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양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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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良佐
1638년 ~ 17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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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묘지명
4. 여담
5. 가족관계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현도(顯道), 호는 명촌(明村)이다. 나만갑의 손자이며, 윤선거의 제자, 윤증의 친우이자 문인이다. 서인의 노론, 소론 분열의 상징인 회니시비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이다. 소론의 선봉에 서서 노론과 대립하였다.[1]


2. 생애[편집]


1638년 나성두와 경주 김씨[2]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는 나만갑이다. 경기도 과천 명촌리에 살았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름과 자는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 정이의 제자인 사양좌(謝良佐)의 이름과 자를 그대로 따와 지은 것이다.

부친이 충청도 이산현감[3]으로 재직할 때 약관의 나양좌는 부친의 소개로 윤선거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다. 송시열, 송준길에게도 당시 함께 배웠다.훗날 송시열과 맺게 될 악연을 알았을지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윤증을 포함한 윤선거의 아들들, 박세채, 최석정, 박세당, 박태보 부자[4], 오도일(吳道一, 1645 ~ 1703)[5]과 교유하였다. 1669년 스승 윤선거가 사망하였다.[8]

1680년 숙종은 경신환국을 일으켰고, 서인은 다시 정권을 잡아 윤휴의 사사를 포함하여 남인 100여명이 처벌당했다.[9][10] 40세 이후 송준길의 추천으로 상의원 주부 등 몇몇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81년 '현종개수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이사명(1647 ~ 1689)[11]이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의 윤선거의 행적에 대해 윤증, 박세채, 나양좌에게 물었다. 윤증이 그에 대한 답을 나양좌와 박세채에게 보냈고, 이 편지는 다시 이사명에게 전달되었고 그를 통해 송시열의 문인인 이선도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추후 1685년 문제가 되어 떠오른다.

1683년(46세)에 모친 봉양을 위해 평강현감 직에 올랐다가 다시 낙향하였다. 그 해에 숙종의 거듭된 부름으로 윤증은 출사 여부에 대한 고민을 하며 과천에 올라와 있었다.[12] 당시 조정은 김석주의 깨끗하지 않은 정치를 통한 남인 말살을 목적으로 하는 독주로 젊은 청류가 포진한 삼사가 격렬한 대립 중이었다. 송시열은 그러나 청류의 기대와는 반대로 김석주의 손을 잡은 상태였다.[13] 그러던 중 박세채가 중재를 위해 송시열의 동의를 받아 윤증을 찾아 출사를 권유하기 위해 나양좌의 집으로 왔다. 그러나 윤증은 출사를 사양하고 다시 낙향한다.[14]

1684년 봄,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15]이 신유의서의 내용을 발견하여 그 내용을 송시열에게 보이게 된다.[16][17]1684년 4월 회니시비를 공식적으로 정치쟁점화한 최신(崔愼)[18]의 상소가 숙종에게 올라간다.실록 링크

1685년 윤증이 나양좌, 박세채에게 보냈던 강화도에서의 윤선거의 행적의 내용을 적은 편지가 논란이 된다. 이 편지의 내용은 결국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노론계에서는 윤선거가 효종 시기 조정의 부름을 사양하며 올린 상소문에 자신을 '죽을 죄를 지은 신하'로 표현하고 자신의 행적을 거론했던 바가 있기에, 강화도에서의 일이 잘못되었다고 알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갑자기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한다면 세상을 속이는 일이라며 윤증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윤선거가 출사하지 않고 강화에서의 행적을 언급한 것은 그 행적의 공적인 성격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며 스스로의 개인적 수치가 아닌 조선 유자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오랑캐에게 짓밟히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을 반성한다는 의미라며 반박하였다. 이는 서인의 척화 의리를 함께 하던 윤황-윤선거 가문이 윤증 대에 이르러 현실적으로 대명의리론을 고집할 수 없으니 주화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경권론, 사세론에 동의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송시열은 사대부 계층에서 이런 경향성이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척화론의 의리 자체의 수호를 위해 윤휴를 배척했던 바 있고 이제는 그 타겟이 윤선거, 윤증 부자로 전환되었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제를 지적한 것은 '스승을 배반하였다', 율곡이 입산한 잘못이 있다고 한 것은 '율곡을 모욕하였다', 강화도의 일을 잊지 말고 극복의 노력을 하자는 윤선거의 주장은 '절의를 손상하고 효종을 모함했다', 북벌을 위한 제도 개혁은 '사문난적인 윤휴의 편을 들었다'는 송시열의 공격이 회니시비이다. 윤증의 소론 측은 스승의 잘못이 있다면 비판하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도리, 율곡의 학문이 훌륭한 것은 그의 입산 여부와는 무관하다, 패전국 신민이라도 상황에 따라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므로 이것은 절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였다.[19]

