토기보다 도기라는 용어를, 고고학 연구자들은 반대로 토기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토기는 유약, 돌가루 등을 쓰지 않기 때문에 색깔과 경도(硬度)는 온도, 가마기술에 따라 달라진다. 때문에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지 못한 신석기 시대 토기들은 물에 오랫동안 넣어두면 녹기도 한다. 기와, 화분 등 현재의 토기는 가마를 이용해 만들지만, 과거에는 구덩이에 토기를 넣고 땔감을 위에 쌓은 후 불을 붙여 만드는 노천 소성 기법이 많이 쓰였다. [3] 재질은 흔히 흙을 빚어서 초벌구이와 재벌구이를 하여 만든다. 토기(도기)는 유약을 사용하느냐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유약을 사용한 토기도 있고, 사용하지 않은 토기도 있다. 화려한 토기에는 색을 넣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고고학적으로 토기는 대단히 많은 점을 시사하는데, 토기의 등장은 인류가 신석기 시대를 맞이하여 정착생활을 하였음과 그에 따른 주거공간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이전 구석기 시대에 인류는 이동생활을 해왔기에 어쩌다 있는 동굴을 제외하곤 일정한 주거공간이 없었으며, 이렇다할 가재도구가 필요하지도 둘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전세계 선사시대 토기의 발전상에 있어 공통적인 특징은, 신석기 시대에 비해 청동기 (혹은 금석병용기) 시대 토기는 더욱 투박해지고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ex 빗살무늬 / 채색토기 -> 민무늬 / 무채색토기) 이는 기존에 수공업으로 일일이 만들어 소중히 여겼던 토기가, 직업 분화 및 사회와 기술의 발전으로 대량생산 시대가 열리며 빠른 보급과 판매를 위해 단순화되었기 때문이다.


2. 한국의 토기[편집]



2.1. 신석기 시대[편집]


점토띠를 덧대어 양각의 무늬를 새긴 덧무늬토기 또는 융기문토기(隆起文土器)가 이른 시기에 나타나고 이후 신석기시대 중기에 한반도 전역에 빗살무늬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신석기시대 후기에 접어들면 겹아가리토기(이중구연토기), 짧은빗금무늬토기(단사선문토기)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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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살무늬 토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신석기시대 토기는 기원전 1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도 고산리 유적의 토기다. 다만 고산리 유적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석기시대 토기인 무늬가 시문된 토기가 아닌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도 발굴되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이른 민무늬 토기들을 '원시 무문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2.2. 청동기 시대[편집]


민무늬 토기미송리식 토기와 덧띠새김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가지무늬 토기 등이 이 시기에 출토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rea-Bronze.age-Jinju-Pot-01.jpg
▲ 민무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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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송리식 토기

미송리식 토기는 지린성과 랴오닝성 일대, 청천강 이북에 분포하여 비파형 동검, 고인돌, 거친무늬거울과 더불어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나타내는 유물 중 하나다.


2.3. 초기 철기 시대[편집]


덧띠토기는 청동기 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옹기형의 민무늬 토기로 일명 점토대 토기(粘土帶土器)라고도 한다. 그릇의 입술 바깥 부분에 단면이 원형ㆍ타원형 및 삼각형 덧띠를 말아 붙여 아가리를 두텁게 한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특징 때문에 돌대문토기(突帶文土器)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 시작이 기원전 21세기라고 한다.#

덧띠 토기는 한국식 동검(세형 동검)과 더불어 후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돌널무덤 유적을 통해 같이 부장된 유물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기에는 주로 고배형 토기, 조개식 쇠뿔잡이, 한국식 동검, 동 등과 같이 출토되었고, 후기에 들어와서는 쇠뿔잡이 토기, 철기 등과 함께 발굴되고 있다. 덧띠 토기 시대에는 한사군의 설치와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덧띠 토기는 그러한 생활 양식의 변모를 나타내는 주요한 유물로서 새로운 양식의 토기라기보다는 이전의 토기를 개량한 형식이라 보여진다.

이러한 덧띠 토기는 지금까지 한강과 금강 유역에서, 그리고 낙동강 유역 등지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고 북한에도 비슷한 토기가 있으나, 덧띠 토기로 보고된 예는 아직 없다. 주요 유적으로 청원의 비하리, 대전의 괴정동, 양주 수석리 주거지, 아산의 남성리, 예산의 동서리 등이 있다.


