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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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 왕국 제26대 국왕
호아나 2세
Joana II.a Nafarroakoa

가문
카페 왕조
생몰년도
1312년 1월 28일 ~ 1349년 10월 6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지
나바라 왕국 팜플로나
재위기간
나바라 왕국의 국왕
1328년 ~ 1349년
아버지
루이 10세
어머니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
형제
장 1세
배우자
필리페 3세
자녀
호아나, 마리아, 루이스, 블랑슈, 카를로스 2세, 필리페, 아녜스, 루이스, 호아나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나바라 왕국 26대 여왕.


2. 생애[편집]


1312년 1월 28일 프랑스 왕국의 수도인 파리 궁정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장남 루이 왕자와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마르그리트의 장녀로 출생했다. 프랑스어 이름은 잔(Jeanne)이며 잔느로 표기되기도 한다. 아버지 루이가 현 나바라 국왕이며 서유럽에 손꼽히는 강대국인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있었기에 잔느는 평탄한 삶을 살아갈 듯했다. 그러나 1314년 일명 '넬탑 사건'이라 명명된 심각한 스캔들이 프랑스 궁정에 들이닥치면서 잔느의 운명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보다 앞선 1313년 필리프 4세의 딸이자 루이 왕자의 여동생이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인 프랑스의 이자벨이 친정에 방문해 형제들인 루이, 필리프, 샤를에게 비단 주머니를 선물했다. 세 형제는 자기 아내들에게 이 주머니를 전달했는데 필리프의 아내인 부르고뉴 여백작 잔 2세는 이를 소중하게 보관했지만, 루이 왕자의 아내 마르그리트와 샤를의 아내 블랑슈는 넬탑에서 밀회를 즐기던 내연남 필리프 드 오네이와 고티에 드 오네이 형제에게 비단 주머니를 선물했다.

오네이 형제는 그 비단 주머니를 허리에 찬 채 이자벨이 있는 연회에 참석해 모두에게 과시했다. 이자벨은 이 광경을 보고 아버지 필리프 4세에게 자신이 루이와 샤를에게 줬던 비단 주머니가 오네이 형제에게 넘어간 것은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니 조사해달라고 청했다. 필리프 4세는 즉각 두 형제를 비밀리에 체포한 뒤 심문한 끝에 사건의 전모와 며느리들의 불륜을 밝혀냈다. 오네이 형제는 마르그리트와 블랑슈가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져 사형당했고, 간통을 저지른 죄로 마르그리트와 블랑슈도 삭발을 당한 뒤 함께 가이야르 성(Château Gaillard)에 감금되었다.

1314년 11월 필리프 4세가 사망한 후 루이 왕자가 루이 10세로 즉위하면서 마르그리트도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지만, 아내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루이 10세는 마르그리트가 가이야르 성에서 계속 갇혀있게 내버려뒀다. 결국 감옥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던 마르그리트는 1315년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1] 그후 루이 10세는 나폴리 왕국의 왕자이자 헝가리의 명목상 국왕인 카로이 마르텔의 딸 클레망스[2]와 결혼했다.

1316년 6월 루이 10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클레망스는 출산을 몇 달 앞두고 있었다. 루이 10세가 생전에 유일하게 낳았던 잔느는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간통남 필리프 드 오네이의 딸이라는 소문에 휩싸여 있었기에, 클레망스는 친자식이 아닌 그녀가 프랑스 여왕이 되는 것을 막았다. 1316년 11월 15일 클레망스의 아들 장 1세가 출생 직후 프랑스 국왕이 되었지만, 불과 5일 만인 11월 20일에 사망했다.

이에 클레망스는 잔느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루이 10세의 동생 필리프가 막아섰다. 필리프는 살리카법을 확대 해석해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로 등극했다. 클레망스는 교황 요한 22세와 나폴리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교황청은 당시 아비뇽 유수를 치르고 있는 터라 프랑스 왕실을 거스르기 힘들었고, 나폴리 국왕 로베르토시칠리아 왕국, 기벨린 파(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지지하는 이탈리아 정파)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터라 그녀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 귀족들 역시 잔느가 필리프 드 오네이의 딸이라고 의심했기에 필리프 5세의 즉위에 승복했다. 결국 클레망스는 대세를 바꾸지 못하고 프랑스 궁정을 떠나 엑상프로방스에 은거했다.

살리카법은 나바라 왕국의 법률에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잔느의 외할머니인 부르고뉴 공작부인 아녜스(Agnès)[3]와 잔느의 외삼촌인 외드 4세는 잔느를 나바라 왕국의 여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필리프 5세가 나바라 왕위마저 자기 것으로 삼는 바람에 실패했다. 아녜스는 필리프 5세가 나바라 국왕 대관식을 치르는 것에 항의하는 편지를 프랑스의 여러 영주들에게 보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외드 4세는 다른 편지에서 잔느가 정당한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은 관습적이고 신성한 법적 권리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318년 3월 27일, 외드 4세는 필리프 5세와 협상한 끝에 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다면 브리와 샹파뉴 백국은 잔느에게 승계되기로 합의했다. 또한 외드 4세는 필리프 5세의 딸 잔느(부르고뉴 여백작 잔 3세)와 결혼하고, 루이 10세의 딸 잔느는 에브뢰 백작 루이의 아들이자 본인의 오촌 숙부인 필리프[4]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1318년 6월 18일, 잔느는 6살의 나이에 12살의 필리프와 결혼했다. 그후 잔느는 필리프의 할머니인 브라반트의 마리에게 양육되었다.

