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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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라는 이름을 가진 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부여(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부여(扶餘)는 현재 만주의 북쪽 지역인 송화강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으로 구성된 한민족의 고대국가이다.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중반에 걸친다. 대한민국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과 고조선에서 모든 한국사가 시작되는 일원적 개념처럼 설명하고는 있으나, 부여는 고조선과 동시대에 공존했던 고대 군장국가이며 서로 중심지역도 상당히 멀다. 또한 고구려, 백제 등 한민족의 조상이 되는 주요 국가의 왕가들이 적어도 그들이 스스로 내세운 내러티브로는 각기 조선이 아닌 부여계 국가에서 나왔음을 표방한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그리고 어쨌든 부여는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예족 국가가 맞다. 현대의 한민족은 만주에서 한반도로 이르는 지역에서 분포했던 여러 종족이 예맥족 중심으로 천수백 년에 걸쳐 융화한 것이며, 부여는 고조선과 별개로 한민족의 조상격인 국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추모(주몽)의 아버지[6] 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삼국유사》 <왕력(王歷)>편
2. 국호[편집]
'夫餘', '扶餘', '夫余', '扶余', 'Puyŏ', 'Buyeo'. 정장상팡(郑张尚芳) 또는 백스터(Baxter)와 사가르(Sagart)의 중국어 상고음 재구에 의하면 夫餘, 扶餘는 고대 중국인들이 /*pa.la/ '빠라' 또는 /*ba.la/ '바라'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란 나라 이름에 대해선 몇 가지 주장이 있는데, 첫째로 '불'이 어원일 것이라는 설과 더불어, 왕족의 성씨가 해씨(解氏)인 것과 관련 지어 해나 불을 숭배하는 뜻이 아니냐는 추측이다. 다만 '解'의 상고음이 'kre' ~ 'ke'임을 생각하면 많이 떨어지는 가설이다. 현대 한국어 '하양'이 고대 한국어에서 'k' 발음을 가졌기 때문에, '해'도 마찬가지로 'k'로 발음하다가 'kh'를 거쳐 'h'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이유는 '하양'이 '해'에서 파생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둘째론 만주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사슴을 뜻하는 '푸후(puhu)'[7] 쌀을 뜻하는 '버러'에서 왔다는 설들이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부여는 처음에 녹산(鹿山)에서 살았고, 발해에서도 사슴을 귀하게 여겼다고 하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부여의 언어는 퉁구스계 언어들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때 부여의 강역인 지린성, 랴오닝성 즈음 대부분의 지역들은 벼 농사가 불가능했다. 요동 반도 남부와 압록강 중하류 일대만 가능했으므로, 그때의 기후적 상황을 생각하면 부여란 나라 이름이 '버러'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낮다. 부여는 벼농사보다 주로 보리와 같은 잡곡 위주의 밭농사와 수렵 활동, 목축을 통해 식량을 확보했던 것으로 보인다.[8]
셋째로 伐, 弗, 火, 夫里 등으로 표기된 현대 한국어 '벌'의 옛말이라는 주장이 있다. 부여는 송화강을 낀 벌판에 자리잡았고, 고대에 '벌'은 '골', '내', '재'와 더불어 지명에 자주 쓰였는데 이는 서라벌, 소부리[9] 처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10] 나주시의 옛 지명은 '발라(發羅)'였는데 이는 부여의 재구음인 '바라'와 굉장히 흡사하다. 평양도 마찬가지로 '벌'과 '내'를 더한 말이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부여란 나라 이름의 어원은 '벌'과 가장 연관이 커 보인다.
한자로 쓸 때 부여의 '부'를 夫로 쓰는 경우와 扶로 쓰는 경우, '여'를 余로 쓰는 경우와 餘로 쓰는 경우가 모두 있다.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대개 부여(夫餘)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서에는 대부분 부여(扶餘)로 기술하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夫餘와 扶餘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애초에 餘는 余에서 파생된 글자이기에 전통적으로 餘의 약자로 余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현행 표준 한자인 신자체와 중국의 간화자(간체자)는 餘를 폐지하고 余로 통합했다. 단, 余 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중국 간화자의 경우 의미가 혼동될 우려가 있을 경우, '남다'라는 의미를 명시하고자 할 때, 또는 본래 번체자(정체자) 표기에서 余가 아닌 餘였다는 걸 확실히 하고자 할 때, 부수 飠(食)을 饣으로 치환한 馀로 쓰는 걸 허용한다. 그래서 비록 중국어 간체에서 부여를 夫余나 扶余로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夫馀나 扶馀로 적기도 한다.
3.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부여/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정치[편집]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였다.
정치는 귀족 정치로서 지배 계급에는 군주왕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의 가 및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다. 관직의 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 지방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사가도(四街道)라고도 함)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 우가 등의 제가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 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했는데, 그들은 지배 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다만 하호와 별개로 노비층도 있고, '하호'라는 계층은 고구려에도 있었다. 부여 하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게 특징이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식량 보급과 물자 운송을 담당했으며, 그때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했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면서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과 비슷한 계층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부여는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국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적인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폐출되거나 보통은 죽임을 당했다. 귀족 연정체제에서 "왕"이라는 호칭의 대표자를 뽑는 선거군주제 체제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름이 "왕"이라서 오해를 살 뿐, 당대로서는 제사장 정도의 느낌이었다. 제가들도 나라를 세우는 데에 일조했고, 왕 또한 제가들이 뽑았으므로 왕을 내쫓거나 죽일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다만 시간이 흐르고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져 왕을 처형하는 일은 없어졌으나, 다른 주변국가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했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했다.