2.4. 원삼국 시대[편집]


원삼국시대는 1세기부터 3세기에 이르는 시기이다. 원삼국(原三國, Proto - Three Kingdoms)이라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 삼국시대의 원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한반도 및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삼국시대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고구려 외에도 부여, 옥저, 예[4], 낙랑군,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 존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 집단들에 대한 토기문화를 언급하는 것이 맞겠지만 축적된 자료의 편차가 크고 내용이 방대해지기 때문에 지역별로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2.4.1. 북부 지역[편집]


원삼국시대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지역에는 부여와 원고구려[5], 낙랑, 옥저, 읍루가 존재하였다.

부여는 오늘날 지린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국가이며 고고학적으로는 서단산문화, 포자연문화로 이해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지린성 위수현의 노하심 유적, 서차구 유적이 있다. 부여의 토기는 조사된 사례가 많지 않고 조사되었다고 하더라도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에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통해 보면 바닥이 평평하며 꼭지형 파수(손잡이)가 부착된 것이 특징이다.

  • 원고구려
고구려의 초기 유적은 환인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축적된 자료가 적고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 많아 원고구려사회와 고구려를 뚜렷하게 구분짓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토기는 삼국시대 고구려 토기에 대한 부분에서도 서술하겠지만 북한 시중군 로남리에서 확인된 토기가 원고구려의 토기로 이해되고 있는데 부여와 마찬가지로 바닥이 평평하지만 꼭지형 파수(손잡이)가 아닌 대상(帶狀) 파수가 많이 확인된다.

옥저는 두만강을 중심으로 함경도 일대와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집단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 문화에 대해 중국의 경우 단결(團結)문화라고 부르며 러시아에서는 크로노프카문화로 부르고 있다.[6] 함경도에서는 나진 초도 유적, 무산 호곡(범의 구석) 유적이 확인되었고 러시아에서는 크로노프카 유적, 페트로바 유적 등이 있다. 토기는 문양이 없으며 바닥이 평평하고 호 및 심발류가 주를 이루고 있다.

  • 낙랑군대방군[7]
파일:낙랑토기.jpg
낙랑의 토기는 크게 니질계, 활석온입계, 석영혼입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주로 취사용기에 활석이 혼입된 토기가 많으며 저장용기는 석영이 혼입되어 백색에 가깝다. 나머지 일상용기는 니질계가 대부분이다. 이들 낙랑토기를 두고, 한사군을 중국 한나라가 세운 만큼, 한나라 토기와 동일하게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한나라 토기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이 있어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들 낙랑토기는 삼국시대 토기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토기 제작과정에서 나타나는 타날기법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낙랑의 영향을 받은 '낙랑계 토기'들이 한반도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많이 확인된다. 중부지역에서는 서울 풍납토성, 가평 대성리 유적, 화성 기안리 유적 등에서 낙랑계 토기가 일부 확인되었다.


2.4.2. 중부 및 서남부 지역[편집]


마한의 토기는 경질무문토기로 대표되며 기종은 심발(깊은 바리)과 원저단경호(짧은목 둥근 항아리)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추후 추가예정)


2.4.3. 동남부 지역[편집]


신라와 가야 토기가 어느 정도 유사한 양상을 보이듯 진한과 변한의 토기도 뚜렷한 구분이 어렵다. 이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도 진한과 변한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원삼국시대 초기 진변한 지역에서는 삼각형점토대토기가 사용되다가,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새로운 기종인 와질토기가 나타난다. 진변한 지역의 토기는 3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점차 낙동강이동양식(신라토기)과 낙동강이서양식으로 분화했다.


2.5. 삼국 시대[편집]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대략 이 시점부터 실용 토기에서 무덤에 부장되는 토기로 메인 자료가 바뀐다.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삼국시대 토기도 열에 아홉이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다.