이 상황에서 나양좌와 자형인 김수항 사이에도 연락이 오갔던 모습이 있다. 김수항의 문집에 나양좌와의 편지가 몇 편 들어있다. 김수항은 이 사안이 제기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문제가 되었으니 걱정이다, 해결을 위해 본인이 노력하는 것은 윤증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도 아니고 윤증의 의도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며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보자고 한다.링크

1687년 2월 송시열이 상소하여 윤선거가 윤휴와 편당을 지어 주자를 배반했다고 공척하자, 3월 나양좌가 소두가 되고,[20] 동문 성지선, 조득중이 동참하여 윤선거를 변호하는 항소를 올린다(丁卯抗疏; 정묘항소) 송시열은 이를 접하고 이희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양좌는 구포공(鷗浦公=나만갑)의 손자인데 왜 율곡을 존숭하지 않느냐고 하였다.[21]링크[22]

숙종은 송시열의 편을 들어주었고, 나양좌는 평안도 삭녕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에 사면되어 돌아온다.[23][24][25] 귀양간 나양좌는 배우려 찾아오는 자들이 많자 윤증에게 어떻게 가르칠지 물어서 답을 받았다.[26]

1689년 숙종은 기사환국을 단행하여 송시열과 김수항을 포함한 서인을 실각시킨다. 나양좌는 노소 대립 과정에서 불편해졌을 수도 있는 매제 이사명이 사사 당하자 상을 치러주었고, 자형 김수항이 사사될 때 필마로 진도로 내려가 작별을 나누고 누나와 조카들을 호위해 돌아와 이름을 떨쳤다.[27]

이후 공조좌랑, 충청도사, 삭령군수에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고, 1706년(숙종 32년) 69세에 사헌부 장령에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710년 73세로 사망하였다.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집안의 묘가 있다. 윤증이 제문을 짓고 묘지명을 작성하였다. 실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

전(前) 장령(掌令) 나양좌(羅良佐)가 졸(卒)하였다. 나양좌는 천성(天性)이 순박하면서도 진실하고, 행의(行誼)가 순수하면서도 독실(篤實)하였다. 일찍이 윤선거(尹宣擧)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였는데, 스승의 말을 깊이 믿었으며, 스승이 죽은 후에 무함을 입은 정상(情狀)을 변론(辨論)하여 피차(彼此)의 시비(是非)를 세상에 밝게 드러나게 하였다. 문화(文華)는 비록 조금 떨어지지만, 순수한 마음과 굳센 지조(志操)는 옛사람의 독행(獨行)에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은 잡록(雜錄)에 진실을 잃은 말이 많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취(取)하지 아니하였다. 천거(薦擧)받아 헌직(憲職)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졸(卒)하였다.

- 숙종실록보궐정오 49권, 숙종 36년 9월 28일 기미 2번째기사, 링크




3. 묘지명[편집]


윤증이 작성하였다.

명촌(明村) 나공(羅公) 묘지명

아, 우리 선친(=윤선거)이 회천(懷川=송시열)에게 비판을 받게 되자, 개연히 일어나 시비(是非)를 밝히고 사정(邪正)을 분변하며 우리 도의 정통을 지키고 세속의 의혹을 풀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로 삼아 위아래에 알리고 다니면서 부지런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노력한 사람은 바로 명촌 선생 나공이라 할 것이다.

공의 휘는 양좌(良佐), 자는 현도(顯道)이며 본관은 안정(安定)이다. 조부 휘 만갑(萬甲)은 호가 구포(鷗浦)이며 곧은 절개로 인조조(仁祖朝)의 명신이 되었다.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묘지명을 지었는데 거기에 가계(家系)와 업적이 수록되어 있다. 부친 휘 성두(星斗)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부친의 풍도를 이어받았다는 칭송을 받았으며 벼슬이 해주 목사(海州牧使)에까지 올랐다. 모친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판서 남중(南重)의 따님이다.

