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보나파르트/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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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깃거리
2. 불규칙적인 수면
3. 평상시 일상
4. 식사 습관
5. 미식
8. 벳시 발콤
9. 한국 관련 일화



1. 이야깃거리[편집]


  • 파일:France_1803-04-A_20_Francs.jpg
    20프랑 금화에 새겨진 나폴레옹.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 제1통령 시절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 밑에는 혁명력 12년 (AN12, 서력 환산 시 1803년 9월~1804년 9월)이라고 새겨져 있다. 또한 이후 발행분에서 점점 머리숱이 적어지고 살이 찌는 것도 도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이탈리아어어로는 Napoleone di Buonaparte (나폴레오네 디부오나파르테), 프랑스어로는 Napoléon Bonaparte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코르시카어로는 Nabulionu Bonaparte (나불리오누 보나파르테)라고 부른다.

  • 나폴레옹을 신으로 숭상한 니콜라 쇼뱅(Nicolas Chauvin)의 일화에서 맹목적인 애국심을 뜻하는 쇼비니즘(chauvinism)이란 용어가 나왔다. 다만 쇼뱅은 가공인물로 여겨진다.

  •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정찰을 하던 도중 잎이 네 개인 클로버를 발견하고 신기하여 고개를 숙였더니, 총알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뚫고 지나갔다는 에피소드 덕분에 네잎 클로버가 행운의 상징이 되었고, 나폴레옹이 전장에 나설 때마다 늘 도서관 마차를 만들어 끌고 다니면서 책을 읽는 애독가였다는 사실은 뭇 책벌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1] 다만 한 번 읽은 책은 보관하지 않고 길가에 내던져 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지나가던 사람이 주워보고 똑같은 감동을 느끼라는 의미의 행동이었다고 한다.

  •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집트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들어가 잤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어떻게 된 일인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무서운 듯이 피라미드에서 뛰쳐나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앞으로 피라미드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마라!"였다고 한다. 이후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당한 뒤 친한 친구들이 나폴레옹에게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봤냐고 물어보자 뭔가를 말하려던 나폴레옹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손을 저으며 '됐어. 어차피 말해봤자 안 믿을게 뻔한데 뭐하러 말하겠냐'라고 했다고 한다.[2] 여러 주장들 중 하나를 말하자면 나폴레옹이 피라미드 안에서 본 것은 바로 자신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폴레옹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죽고 없으니까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기에 학자들도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여하간 그냥 그런 떡밥이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수행비서였던 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의 글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7월 14일, 나폴레옹은 피라미드를 둘러보기 위해 카이로를 떠났다. 원래는 멤피스의 네크로폴리스 고대 유적을 삼사일간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가 갑자기 계획을 바꾸었다. 이때의 피라미드로의 여정은 전쟁과 맞물려 한 가지 로맨틱한 일화를 낳게 내게 되는데, 일부 원주민들이 나폴레옹이 이슬람 율법학자들을 접견한 것과 연관 지었는지 이야기하고 다니길, 그가 피라미드 안에 들어서자 '알라께 영광을! 신은 오직 알라뿐이며 무함마드는 그의 선지자다!'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에 들어간 적도 없다. 심지어는 들어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막에서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났던 적이 없으므로 만약 그가 피라미드에 들어가 보았다면 나 역시 따라 들어갔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밖에 있는 동안 몇 사람을 시켜 대 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보게 한 뒤 그들이 돌아오자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물었다. 그들이 보고하길 '아무것도 볼 게 없었습니다!'라고 했다."[3]

  • 수학과 과학에 상당한 조예와 관심이 있었던 듯, 이집트 원정 때도 아예 현지 학술원을 만들기 위해 명망있는 학자들을 끌어모아 동행시켰으며 현지에서 이 학자들과 여러 차례 학술적 토론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단순한 토론 정도가 아니라 '이집트지'라는 이집트학 학술지까지 현지에서 만들게 하고 거기 참여하기도 했다. 이 '이집트지'는 근대적 이집트 고고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개중엔 "내가 군인 말고 학자를 했으면 아이작 뉴턴[4] 정도로 대성하지 않았을까?"라고 던졌더니 학자들이 "님이 아무리 뛰어나도 뉴턴만큼은 아님"이라 대답해 빡쳤다는 일화도 있다. 단,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게 별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1800년 전후 프랑스에서 가장 수학과 과학에 정통했던 집단이 공병과 포병 장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한가락 했다 하는 프랑스 수학자나 물리학자들 명단을 보면 죄다 에콜 폴리테크닉[5]에서 공부하고 군에서 공병이나 포병 장교로 복무한 경력이 있다. 군대에서 응용되는 공학기술(축성술, 탄도학, 대포 제조법 등)의 기초로 수학이나 과학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는 기관이 공병/포병 장교 사관학교뿐이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됐듯이 나폴레옹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정통 포병 장교 출신이다. 당연히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수준의 수학, 과학, 공학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유명한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저서들에 직접 주석을 달기도 했다고 한다.[6]이렇게 전문 학자 수준으로 수학, 과학 지식을 갖추고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탓에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탈출해 프랑스 황제 자리에 복위했을때 수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나폴레옹의 황제 복위를 가장 지지했다는 말이 있다.

  • 위의 '이집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관심과 재능은 수학-과학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역사적인 관심과 교양 또한 뛰어났으며, 젊은시절 루소의 계몽주의적 작품에 심취하여 문학 공모전에도 출품을 시도하는 등 인문학적인 소양도 상당할 정도로 가지고 있는, 말 그대로 다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인물이었다.

