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튼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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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튼 켈리
Wynton Kelly


파일:Wynton Kelly.png

본명
윈튼 찰스 켈리
Wynton Charles Kelly
출생
1931년 12월 2일
미국 뉴욕 주 브루클린
사망
1971년 4월 12일 (향년 39세)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피아니스트, 작곡가
악기
피아노, 콘트라베이스
장르
재즈, 하드밥
활동
1950년대 ~ 1970년
레이블
블루노트, 리버사이드, 버브, Vee-Jay
서명
파일:Wynton Kelly Autography.png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3. 마일스 밴드 이후, 윈튼 켈리 트리오
2.4. 말년과 죽음
3. 연주 스타일과 영향
4. 여담



1. 개요[편집]


존 콜트레인과 On Green Dolphin Street을 함께 연주하는 윈튼 켈리

Wynton's the light for a cigarette. He lights the fire and he keeps it going.

Without him there's no smoking.

담배 피는걸로 비유하면 윈튼은 담뱃불같은 존재야. 걔는 불을 붙이고 불씨를 이어가지.

윈튼 없이는 담배를 못 피는거야.

마일스 데이비스 #


He puts down flowers behind a soloist.

He never wanted to steal in, he just put together the right things.

그는 연주자들이 솔로를 하면 컴핑으로 뒤에 꽃을 깔아주었어요.

그는 한번도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어요. 단지 맞는 음들로 음악을 조립했죠.

드러머 필리 조 존스 #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마일스 데이비스Kind of Blue, 존 콜트레인Giant Steps, 웨스 몽고메리의 "Smokin' at the Half Note", 행크 모블리의 "Soul Station" 등등 50~60년대 하드밥의 명반들을 함께한 사이드맨이자 리더 연주자.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켈리는 자메이카 이주민 가정 출신으로, 뉴욕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4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긴 했지만, 음악 고등학교를 가기 전까지는 특별히 정규 교육을 받은것도 아니었고 고등학교에서도 피아노를 치지 못하고 베이스를 전공하고 이론 교육만 받았다고 한다.[1] 다만, 정규 교육 없이도 이미 켈리는 12살에 R&B 팀에 데뷔하여 프로씬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고, 16살때는 색소포니스트 핼 싱어의 "Corn Bread"라는 앨범으로 1948년 R&B 빌보드 1위를 찍었다.[2]

이후 1951년에는 본격적으로 피아노 트리오 리더 데뷔 앨범인 "Piano Interpretations"을 블루 노트에서 발매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재즈 피아노 연주자들이 카피하는 켈리의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가 이 앨범의 연주이며, 'Blue Moon', 'Cherokee', 'If I should lose you' 등 재즈 스탠더드들이 버드 파웰, 테디 윌슨 등의 선배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영향을 담아 연주되었다.

(테디 윌슨 식 블락 코드, 버드 파웰의 영향을 받은 라인들이 들린다!)

이후 같은 해에 켈리는 보컬리스트 다이나 워싱턴의 눈에 띄게 되어 그녀의 반주자가 되었고, 1952년에는 이미 본좌의 영역에 있었던 레스터 영디지 길레스피의 눈에도 띄어 그들의 밴드에서도 활동하게 된다. 물론 그런 그도 병역의 의무는 피할 수 없었던지라 9월부터 2년의 군 생활을 하게 되지만[4], 다행히 군대에서 듀크 피어슨 같은 재즈 피아니스트 친구들과 함께 연주를 할 수 있었고, 전역해서는 다시 그대로 다이나 워싱턴과 디지 길레스피 밴드에 복귀하여 활동할 수 있었을 뿐더러 나아가 캐논볼 애덜리, 존 콜트레인, 소니 롤린스, 웨스 몽고메리, 빌리 홀리데이, 에비 링컨 등과도 인맥을 쌓게 된다.

다이나 워싱턴의 "For Those in Love"(1955), "Dinah!"(1956), 캐논볼 애덜리의 "Things Are Getting Better"(1958), "Cannonball Adderley Quintet in Chicago"(1959)[5], 아트 블래키의 "Theory of Art"(1957), 빌리 홀리데이의 유명한 "Lady sings the blues"(1956), 소니 롤린스의 블루 노트 데뷔작 "Sonny Rollins, Vol.1"(1957)이나 "Newk's Time"(1957), 리 모건의 "Lee Morgan Vol.3"(1957) 등이 모두 이 시기 윈튼 켈리가 참여한 음반들이다.

