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마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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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 후쿠시마현 하마도리[4] 의 중앙에 위치한 정으로, 후타바군에 속해있다.
서쪽은 아부쿠마 산지에, 동쪽은 태평양에 접해 있으며 눈은 거의 내리지 않고 온화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2. 역사[편집]
오쿠마마치는 7세기 초반, 이와키 쿠니노미야츠코(石城国造)와 타가국(多珂国)의 북쪽이었으며 "쿠마(苦麻)노촌"이라고 했다. 7세기 후반 율령제가 시작되면서 타가국은 히타치국에 편입되어 쿠마노촌은 히타치국의 북쪽이 되었다.
718년에는 나코소[5] 의 이북이 히타치국으로부터 분리되어 이와키국으로, 쿠마노촌은 나코소에서 와타리[6] 까지를 범위로 하는 이와키국의 중부에 위치한 촌락이 되었다. 그러나 720년대에 이와키국은 무쓰국에 편입되었다. 쿠마노촌은 곧 현지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을 따서 "쿠마가와"(熊川)라고 불리게 되었다.
센코쿠 시대 초기까지는 시네하씨(標葉氏)의 영토의 남부였지만, 1492년에 시네하씨는 소마씨(相馬氏)에 병합되었다. 센코쿠 시대 후반부터 보신 전쟁까지 쿠마가와는 소마씨 영토의 남부가 되었다. 이때 소마씨와 이와키씨의 경계가 현재 오쿠마마치와 도미오카마치의 경계였다.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도 오쿠마마치는 소마씨가 다스리는 나카무라 번의 남부이었며 하마가도[7] 중간의 여관이 밀집한 마을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뒤 보신 전쟁 시기인 1868년에 쿠마가와에서 일어난 나카무라 번과 일본 정부군간의 전투에서 나카무라 번은 패배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에서는 나카무라현은 곧바로 이와사키현(磐前県)에 들어갔다가 1876년 8월 21일 이와사키현은 후쿠시마현, 와카마쓰현과 합병되었고 그 이후엔 후쿠시마현에 소속되었다. 개항 후 메이지 정부의 식산 흥업은 스케가와(히타치시)에서 요노모리에 걸친 지역이 "조반 탄전"으로 개발된 영향으로 조반선이 부설되어 1904년 11월 22일에는 조반선 오노역이 개통했다. 당시의 오쿠마마치는 오노 촌(내륙쪽)와 쿠마마치 촌(해안쪽)으로 나누어져 있었지만 이들이 1954년 11월 1일에 합병하여 오쿠마마치가 탄생하였다. 이렇게 20세기 초기의 오쿠마마치는 "하마도리의 한 촌락"이라는 위치였다.
20세기 후반 오쿠마마치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1967년 9월 29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가 착공한(개업: 1971년 3월 26일) "전력 생산 지대"가 됨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적어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보장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를 상징하는 문제로 2004년에는 오노 병원 사건[8] 이 발생했다.
3. 유령도시화[편집]
도호쿠 대지진으로 지진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피해가 크더라도 수습할 수는 있었지만 이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오쿠마마치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동네이자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직격으로 맞아 일대가 완전 폐쇄되었던 마을이다.[10]
구글 스트리트 뷰에서 오쿠마마치의 각종 장소를 둘러볼 수 있다.[11]
유치원 유치원 구마마치초등학교(熊町小学校) 오노초등학교(大野小学校) 오쿠마중학교(大熊中学校)[12][13] 도서관 스포츠센터 문화센터 후타바의 박물관
칠판이나 안내물 날짜가 3월 11일자로 멈춰있고 학생들의 물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지진 발생 직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쿠마중학교는 칠판에 축하와 감사 메시지가 적혀 있는데, 졸업식 날에 지진이 닥쳤고 결국 졸업식의 흔적이 그대로 방치된 학교에 남겨지게 되었다. 졸업식 사진.[14] 일본 언론 인터뷰를 보면 그때 학생들이 졸업식을 끝내고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지진을 맞이했다고 했다.