  • 괴테의 열렬한 팬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전쟁터에서도 가지고 다니며 7번이나 읽었고 괴테를 직접 만나 환담을 나누었다. 실제로 연애소설같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아예 직접 연애소설을 쓰기도 했다. 소설 이름은 《클리송과 외제니》.

  • 백년전쟁 당시 위기에 몰린 프랑스를 구한 업적에 비해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무명인 취급 받으며 잊혔고, 공화파로부터는 더욱 천시 당하던 잔 다르크를 다시 부각시켜 영웅시한 것도 나폴레옹의 집권 시대 때이다. 자신과 잔 다르크가 벽지 출신이고 대포를 주무기로 다뤘으며 영국과 맞섰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내세웠다. 잔 다르크가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는데 나폴레옹에 의해 조작되고 부풀려진 영웅이라는 일부 수정주의적 인식도 다소 과장된 면이 있다. 자세한 건 잔 다르크 항목 참조.

  • 종교에 대해서 거의 이신론에 가까운 견해를 가졌다. 물론 혁명 정부가 가톨릭과 노골적으로 척을 지다가 오히려 정치혼란을 불러일으켰던것을 반면교사 삼아서 비오 7세와 협약을 맺고, 가톨릭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서이지 없던 신앙심이 생겼던것은 아니라서, 국가가 종교위에 있다고 표방해서 비오 7세와 노골적으로 불편한 관게를 가졌으며, 그는 '인간의 필요성이 종교를 탄생시켰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7]

  •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본 것과 달리, 이슬람교에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군인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도 자리잡는 데만 수백 년이 걸린 기독교와 다르게, 단 몇십 년 만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페르시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이야 말로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생전에 아무것도 못 이룬 예수보다는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시작해서 아라비아 반도를 평정하고 통치자가 된 무함마드야말로 훨씬 유능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집트 원정 때도 개종을 고려하기도 했으며, '동방의 영토와 부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개종 따윈 몇 번이고 할 수 있다'고 발언하였다. 물론 신앙적인 이유에서 개종하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슬림 사이에서 평가는 엇갈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은 이집트에서의 평가도 좋지 않지만, 그래도 유배기간 중에도 무함마드를 높이 평가했던것을 보면 통치자 및 군인으로써 존경했던것은 확실해보인다.


  • 유배지에서의 공책이 경매에 올랐는데 영어 공부[8]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기사 그런데 잘하지는 못했다. run의 과거형은 ran인데 runned라고 우직하게 한 페이지를 채워놨다고 하며 프랑스어 je(나)에 의한 언어 간섭인지 I(나)는 반드시 j로 썼다고 한다. 영국 정복에 성공했으면 불규칙 변화를 모조리 없애 버리고 ran을 runned로 바꿔버리는 세계적 대업적을 이룩하지 않았을까.[9][10][11]영어 공부가 쉬워질 수 있었는데 아쉽다 영어 공부가 아니라 프랑스어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프랑스 프랑 지폐에 등장한 인물 중 하나다.


  • 2014년 11월 16일에 모나코 왕실에서 보유 중이던 나폴레옹의 이각모를 경매에 내놓았는데 하림그룹김홍국 회장이 낙찰 받았다. 기사. 세계에서 나폴레옹 모자를 소유한 민간인은 단 2명뿐인데 그중 한 명이 됐다. 일본인과 경매 배틀이 붙어 무려 26억 원을 주고 샀는데 문제는 주가가 하락하던 중에 이런 것. 물론 회삿돈이 아닌 개인돈으로 샀으니 법적으로 문제삼을 수는 없지만 나폴레옹 모자 외에도 나폴레옹이 사용하던 검에서부터 은잔, 훈장, 나폴레옹 초상화까지 경매로 11억원을 주고 사서 외화를 낭비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 다만 김홍국 회장은 젊은이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 정신을 전파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 사업목적에도 미술관 및 박물관 운영을 추가했다.

국제학술대회 등지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던 이 모자는 현재 판교테크로밸리 하림 계열사인 NS홈쇼핑 별관 1층 나폴레옹 갤러리에 나폴레옹의 검 등, 몇몇 전시품과 함께 무료로 상설 전시되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넥슨코리아, 네오위즈, NHN본사가 근방에 있으니 이곳에 들릴 방문객이 있다면 둘러봄직 하다.

  • 러시아 요리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케이크가 있다. 하필 러시아 케이크 이름이 나폴레옹인 이유는 1912년, 바로 그 나폴레옹을 박살낸 조국전쟁의 승전 100주년을 기념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모자 모양을 따서 만든것이 시초라고 한다. 즉 승자의 여유.

  • 유명한 야구선수 중에도 이름이 나폴레옹인 선수가 있다. 바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2루수 중 하나인 냅 라조이로, 본명이 나폴레옹 라조이다. 선수명은 나폴레옹의 Nap 부분만 따서 냅이라 붙인 것. 조상이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캐나다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부모와 가족들이 실제 이 항목의 나폴레옹을 좋아해서 지었다고 하며, 이름에서 프랑스계인게 티가 나서, 선수시절 선수들 사이에서의 별명도 "프랑스인(The Frenchman)"이었다.

