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케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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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ke II.a Albretekoa
가문
알브레 왕조
생몰년도
1503년 4월 18일 ~ 1555년 5월 25일
출생지
나바라 왕국 상궤사
사망지
나바라 왕국 하게마우
재위
기간
나바라 왕국 국왕
1517년 - 1555년
아버지
호아네스 3세
어머니
카탈리나
형제
아나, 마걀렌, 카탈리나, 호아나, 퀴테리아, 안드레스 페부스, 부에나벤투라, 마르틴, 프란치스코, 카를로스, 이사벨
배우자
앙굴렘의 마르그리트
자녀
호아나 3세, 호아네스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나바라 왕국 34대 국왕.


2. 생애[편집]


1503년 4월 18일 나바라 왕국 상궤사에서 나바라 국왕 호아네스 3세와 나바라 여왕 카탈리나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아나, 마걀렌, 카탈리나, 퀴테리아, 안드레스 페부스, 부에나벤투라, 마르틴, 프란치스코, 카를로스, 이사벨이 있었다. 그는 나바라 부부왕의 성년까지 살아남은 자식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이었기에 일찌감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 그러나 1512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이자 카스티야 여왕이자 아내였던 이사벨 1세 사후 카스티야 왕국의 섭정을 맡던 페르난도 2세의 침공으로 피레네 산맥 이남의 나바라 본토가 아라곤 왕국에 넘어가버렸고, 오직 피레네 산맥 이북의 나바라 영토와 부모가 조상대부터 가지고 있던 영지들만이 남았다.

1516년 아버지 호아네스 3세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다가 실패한 뒤 모레닌으로 철수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고, 1517년 어머니 카탈리나도 사망하면서 그가 나바라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 외에도 베른, 푸아, 비고라, 리바고르자,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투르산, 가바르단, 타르타스, 리모주 일대를 상속받았다. 하지만 아직 14살밖에 안 됐기에, 큰누나 아나가 몇 년간 섭정했다. 1521년, 성년이 된 헨리케는 부모대에 잃어버린 나바라 본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나바라인들은 1515년 페르난도 2세가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에 병합하기로 한 이래 아라곤 관리들의 직접 통치를 받으면서 각종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고, 자연히 강한 불만을 품었다. 과거에 아라곤 왕국 편을 들며 아라곤 왕국이 피레네 이남의 나바라 전역을 공략하는데 큰 도움을 줬던 보몽 가문 역시 정작 자신들에게 별다른 보답을 하지 않고 정치에서 소외시킨 것에 분노했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카를 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별 관련이 없는 자신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것에 분노한 주민들의 반란이 터졌고, 자연히 옛 나바라 왕국에 대한 당국의 관심이 떨어졌다. 헨리케는 이런 상황에서 나바라 왕국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걸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1521년 봄, 레스파레 영주 앙드레 드 푸아가 지휘하는 군대가 헨리케의 명령을 받들어 원정을 단행했다. 원정군은 나바라인, 가스코뉴인, 프랑스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병력 규모는 보병 12,000명, 기마 기사 800명, 대포 29문이었다. 이들은 생장피에드포르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나바라 본토에 진입했다. 이후 대다수 나바라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순조롭게 행군해 5월 19일 팜플로나에 입성했고 뒤이어 리자라, 타팔라 등 나바라 대부분을 장악했다. 앙드레는 여세를 몰아 카스티야로 진격해 로그로뇨를 포위했다.

그러나 카를 5세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이니고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가 25,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뒤 나바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앙드레는 6월 11일 로그로뇨 공략을 포기하고 나바라로 철수했다. 6월 30일, 나바라의 부왕 나헤라 공작이 지휘하는 부대까지 합해 3만 이상으로 늘어난 스페인군은 팜플로나와 에스퀴로즈 사이의 넓은 평원에서 앙드레의 군대와 맞붙었다. 앙드레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임에도 과감하게 선제 공격을 가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파드리케 엔리케스가 이끄는 카스티야 기병대가 후방을 요격하면서 전세가 기울었고, 결국 나바라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낸 후 항복했다. 앙드레는 눈에 상처를 입은 채 체포되었다가 헨리케가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났다.

헨리케는 이후에도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해 영토 탈환을 시도했지만, 1521년 9월 아말이우 성을 점령하고 1521년 10월 18일 온다리비아를 공략해 바즈탄 계곡을 장악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22년에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보낸 지원군과 함께 나바라 탈환에 착수했지만, 그 해 6월 30일 산 마르시알 전투에서 알부르케르케 공작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이끄는 스페인 민병대의 기습 공격에 완패했다. 1522년 7월, 레링고 백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아말이우 성을 탈환했다.

1523년 10월 9일, 카를 5세는 친히 팜플로나에 입성한 뒤 나바라 왕국이 스페인의 일부임을 선언했다. 그 해 가을, 오랑주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스페인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리푸르댕, 하 나바르, 베른 일대를 파괴해 헨리케가 다시는 나바라 왕국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못하게 만들었다. 나바라인들은 이후에도 저항을 이어갔지만, 1524년 2월 푸엔테라비아 성에 포위된 저항군이 항복한 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헨리케는 자기 힘으로는 카를 5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프랑스 왕국의 후원을 좀더 얻기로 했다. 그러려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신임을 얻어야 했기에,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참패를 막지 못하고 프랑수아 1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2년 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본거지로 귀환한 헨리케는 1527년 앙굴렘 백작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후손인 샤를의 딸이며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이기도 한 마르그리트와 결혼해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려 했다.

1528년 여름, 헨리케의 동생 카를로스와 아그라몽 가문의 가주 호아네스가 이끄는 나바라군이 나폴리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스페인군에게 궤멸되었고, 카를로스와 호아네스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후 1529년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간에 캉브레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더 받기 어렵게 되자, 그는 무력으로 나바라 왕국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단념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영토의 통치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530년 카를 5세가 전략적인 이유로 생장피에드포르, 생팔레, 바스티다에서 병력을 철수시키자, 그는 즉시 그곳에 군대를 이동시키고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베른 인근 포 지역에 본성을 세웠으며, 1538년에서 1546년 사이에 나바렌고세에 대포를 견딜 수 있는 성채 요새를 건설했다.

한편, 헨리케는 결혼 정책을 통해 상 나바라를 회복하기로 하고, 딸 호아나를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이 그렇게 했다가는 알브레 가의 영토가 스페인의 손에 넘어가서 자국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이를 막았다. 결국 호아나는 펠리페 왕자가 아닌 부르봉 가문의 앙투안과 결혼했다. 1553년 12월 13일 포에서 헨리케의 손자 헨리케가 태어났고, 나바라 왕국의 관습에 따라 즉시 비아나 공으로 지명되었다.

1555년 5월 25일, 헨리케는 하게마우 마을에서 사망했고 레스카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딸 호아나와 사위 앙투안이 각각 호아나 3세안토니오로서 나바라 공동 왕이 되었다.


3. 가족 관계[편집]


  • 앙굴렘의 마르그리트(1492 ~ 1549): 앙굴렘 백작 샤를의 장녀. 프랑수아 1세의 누나.
    • 호아나 3세(1528 ~ 1572): 나바라 여왕.
    • 호아네스(1530년 7월 7일 ~ 12월 25일):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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