본인이 리더로써 낸 2번째 음반 "Piano"(1958)도 이 시기의 음반으로, 기타의 케니 버렐, 베이스의 폴 챔버스영혼의 듀오, 드럼의 필리 조 존스와 함께 하였다. 윈튼 켈리의 채보집에 있는 'Whisper Not', 'Dark Eyes', 'Don't Explain' 등이 모두 이 앨범 수록 연주 버전으로, 윈튼 켈리의 연주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멜로디컬하고 블루지한, 강한 스윙의 연주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초기의 명반이다.

Dark Eyes(1958)


2.2.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만남[편집]


파일:Wynton and miles.jpg
(피아노를 치는 마일스와 보고 있는 켈리.)

성공적인 커리어를 밟아오던 켈리는 1959년 1월에 드디어 당시 재즈계에서 가장 핫했던 마일스와 함께하게 된다. 연주 시간에 매번 지각하던 레드 갈랜드에게 제대로 빡친 마일스가 그냥 윈튼을 불러서 팀 합주를 하다가, 그날도 여지없이 지각한 갈랜드가 들어오자 "앞으론 윈튼이 할거다(Wynton's got the gig)"하고 쫓아내버린 것.

켈리는 이미 잘 나가고 경험 많은 피아니스트였던지라 마일스 밴드에 무리없이 적응했지만, 하필 들어오고 처음 녹음하려고 했던 음반이 마일스가 빌 에반스를 염두에 두고 구상한 Kind of Blue였던지라, 빌 에반스가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그리고 윈튼 켈리가 특별히 강한 분야이기도 했던) 블루스 트랙인 'Freddie Freeloader'만 녹음하게 된다. 하필이면 워낙에 유명한 음반에 수록된 곡이다 보니 Bb Blues를 학습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이게 윈튼 켈리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이해하고 카피하곤 하는 곡이지만, 사실 이 음반 자체가 윈튼 켈리가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던 하드 밥과는 많이 다른 스타일을 추구했던 만큼 켈리도 평상시의 스타일과는 다소 다르게 연주했다.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에서 So What을 연주하는 윈튼 켈리, 1959년. 빌 에반스와는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 당시 마일스 밴드의 정규 피아니스트는 윈튼 켈리였고, 그는 1960년 봄 유럽 투어라던가 1961년에 녹음한 "Someday My Prince Will Come"에서는 모든 곡을 마일스 밴드와 함께하게 된다. 아래는 이 시기 윈튼 켈리의 위상을 알려주는, 다음 세대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가 될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회고 몇 가지.

...this strange looking, clerical looking guy wit horn rim glasses was at the piano, and at that time I was very dissapointed because I was hoping to see my hero Wynton Kelly. And I didn't hear the piano at all that day, I was just focused on Jimmy Cobb, Miles and Trane...

...(마일스 밴드를 보러 갔는데) 안경 쓰고 사무직 직원처럼,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피아노에 앉아 있어서 저는 제 영웅 윈튼 켈리를 못 본다는 사실에 너무 실망했어요. 그래서 그 날 피아노는 전혀 듣지도 않고 지미 콥, 마일스, 콜트레인만 봤던거 같아요...

칙 코리아, 빌 에반스를 처음 봤던 날을 회고하며#


His harmonic colorations were very beautiful. But I think above all it was his ability to swing. John used to mention that. Miles used to get off the bandstand and just look at Wynton with admiration, because he really held the group together.

그의 화성적 색채는 매우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그 모든걸 넘어서 저는 그의 스윙 하는 능력이 최고였다고 생각해요. 존(콜트레인)은 주로 그 사실을 언급했죠. 마일스는 연주하는 중에 종종 밴드 뒤로 가서 윈튼의 연주를 존중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곤 했어요. 왜냐면 윈튼은 그룹의 연주를 하나로 붙잡고 있었거든요.

맥코이 타이너, 마일스 밴드의 윈튼 켈리에 대해 말하며#


마일스 밴드에 있었던 연주자들이 대체적으로 회고하듯이, 마일스는 밴드 구성원들의 부업에 관대한 편이었고 많은 연주자들에게 사랑받던 켈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시기 이리저리 불려다니며 많은 음반들을 남겼다. 웨인 쇼터의 리더 데뷔작 "Introducing Wayne Shorter"(1959), 웨스 몽고메리와의 합작 "Full House"(1962), 디지 리스의 "Star Bright"(1959), 블루 미첼의 "Blue's Moods"(1960), 행크 모블리의 명작 "Soul Station"(1960), 명작 "Roll Call"(1960), 명작 "Workout"(1961)이 모두 이 시기의 음반이다.

