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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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파스칼 3세(Paschal III)
세속명
귀도(Guido)
출생지
크레마
사망지
로마
생몰년도
1110년경 ~ 1168년 9월 20일
재위기간
1164년 4월 22일 ~ 1168년 9월 20일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편집]


크레마 출신으로, 크레마 추기경 조반니의 조카이다. 1150년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 의해 산테우스타치오 성당의 부제이자 추기경으로 선임되었고, 1152년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마리아 성당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1155년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지시에 따라 다른 추기경 2명과 함께 토르토나를 정복한 후 로마로 진군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접촉해 교황청과 황제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하드리아노 4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브레시아의 아르놀트를 체포해 로마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에 협조했고, 그 대가로 로마에 도착했을 때 신성 로마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4세는 얼마 후 입장을 바꿔 황제는 교황의 지시에 순종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구기에르무 1세와 손잡고 프리드리히 1세에 대적하려 했다. 귀도는 이에 불만을 품고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이 서로 화해하고 친선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고 여겼다. 1159년 하드리아노 4세가 사망하자, 신성 로마 제국에 반감을 품은 대다수 추기경들이 알렉산데르 3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한데 비해, 그는 친 제국 성향의 추기경들과 함께 빅토르 4세를 교황으로 내세웠다.

1164년 4월 20일 빅토르 4세가 루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 해 4월 22일 추기경 2명, 주교 2명, 로마 총독의 입회하에 교황 파스칼 3세로 추대되었다. 4월 26일 루카에서 리에주 주교에 의해 교황으로서 봉헌되었다. 그의 선출과 봉헌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방면 제국 재상이자 뮌헨 대주교였던 다셀의 레이날트에 의해 주도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의 최측근인 레이날트가 교황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파스칼 3세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잘츠부르크의 에버하르트 대주교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대주교들이 파스칼 3세를 받아들여 교황청의 분열을 장기화한 황제의 정책을 비판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1165년 5월 22일 뷔르츠부르크 회의에서 알렉산데르 3세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모든 독일 성직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강요했다. 참석자 대다수는 받아들였고, 알렉산데르 3세를 끝까지 지지한 이들은 영지를 몰수당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167년 말까지 자신의 영토에서 알렉산데르 3세 편에 선 거의 모든 성직자들을 파스칼 3세 지지자들로 교체했다. 하지만 로마는 알렉산데르 3세를 확고히 지지했기 때문에, 파스칼 3세는 비테르보에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1166년 1월 8일 다셀의 레이날트가 주도한 카롤루스 대제성인 시성을 승인했다. 1167년 7월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로 진군했을 때 그를 따라갔다. 제국군이 롬바르드 반란군을 간신히 물리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입성하자, 알렉산데르 3세는 로마의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다가 나중엔 베네벤토로 피신했다. 7월 22일 파스칼 3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봉헌식을 거행했다. 7월 30일 12명이 넘는 주교와 총대주교를 서품했고, 8월 1일에 프리드리히 1세와 베아트리체를 각각 황제와 황후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몇 주 후 로마에서 말라리아가 발생해 프리드리히의 군대가 쇠약해지자, 프리드리히 1세는 급히 독일로 돌아갔다. 이때 2천 명이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다셀의 레이날트도 있었다. 파스칼 3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따라 독일로 가야 했고, 1168년 초까지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로마로 돌아왔지만 롬바르드 반란군이 재차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에 세력을 뻗치는 것을 막아서는 바람에 황제의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는 로마 민중이 이 때를 틈타 봉기를 일으켜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해 안전한 곳에 숨어 지내다가 1168년 9월 20일에 사망했다. 그 후 프리드리히 1세는 갈리스토 3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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