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스코로파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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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국 1대 헤트만
파울로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즈키[1][2]
Павло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

출생
1873년 5월 15일
독일 제국 헤센나사우 비스바덴
(現 독일 헤센 비스바덴)
사망
1945년 4월 26일 (향년 71세)
나치 독일 바이에른 메튼
학력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관학교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893년 ~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군 육군
1917년 ~ 1918년
최종 계급
중장 (러시아 제국 육군)(우크라이나 인민군 육군)
아버지
페트로 이바노비치 스코로파즈키
어머니
마리야 안드리이우나 스코로파즈카[3]
배우자
올렉산드라 페트리우나 스코로파즈카[4]
자녀
다닐로, 마리야, 옐리자베타, 올레나
참전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4. 퇴위 이후
3. 참고문헌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파울로 스코로파즈키는 자포리자 코자키 가문인 스코로파즈키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의해 수립된 괴뢰국 우크라이나국의 초대 수장이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73년 독일 제국에서 태어난 스코로파즈키는 트로스탸네츠에 있는 아버지 페트로 스코로파즈키의 사유지에서 자랐다. 그는 스타로두프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893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스코로파즈키는 친위 기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2년 후에는 같은 연대의 부관이 되었다. 1897년 12월에는 근위대장의 보좌관이 되었고, 이 시기 모스크바 총독 표트르 두르노보(Пётр Павлович Дурново)의 딸 알렉산드라 두르노보와 결혼했다.

1905년 스코로파즈키는 트란스바이칼 카자크 부대 소속 제2 치타 카자크 연대의 중대 사령관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나중에는 니콜라이 리네비치(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Линевич / Микола Петрович Ліневич, 우크라이나어 표기)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905년 12월에는 니콜라이 2세에 의해 대령으로 승진했다.

1910년 9월 4일에는 핀란드 제20 용기병 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11년 4월 15일에는 친위 기병연대로 재배치되었다. 1912년 12월 6일에는 '황제 폐하의 수행원(Свита Его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Величества)' 연대의 소장으로 승진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편집]


1차대전이 발발하자 스코로파즈키는 러일전쟁 무렵에도 그의 상관이었던 파벨 렌넨캄프(Па́вел Ка́рлович Ренненка́мпф / Paul Georg Edler von Rennenkampf, 독일어 표기)가 이끄는 제1군의 일부인 제1기병근위사단 제1여단의 지휘를 맡았다.

1914년 8월 16일 스코로파즈키는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공 당시 벌어진 크라우피슈켄 근교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덕분에 카우셴 근처에서 연합 기병근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16년 4월 2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제1근위기병사단을 지휘했으며 1917년 1월 22일부터 7월 2일까지는 제34군단을 지휘했다.


2.3. 2월 혁명 이후[편집]


2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자 우크라이나에서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제34군단은 우크라이나 제1군단으로 개편되었고, 1917년 10월 치러진 제1차 자유 코자키 대회에서 스코로파즈키는 명예 오타만으로 임명되었다. 10월부터 11월까지 그의 군단은 포돌리에-폴레시에-바프냐르카-즈메린카-코지야틴-셰페티우카를 잇는 철도를 방어했고, 루마니아 전선을 악착같이 지켜냈다.

1918년 4월 독일 제국군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스코로파즈키를 그들이 수립한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임명했다. 다만 그는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독일의 꼭두각시로 비난받았고 또한 그의 내각이 친러파, 군주주의자, 범슬라브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 지휘관들이 러시아 제국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친러 독재자라는 비난 또한 따라다녔다. 무엇보다 인민공화국이 시도한 토지개혁을 다시 원상복구시켰다는 점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국은 인기가 없었다.

여러 비난에도 불구하고 스코로파즈키의 정부는 혼란스러웠던 초기 인민공화국과는 달리 행정 조직을 개편하고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을 건립했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많은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 했다. 하지만 8월 경 스코로파즈키는 반대파의 강요로 자신이 해체한 시치 소총병대를 재편해야 했으며,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동맹국의 패배로 끝나면서 그의 지위는 위태로워졌고 시몬 페틀류라의 봉기로 인민공화국이 재수립되어 볼로디미르 빈니첸코(Володимир Кирилович Винниченко)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안톤 데니킨의 도움까지 받았음에도 페틀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스코로파즈키는 12월 14일 헤트만 직책을 내려놓았다.


2.4. 퇴위 이후[편집]


헤트만에서 퇴위한 스코로파즈키는 키이우에 숨어 있다 독일군과 함께 독일로 이동했고, 1919년 독일에 망명했다.

스코로파즈키는 바이마르에 거주하며 독일 정부 관료들과 군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나치에 협조하는 것만큼은 거부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유럽 전선이 끝나갈 무렵 그는 소련군을 피해 달아나던 중 4월 16일 레겐스부르크 근교 플라틀링의 메튼 수도원 폭격으로 부상을 당했고 열흘 후인 26일 사망했다. 그는 오베르스도르프에 매장되었다.

스코로파즈키는 헤트만 직책을 내려놓은 이후로도 자신이 적법한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임을 칭하며 헤트만국의 복고를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우크라이나의 군주제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의 장남인 다닐로 스코로파즈키(Данило Павл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가 암살당하고 지지자들이 고령화되면서 1980년대 초반 이후 시들해졌다.


3. 참고문헌[편집]




4. 대중매체[편집]


Hearts of Iron IV의 대체역사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동맹국이 승전국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계속 집권하고 있다. 이벤트와 중점을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계속 집권할 수도 있고 인민공화국 잔당들에 의해 쫓겨날 수도 있으며, 아예 열차 사고로 사망하여 아들 다닐로가 뒤를 이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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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블로'라고 표기되기도 한다.[2] 러시아어: 파벨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즈키(Павел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кий)
독일어: 파울 페트로비치 슈코로파즈키(Paul Petrowitsch Skoropadskyj).
[3] 혼전 성씨는 미클라셰우스카[4] 혼전 성씨는 두르노보였으며 러시아식 이름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코로파즈카(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Скоропадска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