Soul Station(1960)

이 외에도 존 콜트레인의 문제작 Giant Steps에도 함께했는데, 물론 서정적인 재즈 피아노의 명수 토미 플래너건이 메인으로 참여하긴 했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모달 발라드 곡 "Naima"만큼은 도저히 어려웠는지 이 곡은 윈튼 켈리가 연주한다. Naima의 연주는 윈튼 켈리 최고의 연주 중 하나로 꼽히는 명연으로, 켈리가 단순히 하드밥만 잘하던 연주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Naima는 이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맨 처음에 낙점되었던 피아니스트였던 세다 월튼이 통과하지 못해[6] 토미 플래너건을 불러왔고, 그마저도 이 곡만큼은 통과하지 못해 윈튼 켈리를 불러와서야 겨우 녹음하여 발매했다는 점에서 당시 1타 재즈 피아니스트였던 윈튼 켈리의 위상을 느낄 수 있다.

또, 마일스 데이비스 섹스텟과 함께하며 입지를 높힌 윈튼 켈리에게 리버사이드 레코드는 Piano(1958) 이후 다시 한번 리더로써 음반을 낼 기회를 주는데, 이 때 낸 "Kelly Blue"(1959)가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리더로써의 자질을 증명한다. 이 작품에서 켈리는 폴 챔버스, 지미 콥과 유명한 스탠더드들[7]을 연주하고, 일부 자작곡들에서 냇 애덜리(코넷), 바비 재스퍼(플룻), 베니 골슨(테너 색소폰)을 추가한다는 다소 이질적인 조합을 시도하는데, 이 실험의 성공으로 이후 켈리는 음반과 라이브에서 자작곡 비중을 늘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이후 Vee-Jay 레이블로 넘어간 켈리는 "Kelly Great"(1959), "Kelly at Midnight"(1960), "Wynton Kelly!"(1961)를 발매하는데, 이 음반들은 윈튼 켈리의 많은 자작곡들과 새로운 시도들을 엿볼수 있어 그의 팬들에게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Kelly Blue(1959)


2.3. 마일스 밴드 이후, 윈튼 켈리 트리오[편집]


파일:Wynton_Kelly_Trio.jpg
(왼쪽부터 윈튼 켈리, 지미 콥, 폴 챔버스)
금전적인 배분 문제로 폴 챔버스, 지미 콥과 트리오로 마일스 밴드를 떠나게 된 켈리는 이후에도 당대 최고의 리듬 섹션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다. Verve와 Vee-Jay에서 정규음반을 계속 발매했고, 1965년에는 프로모터 조지 윈(George Wein)이 주도한 일본 콘서트 투어에도 참가한다.

파일:Wes and Wynton.png
(웨스 몽고메리와 윈튼 켈리)
이 시기 윈튼 켈리 트리오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들은 웨스 몽고메리와 함께한 것이었다. "Full house"(1962)를 시작으로 만난 이들은[8] 라이브 앨범 "Smokin' at the Half Note"(1965)로 큰 호평을 받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이 기회는 웨스 몽고메리가 1968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사라진다. 웨스 몽고메리 사후 버브에서는 윈튼 켈리 트리오와 웨스 몽고메리가 1965년에 녹음한 음원들을 모아 "Willow Weep for Me"(1969)를 유작으로 발매한다. 이 음반은 1969년 빌보드 재즈 차트 12위에 올랐고, 1970년 그래미 어워드 재즈 연주 부문에서 수상한다.[9]

이후에도 조 헨더슨과의 라이브 "Four"(1968), "Straight, No Chaser"(1968) 음반들을 내며 이들은 최고의 연주실력을 들려주지만, 1969년에 폴 챔버스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켈리 본인의 건강도 날이 갈수록 나빠진다. 시대 또한 하드밥이 아닌 전자음악과 락앤롤을 원하고 있었고, 수많은 하드밥 뮤지션들이 이 시기 사라졌던것처럼 켈리도 잊혀지고 있었다. 말년의 켈리는 비틀즈의 "Yesterday"를 녹음하기도 했다.[10]


2.4. 말년과 죽음[편집]