말 위에서 도시를 살펴보는 황제를 - 그 절대 정신을 - 나는 보았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독일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절대 정신(absoluter Geist)이란 개념을 만들었으며, 나폴레옹이 독일을 집어삼켰음에도 그를 절대 정신의 화신으로 보며 찬양했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절대 정신이 나폴레옹이 이룰 혁신들을 통해 구현되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 나폴레옹의 대관식 초상화에 셉터와 같이 등장하는 흰색 손가락 모양은 '정의의 손'이라는 것이다.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 나폴레옹 외의 초상에서도 가끔 보인다. 본래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내려온 상징으로서 보석으로 만들었지만 프랑스 혁명기에 분실되어 상아로 만들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덴마크 왕국에서는 그를 흠모하여 참전한 한 구두 수선공 출신 병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통에 신경 쇠약에 걸렸고, 고향에 돌아간 뒤 얼마 못 가 사망하고 만다. 이때 아버지의 죽음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그의 아내는 어린 아들에게 눈의 요정이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말했는데, 그 병사의 아들이 바로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한 이 말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눈의 여왕의 창작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 언론에 대한 태도가 미묘했다. 일단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시기의 프랑스에서는 신문들이 기사를 펴내기 전에 미리 검열을 받아서 그에게 비판적인 내용의 기사들은 실릴 수가 없었다. 다만 나폴레옹 자신은 지나친 아부를 하는 기사들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집권한 이후에 나온 어느 신문에 나폴레옹의 조상들을 줄줄이 열거하며 찬양하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는데, 이튿날 그 신문에 누군가가 익명으로 "이런 재미도 없고 유익하지도 않은 기사는 도대체 왜 신문에 실었느냐?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는 투고를 올렸다. 그 투고자는 익명을 빌린 나폴레옹 본인일 것이라는 추정이 유력하다.


2. 불규칙적인 수면[편집]


나폴레옹은 잠을 효율적으로 자는 자의 대명사로 꼽히기도 한다. 3~4시간만 자고 부족하다 싶으면 위에서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는데, 사실 당시 장교들이 전쟁 중에 맘 놓고 자기 힘든 상황이었으니만큼, 좀 과장된 면도 없잖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항상 자기가 잔 것보다 적게 잤다고 생각했다는 식의 말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당대 기준에서 봐도 수면 부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 젊은 시절부터 마치 발작하듯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바로 잠들어버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잠을 결코 적게 자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사관학생 시절, 다들 코르시카 촌놈이라고 무시했지만 브리엔이란 동기만 유일하게 친하게 지냈고 이 인연으로 부관이 되었던 브리엔이 남긴 기록을 봐도 불면증 때문에 못 잔다고 투덜거린 게 많았다고 한다. 브리엔은 나폴레옹빠였지만 늘그막까지 나폴레옹이 잠을 적게 잤다고 하면 왜곡하지 말라며 반론했다. 그 밖에도 프랑스 사학자 Roger Chartier의 연구에 의하면, 야간의 수면 시간이 2~3시간이었을 뿐, 1일 동안 토막잠을 잔 시간까지 합치면 6시간 이상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불규칙한 생활 덕분에 불면증까지 겹쳤기에 적게 잤을 뿐이지, 노력근성으로 졸음을 참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저렇게 수면이 불규칙적이다 보니, 한번 잠이 들면 주변에서 깨우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한다. 한 번은 연회 도중에 잠든 나폴레옹을 깨우려고 측근들이 그가 좋아하는 치즈를 가져다 줬는데, 그 냄새를 맡던 나폴레옹이 돌연 '오늘은 피곤하니 안 되겠소 조제핀'이라 잠꼬대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체취와 치즈 냄새도 구분 못할 만큼 넉다운 되었다는 이야기.[12]

한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수면에 관련한 광고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광고에서 간과한 것이 있는데, 보나파르트 가문은 코르시카의 귀족이었다. 나폴레옹의 직계 조상인 자코보 부오나파르테는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메디치 가문의 친구이자 측근이었고, 15~16세기에는 르네상스 피렌체의 상당히 힘 있는 명문가였다. 16세기 후반에 정권 다툼에 휘말려 코르시카로 망명을 갔으나, 코르시카에서도 지방 귀족 가문으로, 비록 섬 밖에서 크게 떵떵거릴 위세는 아니었지만, 현지에서는 상류층에 속했으며, 경제적 사정도 아버지의 사치만 빼면 그럭저럭 잘 살았다. 나폴레옹의 아버지 카를로 부오나파르테는 코르시카 독립 혁명가 파스콸레 파올리의 동지였으며, 루이 16세의 궁정 내 코르시카 대변인이기도 했다. 가문이 살던 현지의 부오나파르테 저택은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며, 인근에는 나폴레옹의 조상들이 매년 사용하던 가문의 여름 별장도 따로 있다. 이런 배경이 있었던 덕분에, 나폴레옹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으며 일찍부터 큰 세상에 발을 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나폴레옹의 유년 시절은 결코 빈곤하지도, 처량하지도 않았다. 그가 활동한 프랑스 본토에서야 어찌 되었건 프랑스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외딴 섬 촌놈이라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였던 거지, 나폴레옹의 배경을 현대로 치면, 한국에서는 차관급이나 중견기업 집안 출신인 사람이 미국에 좋은 사립대학에 유학갔는데 주변인들은 미국의 장관급이나 포춘 500대 기업의 집안 출신이라 상대적 빈곤감을 느꼈던 셈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나폴레옹 잠(혹은 수면)'으로 검색하면 \'나폴레옹 수면법'이라는 출처불명의 유사과학 같은 헛소리까지 내보내서 마치 나폴레옹이 잠을 컨트롤해서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기도 하며,[13] 이 수면법을 자신에게 정착시키는 동안에 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규정해놓고는 하는데, 정작 이 중에선 나폴레옹이 즐기던 목욕 역시 금지되어 있다고 하니 신빙성이 떨어지는 요법이다. 일부 책에서는 나폴레옹이 바보는 6시간, 여자는 5시간, 남자는 4시간을 잔다는 말을 했다고 쓰기도 했다. 남녀노소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늦어도 10~12시에는 잠자리에 들어 6~10 시간 이상 자야 한다.[14]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런 불규칙적이고 부족한 수면으로 건강을 망쳐서 워털루 전투 같은 큰 전투에서 패인(敗因)이 되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숨긴다. 그리고 비교적 1년 정도 짧은 시간에 공부에 전력매진해야 되는 입시생이라면 모를까, 일반 성인이 이따위 짓을 하다가는 건강을 해칠 뿐더러 운전자에게는 졸음운전까지 유발하는 그야말로 자살, 민폐행위나 다름 없다.[15]