이런 정치 제도 때문에 부여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대소왕이 고구려의 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여 연맹국가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5. 사회[편집]
혼인을 할 때는 혼납금으로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간음을 엄격히 금지해서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 부인이 질투를 하는 경우에는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이 질투하는 것을 나쁘게 여겨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했다. 만약 죽음을 당한 여인의 친정에서 딸의 시체를 거두어 가려면 남자 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혼인 때의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고구려와 같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풍습인 형사취수가 있었다. 고구려의 사회법 중 대부분이 부여와 유사한 걸로 보아 고구려의 사회법도 부여에서 따온 걸로 추정된다.
추수가 끝난 후 영고라고 불리는 제천 행사를 벌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영고는 유목 민족의 수렵제적인 성격이 남아 있어 동맹이나 무천과 달리 10월이 아닌 12월에 거행되었다.
노비 제도가 존재했다. 순장은 대부분 노비로 채워졌다. 순장된 노비는 전쟁 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 노비와 부채 노비도 있었다. 때문에 변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노비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법에는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했다. 이 12배 변상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5.1. 언어[편집]
같은 예맥 계통인 고구려어와 비슷했을 거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지만, 관련 자료가 워낙에 부족한 관계로 얼마나 유사성이 높았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후한서> 동이전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而跪拜曳一脚, 行步皆走
동이가 서로 전하기로는 (고구려는) 부여별종(夫餘別種)이라고 한다. 그래서 언어와 법칙이 대부분 같고 궤배(跪拜-무릎꿇고 엎드려 절함)할 때 다리 하나를 끌고, 행보(行步)할 때 모두 뛰어다닌다.
言語 食飮 居處 衣服有似句驪.
(동옥저는)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동예의) 노인이 스스로 말하길 (고)구려와 동종이며, 언어와 법속이 비슷하다.
그러나 당대의 중국 측의 사료에서 꾸준하게 부여와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예맥계 국가들의 언어가 유사하다고 언급하므로, 이들이 서로 같은 어족에 속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며, 이에 따라 주류 언어학계는 잠정적으로 이 어족을 부여어족으로 명명했다. 이 부여어족이 어느 어족과 동계인지가 언어학계의 화두인데, 미국의 언어학자인 크리스토퍼 벡위드가 삼국사기의 몇몇 기록을 토대로 부여어족이 일본어족과 동계라는 설을 제안했으나, 고유어를 한자에 억지로 끼워맞추거나, 한국 한자음의 재구가 엉터리라는 점때문에 바로 부정되었다.
반면 똑같은 미국인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부여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에 한국어에서 볼 수 있는 요소가 대거 존재하는 점을 들어서 양자를 동계로 추정하고 있다. 한때 보빈이 선비족의 언어인 선비어를 부여어족으로 주장했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논문을 오독한 것으로 실제 내용은 (모용)선비-거란 계통의 언어에 고구려어가 외래어로 차용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고구려어 또한 한국어족에 속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부여 사람이 쓰던 성 해씨(解氏)에서 '해'가 '태양'을 뜻하는 현대 한국어 '해'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으나, 근거가 부족한 탓에 주류 학계에서는 해당 주장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이 성씨를 지닌 사람은 2015년 통계청 기준으로 아홉 명이 확인된다고 한다. 여담으로 순우리말 해(日)와 흰(白)은 어원이 같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인지 백의민족 기록이 부여에서도 나타난다.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포목으로 만든 소매가 넓은 도포와 바지를 입는다." (<삼국지> 부여)
6. 경제[편집]
만주의 넓은 평야 지대에서 농사를 주요 산업으로 한 농경 국가였으나, 동시에 목축과 기마술에도 능한 반농반목의 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덕분에 당시 북방의 패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중국에 말을 수출하기도 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말, 붉은 옥(적옥, 赤玉)[11] , 구슬 장식품(미주, 美珠), 담비나 돼지, 여우, 원숭이 등의 짐승 가죽이 있었다.
7. 왕조[편집]
자세한 내용은 부여/왕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인물[편집]
자세한 내용은 부여/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문화[편집]
자세한 내용은 부여/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군사[편집]
북방 지역의 평원에서 기른 말로 인해 기마술이 발달했고, 중기 이후 철기를 사용했다.
부여는 중국과 특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선비족의 연계가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부여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주변 기마 민족들이 부여에 적대적이었기에 양국의 이해 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물론 몇 차례 중국과 부여의 충돌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매우 적었던 데다 충돌 시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중국에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평가하기를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에게 패해 본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위 한사군과는 2차례의 충돌이 있었다. 111년에는 7,000명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낙랑군을 공격하였고, 167년에는 부여 왕이 직접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했다. 위의 사례는 정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이어서 왜 대립했는지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 직후에서 멀지 않은 120년과 174년에 부여에서 오히려 중국에 복속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단순한 약탈은 아니고 무언가 정치적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무력 수단을 동원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는 관계 일변도는 아니었다. 《후한서》에서는 111년의 침공을 (부여의 침공으로서) '처음'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큰 대립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부여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으로 서술하여 '식량이 모자라 주변을 털고 다닌다'고 기술한 고구려와는 차이가 있으며, 관구검이 고구려 동천왕을 공격할 때 부여에서 식량을 얻어가는 등 중국을 지원한 사례도 존재한다.