공은 숭정 무인년(1638, 인조16) 2월 17일에 태어났다. 기질이 엄중하여 어려서부터 어른을 보는 듯하였다. 부친 목사공이 이산(尼山)의 수령으로 있을 때 공에게 명하여 우리 선친에게 학문을 배우도록 하였다. 공은 그때 겨우 약관의 나이로 부지런하고 독실하여 하루 종일 꼿꼿이 앉아 공부하니, 선친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 크게 될 인물로 기대하였다.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전념하였다. 그 학문은 충신(忠信)의 실천을 위주로 하여 마음과 몸을 단속하고 법도에 따라 행동하기를 잠시라도 허투루 한 적이 없었다. 독서는 사서(四書)에서부터 정주(程朱)의 저술까지 섭렵하였으며 늙어서도 정해 놓은 과정에 따라 공부하고 제가(諸家)의 서적들을 널리 본 적이 없었다. 문장을 짓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허무맹랑하고 고원한 학문에 힘쓰지 않아 마침내 이로써 덕을 이루었다.

지극한 성품으로 효도와 우애가 깊었다. 평소 부모님의 봉양에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으며, 초상에 슬픔을 다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인 석좌 중보(碩佐仲輔)와 사이좋게 지내어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과부로 사는 숙모를 친어머니처럼 섬겼으니, 이렇듯 독실한 행실이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 많았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자형(姊兄)인 김공 수항(金公壽恒)과 매부(妹夫)인 이군 사명(李君師命)이 다함께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공이 이군의 초상을 치러 주고, 또 필마단기로 천리 길을 달려가 김공을 유배지에서 영결하고 과부가 된 누이와 그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특히 남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 급히 달려가는 의기는 따라가기 어려운 것으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동춘(同春) 송 선생(宋先生=송준길)이 일찍이 공을 훌륭한 행실을 갖춘 인물로 천거하여 나이 40이 넘어서 비로소 희릉 참봉(禧陵參奉)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고, 품계를 뛰어넘어 6품에 등용하여 상의원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계해년(1683)에 평강 현감(平康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이 나이가 많아 봉양을 위해 마지못해 부임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사가 점차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정묘년(1687)에 상소를 올려 회천(懷川)의 무함을 밝히다가 영변(寧邊)으로 유배당했고 이듬해 용서되어 돌아왔다. 을해년(1695, 숙종21) 이후로 공조 좌랑, 충청 도사, 종친부 전부(典簿), 삭녕 군수(朔寧郡守)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병술년(1706)에 와서야 비로소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공의 나이가 이미 69세였다. 정묘년(1687)의 사건을 끌어들여 사정을 아뢰고 사양하니, 두 번의 상소 끝에 체차되었다. 경인년(1710) 2월에 재차 제수되었으나 소명을 내렸을 때 이미 공의 질병이 악화되어 있었다. 이상은 공이 전후로 거친 관직들이다. 이해 2월 7일에 명촌리(明村里)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73세였다. 4월 15일에 양주 □□산 □좌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모관(某官) 천석(天錫)의 따님으로,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가 나중에 이장하여 공의 왼쪽에 부장되었다. 딸 둘만 있고 아들은 없어 아우 중보의 아들 연(演)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장녀는 윤가교(尹可敎)에게 시집을 갔는데, 나의 아우 추(推)의 아들이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양자 동준(東浚)을 들였고 딸은 김시제(金時濟)에게 시집갔다. 둘째 딸은 정수기(鄭壽期)에게 시집갔다. 측실의 소생으로 아들 둘을 낳았는데 제(濟)와 항(沆)이고, 딸 둘을 낳았는데 윤심교(尹心敎)와 남학청(南鶴淸)에게 시집갔다.

아, 공의 나라를 위한 충성심은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으로서,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을 때라 하더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왕실에 있었다. 그래서 조정의 잘잘못이 있으면 그때마다 근심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정묘년에 상소를 올린 것은 단지 스승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국가를 위해 사악하고 편파적인 주장을 배격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붕당의 무고가 불러올 화란을 막아 인심을 바로잡고 국운을 바로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 후에 매번 말하기를, “세상의 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그 원인이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하면서 평소 울분을 토하기를 거의 사사로운 원수를 대하듯이 하면서, “백년 후에는 의당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하였다.

