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노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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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06대 교황.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선출되어 아비뇽 유수와 서구 대이교로 대표되는 혼란기를 수습하고 후스파에 맞선 십자군을 선포했다.
2. 생애[편집]
교황령 제니차노 출신으로 로마의 명문가 중 하나인 콜론나 가문 사람이다. 파비아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우르바노 6세 시절에 교황청에 등용되었다. 1405년에는 인노첸시오 7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었고, 1409년에 여러 추기경들과 사제들이 피사 공의회를 열어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와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를 모두 폐위하고 알렉산데르 5세를 추대했을 때 동조했다. 알렉산데르 5세가 선종하고 요한 23세[1] 가 즉위한 후에도 요한 23세를 지지해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로부터 파문까지 당했고, 콘스탄츠 공의회에서도 처음에는 요한 23세 측에서 활동했다가 요한 23세를 통수치고(...) 요한 23세의 폐위에 관여했다.
2.1. 교황[편집]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는 먼저 피사 공의회파의 요한 23세를 폐위시킨 후,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 측과 협상해 자진 퇴위시켰으며[2] ,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를 폐위시켰다.[3] 1417년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공의회는 오도네 콜론나 추기경을 마르티노 5세로 선출하였다. 그는 1417년 11월 13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다음날에 주교 서품을 받았다.
공의회가 폐회된 직후 마르티노 5세는 콘스탄츠를 떠났지만, 곧바로 로마로 돌아오지 않고 피렌체에 장기간 체류하다가 1420년에야 로마로 돌아왔다. 마르티노 5세는 곧바로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고 로마와 교황령을 재건하는데 주력, 로마 시의 성당과 각종 건축물, 다리들의 재건을 지시했고, 명목상 교황령인 로마냐의 제후들을 견제했다. 나폴리 왕국으로 넘어가 있던 베네벤토 지역을 되찾았고, 교회 개혁을 추진했다.
마르티노 5세 즉위 당시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후스파가 세력을 얻고 있었고, 콘스탄츠 공의회는 얀 후스를 이단으로 화형시켰지만 후스파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1419년, 강경 후스파들이 동료 후스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지는 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 발생했고, 사태는 후스 전쟁으로 격화되었다. 교황은 1420년 후스파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선포했고, 전쟁은 에우제니오 4세 시절인 1434년까지 이어졌다.
차기 공의회는 5년 후에 열어야 한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마르티노 5세는 1423년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하기로 했다가 전염병을 이유로 시에나로 옮겨 개최했으나, 파비아-시에나 공의회는 공의회 우위론자들과 교황 우위론자들의 갈등으로 흐지부지된 후 해산되었다. 교황은 7년 뒤인 1431년 2월에 바젤 공의회를 소집했으나, 곧바로 선종했다.
3. 대중문화에서[편집]
-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는 현직 교황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행적은 문서 참조.
-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는 초반부의 교황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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