선비족과의 충돌도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중반, 단석괴가 선비족을 통합하고 부여, 오손, 정령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며, 부여를 끝장낸 285년, 346년의 모용선비 침공이 대표적이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이 부여인 노예 매매를 금지시키고, 부여로 되돌려보낸 일화도 고려하면 기록이 안된 모용선비족의 약탈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동한 초기에 읍루를 복속시켰으나 3세기 초 읍루가 부여의 지배권에서 이탈하면서 읍루와도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다만 읍루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다시 복속시키는 것은 실패했다.
부여 왕이 사망할 때 부여가 동한측으로부터 '옥갑(玉甲)'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를 일부 환빠들이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금루옥의(황금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한나라로부터 조공받은 것이며, 부여는 따라서 황제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다. 일단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부여가 중국에 속(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부여가 현도군에서 옥갑을 받아갔다고 되어 있지, 조공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다. 당연히 황제국이 타국에 속할 리는 없는 노릇이므로 일단 관계 설정 자체가 거짓이다. 링크 참고.
한편 금루옥의 관련해서 규정이 있는 것은 《후한서》 <예의지> 하권이다. 여기서 인용한 <한구의>를 보면,
동한의 황제가 입는 수의로 규정된 것은 금루옥의가 맞지만(각주의 ①), 그 뒤에 등장하는 규정에 따르면 제후 왕 등은 은루옥의(은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대귀인과 장공주 등은 동루(옥의)(구리 실과 옥으로 짠 수의)를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각주의 ②).① 漢舊儀曰:「帝崩,唅以珠,纏以緹繒十二重。以玉為襦,如鎧狀,連縫之,以黃金為縷。 ② 諸侯王、列侯、始封貴人、公主薨,皆令贈印璽、玉柙銀縷;大貴人、長公主銅縷。(《후한서》권 96 <예의> 하).
그러니까 실을 금으로 짜는 것이 황제의 규정일 뿐 실만 다르면 옥의는 제후 왕을 포함한 황제 이하의 여러 인물들이 입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물건이었던 것이다(그리고 그렇다면 부여 왕은 형식상 제후 왕의 격식에 따라 수의로 은루옥의를 입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빠들이 부여가 황제국이라고 주장했던 옥갑 관련 사료는 오히려 부여가 동한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여서 동한의 예법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고, 동한에 제도상 복속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사료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부여가 한나라에 속했다는 말이 중국의 속국이나 지방 정권이라는 뜻이라는 게 아니다. 이는 부여가 중국과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기 위해 명목상 칭신을 하는, 당대의 외교적 관례를 잘 알았다는 의미다. 자세한 건 조공 문서 참조.
물론 이런 것과 관계 없는 순수한 연구자라면 부여가 한나라의 국제 질서에 속하여 동한에 대해 제도적으로도 충분히 지위를 보장받았다고만 알고 넘어가면 된다.
11. 역사귀속과 계승인식[편집]
11.1. 한국사[편집]
보통 한국사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들은 대부분 한반도에 영토가 있어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부여는 (동부여를 제외하면) 한반도에 영토를 가진 적이 없었던 데다가 고조선과 진국[12] 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러 전란으로 사서가 유실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록들도 부실하여 한국사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 교육에만 충실했다면 원삼국시대에 이런 국가가 있었다는 정도의 비중으로만 기억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그래도 나름 왕을 칭한 연맹왕국을 이루는 데 성공했고 두 후계국인 고구려와 백제가 메이저급으로 성장했으니 군장국가 수준에 그친 다른 원삼국시대 소국들보다는 훨씬 네임드다. 백제를 누를 잠재력이 있었던 마한의 맹주 목지국은 결국 본격 영토국가로는 성장하는 데 실패해 지명도가 크게 떨어진다. 고조선 준왕 집단의 직계이자 목지국보다 먼저 마한을 영도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건마국도 너무 이른 시기에 몰락해 지명도가 아예 없다.
그와 비교하면 부여는 가장 북쪽 끝 국가였다는 개성이 있는데다 발해도 부여를 이었다고 자부했으며 고려에도 부여공/후란 작위가 존재했고 백제 덕에 한반도에 충청남도 부여군이라는 명칭을 무려 현대까지 남기는 데 성공했다. 한국사를 대충이라도 제대로 공부했다면 부여의 왕들인 해부루나 금와왕, 대소왕은 알겠지만 그에 비해 한때 삼국시대의 한 축을 담당한 강국이었던 가야 반파국(대가야)의 왕들의 이름은 거의 모를 것이다. 여러 일화가 잘 전해진 덕에 오히려 비중에 비해 대우가 꽤 후한 편이 된다.
부여는 5세기 말에 사라지지만 그 유산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남는다. 한국의 전통놀이 문화인 윷놀이의 기원론 중 하나가 부여기원론이며 윷놀이 용어는 부여어라는 게 중론이다. 중국 북송 때의 백과사전 《태평어람》에서도 부여 관련 얘기로 나온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인들과 부여인들이 백의(白衣)를 즐겨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후계 한국사 국가들도 백의를 즐겨입는 성향이 있어서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반도 사람들은 부여에서 내려온 북방계로 부여인의 유골이 형질인류학 연구상 현대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고 나오기도 했다.