3. 평상시 일상[편집]


나폴레옹은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났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두 시간 동안 욕조푹 잠겨 있으면서 비서가 읽어 주는 영국독일 신문의 번역본을 듣거나, 비서에게 자기가 불러 주는 편지를 받아쓰게 했다.[16]

그 후에는 아침을 먹을 때까지 탄원서를 처리하거나 종종 탄원자 본인과 면담을 했다. 하루는 기술학교(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을 거부당한 한 유망한 젊은이가 겁도 없이 무작정 황궁으로 찾아와 나폴레옹을 알현하게 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나폴레옹은 즉석 면접을 본 뒤 교장은 이걸 읽는 즉시 이 청년을 입학시키라는 친서를 써 주었다.

아침 10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오후 5시에 저녁을 먹었다.

여가 시간에는 사냥의 명수였던 베르티에 원수와 함께 코르시카식 토끼 사냥을 즐겼다. 한 번은 담당관이 실수로 길들여진 토끼들을 사오는 바람에 토끼들이 나폴레옹에게 몰려드는 일도 있었다.

부하들과 카드놀이를 하기도 했는데, 황제가 되고 나서는 종종 밑장을 빼곤 했다. 이젠 자기가 황제니 눈치채도 판을 엎기는커녕 티도 못 내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황제만 아니었어도 오함마로 손모가지 날아갔을 것이다.

연극 매니아라서 생클루와 말메종의 양쪽 황궁에 모두 황제 전용 극장을 지을 정도였으나 오페라 매니아였던 조제핀과는 영 취미가 맞지 않았다.

연회자리에서 흥겨우면 종종 친히 노래를 하곤 했는데 장앙도슈 쥐노장군의 부인이었던 '로르 쥐노'가 회고하기를 나폴레옹이 노래를 불렀다 하면 연설을 할 때의 그 근사한 위엄있고 매혹적인 목소리는 대체 어디로 간건지 도축장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꽥꽥거려서 연회의 분위기가 백이면 백 싸해졌다고 한다.[출처]


4. 식사 습관[편집]


잘 먹고 싶을 때는 캉바세르[17]의 집에 가서 먹어라.(식사 소요 2시간 30분.)
못 먹으려면 르브룅[18]의 집에 가서 먹으면 된다.(식사 소요 30~40분.)
빨리 먹고 싶으면 내가 있는 궁전으로 오게나.(식사 소요 5~7분.)

식사 습관도 지금 기준에서 보면 문제가 엄청 많은 편인데, 황제가 된 뒤에도 10분 이상 식사하는 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무척 빨리 먹는 편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현대 프랑스인의 평균 식사시간의 1/4 정도다. 메뉴도 간소해서 보통은 간단하게 조리한 고기, 완두콩이나 감자 등의 채소, 치즈 약간에 가끔 과일을 먹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 밖에는 디저트로 아몬드커피를 좋아했다고.

게다가 귀족 출신이 맞기는 한 건지, 식사예절은 거의 무시하고 식탁에 앉아서도 꾸벅꾸벅 졸면서 대충대충 먹어치우고 곧바로 소파나 침대에 누워 곯아떨어질 때도 자주 있었다고 하는데, 선천적으로 위장이 약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나쁜 식생활로 인해 건강이 당연히 나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대식가라서 식사량이 많았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틀린 말이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다만 원정으로 인해 식사 시간이 불균형하고 말 위에서 한 손으로 빵 한조각으로 금방 식사를 마치거나, 소금 간을 한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가 문제였다.

세인트헬레나로 쫓겨났을 때 불과 46세였는데, 그로부터 6년도 못 살고 51세에 죽은 것도 이전부터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 제대로 관리도 하지 못한 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포로로서 유형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끌려가는 영국 군함 노섬버랜드호에서도 이 습관을 그대로 고집했다고 한다. 상대가 명성 높은 군인이자 전직 황제이다보니 하루는 영국 군함의 함장이 나폴레옹을 식탁에 초대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영국 해군의 전통에 따르면 식사자리에서는 함장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허나 나폴레옹은 아무 말 없이 후다닥 음식을 집어먹고는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하면서 벌떡 일어나 나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석했던 함장과 영국 해군 장교들이 모두 아연실색했고, 워털루 전투의 패배가 아직도 사무쳐서 우리하고 말도 섞기 싫은 게 아니냐고 오해를 산 적도 있었다.[19]

결국 이러한 수면 부족과 급히 먹는 식습관이 훗날 건강에 크게 악영향을 주고 몇몇 중요한 전투에서 패인으로 작용했다.