아, 공과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혈육과도 같은 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공의 아들들이 나에게 묘문(墓文)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늙고 혼몽하여 공의 평생 행적을 다 기록할 수가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지혜롭지 않으면 어긋남 없이 분변할 수 없고 / 非智無以辨之不差

인자하지 않으면 잃지 않고 지킬 수가 없으며 / 非仁無以守之不失

용맹하지 않으면 두려움 없이 홀로 설 수 없도다 / 非勇無以獨立不懼

어떻게 이 셋을 지닐 수 있을까 / 何以有之

한결같이 성실함 뿐이라네 / 一誠而已

어떻게 성실할 수 있을까 / 何以誠之

속이지 않을 뿐이라네 / 不欺而已

귀신이 곁에서 지켜 주니 / 鬼神在旁

백세 뒤를 기다리리라 / 百世可俟

이것으로 공의 명을 지어 / 以玆銘公

부끄럽지 않고자 하노라 / 庶幾無愧

한국고전번역원 ┃ 최채기 (역) ┃ 2008 링크


4. 여담[편집]


저작으로 '명촌잡록'링크이 있다.

나양좌는 귀양을 다녀오고 은거하던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서재 이름을 '돈재(遯齋)’라고 지었는데, 최석정은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친구인 그를 위로하기 위해 기문을 작성한 바 있다.[28] 또한 나양좌의 사촌 동생인 나홍좌의 묘갈명도 최석정이 작성했는데, 본인의 친한 친구로 나양좌를 언급하였다.

윤증과는 동문이자 정치적 동지이자 개인적인 친우로 관계가 깊었다. 나양좌의 유일한 저술로 전해오는 '명촌잡록'은 윤증과의 의견 교환으로 작성되었다고 노론에서는 의심하였다. 송시열의 죽음을 비참하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29] 윤증의 '명재유고'에는 나양좌에게 보낸 서한 183편이 전한다.[30]서한 번역 링크 학문이 뛰어난 윤증이 나양좌의 질문에 답한 기록도 많다.[31][32] 윤증이 나양좌 모친 생신 잔치에 보낸 서문과링크 나양좌가 지은 장성가(長星歌)에 대해 1702년에 지은 발문도 전한다.링크

박세당이 나양좌에게 쓴 편지가 문집에 전한다.링크 박태보의 사망에 대한 나양좌의 위로에 대한 감사와 부탁받은 부친 나성두의 묘갈이 늦어짐에 대한 미안함 등의 내용이다. 박세당의 차남인 박태보와 친했고, 그와의 왕복서한을 묶은 '정재수첩'이 있다고 윤증과 최석정이 언급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울분을 담은 '장성가'도 있다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송시열에게 배운 적도 있었기에 이런 일화도 전한다.링크

가깝게 지내던 조카들인 김창협, 김창흡[33]을 소론계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듯 하다. 조카들은 노소 갈등에의 개입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현은 했으나, 부친과 송시열의 관계에 훨씬 큰 무게감을 둔다. 이들 형제는 훗날 노론의 거물로 성장한다.[34][35][37][38][39][40] 명촌잡록에 김창협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 실려있다.

5. 가족관계[편집]


