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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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비 초대 국왕
Hermeric | 헤르메리크
제호
한국어
헤르메리크
라틴어
Hermeric
생몰 년도
미상 ~ 441년
재위 기간
406년 ~ 438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수에비 왕국 초대 국왕.


2. 행적[편집]


411년경, 수에비족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의 갈리시아에 아스딩 반달족과 함께 정착했다. 416년~418년, 서고트 왕국의 군주 왈리아콘스탄티우스 3세가 이끄는 로마군과 함께 베티카로 진군하여 실링기아 반달족을 물리친 뒤 그들의 왕 프레디발을 체포하여 호노리우스 황제에게 압송했으며, 뒤이어 알란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왕 아다크를 주살했다. 이에 실링기아 반달족과 알란족은 반달 왕국군데리크에게 귀순했고, 로마는 작전을 도와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서고트족을 아키텐에 정착시켰다. 이러한 상황에 위협을 느낀 수에비족은 419년 헤르메리크를 지도자로 세웠다.

419~420년, 아스딩 고트족이 네르바스 산에서 수에비족을 포위했다. 하지만 420년 히스파니아의 사령관 마우로켈루스가 서고트족과 연합하여 반달 왕국을 압박해오자, 군데리크 왕은 아스딩 고트족에게 포위를 풀고 자신을 돕게 했다. 이리하여 아스딩 고트족이 로마-서고트 연합군에 맞서 반달군과 연합하고자 이동한 뒤, 수에비족은 헤르메리크의 지도하에 갈리시아 대부분을 장악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세웠다.

세비야의 이시도르에 따르면, 수에비족은 갈리시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갈리시아의 일부 지역만이 요새에 의존하여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브라카라 아우구스타(현 브라가)는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고, 수에비족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여기에 아스토르가와 루고 역시 귀순했고, 수에비족은 브라가, 아스토르가, 루고 시와 그 주변 마을에 주로 거주했다. 학자들은 당시 수에비족의 인구가 25,000~35,000명이며 전사는 8,000~9,000 명 이하였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시도르에 따르면, 수에비족보다 몇 배 많은 현지 로마인들은 노예 취급 받으며 비참한 삶을 연명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라를 세운 뒤 갈리시아에서 잠자코 지내던 헤르메리크는 반달족이 429년에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 아프리카로 이주하자 430년부터 정복 전쟁을 단행했다. 431년 아쿠아 플라비아(현재 샤베스 시)의 주교 이사키우스는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찾아가서 수에비족의 잔혹한 파괴와 약탈 행위를 설명하며 군대를 보내 이들을 막아달라고 간청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 켄소리우스를 수에비 왕국에 사절로 보내 더 이상의 적대행위를 벌이지 말라고 요구했고, 헤르메리크는 로마의 개입을 우려해 그 말에 따랐다.

그러나 아에티우스는 갈리아의 분쟁에 얶매여 있던 터라 이베리아 반도 로마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헤르메리크는 휴전 협약을 깨고 주변 일대에 대한 습격을 이어갔다. 437년 켄소리우스가 다시 사절로 와서 수에비족으로부터 무력 행위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사절이 돌아가자 재차 습격을 이어갔다. 그러다 438년 중병에 걸리자 아들 레칠라를 왕으로 옹립하고 퇴위했다. 이사키우스 주교는 441년경 헤르메리크를 여전히 왕이라고 불렀는데, 이로 볼 때 441년까지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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