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누마 기이치로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 제3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2. 생애[편집]
1867년에 오카야마에서 하급 사무라이 히라누마 신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872년에 도쿄로 상경하여 영어, 한문, 산술을 공부한 후 1878년 도쿄대학 예비학부[1] 에 입학했고, 1888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2] 졸업 후에는 사법성으로 진출하여 출세가도를 타기 시작했다. 1908년 형법개정으로 설치된 범죄자이동식별법 조직회의 멤버가 되어 히라누마는 자신의 보고서로 지문에 의한 범죄인 등록제를 추진했다. 그러다가 1910년 덴노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히라누마는 검사로서 고토쿠 슈스이 등 피고들에 대한 사형을 구형했다. 1912년부터 1921년까지 3대에 걸쳐 무려 9년간 일본 검사총장을 역임했으며 재임 중 지멘스 사건을 수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른바 관념우파라고 하는 국수주의계 보수주의 일파[3] 의 수장으로서 사법계와 추밀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고관들만을 상대로 한 그의 정치활동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는 와카쓰키 내각과 하마구치 내각,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를 맹렬히 비난해서 이들의 반감을 샀고 특히 차기 수상후보를 점찍을 힘이 있었던 사이온지의 진노를 크게 산 까닭에 정당정치가 붕괴한 후에도 수상후보가 되지 못한 채 추밀원 부의장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다가 전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놓고 무책임하게 사임해버리자, 추밀원 의장[4] 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유아사 구라헤이의 추천을 받아 총리로 발탁되었다. 일단 집권하자 히라누마는 종전의 과격한 국수주의를 누그러뜨리고 대외정책에 골몰했다. 당시 독일은 일본과 정식적인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계속해서 러브레터를 보내고 있었고, 히라누마는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미와의 대결구도로 흘러가는 것만은 피하고자 이를 유보했으나 독일과의 대소공조만은 계속 유지하려고 했는데, 이것에 불만을 품은 군부는 천진에서 일어난 한간 암살사건을 빌미로 천진조계를 봉쇄하는 이른바 천진사건을 꾸며내어 영미를 자극하는 등의 공작을 펼쳤고, 히라누마는 이후 종전까지 군부와 혁신우익의 암살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아무튼 이런 까닭에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히라누마의 외교 정책은 완전히 붕괴하였다. 그간 일본과 군사동맹을 체결하려고 접근해왔던 나치 독일이 갑자기 일본의 제일 적국인 공산주의 소련과 서로 침략하지 않겠다는 독소 불가침조약 발표를 해버리자 히라누마는 충격을 받았고 그 유명한 구주천지 복잡괴기, 즉 "유럽 천지가 복잡괴기하게 되어 신정세가 생겨났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여 기존 정책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정책수립을 할 필요가 생겼다"는 등의 입장을 밝히면서 내각총사퇴를 하기에 이른다. 마침 같은 시기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패배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발려버렸다. 그래도 사임 후에도 종전까지 중신으로서 일본의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히로히토 천황의 비공식적인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중신(重臣)[5] 이라고 부른다 . 1945년 4월 다시 추밀원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패전 직전 항복을 결의한 어전회의에서도 중신이자 추밀원 의장자격으로 참여해서 '국체수호가 보장되지 않으면 항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6] 궁성사건 당시 반란군에 의해 사택이 불타기도 했다.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친영미파라는 것. 패전 이후 도쿄 전범 재판에서 히라누마는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러나 1952년에 질병으로 가석방되었고 병이 깊어져서 가석방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하였다. 향년 85세. 참고로 그의 위패는 1978년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자민당 의원인[7] 히라누마 다케오가 그의 손자인데, 친손자는 아니고 양자이다.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평생 독신이었기 때문에 직계자손이 없다. 실제 혈통은 형의 손녀의 아들.
3. 매체에서[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7 16:24:53에 나무위키 히라누마 기이치로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칭 당시 제1고등학교로 분리되었으나 1949년 신제 도쿄대학에 재통합되었다.[2] 현 도쿄대학은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이 개교 당시의 도쿄대학을 구제 도쿄대학, 현재를 신제 도쿄대학으로 구별해 부른다. 도쿄대학은 1886년 제국대학으로 개칭되었으나 1897년 교토제국대학이 개교하자 제국대학 간 구별을 위해 도쿄제국대학으로 또 한 번 개칭되었다. 그러나 종전 후인 1947년 제국대학령이 폐지되어 식민지를 제외한 각지의 제국대학들은 '제국'이 삭제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 구제고등학교들을 각각 통합하여 모두 신제대학으로 개편되었다. 히라누마가 졸업할 당시는 도쿄제국대학으로의 개칭 전이니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었다.[3] "파시즘 그거 유럽놈들 사상 아니냐? 우리는 우리 식으로 혁신을 해야하고 파시즘은 배격대상이다."라고 주장하던 양반들이다. 일본군 육군의 황도파와 많이 연루되었다. 소련을 일본의 제일 위협으로 본 황도파와 사회주의를 불구대천원수로 취급하던 관념우파의 쿵짝이 잘 맞아떨어진 것으로 이와 반대로 통제파와 혁신우익들은 소련의 통제경제를 선망하거나 적어도 연구의 대상으로 보았다.[4] 사실, 추밀원 부의장으로 오래 재직하였고, 전임자였던 이치키 기도쿠로가 워낙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라누마의 헌법관이 천황주권론자인데다, 극렬 파시스트였기 때문에 추밀원 의장직을 계승하지 못했다. 의장이 된 것은 파시스트 단체인 국본사를 떠난 뒤였고, 그나마도 천황에게 자신은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맹세를 한 다음에야 가능했다.[5] 과거에는 원로(겐로)라 부르는 유신과 이토 히로부미, 가쓰라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총리를 지낸 사람들이 천황을 보좌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고령으로 점점 세상을 떠나자 천황은 사이온지에게 원로의 추가지명을 위한 추천을 부탁했다. 그러나 사이온지가 '더 이상 원로는 필요없습니다.'라면서 거절하였고, 사이온지 사후에는 히라누마와 같이 총리나 추밀원의장 등을 역임한 전직 고관들이 중신이라는 이름으로 천황을 보좌하게 된다.[6] 국체는 천황제를 의미한다. 당시 일본제국이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에 대해서, 다른 조건들은 하나씩 포기하면서도 끝까지 고집했던게 천황제였다. 이미 1945년에 접어들면 패전은 기정사실이라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끝까지 천황제에 대한 미련 때문에 결단을 못내리고 질질 끌다가 결국 소련의 참전과 핵무기를 본 뒤에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히라누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천황제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7] 중간에 일어나라 일본 → 일본 유신회(2012년) → 차세대당을 거쳐 자민당으로 돌아왔다.[8] 전 타이완 총독이다.[9] 내각에서 사퇴한 것은 아니다. 원래 농상무대신과 사법대신을 겸임하고 있었고 사법대신만 그만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