부인 연안 김씨와 2녀가 있었고, 측실에게 2남 2녀가 있었다. 아우 나석좌(羅碩佐, 1652 - 1698)[42]의 아들 나연(羅演)을 양자로 삼았고, 측실 소생의 아들 나제(羅濟, 1696 ~ 1734)와 나침(羅沈)이 있다.[43] 장녀는 윤증의 아우인 윤추의 아들 윤가교[44], 측실 소생의 장녀는 역시 윤증의 다른 동생인 윤발의 아들 윤심교와 혼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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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논문을 주로 참조하여 작성되었다. 최영성, 명재 윤증과 명촌 나양좌 - 나양좌를 중심으로 -, 2007[2] 나만갑과 함께 병자호란 시기 예조참의로 인조를 호종한 김남중의 딸이다.[3] 회니시비의 니가 이산(尼山)이다.[4] 박세당의 형 박세후가 윤선거의 사위이다. 박세후는 아들이 없어 박태보가 양자로 입적한다.[5] 오윤겸의 손자. 대제학, 병조판서를 역임하는 소론의 중신 중 한 명.[6] 기유년(1669년)에 윤선거가 송시열에게 작성한 편지. 1660년 1차 예송에서 송시열과 윤휴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평소 송시열은 윤휴가 경전의 주해에 주자의 해석이 아닌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밝히자 거부감이 매우 커 그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송시열은 친구인 윤선거가 윤휴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하는데 불만이 있었다. 윤선거는 이후 윤휴와 허적 등 남인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며 표면적으로는 송시열과 무난하게 지냈다. 그러나 윤선거는 사망하던 해에 송시열에게 윤휴와 허적을 참적(讒賊)이라 단정할 수 있겠냐며 남인에 대한 그의 배타적인 모습에 충고하는 기유의서를 작성하였다.[7] '“先人의 墓碣銘은 작년에 函丈을 직접 뵙고서 고쳐 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공경히 기다리면서 해를 넘겼는데 지난번에 비로소 편지를 받으니, “우선 자네가 찌지를 붙인대로 수정하여 돌려보내네.”라고 말씀하셨는데, 고명께서 어떤 내용으로 답장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감히 다시 말씀을 드려 성가시게 해 드릴 수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후략).' - 참조: 최윤정, 명재 윤증 書 연구 - 윤증⋅박세당⋅박세채의 관계와 이념 지향성을 중심으로 -­[8] 1673년 부친 윤선거의 묘갈명 작성을 위해 윤증은 박세채가 찬한 행장과 기유의서(己酉擬書)[6]를 동봉해 송시열에게 보낸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포함한 남인을 비호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의 생애 총평을 박세채의 말로 대신한다는 무성의한 답을 보낸다. 1677년 윤증이 박세채에게 보낸 서간에 따르면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수정되지 않았고, 박세채가 중재를 시도하다가 미처 수정되지 않은 묘갈명을 윤증에게 도로 돌려보낸 정황이 보인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직접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7] 윤증은 부친에 대한 후한 평가를 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부친과 송시열의 40년 교분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어떻게 본인과 의견이 달랐는지 분명히 해달라는 요구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증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윤선거는 부국강병을 위해 지주제, 공납, 군정의 폐단 등 제도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에 반해 송시열은 군주의 수신과 의리론만 강조하고 있었다. 크게 보아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었고, 이는 소론과 노론의 분열로 이어진다. 결국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좋은 말을 해주지 않아서 윤증이 스승에게 삐쳐서 틀어진 것이 회니시비라는 일반적인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 참조: 김용흠, 조선후기 당쟁과 제도 개혁[9] 1681년 여름, 묘갈명에 관련된 윤증과 송시열간의 갈등은 끝내 송시열이 윤증의 요구를 거절하며 어찌저찌 마무리는 되어 있는 상태였다.[10] 이 때 윤증은 신유의서(辛酉疑書)를 작성하여 윤선거의 생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송시열의 문제는 학문의 본원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 편지는 박세채의 만류로 송시열에게 부쳐지지 않았다. 신유의서에서 윤증은 송시열이 학문에서 주자학을 내세우지만 주자의 권위를 빌려서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한 것을 '왕패병용(王覇竝用, 왕도와 패도를 함께한다}'의 결과로 간주하였으며, 북벌대의를 내세워 자신의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수신(修身)의 측면에서는 ‘사욕을 극복하고 몸소 실행하여 실지에 힘쓰는’ 것은 거의 없고 ‘남을 공격하고 이기려는 말’만 끊임없이 나온다고 하였고, 이로 인해 붕당과 붕당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붕당 내에서도 조야를 불문하고 분열과 갈등이 격화된 현실이 송시열의 잘못된 학문과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윤증은 ‘'實心 實學’을 제시하였다.