2.5.1. 고구려[편집]


파일:고구려토기.jpg

고구려 토기는 통상 계보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북한의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유적[8]의 토기나 중국 요령성 환인[9]시의 망강루 유적 토기류들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다만 해당 유적의 소재 국가들의 발굴이나 연구, 보고서 작성 방법 등이 한국의 학계와는 다소 차이가 있어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제작기법 및 형태변화에 따라 4세기 이전 전기, 4~6세기 이전의 중기, 6세기 이후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대부분 평저의 저부 형태를 보이지만 기종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전기를 대표하는 기종은 심발류의 토기들이다. 이 심발류의 토기들은 전기에는 종상파수(縱狀把手)라고 부르는 세로 모양의 손잡이가 붙는 것이 특징이고 중기가 되면서부터는 횡상파수 또는 대상파수(帶狀把手)[10]라고 불리는 가로 형태의 넓적한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시기 구분의 지표이다. 또 고구려 토기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사이부광구장경호(四耳附廣口長頸壺), 한글로는 네 귀 달린 나팔입 항아리는 대표적인 중기의 토기이다. 중기부터 후기까지 계속 사용되며 중기의 사이부장경호들이 높이와 가로폭이 1:2 정도 비율이라면, 후기의 것들은 대부분 1:3 이상으로 늘어진 형태이다. 참고로 이 사이부 장경호는 서울 몽촌토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사진 참고) 이는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시키고 남진하였음을 증명한다.

대표적인 심발, 사이부장경호 이외에도 단경호, 장경호, 직구호, 시루, 동이, 사이호, 옹, 직구옹 등 다양한 기종이 있다. 전기에는 심발류의 토기가 주기종이라면 중후기에는 다양한 기종들이 고루 나타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니질(泥質) 태토라고 하여 고운 입자의 진흙을 베이스로 토기를 굽는 것이 특징이다. 태토의 성질 때문에 토기의 색깔은 대부분 암갈색, 갈색, 황토색 등을 띤다. 토기의 외면에는 파상문이라고하는 파도무늬의 장식이나 작게 파낸 침문, 또는 삼각형의 집선문(集線紋) 등이 한 줄씩 간단하게 장식되기도 한다. 특히 남한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토기들 가운데서는 암문(暗紋)이라고 하는 묵으로 문양을 그린 토기도 있다.

고구려 토기는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백제, 신라, 가야의 경우에도 실용적인 토기들이 많지만 화려한 문양을 넣거나 멋스러움을 강조한 토기들도 존재하는 반면 고구려에서는 문양을 넣더라도 간단하게 넣으며 대체로 투박하다.


2.5.2. 백제[편집]


파일:풍납토성 미래마을 부지 나-10호 주거지 출토 토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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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납토성 미래마을 부지 나-10호 주거지 출토 토기(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풍납토성 ⅩⅣ)
백제 토기는 원삼국시대 마한토기를 토대로 다른 기종,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면서 성립하였다. 토기 제작에 사용된 흙은 정선된 니질(泥質)태토이며 표면은 회색부터 적갈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고구려토기와는 달리 타날기법을 통해 문양을 새긴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표면을 흑색으로 마연(磨硏)한 '흑색마연토기'가 확인되고 있다. 이는 삼족기(세발토기)[11], 직구단경호(곧은입항아리) 등과 함께 백제토기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다.

백제토기는 크게 한성기, 웅진·사비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한성기는 1기와 2기 혹은 3기까지 나누는 경우도 있다. 주로 1기는 백제토기의 성립기로 보고 있으며 2기는 백제토기의 확산기로 보지만 시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차이를 보인다. 통상적으로 백제토기는 3세기에 성립되어 4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확산됐다고 본다.

웅진·사비기에는 한성기에 제작된 토기들이 지속적으로 확인되는 가운데 대부완(굽달린 사발), 벼루 등 새로운 기종이 등장하기도 한다.


2.5.3. 신라[편집]


실생활에도 쓰였지만 주로 껴묻거리로 많이 이용되었다. 굽다리(고배)가 특징이다.
파일:국보91호.jpg
국보 91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2.5.4. 가야[편집]


신라토기와 매우 유사하며 역시 굽다리(고배)가 특징이다.
파일:external/www.newstown.co.kr/c_20041031_15238_21684.jpg

2.6. 남북국시대[편집]


남북국시대는 발해와 통일신라가 존속하던 시기를 의미하지만 두 국가의 존속시기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발해는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30년이 지나 세워진 나라이며 후삼국시기에도 일정 기간 존속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남북국시대를 발해와 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만을 이르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두 국가의 토기에 대해 서술한다.