5. 미식[편집]


나폴레옹이 평상시에 무엇을 먹었는지는 몇몇 기록들로 대략 알 수 있고, 그것이 부르봉 왕조 때와 어떻게 달랐는지도 알 수 있다. 음식 취향은 매우 소박해서 빵, 염장버터, 감자튀김, 물에 탄 와인을 곁들인 빠르고 간편한 식사를 선호했다.

전속 주방장은 그냥 따뜻한 수프와 푹 익혀 삶은, 얇은 쇠고기 한조각을 더 좋아할 때가 있었다고 전했다. 아침으로 삶은 달걀이나 감자, 토끼고기나 닭고기로 만든 커틀릿, 삶은 토끼고기나 닭고기와 함께 렌틸콩을 넣은 샐러드 등을 간단히 먹기도 했다. 하지만 먼저 먹는 수프를 빼면 아침에 먹는 요리가 2가지를 넘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식사를 담당했던 부서에 전달된 지침서를 보면 포타주, 세 가지 앙트레, 두 가지 앙트르메, 두 가지 빵을 준비해서 튈르리궁에 있던 조제핀 황후의 거처로 내와서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여기에 나폴레옹이 생전까지 좋아했던 샹베르탱 와인 한 병을 내가면 끝이었다.

그런 나폴레옹조차도 저녁은 부하들이나 다른 궁정 식구들과 함께 먹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라도 좀더 풍성한 저녁 식탁을 차리도록 했다. 그러나 그런 저녁 식탁에서도 나폴레옹 본인은 굽든지 삶든지 해서 아주 간소하게 요리된 고기와 채소 한 접시씩만을 먹었다.

채소라고 해봐야 콩이나 감자 같은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은 특히 감자를 매우 좋아해서 굽든 삶든 튀기든 감자라면 다 잘 먹었다. 식사의 마무리는 치즈 한조각을 먹었다. 주로 까망베르, 리코타, 로크포르(Roquefort) 또는 파마산(Parmesan) 치즈가루를 택했다.

나폴레옹은 끼니 때 갑자기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하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이때는 그저 있는 재료로 준비해 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한 종류의 포타주, 두 가지 를르베, 콜드 컷, 네 가지 앙트레, 두 가지 로스트 요리와 네 가지 앙트르메, 네 종류의 오르되브르, 두 종류의 샐러드, 6가지 빵, 나폴레옹이 즐기는 샹베르탱 와인 6병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연회를 열기는 했지만 그 규모가 몇몇 지방 시청 관료나 초대된 손님만이 참석하는 정도의 아주 작은 규모였던 점을 미루어 보면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의 공식 연회 만찬을 계승하거나 복원하려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은폐된 생활을 했고, 후일 세인트헬레나에서 그러한 생활을 했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당연히 미식도 즐겼다. 그가 매우 아꼈던 둘째 여동생 '폴린 보나파르트'는 오빠는 어렸을 적부터 감자와 토끼고기, 닭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로스트 치킨, 치킨소테, 닭고기 살 크넬, 볼로방 페이스트리 치킨파이, 프로방스식 치킨, 백포도주나 샴페인으로 디글레이즈한 닭고기나 토끼고기 볶음, 달걀물을 풀어서 빵가루를 입혀서 버터에 녹인 후라이팬에 요리한 토끼고기나 닭고기 커틀릿 등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특히 즐겼던 디저트는 바로 아몬드였다. 보통 한 접시를 거의 다 혼자서 비웠다고 한다. 그래서 조제핀 황후가 아몬드를 너무 과식하지 말라고 자제시키기도 했다.

꿀이나 잼, 설탕 등의 단맛 자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드물게 과일을 먹을 때도 있었는데 새콤달콤한 과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사과나 배 1/4 조각 정도만 먹거나 포도 약간을 먹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또 둥글게 말아 리코타 치즈를 넣은 이탈리아식 카놀리(Cannoli)를 매우 좋아했다. 전통 카놀리는 다양한 종류의 달콤한 잼을 리코타 치즈와 같이 넣어서 먹는데 나폴레옹은 잼을 빼고 리코타 치즈만 넣은 카놀리를 더 선호했다.

또 당시 프랑스 신사들처럼 식사 후 입가심으로 코냑 같은 독한 증류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물이나 샹베르탱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따라서 "쿠르부아지에"코냑은 나폴레옹이 자주 마시고, 좋아했다는 말은 허풍일 가능성이 높거나, "쿠르부아지에"를 인수한빔 산토리의 크게 부풀린 과장광고일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귀향 갈 때도 이 쿠르부아지에 코냑을 가져가 외로움을 달랬다 하는데,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폴레옹이 생전까지 좋아하고, 엘바 섬, 세인트헬레나 유배지에서 유배생활, 그 유배지에서 그의 임종을 얼마 남지 않았을때, 숨을 헐떡거리며, 목이 마르다고 포도주 한모금 달라고 시종에게 말할때도 애용한 건 바로 부르고뉴 지역 디종의 바로 아래쪽 조그만 포도농장에 재배해서 만든 쥬브레샹베르탱 (Gevrey-Chambertin)와인 이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마지막 부탁인 샹베르탱 와인 한모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신 아편을 섞은 강력한 진통제 한 숟가락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샹베르탱 와인은 유배생활 동안 이미 한참 전에 모두 소비해서 진작부터 없었다. 나폴레옹도 이미 진작에 알고 있었으면서 부탁을 한 걸 보면……

그리고 나폴레옹은 코냑 같은 독한 브랜디는 절대로 입에 대지도 못했고, 매우 싫어했다. 애초에 코냑의 알코올 도수는 보드카 도수에 맞먹는 40도 이상이다. 황제 즉위식 이전부터 평생 위장이 좋지 않은 사람이 이걸 마셨다니... 당연히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위장이 좋지 않아서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샹베르탱 와인도 물에 타 마셨다.


