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보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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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


파일:Peterbonetti1.jpg

이름
피터 보네티
Peter Bonetti
본명
피터 필립 보네티
Peter Phillip Bonetti
출생
1941년 9월 27일
잉글랜드 런던 푸트니
사망
2020년 4월 12일 (향년 78세)
국적
[[영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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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잉글랜드|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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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신체
177cm
포지션
골키퍼
선수
유스
워딩 FC
프로
첼시 FC (1960~1975)
세인트 루이스 스타스 (1975)
첼시 FC (1976~1979)
던디 유나이티드 (1979)
워킹 FC (1986)
국가대표
7경기 (잉글랜드 / 1966~1970)

1. 개요
2. 선수생활
2.2. 그이후, 은퇴
2.3. 국가대표




1. 개요[편집]


내가 지금까지 본 세계 최고의 골키퍼 세 명은 고든 뱅크스, 레프 야신, 피터 보네티이다.

펠레 #


피터 보네티는 첼시의 전설적인 골키퍼로, 첼시의 역대 골키퍼 중 최다 출전기록과 전체 선수 출전기록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안정감있는 세이브와 그의 우아한 스타일로 고양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선수이다.

2. 선수생활[편집]


1948년에 도착한 스위스 이민자 출신 집안이며 그의 부모님은 런던에서 서섹스의 워딩으로 이사해 워딩 돔의 바닷가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했고, 어렸을 때부터 눈에 띄는 인재였기에 지역팀인 워딩 FC에서 유소년 클럽에 몸담았다.

2.1. 첼시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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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에서 들어올린 1970 FA컵 우승컵과 함께

도중 테드 드레이크 감독에 눈에 띄어 첼시와 싸인하게 되고 첼시의 수문장이 되어 바비 탬블링,론 해리스,앨런 해리스.피터 오스굿 등의 선수들과 함께 60년대 초반의 성공에 기여하게되지만 토미 도허티와의 다른 선수들간의 불화 등으로 주목받던 때에 비해 많은 트로피는 따내지 못한다.

그 후 첼시의 재정적 악화로 NASL의 세인트 루이스 스타스로 자유계약을 통해 떠나가지만 반시즌만에 동료였던 새 감독 에디 맥크레디의 세대교체를 도우며 팀이 승격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1979년 5월 아스날과의 1:1 무승부를 기록한 것을 끝으로 729경기 출전 200번의 클린시트를 이뤄냈으며 그가 치룬 첼시의 경기중 2/3에서 1골 이하로 실점하는 등 준수한 기록을 세우며 첼시에서의 기록은 막을 내렸다.

2.2. 그이후, 은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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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스코틀랜드의 던디유나이티드, 2부리그의 웍킹에서도 잠깐 몸담았으나 오래 뛰진 못하고 은퇴하였다. 은퇴 후 친정팀 첼시를 비롯해 뉴캐슬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 FC, 풀럼 FC,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등에서 골키퍼 코치 생활을 했다. 2020년 78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3. 국가대표[편집]


아쉬운 신장(177cm)도 신장이지만 더 아쉬운 건 잉글랜드의 골키퍼 황금세대에 태어난것이었다. 특히나 고든 뱅크스의 위용에 밀려 7경기만 출장하는데 그쳤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 소집되었으나 출전하진 못하였으나 축구협회가 피파를 설득해서 다행히 메달은 받았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도 소집되었고 고든 뱅크스에 또 밀리다가 서독과의 8강전 뱅크스의 식중독 증상으로 인해 대신 출전했으나 실책성 플레이와 함께 연장 끝에 3:2로 역전패하자 탈락의 원흉으로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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