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간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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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五間水橋 / Ogansugyo
청계천의 다리이다.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4번째 다리이다.
2. 위치[편집]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종로6가)와 중구 장충단로 (을지로6가)를 잇는 위치에 있다.
3. 역사[편집]
원래는 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청계천이 도성을 빠져나가게 만든 수문(水門)이었다. 5개의 무지개 모양으로 된 홍예문이었으며 이름도 본래는 ‘오간수문(五間水門)’이었다. 사대문안의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른다. 처음에는 수문이 3개였으나 1421년(세종 3년)에 장마로 개천이 범람하자 1년 뒤에 추가로 2개를 더 만들어 5개가 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에 수리했다.#[4] 1760년(영조 36년)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다시 보수했다.
1907년(융희 원년) 일제가 청계천 물줄기가 원활하게 흘러간다는 명분 하에 오간수문을 헐었고 1년 뒤에는 근처의 성벽마저 철거했다. 이후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새 다리를 짓고 이름을 ‘오간수교(五間水橋)’라 했다.
1921년 6월에 흥인지문(동대문)에서 광희문간 전차 노선이 새로 생기면서 오간수교 위에 전차 선로가 놓였다. 1926년 6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 행렬이 오간수교를 지나면서 약 4.5m던 다리의 폭을 약 8.2m로 확장했다. 그러나 그 다리마저도 1961년 12월에 청계천 복개공사로 사라졌다.
서울특별시에서 2000년대에 진행한 청계천 복원공사 때 재건했다. 그러나 교통문제로 예전의 오간수문으로 복원하지 못했고 지금의 오간수교를 만들었다. 대신 오간수교 북측의 동쪽 벽면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구조물을 설치했다.
4. 구조[편집]
4.1. 오간수문[편집]
- 청계천 바닥에 선단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홍예를 얹었다. 홍예 위로 석축을 쌓았으며 석축 위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단석 사이마다 가로로 긴 돌 부재를 얹었다.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 엄연히 도성의 경계를 나타내는 방어 구조물이었지만, 아무래도 물이 나가다 보니 다른 문이나 성벽처럼 막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홍예마다 쇠창살을 두어 외부인이 멋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다만 하천의 범람 시 물이 원활하게 흐를 수 있게 쇠창살마다 작은 철제 줄을 연결시켜 상황에 맞춰 언제든 열고 닫을 수 있게 했다.#
4.2. 오간수교[편집]
- 다리 동남단 약 50m 지점부터 황학교 동남단 약 60m 지점까지 청계천 남쪽 산책로가 막혀있다. 동 · 식물 서식환경 보호를 위해서라고. 대신 산책로가 끊기는 지점에 징검다리가 있어 북편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해놓았다.
5. 교통[편집]
- 지하철: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이 제일 가깝다. 8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가까운 역은 서울 지하철 2 ·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다. 14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하면 나온다. 대략 8분 정도 걸린다.
6. 여담[편집]
- 오간수문에 쇠창살을 두는 등 경비를 강화했음에도 죄인들이나 외부인들이 몰래 출입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던 듯하다. 명종 때 유명했던 도적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전옥서를 부수고 도망갈 때도 오간수문을 이용했다.#
- 그리고 쇠창살을 열고 닫게 만들었음에도 청계천을 제대로 준설한 적이 거의 없어 나중에는 토사와 부유물들이 쌓여 배수가 잘 안되었다. 이에 임시로 나무문 2개를 설치하여 활용했으나 영조 시절에는 그마저도 사용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1760년(영조 36년)에 청계천을 준설하면서 오간수문 역시 보수했다. 이 때 나무문을 헐고 전부 원래 모습대로 되돌렸으며 주변에 버드나무를 심어 토사가 쓸려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버드나무가 심어진 오간수문은 한성 내 봄놀이 장소로 유명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