(실질적으로 人欲을 극복하고 天理를 추구하는 것이며, 송시열처럼 ‘북벌대의’를 말로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제도개혁을 통해서 실제로 국방력 강화를 도모하는 것) - 참조: 김용흠,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명재 윤증의 위상[11] 병조/형조판서 역임. 노론 4대신 이이명의 형이다. 나양좌의 매제[1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회니시비 파트에 나오는 과천의 지인이 나양좌이다.[13] 소인들인 남인을 배제하고 군자의 당인 서인이 집권해야 주자의 붕당론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14] '남인의 원한은 풀어주어야 한다. 외척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 송시열의 독선, 독주도 막아야 한다.' 의 3가지 조건을 든다. 박세채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후 황극탕평론을 주장하게 된다.[15] 박세채의 사위이기도 하다.[16] 윤증의 문인 최석문의 훗날 상소에 신유의서의 내용이 송시열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글을 쓴 뒤에 집안 사람들이 모두 말리므로 신의 스승은 마음에 딱하게 여겼습니다. 교하(交河)로 성묘(省墓)하러 가는 길에 박세채(朴世采)와 감로사(甘露寺)에서 만나 여러 날 동안 상의하였더니, 박세채가 크게 놀라 ‘반드시 끝없는 풍랑을 일으킬 것이다.’ 하며 간절하게 말하여 힘껏 말리므로, 신의 스승이 드디어 따르지 않기로 정하였습니다. 그 뒤에 권이정(權以錠)이 신의 스승에게 말하기를, ‘외할아버지께서 요즈음 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만족하여 승복하지 않는데, 자제·문생 중에는 친절히 경계하여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할 만한 사람이 없고, 아저씨께서도 끝내 한 마디 말씀이 없으시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하였습니다. 권이정은 송시열의 외손이고, 신의 스승의 처조카입니다. 신의 스승이 대답하기를, ‘내가 비로소 긴 글을 써서 소견을 바치려 하였으나, 집안 사람과 벗들이 말려서 보내지 못하였다.’ 하고, 의와 이를 병행하고 왕도·패도를 병용한다는 것과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과 같지 않다는 따위 말로 수작한 일이 있습니다. 권이정이 신의 스승의 말을 외어 송시열에게 말하니, 송시열이 그것을 듣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 손자 송순석(宋淳錫)은 박세채의 사위인데, 그 일을 박세채에게 전하러 곧 신의 스승에게 글을 보내어 그 곡절을 물었습니다. 신의 스승이 권이정과 수작한 말을 대략 답하였는데, 그 글을 드디어 송순석이 훔쳐 갔습니다. 이 이후로 최신(崔愼)의 무리가 상소한 것이 망극하였고 마침내는 송시열이 몸소 스스로 글을 올려 윤선거를 헐뜯고 배척하였으며, 윤선거가 더러운 오랑캐에게 절개를 굽히고 적신(賊臣) 윤휴(尹鑴)를 편들었다는 따위 말로 글을 지어 중외(中外)에 유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실록 링크[17] 윤증은 나양좌에게 보낸 글에서 '갑오년(1654년)에 날마다 소제 서당(蘇堤書堂)에서 종학(從學)하였는데, 이것이 배우러 다닌 처음이며, 수년 동안 왕래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 20여 권에서 그쳤다. 결국에 가서 졸업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때부터 스승에 대한 예로 섬겼고 정의(情義)도 절로 여러 어른들과 다른 것이 있었다. 그러나 부자와 같다고 한 것은 망언이다. 스승이 모두 같지는 않다는 말은 정자(程子)·장자(張子) 이래로 이미 있었는데, 어찌 이름이 스승·제자라 하여 곧 아버지·아들과 같을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증(拯=윤증 본인)이 회천(懷川=송시열)을 대우한 본말이 이러할 뿐이나, 예전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끌려 슬픈 생각이 나니, 실로 장래에 나를 구실삼는 수치가 있을 것이다.'라는 송시열과 본인의 관계에 대한 술회를 남겼다.[18] 송시열의 문인[19] 참고 - 김용흠, 스승을 비판한 백의정승 - 명재 윤증의 탕평론과 회니시비[20] 내용은 박태보가 지었다.[21] 나만갑은 율곡의 직계 제자인 정엽의 제자이자 사위이다.[22] 이희조와 나양좌는 또한 인척이기도 하다. 이희조의 부친 이단상의 둘째 형 이가상은 나만갑의 손녀이자 나성두의 딸인 안정 나씨와 혼인하였다. 곧 이희조의 숙모의 친형제가 나양좌이다.[23] 당시 부제학 최석정, 승지 오도일, 사간 이숙, 유집일, 이익수 등이 나양좌를 구하려 노력하였으나 모두 삭출당했다. - 이건창, 당의통략[24] 송시열은 다음 해인 1688년 상소에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고 나양좌가 본인의 스승을 위한 일을 한 것이라며 용서을 청하였다.[25] 조카 김창협이 동생 김창즙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외삼촌이 사면되었다고 들었다며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이 언급된다.