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왕위 계승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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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ege_of_Danzig_1734.png
단치히 포위전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영향



1. 개요[편집]


대홍수 이후 쇠퇴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결정타를 가한 전쟁이자 폴란드 분할의 서곡.

폴란드의 왕위 계승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결국 프랑스의 독일 침공과 오스트리아의 반격 등으로 대부분의 전투는 폴란드 밖에서 벌어진 전쟁. (1733 ~ 1735년)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부르봉 왕조 (스페인 - 파르마 공국), 프랑스 왕국, 스웨덴, 사르데냐 왕국 VS 아우구스트 3세합스부르크 왕조 (신성로마제국 -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작센의 구도로 진행되었다.

전쟁은 2년도 안되어 중단되었으며, 프랑스의 영토 확장과 아우구스트 3세의 즉위로 귀결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738년의 빈 조약으로 마무리 되었는데, 라틴어로 쓰여진 마지막 조약이다. 이후로는 프랑스어가 유럽의 외교 공용어가 된다.


2. 배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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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1702 ~ 1713년)과 루이 14세의 죽음 이후 오스만 제국을 괴롭히며 재미를 보던 열강들 (오스트리아, 러시아, 베네치아)은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장성하자 다시 프랑스 견제에 나서게 된다.

한편, 폴란드에서는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죽자 의회에서 새로운 왕을 선출했고, 이미 폴란드 왕위에 오른 적 있는 루이 15세의 장인인 스타니스와프 1세가 프랑스의 지지를 얻어 폴란드 왕이 되었다. 이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스타니스와프 1세에 의해 폴란드가 프랑스와 손잡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적자인 아우구스트 3세의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아우구스트 3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스타니스와프 1세가 왕위에 오른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했다.


3. 전개[편집]





4. 영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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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년 10월 3일 양측의 모든 적대행위가 중지되었으며 동년 11월 18일 양 세력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빈 조약을 체결하면서 폴란드 왕위 계승전쟁이 종결되었다.

우선 불리한 상황에 몰렸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빈 조약에서 폴란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트 3세의 폴란드 왕위 즉위를 인정했고 아우구스트 3세는 계속해서 폴란드 왕으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홍수를 겪고 얀 3세 소비에츠키의 중흥기 때 잠시 세력을 회복한 이후 대북방전쟁-폴란드 왕위 계승전쟁이라는 연속 재앙 크리를 겪으면서 완전히 황폐화된 폴란드는 아우구스트 3세의 후원자인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서서히 쇠퇴하다가 1772년에서 1795년까지 3번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인해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져 멸망하게 된다.

폴란드 왕위를 잃은 스타니스와프는 대신 로렌을 영지로 받았다. 전쟁이 끝날 당시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합스부르크 제국의 차기 계승자인 마리아 테레지아 간에 혼담이 오가고 있었는데 프랑스는 자기 영토 코앞에 벨기에에 이은 또다른 합스부르크 영지가 생기는 것을 결사반대하고 나섰고 프랑수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혼인 승인 조건으로 로렌을 요구했다. 졸지에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빼앗기게 된 프랑수아는 처음에는 반대하였으나[1] 유럽 대륙 내 두 열강의 암묵적 합의에다가 약혼자의 공손한 태도[2]로 인해 울며 겨자먹기로 로렌을 내놓아야 했다. 프랑수아에겐 대신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가 사망하면서 공위 상태가 된 토스카나 대공국이 영지로 주어졌으며 프랑수아 대신 로렌 공작으로 부임한 스타니스와프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766년 그가 사망한 후 로렌은 프랑스의 일부로 합병되었다.

스페인의 경우 펠리페 5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공의 영지인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을 오스트리아에게 양도하고 카를로스의 토스카나 대공 주장을 포기했다. 대신 나폴리시칠리아가 카를로스 공에게 주어지면서 아버지 펠리페 5세가 사망할 때까지 카를로스 공은 나폴리 및 시칠리아 국왕으로 재위했다.

또한 이 조약으로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국사조칙을 승인하지 않고 있던 프랑스마저 국사조칙을 승인하였고 이로서 카를 6세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버지의 영지를 모두 물려받는 것이 확정된 듯 으나...


[1] 훗날 처제랑 결혼하게 될 프랑수아의 동생 샤를은 출세할 기회에 영지를 팔아먹자고(?) 적극적으로 나섰다.[2] 죄책감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서명하기 직전 깃털펜을 세 번이나 내던졌으나 그 때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공손하게 주워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