2.6.1. 발해[편집]


파일:발해토기.jpg
발해토기는 발해가 영유했던 땅인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북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며 중국 동북지역은 상경성, 홍준어장 고분군, 오녀산성[12]이 대표적이고 한반도 북부에서는 궁심고분군, 부거리 고분군, 청해토성 등이 있으며 러시아는 크라스키노성, 체르냐치노 유적, 콕샤로프카성 등이 대표적이다.

발해토기는 크게 고구려계 토기와 말갈계 토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 및 말갈의 문화가 어우러진 국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계 토기로는 외반구연호와 같이 기존 고구려 토기의 기종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말갈계 역시 말갈토기에서 보이는 특징들을 많이 계승하였다.


2.6.2. 통일신라[편집]


통일신라가 되면 신라의 토기 양식에도 변화가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인화문토기, 주름무늬병 등 새로운 문양 및 기종이 등장한다.

신라토기 문서 참조.


3. 외국의 토기[편집]



3.1. 그리스[편집]




3.2. 중국[편집]


  • 채문토기 - 양사오 문화 등 고대 중국의 색채토기. 한반도 및 중국 동북지역, 멀리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회도(灰陶)문화와 다른 것으로 주로 기하학적 무늬를 채색한 것이 특징이다.
  • 자사호 - 보이차의 다구로 유약을 바르지 않은 자사니를 소성하여 만든다.


3.3. 일본[편집]





4. 토기 고미술품 목록[편집]




4.1. 국가 지정 문화재[편집]



4.1.1. 국보[편집]



4.1.2. 보물[편집]


  • 보물 제597호 융기문토기


4.2. 시도 지정 문화재[편집]



4.3. 일반 동산 문화재[편집]


  • 부산 동삼동 동물토우
  • 양양 오산리 인면토우
  • 울산 신암리 여인상


4.4. 해외 소재 문화재[편집]



5. 같이보기[편집]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한국의 도자사
토기 | 도기 | 자기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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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도기에도 겉에 유약이 발린 것이 있고 유약을 바르지 않았더라도 높은 온도에서 구워지는 만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유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기와도 마찬가지로 높은 온도에서 구워진 기와는 겉에 마치 유약을 바른 것 처럼 자연유가 나타난다[2] 중국에서는 여전히 도(陶)를 많이 사용한다.[3] 그 덕분에 재와 탄소 성분이 토기 위에 불규칙한 무늬를 남기는 일이 많았고, 이런 기법은 현대 도예에 응용하기도 한다.[4] 동예라는 이름은 '예' 집단 중에서도 오늘날의 영동(함경 및 강원)지역에 있었던 집단을 특정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다.[5] 삼국시대 고구려라고 하는 고대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고구려사회를 지칭하는 용어로 '원고구려'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와 용어의 적합성을 검토하여야겠지만 초기 고구려사회를 지칭하는 말로 현재까지 별 이견이 없다.[6] 우리나라에서는 이 둘을 합쳐 단결-크로노프카 문화라고 부르고 있다.[7] 한사군의 문화에 대한 연구는 낙랑군에 많이 치중되어 있다. 이는 낙랑군이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점도 있거니와 발굴을 통해 확인된 자료가 많은 점도 한 몫 한다. 반면 다른 군현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물론 같은 한사군인 만큼 문화의 차이가 크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나 각 군현별 차이점 및 특징에 대한 변별이 부족한 실정이다. 때문에 사실상 '한사군의 문화=낙랑군 문화'가 되어버렸다. 백제와 경계를 접하던 곳은 대방군이었지만 현재 풍납토성, 가평 대성리 유적 등에서 확인되는 한사군의 토기를 '낙랑토기'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낙랑군을 제외한 다른 군현의 존재감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남북분단이 이러한 현상을 발생시킨 원인이지만...[8]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 지금의 길림성 집안시에서 압록강을 건너 약 30~40여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만포시를 지나면 바로 시중군이다.[9] 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지이다.[10] 띠 모양의 손잡이라는 뜻으로 장독에 붙어있는 손잡이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쉽다.[11] 고구려 토기에도 다리가 세 개 달린 토기가 확인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세발토기는 정확히 말하면 '원통형 삼족기'라고 해서 백제의 삼족기와 명확하게 구분된다.[12] 오녀산성은 고구려 초기 수도였던 지역으로 고구려문화층에 해당하는 3기 문화층 이후의 문화층에서 발해 토기가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