두막루도 부여의 후계국이라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라면 부여는 정설보다, 심지어 삼국 고대왕국 고구려, 백제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발해대까지 그 여명을 유지한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왕가들이 내세운 프라퍼갠다로만 따지면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고 신라는 조선이라고 볼 수는 있겠으나 고고학적 조사 및 다름아닌 문헌 자료 연구는 약간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이 부분은 밑의 고구려, 백제 단원 참조.
11.1.1. 고조선과의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고조선-부여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1.2. 고구려, 백제[편집]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자처했다. 1차 사료인,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에 보내는 국서(472)가 있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북위서》 <열전>,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고구려, 백제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쓰여 있다. 고구려는 시조 추모성왕의 시호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에게서 따왔고 건국 신화도 동명왕 신화를 차용했을 정도였다. 특히 백제 같은 경우는 왕실의 성이 부여씨였고, 국호를 아예 남부여로 바꾼 적도 있을 만큼 부여에게서 내려오는 정통성을 중시했다. 이로 인해 사비성이 있었던 지역의 현대 명칭도 부여군이다.
일단 삼국사기상 내러티브로는 주몽이 부여에서 왕자들의 질투를 받아 죽을 위험에 처하니 부여를 떠나 졸본부여로 가서 고구려를 세운 후, 부여에서 주몽의 아들 유리(고구려 2대왕)가 오니 찬밥 신세가 된 주몽 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한반도로 내려가서 각각 인천(미추홀)에 비류국, 한성(위례)에 백제국을 세운 걸로 되어는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고구려 왕가 및 백제 왕가가 본인들 이익과 그 당시 거느리면서 흡수하고 경쟁하던 주변국에 대한 입장에서 어느 정도 윤색한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고구려는 본인들이 부여에서 나오긴 했지만 뿌리는 금와왕의 부여가 갈라져 나온 북부여(즉, 부여 동명왕이 떠나온 부여 동명왕의 본국인 탁리국 혹은 고리국을 말한다.)에 있다고 주장했고, 백제는 아예 건국사화를 봐도 부여도 졸본부여도 아닌 고구려에서 나온 게 분명함에도 본인들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단 고고학적으로는 고구려 지배층은 부여 동명왕이 떠나온 고리국(=탁리국)으로 비정되는 백금보-망해둔 문화권과 1도 관계가 없고, 실제로는 부여로 비정되는 기원전 2~1세기 포자연 문화권과 강력한 연속성이 입증된다. 묘제는 송양 집단과 주몽 집단이 내려오기 전 요동 동부 및 압록강 바로 건너에 살던 고조선 유민들의 조선식 묘제와 부여식 묘제가 절묘하게 합쳐진 형태지만, 지배층의 묘소에서 발견되는 무구류와 장신구는 모두 부여 포자연 문화권의 것이기에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부여 지배층의 그것과 강력한 연속성이 발견된다. 때문에 이는 고구려의 지배층이 부여에서 온 전사 집단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되는데 이는 사서의 내용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므로 별다른 이견이나 반박은 없는 상황. 그리고 고구려의 원류가 되기도 했던 이 소수맥 지역은 고주몽 집단이 오기 백 년 전인 기원전 2세기에도 부여로부터 내려온 집단의 남하가 또 한 번 확인되는데 이들을 문헌 사료와 맞춰서 이해하면 바로 졸본부여의 건국 집단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실제로는 고구려는 그냥 부여에서 떨어져나온 이들일 뿐이고 고리국과도 무관하기에 건국 신화에서 말하는 해모수-고주몽, 해모수-해부루-금와 이런 내러티브는 절대로 사실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때문에 부여는 고구려를 내내 무시했다. 제3자가 보더라도 이해되는 현상이다.
한편 부여-고구려의 이 묘한 관계는 고구려-백제에게서 똑같이 드러난다. 물론 백제와 고구려의 연결성은 묘제의 연결성이 너무나도 분명하니 백제가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건 고고학적으로 결코 부정할 수 없으나, 이것이 백제 왕실의 공식 주장, 즉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오지 않았고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에 고구려와 대등하다는 주장에 부합하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초기 한성백제는 부장품이든 묘제든 부여와 연관되는 게 하나도 없으며, 토광묘제가 한때 부여와 일치한다는 증거로 들어졌으나 이는 논파된 지 오래된 주장. 그냥 대중에게 알려진 대로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백제는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얘기가 고고학적으로도 맞다가 되겠지만, 이것이 어쨌든 백제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한 얘기하곤 틀린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지가 역사학자들의 현재 고민거리다.
흔히 알려져 있는 온조시조설의 백제 건국신화에서는 동명성왕이 북부여에서 홀본부여에 남하해 소서노와 혼인, 고구려를 세운 뒤 비류와 온조를 낳고 후에 북부여에서 내려온 장자 유리명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소서노와 비류, 온조가 남하해 백제로 떨어져나갔다는 게 골자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고구려의 왕대가 2대가 될까 말까한 초기에 일어난 일이니만큼 북부여가 아닌 '홀본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거의 동시에 나왔으면 백제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와의 물질 문화 연계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긴커녕, 고고학 연구가 진전될수록 백제와 고구려의 연결성은 입증되어도 백제와 부여 사이엔 그런 게 되질 않으니, 결국은 온조 설화의 내러티브 자체도 그게 정말 문자 그대로 그랬었을지는 상당 부분 의문시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편 한성백제가 막 목지국을 쓰러뜨리고 낙랑군 및 대방군의 영향력을 완전히 뿌리치며 마한의 맹주국으로 발돋움하던 3~4세기 즈음에 흡수한 경기, 강원, 충북 일대 동예 소국들의 물질 문명에서는 부여의 영향이 어느 정도 보이긴 한다. 이는 부여가 고구려나 전연 등을 포함해서 여기저기 정신 못 차리게 두들겨 맞을 때 탈출해온 부여 유민들의 영향으로 유력하게 해석된다.