학교는 이후 타지에 임시로 이전했는데 아마 평생 귀환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에 사실상 학교 위치를 옮긴 셈이다. 학교 건물은 옮겼지만 학교 행정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어 학교 홈페이지는 여전히 돌아가고 피난 온 현지 출신 학생들이 무사히 졸업하고 있다. 2021년에 오쿠마마치의 출입제한을 일부 완화하기로 하였으나 오쿠마중 건물은 결국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해체 결정 이후 10년간 방치됐던 학생들의 개인 사물을 돌려주기로 했고 이후 약 10년만에 당시 졸업생들이 옛 학교 건물을 다시 찾아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기사를 보면 2021년에도 위 스트리트뷰가 촬영된 2015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이 지정한 여행경보 발령국가 리스트 중 3단계인 출국권고지역에 들어가는 마을이다.
사태가 수습되어 공간방사선량이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나 장시간 체류하면 CT 촬영 이상의 피폭이 가능하다.[15] 실제로 후타바마치와 더불어 2015년에 피난조치 해제 구역에서 제외되기도 했을 만큼 방사선이 매우 높다.
2019년 오쿠마마치의 서쪽에 위치한 오가와하라 지구의 피난지시가 해제되었다. 따라서 사람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유령도시는 아니며, 식료품점도 오픈한 모습을 담은 영상도 있다.
2020년 3월에 이 마을에 위치한 조반선 역인 오노역이 영업을 재개하였다.
사람이 살기는 하나 아직도 일부 구역은 바리케이드를 쳐 출입제한이 걸려 있는 곳이 많이 있다. 도로만 통행을 위해 열려 있지 그 외 대부분 구역은 출입이 제한된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사람이 사는 곳이긴 하나 이곳은 외교부 지정 출국권고지역이기 때문에 정말 긴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특히 여행 같은 용무라면 방문을 자제하도록 하자. 출국권고 지역이라고 이미 통보했기 때문에 이곳에 멋대로 들러서 피폭당하더라도 정부에선 책임져 주지 않는다. 사실 미국과 캐나다는 해당 지역을 여행금지 지역으로 분류했으나 한국은 그보단 한 단계 낮은 출국권고 지역으로 분류한 것이다.
오쿠마마치 사진관에서 사고 전 오쿠마마치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사고 후의 사진도 열람이 가능하다.
2021년 7월 들어 인구조사가 재개되어 75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유령도시는 면했지만 일부 지역은 아직 출입 불가능하다.
오쿠마마치에서 원전 사고 이후 2011년부터 계속 있는 1959년생 마츠무라 나오토라는 일본 남성이 있다.[16] 동물들을 돌본다고 떠나지 않았고 흡연자인 데다 오쿠마마치에서 재배하는 식물을 매일 먹는데, 건강검진을 해도 건강은 멀쩡하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것이, 치사량의 고선량 방사능을 한번에 피폭당하면 당연히 빠른 시일 내에 죽지만 오랜시간 저선량 방사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누적되는 피폭은 피폭 뒤 30~40년쯤부터 눈에 띄게 건강에 이상신호가 켜지기 시작한다. 30~40년보다 이른 시기에 이상이 드러날 수도 있다. 방사선 피폭은 바이러스 감염 같은 것이 아니다. 몸의 형태를 유지하는 설계도인 DNA가 부서져 버리는 것.[17][18] 그 상태로 아이를 낳으면 그 부서진 DNA가 그대로 유전되는 것이고 따라서 장애아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자세한 건 방사선 피폭 문서 참고.
당연히 홍보용으로 써먹기 좋아 일본 지방자치단체와 일본, 프랑스 민간 단체에서 정기적으로 기부금이 들어오는데 동물을 돌보는 데 드는 비용과 생활비를 제외해도 1년에 2억원 정도가 남는다고 한다. 완전 시골이라 개인적으로 돈 쓸 일이 없어 도쿄에 사는 딸에게 거의 다 보낸다고 한다.
4. 출장소/연락사무소[편집]
2021년 4월 이후 모든 업무가 신설된 본청사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일부 출장소/연락사무소에서 보건복지, 피난자 관리 등의 업무를 보고 있다.