1322년 필리프 5세가 사망했을 때 딸만 여럿 낳았을 뿐 아들을 두지 못했기에 동생 샤를 4세가 프랑스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그 역시 1328년 2월 1일에 남자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잔느는 남편 필리프와 함께 프랑스 왕위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세력은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에 비할 바 아니었기에 프랑스 왕이 될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잔느와 필리프 부부는 나바라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필리프 6세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국, 에브뢰 백국이 통합된다면 프랑스 국왕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필리프 6세는 과거 외드 4세와 필리프 5세가 약속한 대로 브리와 샹파뉴 백국을 잔느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에, 코탕탱 반도의 일부인 모르탱, 벡생, 퐁투아즈, 보몽 쉬르 우아즈, 아스니에르 쉬르 우아즈를 넘겨주기로 했다. 이때 앙굴렘 역시 양도하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죽을 때까지 앙굴렘을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합의를 이룬 후, 잔느와 필리프는 쉴리의 영주 앙리 4세와 필리프 드 멜룬을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해 통치를 대행하게 했으며, 통치 권한을 놓고 나바라 왕국의 귀족들과 긴 협상을 벌였다. 나바라인들은 잔느를 여왕으로 받드는 데엔 동의했지만, 지금까지 나바라 왕국과 별 관련이 없던 에브뢰 백작 필리프까지 왕으로 추대하는 것엔 주저했다. 하지만 잔느가 총독들을 통해 남편 역시 공동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들은 1328년 11월 론체스발레스에서 열린 나바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놓고 협의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필리프를 공동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다만 새 군주가 방패에 오르거나 군중에게 돈을 던지는 등, 대관식의 모든 전통적인 요소들은 오직 잔느만 수행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다.

1329년 초 나바라로 향한 잔느와 필리프는 3월 5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각각 '호아나 2세'와 '필리페 3세'로서 나바라의 공동 왕으로 등극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나바라 통치에 긴밀하게 협력했다. 두 사람의 통치 기간 동안 발효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85개의 왕실 법령 중 41개의 문서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호아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법령은 38개였고, 필리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문서는 6건이었다.

한편, 호아나와 필리페가 나바라 귀족들과 장기간 협의하고 있던 사이에 팜플로나에서 반 유대 폭동이 벌어져 많은 유대인이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을 마무리한 뒤 폭동 주모자들을 처벌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또한 왕궁의 요새들을 수리하고 카스텔레노에 새로운 성을 세웠다. 투델라 주변의 건조한 들판을 관리하는 관개체계도 두 사람의 지원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두 사람은 아라곤, 카스티야 왕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1329년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4세의 아들 페로(훗날 페로 4세)와 맏딸 호아나와의 약혼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1330년 3월 15일 살라망스에서 카스티야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호아나와 페드로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1336년 두 번째 딸 마리아와 페드로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혼 동맹이 맺어졌다.

부부왕은 1331년 9월 나바라 왕국을 일시적으로 떠나 각자의 영지를 관리했으며, 프랑스 총독들이 그들을 대신해 나바라 왕국을 관리헀다. 1335년 카스티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지만 규모는 크지 않았고, 1336년 2월 28일 평화 협약이 재차 체결되었다. 1336년 4월, 두 사람은 나바라로 돌아와서 1337년 10월까지 직접 통치를 행사했고, 이후에는 다시 프랑스의 영지로 돌아갔다. 필리페는 몇년 후에 나바라로 이동했지만, 호아나는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1343년 9월 필리페 3세가 그라나다 토후국을 상대로 원정을 떠났다가 알헤시라스 공방전에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팜플로나로 옮겨졌고, 심장은 파리로 이송되어 쿠벵 드 자코뱅에 안장되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호아나는 나바라 총독 필리프 드 멜룬을 기욤 드 브라헤로 교체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기욤 드 브라헤를 해임하고 장 드 콩플랑스를 선임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호아나는 나바라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는 백년 전쟁 동안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가 잉글랜드군에게 침략당할 위험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전쟁 초기에는 필리프 6세를 지지했지만,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연전연패하자 1346년 11월 에드워드 3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를 더는 적대하지 않았다. 1349년 10월 6일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심장은 남편의 심장이 안장된 쿠벵 드 자코뱅에 합장되었다. 사후 아들 카를로스 2세가 나바라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편집]


  • 필리페 3세(1306 ~ 1343): 나바라 국왕.
    • 호아나(1326 ~ 1387): 아라곤 왕자 페로(훗날 페로 4세)와 혼사가 오갔으나 성사되지 못했고, 나중에 롱샹의 프랑치스코회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
    • 마리아(1329~ 1347):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왕비.
    • 루이스(1330 ~ 1334): 요절
    • 블랑슈(1331 ~ 1398):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왕비.
    • 카를로스 2세(1333 ~ 1387): 나바라 국왕.
    • 필리페(1336 ~ 1363): 롱그빌 백작. 프랑스 국왕 1353년 장 2세를 축출하고 프랑스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 아녜스(1334 ~ 1396): 푸아 백작 가스통 3세의 부인.
    • 루이스(1341 ~ 1372): 보몽레로제 백작
    • 호아나(1342 ~ 1403): 로앙 자작 장 1세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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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식적인 사인은 독감이지만 재혼하려는 루이 10세에게 암살당했다는 음모론도 존재한다.[2] 헝가리어 이름은 '클레멘치어(Klemencia)', 프랑스어 이름은 '클레망스(Clémence)'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3] 영어로는 '아그네스', 프랑스어로는 '아녜스'로 발음하는 이름이다.[4] 아버지 루이 10세의 사촌. 필리프의 아버지 에브뢰 백작 루이와 잔느의 할아버지 필리프 4세가 이복형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