그런데 이들은 또 어디까지나 그 시점에선 백제에게 직접 지배 지역화당하거나 간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되던 지역 호족이니, 백제의 건국 설화 내용과는 또 다시 묘하게 잘 들어맞지 않는다. 역시 이 부분에 대한 설명도 현재 역사학자들의 주된 고민거리다. 혹자는 부여-고구려-백제니 백제는 어쨌든 부여와 관계 있을거라 추정하겠지만, 백제의 주장은 부여-고구려 // 부여-백제니 백제는 고구려와 대등함!이었다. 한편 백제의 이런 주장에 대해 고구려가 일언반구 대응 없이 그저 백잔 운운하면서 무관심무대응 내지는 비하 반응 일변도로 일관했던 것도 더 생각해볼 부분이다.
다시 정리하면, 고구려가 뭐라고 주장하든 부여는 FACT에 기반을 둔 자신감으로 코웃음치며 내내 고구려를 무시했다. 그리고 고구려 또한 백제가 뭐라고 주장하든 역시 FACT에 기반을 둔 자신감으로 백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갈라졌다느니 등 따위 얘기들은 아예 상대조차 해주질 않았다. 이러니 부여-고구려, 고구려-백제의 관계가 좋아질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되겠다. 일반적으로 삼국통일전쟁 막판의 여제동맹 구도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가 한 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멸망 이전 몇 십 년 정도에 한정된 관계였다. 이것도 긴밀하기보단 이해관계 때문에 일시적으로 뭉친듯한 모양새다. 오히려 동맹의 긴밀함은 한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외국 왕족끼리 서로 통혼을 한 백제, 신라의 경우가 유별났다. 물론 이들도 동맹이 깨진 뒤론 원수가 되지만. 고구려와 백제는 왕조 존속기간 수백년을 통틀어 보면 이들이 신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기간보다 여제가 서로 원수지간이던 기간이 훨씬 길었다. 현대 남북한관계도 그렇듯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실제 외교에서도 친밀함을 담보하진 않았다.
그래도 부여는 최후의 일격을 모용씨 세력에게 맞긴 했으나 실제로는 그 인민과 영역 대부분을 융성하게 된 고구려에게 흡수당했고, 끝내 고구려는 부여의 옛 고토를 당연히 옛 탁리국 영역까지 모두 합쳐 영역화했다. 그래서 부여와 고구려의 갈등은 일단락되었고 옛 부여인들 대부분은 정체성이 고구려화된다.[13] 그러나 백제는 한성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그 이후에도 아예 청주-세종-대전까지 모두 빼앗기며 멸망 직전에 몰리긴 하였으나, 나제동맹을 통해 어떻게든 고구려를 충남에서만큼은 완전히 밀어내서 생존에 성공하였다. 때문에 같은 부여계라는(고구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백제와 고구려의 근본적인 갈등은 삼국통일 전까지도 해소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대중에게 널리 퍼진 오해로,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인데 신라는 조선이니 고구려/백제와 신라는 계통이 좀 다르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는 실제 역사적인 사실과 다름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왕가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그렇게도 볼 수는 있겠지만 왕가 중심으로만 역사를 보는 관점이 수백 년 전 타파된 걸 고려해본다면, 이는 제대로 된 인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고구려는 졸본부여 시대부터 대다수 고조선 유민과 소수 부여 지배층이 연합해서 내려오는 나라였다. 즉 적어도, 태조왕 이전 고구려는 주민 구성 대부분이 조선인 계통이란 얘기다. 태조왕 때부터는 이미 약해진 부여 본토 영역까지 본격적으로 잠식해 들어가니 그 이후 고구려는 부여인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겠지만 그 전에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초기 한성백제는 아예 지배층마저 고구려 유민 일변도는 아니었다. 건국 단계부터 토돈분구묘 해양 민족 계열과 연립 정권을 이룬 상태였고(물론 주로 초고-온조계로 비정되는 고구려 주몽 왕족 계열이 우위였으나), 피지배층 대부분은 낙랑에서 내려온 서북한 고조선인과 동북한 옥저 계통이 주를 이루었다. 이후 3세기 중후반 목지국 기습 직전 고이왕 시절에는 경기도 전체와 (목지국이 소재한 천안을 제외한)충남 북부 일대를 영역화한 단계였는데 이 시기에 한성백제 산하에 들어온 주민 대부분은 고조선 계통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대성팔족도 몇몇 씨족 외엔 다수는 마한 조선계임이 분명한 집안들이었다. 그러니 아주 당연한 얘기로 성왕 때 백제 왕가가 국호를 남부여로 바꾼 것에 대해, 옛 마한 거수국 거수들의 후예인 나머지 백제 귀족들이 결코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와 달리 조선과 무관한 부여계 국가라는 일각의 인식은 사실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 대한민국이 부여보다 조선을 다소 부각할 수밖에 없는 건 부여사가 고조선사에 비해 덜 알려진 것만 이유는 아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모두 조선과는 연계가 대단히 깊은데 적어도 신라는 부여와의 직접적 연관성에서 빠지니, 신라가 먼저 주창하고 고려가 그 개념을 바꿔서 계승한 삼한일통적 관점[14] 에서는 고조선이 보다 주목될 수밖에는 없다. 물론 고려가 내세운 삼한일통 인식은 부여의 후계인 고(구)려가 중심이 되긴 하였어도, 엄연히 신라가 삼한일통의 한 주축인 이상 통합을 내세울 때는 부여보다 조선이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11.1.3. 발해[편집]