조지 콜먼과 연주한 Mr.P.C., 1968년. 마일스가 말한 "불 붙이는" 연주자로의 윈튼 켈리의 저력이 유감없이 들리는 연주다. 한편으론, "Mr.P.C."폴 챔버스와 반평생을 함께한 윈튼 켈리와 지미 콥이 그를 보내고 베이스에 론 맥클루어와 함께 이 곡을 연주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들으면 기분이 남다른 연주이기도 하다.
폴 챔버스 사후, 말년의 켈리는 일자리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조지 콜먼과의 라이브, 덱스터 고든의 반주자로써 클래스는 영원함을 보여주긴 했지만, 연주력의 기복은 갈수록 커졌고 건강 문제도 심각해져 누가 달라붙어서 계속 봐주지 않으면 생사를 걱정해야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공연을 하러 간 캐나다토론토에서, 건강이 나빠짐을 눈치챈 켈리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있잖아, 지금 나 상태가 좀 안 좋아.(You know, I don't feel good.)"이라고 한 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여자친구는 그에게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누가 봐줄 수 있으니 아래층에 바(Bar)로 가 있어"라고 했지만, 켈리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던지 이후 방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간질(Epilepsy), 즉 뇌전증 발작으로 인한 심장마비. 사망 당시에 그는 수중에 거의 돈이 없었다고 전한다. 이후 같은 해 6월 28일, 그를 기리는 콘서트가 뉴욕에서 열렸고 당대의 수많은 음악가들이 자리를 찾았다.


3. 연주 스타일과 영향[편집]


"The Theme"을 연주하는 윈튼 켈리 트리오, 1960년콜트레인도 첫음과 끝음을 연주했다
가스펠, 블루스의 영향을 받은 '밝고 신나는' 연주를 했으며 하드밥 시대의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비밥 피아노의 거장 버드 파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넓게 펼쳐진 보이싱을 센스있게 넣으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에는 달인이었으며, 이에 수많은 관의 명수들과 기타리스트들, 보컬리스트들 등이 그를 사이드맨으로 쓰기 위해 러브콜을 보냈다.

파일:wynton kelly voicing.png
(C Ionian 스케일에서의 윈튼 켈리 보이싱 예시)

'정재열의 재즈 화성'과 Mark Levine의 '재즈 피아노 북'에 따르면 왼손에 가이드톤을, 오른손에는 사용가능한 코드 스케일의 음을 옥타브로 쌓아 연주하고 옥타브 사이에 완전 4도 또는 5도음을 넣어 텐션의 강도를 조절하여 연주하는 방식을 윈튼 켈리 보이싱이라고 한다. 이는 오픈 보이싱적인 느낌을 강하게 낼 수 있어 컴핑때는 물론 솔로에도 활용 가능하며, 윈튼 켈리가 컴핑시 애용하던 보이싱 중 하나였다. 물론 이 것만 일괄적으로 사용하여 컴핑을 했던 것은 아니고, 그가 유행시킨 방식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보이싱이었던 것.

윈튼 켈리의 컴핑은 역대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으며[11], 솔로 스타일도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직접 밝힌 사람들만 해도 몬티 알렉산더, 칙 코리아, 브래드 멜다우, 추초 발데스 등 다수가 있다. 이 중 멜다우의 경우는 조슈아 레드맨과의 만남에도 윈튼 켈리가 일종의 중요한 커넥션이 된 것으로 조슈아 레드맨의 회고록에 나온다.

When I first heard Brad I remember being struck by how much Wynton Kelly he had in his playing and I loved Wynton Kelly.

처음 제가 브래드(멜다우)를 만났을때, 그의 연주에 윈튼 켈리가 얼마나 많이 들어있던지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전 윈튼 켈리를 사랑했죠.

조슈아 레드맨, 브래드 멜다우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때를 회고하며. #


...if you think of some Wynton Kelly solos… If you were listening to them and you knew a lot about how pianos sound and what condition it might have been in, you’d probably realize that almost all the time, when things were really cooking, there was a particular quality of the piano that would never be able to be considered a good quality for anything but Jazz, I guess. That’s what I was trying to get at.

윈튼 켈리의 솔로를 생각해보면... 만약 당신이 피아노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알고 피아노가 어떤 상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면, 아마 윈튼 켈리가 연주하는 대부분의 순간, 연주가 완전히 달아올랐을 때 피아노가 '이 악기가 재즈 말고 다른 음악에도 어울릴 수가 있나'싶을 정도로 특별한 질의 소리를 낼 때가 있음을 인지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제가 도달하고자 했던 것도 그런 거겠죠.

