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소카와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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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리 성명 옆 (1, 2...) 표시는 총리의 중임으로 조성된 내각의 회차를 말한다.
* (개), (1개, 2개...) 표시는 총리가 국무대신 (장관)의 교체를 목적으로 다시 조성한 개조내각을 말한다.





헤이세이 시대
호소카와 내각

細川内閣 | Hosokawa Cabinet

출범 이전
이후
미야자와 개조내각
하타 내각
}}}
내각총리대신
호소카와 모리히로 / 제79대 (초대 일본신당 대표, 제40대 중의원 의원)
부총리
하타 쓰토무 / (제116대 외무대신, 제32~40대 중의원 의원)
여당


연립여당













파일:호소카와 내각.jpg
▲ 호소카와 내각 출범 기념사진

1. 개요
2. 성립 과정
2.1. 시작부터 예정된 파열
3. 총리 지명 투표



1. 개요[편집]


55년 체제 이후 38년만에 출범한 비자민 내각으로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의해 자민당의 단독 과반이 무너지자 공산당을 제외한 야7당이 연합하여 출범한 연립내각이였다.

2. 성립 과정[편집]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결과 55년 체제 성립 후 처음으로 자민당의 단독 과반이 무너졌다. 물론 여전히 223석(43.6%)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민당은 탈당파 신당인 신생당[1] 내지 신당 사키가케[2]를 설득해 연립 정부 구성을 구상에 두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민당은 정권을 잃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제1야당 역할을 도맡아 왔던 사회당 역시 '신당 붐'의 영향을 받아 의석이 크게 감소한 상황이었기 때문.

하지만 바로 그 신생당의 간사장이었던 오자와 이치로가 움직이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오자와는 사회당, 민사당, 공명당, 사회민주연합, 민주개혁연합과 함께 연립 정권을 수립하기로 1차적으로 합의한 뒤 별도로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의 통일회파에 접촉했다. 즉 이 시점까지는 일본 정계가 자민당 / 신생당 중심 6개 단일 회파 / 일본신당-사키가케 단일회파인 3개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던 셈이다.

선거 직후 상황
자민당
오자와 그룹
일본신당-사키가케
223석 (43.6%)
195석 (38.2%)
48석 (9.4%)
의원정수 : 511석
일본신당-사키가케 측에서는 자민당과 오자와 회파 양측과 모두 협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오자와가 달콤한 제안을 날리는데 바로 일본신당 호소카와 모리히로 대표의 총리 추대였다. 일본신당-사키가케 측에서는 자민당과 협상할 경우 연립여당 지위에 만족해야하지만 오자와와 손을 잡을 경우 총리를 배출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 결국 오자와와 손을 잡고 함께 비자민-비공산 연립정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한다.

오자와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는데 국민들에게 자민당과 같이 심판받은 사회당이나 다나카 가쿠에이의 수제자로 정치 기술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본인이 전면에 나서는 것보다는 총선에 앞서 정계 개편 및 정치 개혁의 선구자로서 지닌 국민적 인기와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손자로 명문가인 호소카와 가문의 일원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일종의 얼굴 마담으로 전면에 나서주는 것이 연립 정부 운영에는 더 나았기 때문.

이후 각료 배분 문제가 있었으나 각 당의 당수가 내각에 모두 참여하고 연립 정부 운영 역시 각 당 간사장으로 구성된 대표회의를 구성해 이뤄나가기로 하면서 비교적 무난하게 문제가 해결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회당의 야마하나 사다오 위원장이 내각 구성 협상을 마무리한 뒤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고[3] 뒤이어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새롭게 위원장이 되었는데 무라야마 위원장은 내각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면서 시작부터 분열의 가능성을 안고 출범하게 되었다.

2.1. 시작부터 예정된 파열[편집]


사실 오자와 그룹에 참여하긴 했지만 연립정부 구성 과정에서 사회당의 불만이 적지 않았는데 어쨌든 야당 중 최다 의석[4]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각료 배분에서 별로 배려를 받지 못했고, 특히 오자와 이치로가 협상 과정에서 사회당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했기 때문. 대신 오자와는 사회당의 불만을 배려하는 의미로 도이 다카코 전 사회당 위원장을 중의원 의장으로 선출하기로 합의하지만 이때의 불만이 이후 자민당과 사회당이 손잡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반면 신당 사키가케 측에서도 연정 구성에 합의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치 개혁을 앞장세워 나온 당 입장에서 자민당의 간사장까지 지냈던 오자와가 독주하는 행보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지라 뒤로 몰래 자민당과 지속적으로 연정을 구상중이었다는 사실이 이후에 밝혀지기도 했다. 실제로 사회당과 함께 이후 자민당의 손을 잡고 지샤사(自社さ) 연립정부가 출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3. 총리 지명 투표[편집]


  • 각 원마다 각각의 총리후보를 지명한다. 중의원과 참의원의 지명후보가 일치한 경우 그 자가 총리지명자가 된다. 각 원에서 지명한 후보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양원 간의 협의회를 열고 협의회에서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중의원에서 지명한 자가 총리지명자가 된다.
  • 전체투표수의 과반을 넘는 후보가 없을 경우 최다 득표자와 2위 득표자 간의 결선투표가 진행되며, 결선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한 자가 총리로 지명된다.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중의원
후보
득표수
비고
정당
득표율
당락
파일:일본신당 로고 반전.png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川護煕)

262표
1위


51.27%
지명
파일:자유민주당(일본) 흰색 로고.svg
고노 요헤이
(河野洋平)
224표
2위


43.84%
낙선
파일:일본공산당 로고 white 상하.svg
후와 테츠조
(不破哲三)
15표
3위


2.94%
낙선
파일:일본 사회당 로고 반전.png
야마하나 사다오
(山花貞夫)
2표
4위


0.39%
낙선

총 투표수
511표
과반
256표
유효표
503표
[1] 원래 자민당 내 계파인 개혁포럼21(하타·오자와파)이 분당한 정당이다.[2] 자민당 내 정치 모임인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를 모체로 하는 정당이다.[3] 야마하나 사다오는 정치 개혁 담당 국무대신으로 내각에 참여하게 된다.[4] 중의원 75석, 참의원 71석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참의원
후보
득표수
비고
정당
득표율
당락
파일:일본신당 로고 반전.png
호소카와 모리히로
(細川護煕)

132표
1위


52.38%
지명
파일:자유민주당(일본) 흰색 로고.svg
고노 요헤이
(河野洋平)
93표
2위


36.90%
낙선
파일:일본공산당 로고 white 상하.svg
후와 테츠조
(不破哲三)
11표
3위


4.37%
낙선

총 투표수
252표
과반
127표
<rowbgcolor=#EEEEEE,#353535><rowcolor=#373a3c,#dddddd> 유효표 || 236표 ||}}}

55년 체제 이후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상황이다보니 지명 투표 과정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반발하는 자민당 의원들의 항의가 워낙 거세다보니 총리 지명 투표에 앞서 선출된 도이 다카코 의장이 중의원을 정숙시키는데만 상당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후 양원의 지명을 받아 호소카와 모리히로 일본신당 대표가 38년만에 처음으로 자민당 소속이 아닌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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