《속일본기》에 따르면 발해 왕 대무예가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선언했다. 발해는 옛 부여의 땅에 부여부와 막힐부를 두었고, 부여부 부주 부여현은 후기 부여의 중심지 농안일대로 보기도 한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요사의 기록을 근거로 발해 부여부가 랴오닝성에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요사에 기록된 발해 여러부의 요동 위치설은 거란이 발해를 정복하고 발해인들을 집단이주시켜 주군현을 이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11.1.4. 고려[편집]
고려 문종의 왕자 왕수의 봉국명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중국 왕조가 전왕조들의 국호를 제후에게 봉한 사례를 따른 것이다. 왕수의 작위는 후작에서 진작된 부여공(扶餘公)이었다. 또한 중국 송나라의 《고려도경》엔 고려가 제후에게 준 부여궁(扶餘宮)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부여궁은 부여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11.2. 중국사(만주사)[편집]
한국사뿐만 아니라 부여가 자리잡은 지역이었던 현 중국 만주 지역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나라로, 7세기에 속말말갈의 수령 돌지계가 수나라로부터 부여후로 봉해졌고, 여진의 금나라도 건국할 때 부여를 언급했다.
하지만 말갈과 여진 등 숙신계 민족들은 부여를 비롯한 예맥계 민족들과 이질성이 존재했다. 애초부터 부여인들은 읍루와 말이 통하지 않고 읍루를 착취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숙신계 읍루가 3세기까지 부여에 신속했고, 이후 5~6세기 말갈이 강성해져 속말말갈은 부여의 초기 중심지 속말수(송화강) 유역으로 남하하면서 부여를 서북쪽 농안지역으로 밀어내고 자리잡았기에 수나라로부터 부여후로 봉해졌을 수 있다. 이후 말갈의 여러부가 고구려의 일원이 되고, 발해 때는 고구려 유민과 함께 건국세력이 되어 한 국가를 이룰 만큼, 비록 민족은 다르지만 발해 멸망 전까지는 부여와의 접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1.2.1. 중국의 동북공정[편집]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최근 아무리 계속하여 밀어붙여도 고구려가 중국 왕조로 인정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구려보다 비교적으로 한국 학계에서 역사적 연구 및 자료가 빈약한 부여를 중국 한나라의 한사군에 소속되었던 중국의 왕조였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비중을 옮겨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즉,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의 왕조로 인정받지 못 한다면, 아예 고구려와 백제의 선조격인 부여를 중국 왕조라고 주장하면 된다(...)는 생각.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부여를 한국 발음인 부여가 아니라 중국식 발음인 푸위(Fuyu)라고 불러야 한다 주장하는 것은 덤이다.
특히 영어 위키백과 항목에 수정 전쟁을 통하여 부여 항목을 점거한 뒤 위의 주장들을 기재하여 부여를 중국의 왕국으로 소개하고 있다. #. 2022년 1월 기준으로는 한국의 역사로 다시 수정되었지만 다시 중국 역사로 바뀌는 등 한국 유저와 중국 유저 간의 수정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부여와 관련된 위키백과 페이지를 중국인 편집자들이 쪽수로 점거해서 밀어붙이고 있다.
12. 부여에서 유래한 이름[편집]
12.1. 한국[편집]
- 부여와 백제의 왕성(王姓) 부여씨 - 백제에서는 부여 계승 의식에 의거하여 부여를 왕성으로 삼았다. 한국의 국성 중 유일한 복성이다. 중국에서는 편의대로 여(餘)씨로 줄여서 기록했다. 실제로 夫 자는 한문에서 그냥 별 의미 없는 발어사(發語辭)로 쓰는 경우가 많다. 고대 중국인들이 백제 왕족을 언급하는 문장에 적혀 있는 夫餘나 夫余를 복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발어사로 夫를 쓴 다음에 한 글자 성씨로 餘나 余를 기재했다고 오독했거나 혹은 백제 왕실이 중국 왕조와 무역할 때 중국식으로 한글자 성씨인 餘씨로 줄여서 소개한 것이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5] 부여의 '여'(餘 또는 余)와 성씨 서(徐)는 余를 구성 요소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외로 선비족에 의해 요서로 이주된 이후의 부여 왕족들도 성씨가 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부여씨를 쓰는 사람은 없지만 그 후예는 현재 서씨와 여씨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도 백제 왕족 부여씨의 후예를 자처하는 몇몇 성씨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대개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성씨를 새로이 하사 받고 귀족, 왕족으로 편입되어 꽤 오랫동안 일본 역사서에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현대까지 내려오는 부여씨 후손을 자처하는 성씨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임성태자를 조상으로 하는 오우치(大内), 부여선광의 쿠다라노코니키시(百済王)씨의 분파 미츠마츠(三松)씨 등이 있다.