6. 체스[편집]


서구권의 민속놀이 수준이던 체스를 평생 좋아했고 실력은 완전 초보까진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잘한다고도 보기 힘든 아마추어 수준이였다.

오직 공격만이 미덕이라 생각하며 남자의 로망으로 가득한 날빌을 선호했다.[20] 오프닝1.e4를 주로 두었다. 스콜라 메이트를 노리고 초반부터 퀸을 꺼내길 좋아해서 오늘날엔 1.e4 e5 2.Qf3로 시작하는 오프닝을 나폴레옹의 이름을 따 나폴레옹 오프닝이라 부를 정도.[21]

전술은 다음 수에 바로 당하는 포크디스커버드 어택, 같은건 잘 봤지만 스큐어, 기물 과부하같이 한 눈에 봐선 티가 안나는건 눈치를 못챘다고 한다.

정말이지 화끈하게 공격밖에 안했으나 현대 체스에서는 짤막당하기 십상인 수를 자주 뒀고 2수 앞을 못보는 경우가 허다했다. 당연히 이기고 싶기에 선공을 해서 유리한 백을 주로 잡았으며[22] [23] 그러고도 접대 체스가 아니면 지는 경우가 많아 전쟁을 잘하는 사람이 체스나 바둑같은 보드 게임을 잘하는건 아니라는 대표적인 예시가 되었다.

황제가 된 다음에는 승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는데 접대를 해주고 싶어도 나폴레옹이 너무 못한 경우나 눈치가 없는 경우는 나폴레옹이 패배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방은 접대 체스를 해야했기에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이 패배하는 수가 있음에도 일부러 블린더를 둬서 뽕맛을 느끼게 해주었고 보통 그런 전술에 성공하면 기분이 대단히 좋기에 체스두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의 취미가 스타크래프트고 종종 프로게이머들이나 국방부 장관[24]을 불러서 상대방의 종족은 테란으로 고정시켜놓고 4드론을 하는 취미가 있다고 보면 된다.

그 당시 전세계를 상대로 순회 공연을 다니던 최초의 체스 기계와도 체스를 뒀는데 당연히 증기 자동차도 상용화가 덜 된 시대에 인공지능은 따윈 없었고 체스 기계 안에서 사람이 조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폴레옹도 이 사실을 지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기계를 조작하는 사람이 체스를 둔다고 생각했지 기계 안에 체스 마스터가 숨어 있는 줄은 몰랐다고 하며 이 사실은 30년 뒤에나 밝혀졌다. 체스 인형이 첫 수는 체스를 두는 터키인에게 양보하는게 관례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였으나 백말곤 모르던 나폴레옹은 그 졸렬한 성격 어디 안가는지 관례를 씹어버리고 고집을 부려서 백을 잡았다.

이 후 나폴레옹은 평소하던대로 e4를 두고 퀸을 꺼내서 스콜라 메이트를 시도하나[25] 아무리 접대 체스라지만 너 따윈 4수만에 끝내겠다는 나폴레옹의 행동에 기계의 자존심이 상하여 나이트를 전진시켜 쉽게 막아내고 나폴레옹이 의미없는 수를 둬서 시간낭비를 동안 체스 기계는 중앙을 먹었고, 나폴레옹 전술을 못보고 한가롭게 캐슬링을 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스큐어로 나이트를 짤라내고 퀸을 쫓아낸다. 체스 기계는 중앙을 차지하며 계속해서 킹사이드 어택을 했고, 나폴레옹의 퀸은 이리저리 쫒기다가 나이트 포크를 당하여 사라지고, 킹사이드가 완벽히 초토화된 후 나이트와 퀸에게 체크메이트를 당했다. (기보 참조.)기계라 황제의 눈치따윈 보지않은 듯하며 이 이후에 나폴레옹이 똥씹은 표정을 했을지 웃어 넘겼을 지는 불명이다.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폴레옹을 탈출시키려는 추종자들이 체스판에 탈출 계획을 숨겨서 보냈는데 그걸 얘기해줘야 되는 장교가 가는 도중 죽어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탈출 계획이 숨겨진 체스판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사망했다라는 말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세인트헬레나 시절 측근들의 기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탈출계획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 중 하나가 총독 허드슨 로를 죽이려고 계획한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대노하여 그 하인을 혼냈을 정도로 나폴레옹은 물리력을 사용하거나 탈출을 하는 등의 행위를 거부했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을때까지 혼자 체스를 공부하였다. 같이 둔 사람이 없기에 그 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을지는 불명.