링크[26] “입지(立志)와 무실(務實)이 무엇보다 학문하는 자의 급선무이고, 그 나머지는 책에 다 적혀 있을 뿐입니다. 《격몽요결(擊蒙要訣)》이 학문하는 사람에게 가장 요긴하고 《주문지결(朱門旨訣)》이 그다음인데, 《주문지결》은 지경(持敬) 공부를 논한 것이 《격몽요결》보다 꽤 정미(精微)하기 때문에 자못 보기 어려우니, 모쪼록 《격몽요결》을 숙독해서 터득함이 있은 뒤라야 《주문지결》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책을 투철하게 읽고 나면 《근사록(近思錄)》을 읽는 데도 어려움이 없고 《주서절요(朱書節要)》를 읽는 데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이 두 책으로 문호(門戶)를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27] 왕조 국가에서 다름 아닌 왕이 죽인 사람들,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사람들을 챙기는 것은 보통 심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28] '최석정은 주역의 효사(爻辭)와 순환론적 우주관을 통해 의론을 전개하였다. 돈괘(遯卦)에는 물리쳐서 단절하는 뜻(斥絶之)과 물러나 멀리하는 뜻{退遠之) 두 가지가 있는데, 나양좌 자신은 전자에 의미를 두어 종신토록 세상과 단절하고자 했지만, 최석정은 후자의 의미를 부각시켜 나양좌로 하여금 잠시 물러나 피해있을 뿐 세상과 절연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는 한편 훗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을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은둔해 있으면서 청정한 마음을 지키고 도를 구하는 삶은 당장은 돈괘의 형상이지만, 훗날 비괘(賁卦)의 형상처럼 조정에서 초빙하기 위해 예물이 내려질 것이라는 의론을 개진하여 불우한 처지의 나양좌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주역을 통해 위로받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도록 하였다.' - 참조: 권진옥,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기문(記文) 연구[29] 송시열은 사약을 받던 날 효종과 명성왕후의 어찰을 빌어 목숨을 구걸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리를 뻗고 바로 드러누워 사약을 마시지 않고 버텼다. 할 수 없이 약을 든 사람이 손으로 억지로 입을 벌리고 약을 부었다.[30] 윤증이 200여 명에게 1500편의 서한을 작성한 것이 문집에 남아있다. 박세채에게 보낸 43편, 박세당에게 보낸 22편과 비교해보면 나양좌와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명재유고'의 14, 15권이 모두 나양좌에게 보낸 서한.[31] 나양좌가 만학의 탄식을 토로하자, 정치적인 문제로 당인으로 지목받아 힘들어함을 안타까워하고 공부에 힘쓸 것을 권유한다. 윤증은 기본적으로 제자가 스승을 변무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보았다. 그것이 풍습을 이루어 나라를 병들게 하는 폐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지 않는 것이 스승을 높이는 도리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당쟁이 치열해지며 시비가 오가며 무고에 대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것이 정론으로 굳어질 수 있으니 변무의 불가피성도 어느 정도 인정하였다.[32] 나양좌의 '정묘항소'에 대해 윤증은 '스승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실로 국가를 위하여 사특하고 치우친 설을 막고 떼로 무함당하는 화를 구제하여 인심을 바로잡고 나라의 명맥을 부지하려고 한 것이었다'고 고평가하였다.[33] 이들은 어릴때 과천의 외가에서 자랐다. 김창협은 출생도 외가에서 했다.[34] 나양좌는 김창협에게 송시열에 대한 절대적 추숭이 옳지 않음을 역설하며 그 근거로 몇 가지 사실을 언급한다. 인척 및 교유 관계를 맺어온 소론계 가문들이 안동 김문을 바라보던 시선을 보여주는데, 김수항이 송시열을 비판한 상소문이 있고, 평소 송시열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말을 했다는 사실, 김창협이 박세당을 찾아 뵙고 존경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는 점 등이다. 결국 안동 김씨 집안이 송시열을 높이고 노론계의 결집을 주도하는 것은 혈연, 학문의 배경보다는 김수항과 송시열의 사후 정치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 참조: 송혁기, 上疏를 통해 본 조선후기 지식인의 재편[35] 김창협이 나양좌에게 보낸 편지가 농암집에 전한다. 참고: 최천식, 김창협 철학 연구, 2016[36] 이단상의 맏아들. 이단상의 형 이가상이 나양좌의 고모와 혼인하여 나양좌와 이희조도 먼 인척 관계이다. 그리고 나양좌의 동생 나석좌는 김창협과 함께 이단상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당시 집권층은 혼맥과 학연으로 서로 얽히고 설켜있다.[37] '최근에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전해주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아무개 어른(=나양좌)은 별 말씀이 없다가도 이산(尼山: 윤선거ㆍ윤증)과 회덕(懷德: 송시열)에 관한 일이 화제에 오르기만 하면 샘물이 솟아나듯 말씀이 그치지 않습니다. 