키스 자렛, 69번째 생일 인터뷰에서 재즈 연주에서의 피아노의 소리에 대해 얘기하며 #


4. 여담[편집]


  • 친척들 중 음악가들이 여럿 있는데, 역시 가장 유명한 것은 사촌이었던 베이시스트 마커스 밀러. 그 외에도 래퍼 Foxy Brown과 재즈 피아니스트 Randy Weston도 그의 사촌이다.

  • 전통 재즈의 명맥을 잇는 것을 자처하는 트럼펫터 윈튼 마살리스의 이름이 바로 이 윈튼 켈리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다. 아버지 Ellis Marsalis Jr.가 재즈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인데, 윈튼 마살리스가 1961년생인걸 감안[12]하면 이 역시 당대 재즈 피아니스트 1타로써의 윈튼 켈리의 위엄을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부분.

  • 사적으로 윈튼 켈리는 매우 유머러스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베이시스트 빌 크로우에 의하면 윗니가 틀니였던 켈리는 연주 중 종종 관객들은 못 보고 연주자들만 볼 수 있는 각도로 고개를 돌리고 틀니를 아랫 입술로 떨어뜨리고 이상한 표정을 지어가며 연주자들을 웃겨주었다고 한다. 때로는 이 틀니를 혀로 밀어서 윗 입술보다 위로 올리기도 했다.

  • 마약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알코홀릭이기도 했다. 다만, 색소포니스트 지미 히스에 의하면 '연주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는 술 중독자'였다고.

  • 자식으로는 딸 Tracy가 있으며, "Comin' in the back door"(1963)에 수록된 자작곡 "Little Tracy"는 이 딸을 위해 지은 곡이다.(Tracey Matisak은 현재 방송인으로 일하고 있다) 오늘날 재즈인들 사이에서 자주 연주되거나 하는 곡은 아니지만, 칼립소 리듬[13]으로 연주된 이 곡은 1964년 5월 R&B 빌보드 차트 38위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로 당시엔 인기를 끈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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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 베이스를 전공했던 경험을 살려, 보컬리스트 애비 링컨과 "That's Him!"(1957)을 녹음 할 때 베이시스트 폴 챔버스가 스튜디오에서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못 일어나자 마지막 트랙 'Don't Explain'은 윈튼 켈리가 베이스로 연주하기도 했다![2] 많은 평론가들은 윈튼 켈리의 신나고 듣기 편한 스타일의 연주가 이 때 R&B를 연주했던 경험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3] 파일:wynton kelly grave.jpg[4] 1952년 9월~1954년 9월로, 기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6.25 전쟁때 군생활을 했다. 때문에 사후 그는 미국 롱아일랜드 국립 현충원에 한국 전쟁 유공자로 안치되었다.[3][5] 존 콜트레인과 함께 한 음반으로, 베이시스트 폴 챔버스, 드러머 지미 콥과 녹음하여 한 달 뒤에 있을 Kind of Blue 세션에서 마일스만 제외한 멤버로 연주되었다.[6] 세다 월튼이 녹음한 버전의 Giant Steps와 Naima는 이후 1998년에 음반이 재발매 되면서 공개된다[7] 윈튼 켈리 트리오의 유명한 On Green Dolphin Street의 연주는 이 음반의 버전이다[8] 윈튼 켈리는 이후에도 비브라폰의 거장 밀트 잭슨과도 함께 웨스 몽고메리와의 합작 앨범 "Bags meets Wes!"(1962)을 녹음하긴 했다. 베이스가 샘 존스고 드럼이 필리 조 존스였지만.[9] 많은 사람들이 이 쿼텟이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지, 또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미 가졌던 이들이지만 더 나아갈 수 있었을지에 대한 얘기를 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평론가 Gary Giddins. 그 정도로 이들의 합이 좋았던 것.[10] https://www.youtube.com/watch?v=j0XI_s4iw2Y[11] 평론가 Ray Comiskey,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교육자 Mark Levine, "Jazz Piano Book"등 다수[12] 당장 직전 해인 1960년에 나온 음반만 둘러봐도 블루 미첼의 "Blue's Moods", 행크 모블리의 "Soul Station"과 "Roll Call", 리 모건의 "Here's Lee Morgan", 아트 테일러의 "A.T.'s Delight" 등으로 윈튼 켈리의 전성기였다[13] 소니 롤린스의 St.Thomas로 유명한 리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