7. 나폴레옹의 정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의 정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벳시 발콤[편집]


세인트헬레나에서 나폴레옹과 벳시 발콤이라는 소녀와의 이야기를 다룬 "벳시와 황제"라는 소설이 유명한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대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소설이다. 다만, 나폴레옹이 거주한 롱우드 지역에 발콤이라는 가족이 살았고, 그 집의 자녀인 딸 두 명이 나폴레옹과 친하게 지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이다.[26]


9. 한국 관련 일화[편집]


의외로 조선과 관련된 이야기가 존재한다.

순조 16년(1816년)에 조선 충청도 해안에 영국 범선 두 척(알세스트호, 리라호)이 표류해왔는데, 각각 멕스웰 함장과 바질 홀 함장이 영국 사절단을 청나라 텐진에 내려주고 조선과 유구를 거쳐 영국으로 떠나던 도중 충청도 해안가에 표류한 것이다. 이 중 바질 홀 함장은 조선의 서해 탐사를 마치고, 조선의 여러 풍물들을 그려 책에 담아왔는데, 이후 귀항 도중에 리라호가 세인트헬레나에 들르면서 나폴레옹을 방문한 것이다.

파일:조선사또 이승렬.jpg
1816년 조선을 방문[27]한 영국 해군에서 그린 조선 비인[28]현감 이승렬과 마량진 첨사 조대복 등 부하들의 모습
바질 홀 함장은 군의관인 맥레오드와 자신이 항해기에 그린 조선 관리들의 복식과 풍물을 담은 그림들을 보여주고 나폴레옹에게 '조선은 외국을 침범한 적 없는 평화로운 은자의 나라'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커다란 을 쓰고 긴 장죽을 피고 있는 흰 수염의 늙은 조선 선비의 그림[29]을 보며 '이 긴 모자와 담배가 아주 멋있다, 갖고 싶다' 라고 했으며, '내가 세계를 다시 정복하는 날 꼭 조선을 찾아보고 싶다'라 말했다.물론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고 한다.

자라가 가로되, "너는 우물 안 개구리라. 한 가지만 알고 두 가지는 알지 못하는도다. 지나에서 세상을 주름잡던 초패왕(항우)도 해하성에서 패하였고, 유로바에서 각국을 응시하던 나파륜(拿破崙)해도(海島) 중에 갇혔는데, 요마한 네 용맹을 뉘 앞에서 번쩍이며, 또는 무슨 지식이 있노라고 내 지혜를 헤아리느냐. ... "

한편 당대의 조선에서도 그의 이름과 일대기가 널리 알려졌는지, 판본에 따라 별주부전(토끼전)(!)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수궁 신하들 중 누가 육지에 갈지 옥신각신하는 장면에서 문어가 별주부를 디스하자 별주부가 맞디스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구술로 전해오는 판소리의 특성과 시대상이 잘 드러나는 부분. 이것으로 볼 때 토끼전의 현대적 모습은 최소한 19세기 말 이후에야 정립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사. 다만 나폴레옹이 죽은 후인 개화기 때 유럽흥망사나 유럽의 인물 평전을 다룬 책이 대중에 유행했기 때문에 이본(異本)이 그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링크

이후 최남선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도 나온다.