아귀가 맞고 근거가 있어 그 말에 신뢰가 갑니다.” 하자 그 상대방이 말하기를, “자네는 아직 이동보(李同甫: 이희조[36])를 만나보지 못했네그려. 그가 이 사안에 대해 말을 하면 근거가 상세하고 주장이 명확해서 믿지 않을 수가 없다네. 아무개 어른의 호적수가 되고도 남을 것이네.” 하였다고 합니다.'[38] '작년 봄에 제 아우(=김창흡)가 성동(城東)에서 동보(同甫)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동보는 그 자리에서도 이 일에 대해 극론(極論)하였는데, 두 집안이 다투게 된 자초지종과 주고받은 편지의 날짜를 고증했기에 그 내용에 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 아우는, “이 일은 외면적이고 말단적인 일일 뿐 자신에게 절박한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궁리ㆍ거경 공부에 힘쓰지 않고 이깟 일에 힘을 쓰느냐”는 말로 말을 막았다고 합니다. 저희들의 생각이 본래 이러한데 어찌 외삼촌을 뒤에서 헐뜯고 동료들을 설득하는 일에 힘을 소비하겠습니까?부디 지금부터는 저희들의 생각을 깊이 살펴서 말씀하실 때나 편지를 보내실 때 이 일에 대해 다시는 언급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쟁단(爭端)을 멈추어 친척간의 정을 온전히 할 수 있다면 저희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저희들한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한테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야할 것이고, 입에는 물론이고 마음속에도 이 일을 담아두지 않아야할 것입니다.'[39] '우옹(尤翁: 송시열)을 대하는 저희들의 태도는 실로 아버지의 유지를 따른 것입니다. 영평(포천)에 있을 때 보낸 편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여전히 이해를 못하시니 어찌된 것입니까? 아버지가 노서(魯西: 윤선거)를 존중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우옹을 종장으로 받들며 우의를 돈독히 다진 것과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외삼촌은 아버지가 올린 소 한 편을 가져다가 (부친이 노서를 존중했던) 증표라고 하시면서, 저희들이 노서 집안을 편들고 우옹을 등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저희들과 우옹(尤翁) 사이에는 4대에 걸친 사우(師友) 관계가 있으니, (외삼촌과 노서가) 한 때 사제(師弟)의 연을 맺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친척 간에 노선이 다를 경우 끝까지 논의해서 의견을 합치해야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이는 외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엄중한 부자관계에 미칠 수 없는데도, 저희들더러 아버지가 평생 지켜온 뜻을 저버리고 외삼촌의 현재 견해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외삼촌과의 관계는 좋아지겠지만 부자간에 노선이 틀어지는 일인데 그러면 저희들은 어떤 부류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까? 이 때문에 저희들은 이 일을 한쪽 구석에 치워두고 더 이상 논쟁하지 않기를 바란 것입니다.....보내신 편지에서, 우옹(尤翁)이 저희 아버지를 비판했던 말들을 열거해놓고는 그것을 근거로 아버지가 우옹을 진심으로 따른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해와 달도 서로 그 빛을 가릴 때가 있지만 곧 정상을 회복하니 (밤낮으로) 함께 비춰주는 것에 서로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우옹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했고 그 과정이 명확히 남아있어서 의리를 손상했던 흔적이 없습니다. 설령 한때 일처리 과정에서 설왕설래한 흔적이 남아있다 한들 그것이 어찌 고려할 만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외삼촌은 이것을 구실로 두 집안의 우의에 흠집을 내려하시니, 공정한 판단이 아닌듯 합니다.'[40] 김창협의 편지에 보이듯 송시열과 김수항 사이에도 이견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알려진대로 송시열의 뜻을 김수항이 따른 것이 아니라, 이들은 산림과 중앙 정계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 정치적 파트너로서 서로 존중하는 사이였다. 김수항, 김창협 모두 송시열과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다.[41] 나석좌가 늦둥이였던 관계로 1살 어린 조카이다[42] 자는 중보(仲輔), 송준길이단상의 문인. 조카이자 동문인 김창흡[41]이 묘갈명을 지었다.[43] 나제는 서자이나 학행으로 인정을 받았고,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던 바 있다. 윤증의 후손들과 지속적인 교류가 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귀록 조현명과의 친분도 있던 기록이 있다.[44] 혼례 당시 의심스러운 절차에 대해 정관재 이단상과 편지를 주고 받은 기록이 남아 있다. 이단상은 나양좌의 부친 나성두와 처남 매부 사이인 이가상의 동생으로 가문 사이의 교분이 두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