-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 성왕이 세운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있었다. 한때 강성했던 부여의 이름이 한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지명이다. 백제 성왕 대에는 잠시 백제 국호가 남부여로 변경되기도 했다. 다만 전통적으로 역사서에서 국호에 들어간 성씨, 방위 표시나 전·후 같은 수식어는 후대에 동명의 왕조들을 구분하기 위해 첨가하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이런 수식어를 뺀 게 실제 국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실제로는 성왕이 국호를 그냥 '부여'라고 고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부여가 됐든 부여가 됐든 이 국호가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성왕의 국호 변경 이후 시기를 기록한 역사 기록(중국측 기록 포함)에는 그냥 백제로 표기된다. 또한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이나 <미륵사지 사리봉안기> 등 성왕 이후의 백제 유물에서도 백제라는 국호만이 표기될 뿐더러 훗날 후삼국시대 견훤이 이 나라를 계승해 세운 나라의 국호가 백제(후백제)였지, 부여나 남부여는 아니었다. 성왕이 선포한 (남)부여라는 새 국호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학계에서는 왕권 강화를 위한 정통성 주장이 목적인 일시적인 퍼포먼스였던 데다가, 성왕이 급작스레 죽었기에 지속성 논의 없이 흐지부지 된 것이라 보고있다.
12.2. 중국[편집]
- 중국 지린성 송원시(松原市) 부여시(扶余市)(간체자. 정체자로는 扶餘市)- 중국에도 부여가 현존한다. 한어병음으로는 푸위. 본래 부여의 옛 땅이라 중화민국 정부가 1915년에 부여현(扶餘縣)을 설치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그대로 이어지다가 2013년 1월 23일 중국 국무원에 의해 부여시(扶余市)로 바뀌었다. 송원시 안에 부여시가 있는 것은 오타가 아니라 중국의 행정구역 체계상으로 두 도시의 등급이 다르다. 산하에 시, 현 등을 거느린 시를 '지급시'라고 한다.
12.3. 기타[편집]
- 드라마 주몽에서는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몽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로 나온다. 부여 스스로 옛조선의 후예라 표방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으나, 정황상 옛조선의 후예이나 초심을 잃고 전한과 결탁했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연맹 왕국에 불과했던 부여의 군주를 '황제'로 지칭하는 것도 특징.
- 김진의 만화 《바람의 나라》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는 고구려와 적대하는 나라로 등장하며 국력 역시 고구려보다 우위로 묘사된다. 그러나 후반부에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부여성까지 함락당하는 모습이 나온다. 갑옷과 고대 전쟁에서 퇴출되었던 전투 마차를 굴리는 모습이나 부여를 멸망시킨 대무신왕이 최강국이었던 후한을 공격하겠다는 발언 등 역사 반영도 부족하지만, 원작은 러브스토리에 중점을 두었다면 드라마는 한 영웅의 일대기처럼 그려져 원작 재현도 부족하다.
- 삼국전투기에서는 부여라는 나라 자체가 다스베이더로 패러디되었다. 전성기때는 고구려와 백제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위엄이 대단하다. 아버지를 좋아한 걸로는 루크는 고구려로 패러디해야 하겠지만, 정작 고구려와 부여 사이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시기 자체가 몰락기라 위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고구려를 설명할 때 곁다리로 살짝 언급되는 정도다.
- 부여 유적지를 찾아가서 현지 주민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 중국 네티즌이 있는데, 현지 주민들은 부여를 잘 모르고 해당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 인물이 누구냐는 글쓴이의 질문에 부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먼 후대 인물인 금태조라고 대답했다. #
13. 학계[편집]
부여사 분야 연구의 선구자로 미국의 마크 바잉턴이 있다. 이 사람이 쓴 부여사라는 책이 유명하고 한국에 번역 예정이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이외에 한국 학계의 경우, 사정상 부여만 따로 연구하기보다는 고구려나 고조선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부여도 같이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학자로 노태돈이나 송호정 교수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중 송호정 교수가 쓴 '처음 읽는 부여사'라는 책이 부여사 입문에 좋다. 다만 필력이 안좋아서(...) 재미는 없다는 평.
이외에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간한 '고조선 단군 부여'라는 책이 참조할만 하다.
14. 참고 자료[편집]
14.1. 연구 자료[편집]
- 강만길 외, 《한국사 2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한길사, 1995년
- 백산자료원 편집부, 《고조선 부여사 연구》, 백산자료원, 1995년
- 송호정, 《한국사.4 - 초기국가 고조선 부여 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8년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혜안, 2001년
- 박경철 외, 《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단, 2004년
- 김기섭 외,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년
-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년
14.2.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의 논란[편집]
어떤 이유에서인지 부여가 다양한 한국사 시험의 고난도 문제에서 교과서적 내용과 학술적 내용의 일부 충돌로 인해 논란이 있다.