[1] 그 책들 중에 손자병법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프레데릭 맥슨이 나폴레옹에 관하여 연구한 프랑스의 고서 <나폴레옹과 그 가족>1에 의하면 그렇다.[2] 물론 세인트헬레나 동행인들의 기록들에는 이런 피라미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3] http://www.strangehistory.net/2013/12/02/napoleon-and-the-great-pyramid/, 왜 아무 것도 없었는지는 피라미드/이집트#고고학계의 의문점 문서 참고.[4] 천재적 수학-과학자로 더 알려져 있지만, 신학자이기도 했으며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다.[5] 프랑스 혁명기에 설립된 공병장교 교육기관이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제일의 이공계 교육기관으로 남아 있다.[6] 이 사실은 헤럴드경제 2019년 1월 24일자 기사인 데스크 칼럼 '체리피킹' 리더쉽에 나온다. 정말로 인류 역대 국가원수들 중 가장 뛰어난 수학과 과학지식을 갖춘 사람 중 하나일듯.[7] 그가 벌였던 토론들 중에는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영혼은 언제부터 존재하는가?'등 상당히 추상적인 주제도 꽤 많았다.[8] 라스 카즈에게서 배웠다. 유배지에서는 불어 신문을 보는 게 금지되었기에, 영어 신문이 자신을 어떻게 보도하는지가 궁금했던 듯. 교습 후 얼마 되지도 않아, 아직 어설픈 문법이 군데군데 존재하기는 했으나마 라스 카즈에게 영어 편지를 자주 쓸 정도로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라스 카즈가 섬을 떠나게 되면서 교습은 중단되고 말았다.[9] 이 서술이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세인트헬레나에서의 충복 중 하나였던 '구르고'의 일기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프랑스어를 '완성되지 못한 언어'로 보았다고 한다. 이유는 바로 '불규칙 문법 요소들의 산재'. 그래서 자신의 권력이 좀 더 지속되었더라면 프랑스어는 완벽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runned를 고집한 것 역시 그가 그 정도의 간단한 과거형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문법의 불규칙성'에 반대하는 자신의 언어학적 신념을 에둘러 드러낸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10] '구르고의 일기' 중 1817년 2월 6일 목요일, <황제는 와이이(Wailly)와 레스투(Restout)의 문법책을 읽고 나서 제대로 된 법칙과 방법론이 없다고 했다. 집권하고 있을 때, 학자들을 시켜 프랑스어 문법의 예외들을 줄이기 위한 개혁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프랑스어는 완성되지 못한 언어이다. 내가 완성시켰어야 했다.”>[11] 사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처럼 변화무쌍한 동사 변화가 중요한 언어를 배울 때, 강사들이 흔히 하는 구라 말이 "변화 종류는 많아도 다 규칙이 있어서 쉬워요~"규칙이 없다는 것이 규칙지만 막상 공부하다 보면 '먹다, 자다, 뛰다, 숨쉬다, 생각하다' 등과 같은 일상적인 동사들은 전부 다 일반 동사 변화 규칙에서 '예외'로 처리되어 외우기 힘든 동사 변화 형태를 가지고 있다. 포병 장교로 시작해 산술적으로 모든 게 들어맞는 것을 선호하는, 합리적인 성격이었던 나폴레옹 관점에선 짜증날 법도 했다.[12] 나폴레옹은 조제핀의 체취를 좋아했는지, 도착한다는 편지를 보낼 때 씻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말로 치즈 비슷한 체취가 났던 모양이었다.[13] 이말년씨리즈 잠은행 下下편에서는 막 과장이 된 금봉수가 이자가 너무 세다고 그냥 나가려고 하자 러시앤쿨쿨 직원이 나폴레옹이 잠 시간을 안 빌렸으면 코르시카의 평범한 어부였을 것이라고 한다. 자기네 러시앤쿨쿨에서 잠 시간을 안 빌리면 안 될 것처럼 유혹하는 것. 下下편 마지막에는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가 엮였다.[14] 수면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짧아지며, 수면량을 채우는 것보다 늘 규칙적으로 일정 시간마다 자주는 것이 좋다.[15] 당연히 입시생도 6시간 정도의 충분한 잠을 자야 피로 때문에 다음 수업 및 복습에 지장을 초래하듯이 하루를 다 망치는 걸 막을 수 있다.[16] 1971년 개봉한 영화 워털루에서도 나폴레옹이 주인공인만큼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목욕을 즐기는 것과 비서들에게 속사포처럼 편지의 내용을 구술하는 장면이 잘 나와있다. 이때 나폴레옹을 맡은 배우 로드 스타이거의 원맨쇼 연기가 압권.[출처] 리처드 홈즈 저 '나폴레옹의 영광'.[17] 몽펠리에 출신의 정치가, 프랑스의 대서기관. 엄청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식가로 유명하다. 얼마나 입맛이 까다로운지 그가 저택에 고용한 수석주방장이 무려 17~19명이나 됐고, 매번 입맛이 맞지 않다고 해고시키고 갈아치운 주방장이 수두룩했다.[18] 정치가. 프랑스 공화국 제3집정관[19] 참고로 노섬블랜드함의 영국군 수병들은 처음엔 저게 유럽을 삼키려한 프랑스 괴물이다 라며 꺼렸지만 나중엔 나폴레옹의 인품에 경계심을 풀고 나폴레옹 앞에서 영국식 집총 자세를 시범보이기도 했으며 나폴레옹 역시 프랑스식 집총이나 프랑스군 전통같은 걸 노섬블랜드 함 선원들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그러니 영국 장교들이 나폴레옹이 아직도 삐진건가 하고 오해한 것이기도 하다.[20] 나폴레옹 시대 특유의 낭만적인 희생 플레이를 자주 보였다. 그 당시에는 실용성과 실력은 별개로 질질 끌지않고 아무튼 빠르고 멋있게 공격하는 플레이를 하는게 미덕으로, 희생으로 인해 점수차가 크면 클수록 멋있어 보였다고 한다. 이런 체스 풍조를 낭만주의라고 하며 포지셔널 플레이 개념이 나온 20세기 초부터 낭만주의는 사장됐다.[21] 상대가 입문자 수준만 벗어나도 쉽게 막히고 이후 퀸이 마이너 피스에 이리 저리 쫒겨 다니다며 턴만 낭비하기에 영 좋지 않은 수다.[22] 흑으로 하면 백이 주도하는 오프닝을 추가로 숙지해야 하고 안그래도 데려오는 유명인사들에 비하면 못하는 편인데 모르는 걸 하면 더 못해지고 머리쓰긴 싫으니 백만 잡은 듯하다. 실제로 백으로 할땐 생각을 놓고 방어적으로 전개를 끝낼만한 시스템 계열의 오프닝들이 많이 있다.[23] 2판 이상 뒀을 경우 돌아가면서 색깔을 바꾸는게 그 당시에도 매너이기에 주변의 눈치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백을 포기했다. 흑으로 할땐 나이트부터 꺼내서 공격하고 보는게 취향인 듯 하다.[24] 루이알렉상드르 베르티에가 주로 얻어 맞았다.[25] 골드 내지 플레티넘 정도의 실력을 가진 나폴레옹이 챌린저에게 덤비는 수준인데 결과는 예상된 일이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접대 체스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동안 둔 짬밥으로 스콜라 메이트가 통할지 정도도 모르는 수준은 아님을 고려하면 그냥 기계를 얕봤을 확률이 크다.[26] 이 소녀들은 황제였던 나폴레옹에게 온갖 천진난만한 질문들을 하며 나폴레옹의 흥미를 끌었고, 나폴레옹도 그 아이들이 딱히 싫지는 않았는지 '마치 가면무도회에 온 것 같다'라는 긍정적인 심경을 남겼다.[27] 이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순조실록나온다.[28]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의 비인면[29] 사또였던 당시 충청도 비인현감 이승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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