- 아이즈와카마츠 출장소
- 이와키 출장소
- 주소 :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요시마코교단치 1-43(福島県いわき市好間工業団地1-43)(우편번호 : 970-1144)
- 전화 : +81-120-26-5671
- 팩스 : +81-246-36-5672
- 나카도리 연락사무소
- 주소 : 후쿠시마현 코리야마시 키보가오카 11-40(福島県郡山市希望ヶ丘11-10)(우편번호 : 963-8035)
- 전화 : +81-120-24-1013
- 팩스 : +81-24-98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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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계인구 2021년 8월 1일 기준.[2] 한때 1만명 이상의 소도시로 규모를 유지했으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다.[3] 2021년 7월 1일부로 후쿠시마현 공식 홈페이지에서 후타바군 후타바마치를 제외한 나머지 정촌은 인구조사가 재개되었다.[4] 후쿠시마 현의 해안 지방[5] 현재의 이와키시 남부.[6] 현재의 미야기현 와타리정[7] 도쿄에서 시작되어 미야기현으로 향하는 현재의 일본 국도 6호선.[8] 2004년 12월 27일에 이곳에 위치한 후쿠시마 현립 오노 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지역 병원의 의사의 부족과 진료기구 부족으로 인하여 임산부 1명이 제왕절개 수술 도중 사망한 사건이다.[9] 사진을 보면 거리에 타조가 1마리 있는데 원전 사고 이후 사육시설에서 길러지던 것이 방치되며 탈출한 것이다. 해당 타조는 마을의 다른 동물들과 함께 마츠무라 나오토(1959년생)라는 남자에게 보살핌받고 있다. 도쿄에서 거주하다가 원전 사고 이후 고향인 오쿠마마치에 내려와 버려진 동물을 돌보며 오염구역에서 살던 나오토는 여전히 동물들을 돌보며 살고 있고 오히려 코로나19 때문에 원래 살던 도쿄에 못 가게 되었다.근황 당연하지만 방사능 위험구역에 살고 있는 만큼 점점 몸이 안 좋아지고 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가족들도 그와 접촉하길 꺼린다고 한다. 그럼에도 동물들을 위해 스스로 죽어가는 길을 택한 것을 보면 상당한 군자.[10] 2020년 기준으로 일부 지역의 피난지시가 해제되었다.[11] 특정 건물은 층별로 스트리트 뷰가 존재하는데 다른 층으로 이동하고 싶을 때는 지도에 나타난 스트리트 뷰의 다른 실내지도 점을 클릭하면 된다. 이외에도 주변 마을의 몇몇 공공기관도 실내지도를 찍은 것으로 보인다.[12] 구글지도와 보건실에 붙은 유인물을 잘 보면 고교가 아닌 중학교이다.[13] 칠판에 3월 11일 금요일이 FRY로 적혀 있다.[14] 당시 졸업생들의 생년은 2010년에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95년생. 강당에 의자가 널브러져 있고 졸업식이라고 쓰인 플랜카드와 화분들, 단상이 무대에 세워져 있는 등 졸업식의 흔적이 있다. 강당에 걸린 졸업식 플래카드[15] 때문에 방호복 없이 들어갔다고 100% 사망까지는 안 간다. 그래도 방사능은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긴 하니 안 가는 게 좋다.[16] 2011년 대지진 당시 52세.[17] 따라서 한번에 심하게 피폭되어 DNA가 전부 박살나게 되면 2주~8주에 걸쳐 몸이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물론 의식도 통점도 전부 살아 있는 상태로. 피부나 뼈의 문제가 아니라 피부와 뼈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유지되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DNA가 근본적으로 파괴된 상태인데 21세기 의학기술로는 한번 부숴진 DNA를 복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에 이를 막을 방법 또한 없다.[18] 저선량 피폭은 DNA가 전부 파괴되진 않고 일부만 파괴되는 것인데 DNA는 배아일 때부터 인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러한 DNA의 일부 파괴가 신체에 언제 어떤 이상증세를 가지고 오게 될지는 미지수. 당장 겉보기엔 멀쩡할지 몰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