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라(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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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라를 그린 19세기의 이콘
1. 개요[편집]
9세기 동로마 제국 아모리아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의 황후. 아르메니아계라서 동명이인들과의 구별을 위해 '아르메니아인 테오도라(Theodora the Armenian)'라고 불린다.
대단한 미녀였다고 하며, 테오필로스가 10대의 나이로 단독 황제가 되자 그의 계모 에우프로시나는 830년에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오필로스의 신부 간택을 위해 전국에서 후보를 불러모았고, 여기서 테오도라가 황후로 간택되었다. 테오도라는 황후로 지내며 테오필로스와의 사이에서 미하일 3세 등 7남매를 낳았다. 842년, 테오필로스는 신하 및 관리들에게 아내 테오도라와 아들 미하일 3세의 권리를 지켜달라 말하고선 죽었고, 테오도라는 어린 아들 미하일 3세의 섭정이 되었다.
남편 테오필로스는 물론 세계총대주교까지 성상 파괴주의자였음에도 테오도라는 섭정이 되자 정치력을 발휘하여 843년에 성상 파괴령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성상 파괴파인 파울리키아파를 박해하게 되었고, 박해를 피해 도망친 이들이 동방의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동부 전선의 긴장이 높아지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아들 미하일 3세가 성년이 되자 며느리감을 짝지어 주었으나 미하일 3세는 어머니가 고른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를 맘에 안 들어했으며[1] 점차 어머니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하였다. 결국 미하일 3세는 손위 외삼촌[2] 바르다스와 손잡고 일종의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테오도라를 실각시켰다. 856년 3월, 미하일 3세는 자신을 단독 황제로 선포하고 모친 테오도라의 아우구스타 지위를 박탈했다.
테오도라의 사후 그녀의 유해는 코르푸에 안치되었는데, 4차 십자군으로 콘스탄티노플 시내의 영묘들이 모두 파괴돼 버려 시신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는 소수의 황제 및 황후 중 한 명이 되었다.
2. 여제 설[편집]
현대 역사가들은 테오도라를 단순한 섭정 황태후가 아니라 여제로 보기도 한다. 테오도라의 통치 첫해에 발행된 동전의 앞면에는 테오도라만 단독으로 새겨지고 미하일 3세는 뒷면에 테클라와 같이 그려진 점, 테오도라의 통치 초기에 나온 황제의 옥새에 테오도라, 미하일 3세, 테클라 셋 다 '황제'라는 남성형 칭호로 칭해진 점 등이 증거로 제시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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