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오 2세(대립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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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호노리오 2세(Honorius II)
세속명
피에트로 카달로(Pietro Cadalo)
출생지
베로나
사망지
파르마
생몰년도
1009년 ~ 1072년
재위기간
1061년 ~ 1072년
1. 개요
2. 행적



1. 개요[편집]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편집]


1009년 베로나에서 출생했다. 1046년 파르마의 주교로 발탁되었으며, 1034년 7월 31일 부제에 선임되었다. 1061년 7월 교황 니콜라오 2세가 사망하자, 추기경들은 교회 개혁 정책을 추진하던 힐데브란트[1]의 주도 아래 알렉산데르 2세를 새 교황에 선출했다. 그러나 개혁 운동에 반대하는 주교들과 독일 및 롬바르디아 출신 인사들이 이에 불복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아그네스 황후의 주도로 바젤에 집결했고, 그 해 10월 28일 알렉산데르 2세가 성직매매를 저질렀다고 규탄하고 교황 폐위를 선언한 뒤 카달로를 교황 호노리오 2세로 선출했다.

1062년 봄, 호노리오 2세는 아그네스 황후와 독일 및 롬바르드 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알바 주교 벤조도 신성 로마 제국의 사절로서 그의 대의를 지지했다. 호노리오 2세는 3월 25일 수트리에 들어갔고, 4월 14일 산탄젤로 성 바로 북쪽의 프라토 네로니스에서 알렉산데르 2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 경내를 점거했다. 그러나 로마 시에 입성하는데 실패했고, 며칠 후 로렌 공작 고드프리 3세가 알렉산데르 2세를 지원하기 위해 접근해오자 플라야눔 요새로 철수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노스 10세가 보낸 사절들로부터 교황으로 인정받은[2] 그는 파르마로 돌아가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추가 병력을 지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신성 로마 제국 궁정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쾰른 대주교 아노가 섭정직을 장악했고, 아그네스 황후는 피에몬테에 있는 프루투아리아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아노는 1062년 10월 아우크스부르크 공의회를 소집한 뒤 알렉산데르 2세에게 제기되었던 성직매매 혐의를 재조사하게 했다.

1063년 할버슈타트의 주교이자 아노 2세의 조카인 부르차드 2세는 알렉산데르 2세에게 걸린 혐의가 근거없다고 보고했고, 아노 2세는 호노리오 2세 지지를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이에 알렉산데르 2세는 즉각 호노리오 2세를 파문에 처했다. 하지만 호노리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파르마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자신은 로마 귀족으로서 독일왕에 의해 선택되었지만, 알렉산데르는 모든 로마 성직자나 로마 시민에게 선택되지 않고 단지 추기경 몇명이 밀실에서 결정했으며, 로마인들의 적인 노르만족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교황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의회가 끝난 뒤 군대를 모집해 로마로 진격하여 산탄젤로 성에 자리잡고 알렉산데르 2세와 로마의 패권을 놓고 1년간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노르만족의 지원을 받은 알렉산데르 2세가 승기를 잡자, 호노리오 2세는 파르마로 철수한 뒤 그곳에서 미사를 거행하고, 서품을 집전하고, 교서와 사도 서한을 발행하는 등 교황직을 계속 수행했다. 1064년 5월 31일 만토바 공의회가 공식적으로 알렉산데르 2세가 베드로의 합법적인 후계자라고 선언했지만, 그는 1072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파르마에서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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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교황 그레고리오 7세[2] 당시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남부의 제국 영토를 침략하는 노르만족과 연계한 알렉산데르 2세를 적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