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수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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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백제 제 18대 국왕 전지왕의 처.
2. 생애[편집]
아이부인 진씨와 달리 팔수부인의 출자는 확실치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해씨(解氏) 설[2] 과 일본 귀족 여성이라는 설[3] 이 제기되었다.
25년에 백제의 직지왕이 죽었다[薨]. 이에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어려 야마토(大倭)의 목만치(木滿致)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왕모(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백제기》에서는 “목만치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임나에서 전횡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귀국(貴國)과 왕래하였다. 천조(天朝)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다.”라고 한다.】.
일본서기 오진천황 25년.
일본서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되는데, 414년[4] 전지왕이 사망한 후 구이신왕이 즉위한 후[5] 왕이 어려 목만치가 국정을 잡았다고 한다. 목만치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고 왕에게 무례한 행동들을 했다가 이를 보다못한 오진 덴노이 목만치를 일본으로 소환시켰다는 기록이 있다.[6] 이후의 행적은 불명.
[1] 아신왕의 출생연대를 역산하면 전지왕은 390년대생이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 추정.[2] 전지왕 시기에 해씨들이 대거 기용되었는데, 이 때 기용된 해수(解須)와 해구(解丘)가 왕의 친적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진다.[3]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김현구 교수의 주장이다.[4] 원문은 294년으로 되어있다. 이주갑인상으로 올린 연도다.[5] 삼국사기에 기록된 전지왕의 사망 / 구이신왕의 즉위년도(420년)과 6년이나 차이난다.[6] 천황의 부름을 받고 일본으로 소환했다는 내용은 일본서기의 윤색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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