- 사례 1. 1책 12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형벌은 엄격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도둑질하면 1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특히 도둑질과 관련된 내용은 소위 '1책 12법'이라고 하여, 부여를 설명해 놓고 보기로 자주 제시된다. 그런데 정상적인 출제 기관이라면 반대로 '1책 12법'을 설명해 놓고 부여와 고구려 중에 고르라는 유형의 문제는 나올 수가 없다. 둘 다 1책 12법이 있었다는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 고구려를 제시해 놓고 '1책 12법'을 고르라는 문제도 나올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법률에 대한 기록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서》 <고구려전>에서는 도둑질에 대해 10여 배, 《수서》·《북사》·《신당서》에는 10배, 《구당서》에는 12배를 내도록 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가 잘못된 것인지 시간적 변천이 있었던 것인지 역사학적으로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그건 학술적인 문제고 점수를 가려야 하는 문제에서 고구려에 1책 12법이 있었는가에 대해 단순히 O, X 퀴즈를 내면 맞다고 볼 수도 없고 틀리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사료는 모두 6세기 이후 고구려의 상황을 다룬 사료이므로, 3세기의 상황(《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출처로 하는 기술)을 놓고 위에서 말한 '나올 수 없는' 유형의 문제를 내면 일단 부여-1책 12법을 찍어놓고 출제 기관에 항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 사례 2. 우제점법은 (부여/고구려)의 풍습?
201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9급 공무원 지방직 추가채용 시험에서 '우제점법이 부여와 고구려의 공통 풍습이다 아니다'를 가지고 복수정답 논란이 생겼다. 일부 교재에서는 공통 풍습이라고 씌여있었고, 심지어 몇몇 한국사 강사들이 사료까지 제시해가면서 고구려에도 있는 풍습이라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출제자 측에서 묵살(...)하였다. 다만 이는 조금 애매한 면도 있다. 우제점법이 제시된 것이 정사25서가 아닌 한원이다. 이런저런 사료 다 들고 오면 우제점법은 전 세계에서 엄청나게 많은 지역에서 있었던 풍습이다. 교과서적 내용과 실제적 내용이 충돌하는 부분은 고대사에서 수백 곳은 된다는 점 등이 있다. 애초에 고조선으로 보자면 미송리식 토기니 고인돌이니 하는 내용은 모두 30년 전에 폐기된 학설이다.
- 사례 3. 부여 vs 동부여
2017년에 시행된 역사교사 임용고시에서는 광개토왕비문의 특정한 내용을 발췌해서 제시한 후에, 괄호 안에 들어가야 할 나라를 적으라는 문제가 나왔다. '부여'라고 적은 사람이 많았지만 정답으로 처리된 것은 동부여였다. 이유는 비문을 그대로 가져왔으며 비문에 동부여라 적혀있기 때문이었다. 부여는 오답 처리되어서 오답률이 극악무도하게 높았다고 한다.
1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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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부여 초기 수도. 현 중국의 지린성 지린시로 추정. 알렉산더 보빈은 예성이 옛성, 즉 "오래된 성"의 음차라고 주장했다.# 중국 사서인 <위서> 30권에서 예성을 소개하면서 "그 나라(부여)에는 예성이라는 오래된 성이 있다"(國有故城名濊城)고 서술했기 때문인데, 그 바로 뒤에 "원래 예맥의 땅이다"(蓋本濊貊之地)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예인의 이름을 딴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2] 현 중국의 지린성 창춘시 눙안현으로 추정.[3] 출처는 <광개토대왕릉비문>. 현 중국의 지린 성 둔화시로 추정. 사실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용성이라고 표기했던 것처럼 그냥 부여성의 줄임말일 가능성이 커보인다. 이 경우 부여에서는 수도성의 이름을 따로 정하지 않고 그냥 국호랑 똑같이 부른 것으로 보인다.[4] 고구려어와 같은 어족으로 추정.[5] 고구려(졸본부여)는 부여와 공존했지만, 부여는 멸망 후 고구려에 흡수된다.[6] 보통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로 알려져 있으나 단군과 동일시하기도 한다.[7] 몽골어로는 'pobgo'[8] 부여 남쪽의 고구려도 초기에는 벼 농사를 거의 짓지 않았고, 보리가 주요 재배 작물이었다.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재배하던 주요 작물이 벼가 아닌 보리라 나오는 것만 봐도 고구려는 당시 벼 농사를 주로 하지 않았다.[9]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 신라에서는 벌 백제에서는 부리로 불렸으면 전부 같은 실체를 가르키는 말로 추정된다.[10] 독일어도 마찬가지로 지명에 -burg(재 城), -berg(뫼 山), -dorf(고을), -bach(내) 등이 붙는다.[11] 실제로 부여 유물 중 붉은 옥이 들어간 장신구가 많다[12] 이 경우는 특정 국체가 있었다기보단 사실상 삼한의 전신급 정도 되는 애매한 존재라 비중을 삼한이 대신하고 있다.[13] 실은 동명왕이 세운 그 부여도 건국 시조가 떠나온 바 있는 본국격인 탁리국을 멸망시켜 흡수했었다. 그런데 동명왕-해부루-금와의 부여 또한 고구려에게 똑같은 일을 당하고 만 것.[14] 통일신라가 주장한 삼한일통은 신라가 중심이 되어 고구려, 백제를 통합한다는 개념이었는데 이는 후삼국시대 개막으로 정면 부정되었고, 931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칭신하면서 사실상 완전히 폐기된다.[15] 다름이 아니라 백제에서 중국에 보낸 국서에서도 이런 축약표기가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