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교직원노동조합/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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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표
2. 개요
3. 조선교육자협회 시대
3.1. 미군정 시기
4.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시대
5. 교사 소모임 시대
6.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시대
7.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시대
8.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시대
9. 참고/관련 자료



1. 연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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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윤영규
4대
이영희
5~6대
정해숙
7대
김귀식
8대
이부영
9대
이수호
10대
원영만
11대
이수일
12대
장혜옥
13대
정진화
14대
정진후
15대
장석웅
16대
김정훈
17대
변성호
18대
조창익
19대
권정오
20대
전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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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외노조로 출범
1989년 5월 28일 ~ 1999년 7월 2일
합법화
1999년 7월 2일 ~ 2013년 10월 24일
제1차 법외노조화
2013년 10월 24일 ~ 2013년 11월 13일
임시 합법화
2013년 11월 13일 ~ 2014년 6월 19일
제2차 법외노조화
2014년 6월 19일 ~ 2014년 9월 19일
임시 합법화
2014년 9월 19일 ~ 2016년 1월 21일
제3차 법외노조화
2016년 1월 21일 ~ 2020년 9월 4일
재합법화
2020년 9월 4일 ~ 현재


2. 개요[편집]


해방 이래 한국 교육은 미국식 교육시스템(가장 대표적인 예로 6-3-3-4 학제)을 이어받았으나, 권위주의적인 독재정권 내내 학교 교육은 '정권의 시녀' 역할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이러한 비판의 대표격이 지나치게 통제적이고 강압적인 이념을 담았다고 비판받는 교육헌장들이다. 해방 이후 황국신민서사가 폐지된 자리에는 우리의 맹서가 들어갔고, 4.19 혁명으로 우리의 맹서가 폐지되자 그 자리에 국민교육헌장이 들어갔다. 이 국민교육헌장6.10 민주 항쟁6.29 선언 이후 폐지가 논의되었으나 2003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폐지되게 된다.

하나,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

둘, 우리들은 마음을 모아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셋, 우리들은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국신민서사 아동용


1. 진리에 살자

2. 자유롭게 배우자

3. 공정히 행하자

첫째,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둘째,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 침략자를 쳐부수자.

셋째,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우리의 맹서 1949년판과 1952년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국민교육헌장

이에 교사들과 학생들은 크게 반발하였고, 올바른 교육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며 교원노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교원노조 운동이 현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뿌리이다. 행정안정부 국가기록원 문서, [교원노조운동] 교원노조의 역사와 발전, 심성보,「1987년이후 교원노조를 둘러싼 공방」,『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역사비평사,2000 정기평, 「1980년대 후반 교육 운동사」, 형성사, 1989 등을 참고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3. 조선교육자협회 시대[편집]



3.1. 미군정 시기[편집]


1946년 2월 17일, 교육분야의 모순해결을 위해 조선교육혁신동맹을 모체로 결성된 전국 규모의 교원단체인 조선교육자협회가 교육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교육문제의 해결이 식민지 문화 극복의 일환이며 이를 위해서 식민 상황의 극복과 자주적 민족국가 설립을 위한 정치적 행동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 아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고, 교사 대중집회를 주도하며, 미군정 교육정책에 반대하고 민족민주운동세력과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진보적 민주주의 교육’을 제시하여 친일파 교원, 교육 행정가를 청산하고 학원의 민주화 및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지켜야 한다고 외쳤다. 조선교육자협회가 교육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힘을 쏟았던 것은 학원민주화 운동이었다. 국대안 반대, 교직원 무고파면반대, 학생·교직원 생활대책 마련 요구 등이 학원민주화 운동의 핵심이었다. 또한 조선교육자협회는 교육과 연구활동도 진행하였다. 조선교육자협회는 교육실태 조사, 강습회 개최, 연구회 조직, 교과서 편찬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7년 8월 그러나 반대투쟁을 계기로 교사들에 대해 폭력적 탄압을 가해지면서 조직력과 활동력이 약화되었고, 북한의 침입으로 6.25 전쟁이 일어나 사실상 해체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미군정기 조선교육자협회의 교육이념과 활동 논문을 참고할 것.


3.2. 이승만 정부[편집]


전쟁이 끝난지 5년이 지난 1958년, 다시 교원노조를 창립하려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1958년 11월에 일부 교사들은 교원노조에 관한 회합을 열었고, 노총측은 이에 대한 지지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이듬해 4월초까지 교원노조의 결성을 둘러싸고 교사측과 학교재단 간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자유당 말기의 교원노조결성의 움직임은 1959년 4월초에 법무부가 내린 유권해석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법무부는 “교육공무원법에 의하여 교원은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정부의 교원노조 불허방침을 명백히 밝혔다. 이에 따라서, 교사들의 진보적 노력은 4.19 혁명 이후까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4.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시대[편집]



4.1. 허정 과도정부[편집]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붕괴되고 말았고,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강요당했던 교원들이 4.19 혁명 직후 '희생된 제자들의 피에 보답하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교육자가 되자'는 각성으로 기존의 대한교육연합회(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의 전신)을 비판하며 대한민국 최초의 자주적인 교원노조인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를 결성하게 된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1960년 4월 29일 대구의 교원 60여 명이 대구시 교원조합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1960년 5월 7일에는 대구시에서 초·중등 교원노동조합이, 1960년 5월 15일에는 부산시의 중등 교사들이 부산시 지구 교원노동조합이, 21일 초등 교사들이 부산시 초등교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대구시부산시의 교원노동조합 결성은 전국적인 교원 노조 단체의 출범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제 강점기 하의 군국주의 교육을 타파하고 민족 교육을 실현하기 위한 교원노동조합의 결성은 부산 지역 학부형과 학생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에 1960년 5월 1일 서울 시내 47개 중·고교와 3개 초등학교 교원들은 동성고등학교에 모여 ‘서울시교원노동조합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서울에 교원노동조합이 결성되자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제주도에서 교원노동조합이 조직되었다. 1960년 5월 2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 강당에서는 300여 명이 모여 ‘대한교원노조연합회 결성식을 열었다. 이후,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 각 시군별로 단위노조들을 통합해 도별연합체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고, 1960년 6월 29일 서울에서 서울교원노조와 영호남 교원노조 대표자들이 모여 전국 중앙조직건설 문제를 논의했다.

전국 중앙조직개편 작업을 통해 1960년 7월 3일 대구에서 ’교원노조 전국대표자대회‘가 전국에서 모인 200여 명의 대표들[1]의 참가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1960년 7월 17일 서울 의사회관에서 ‘교원노조 제1차 전국대회’가 열렸다. 전국대회에서는 위원장에 조일문, 부위원장에 강기철·계훈제·김종길, 사무국장에 김희조, 41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했다. 임원진을 정비한 후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가 발표한 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우리는 교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한다.

② 우리는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도모하고 정치적 중립을 기한다.

③ 우리는 민주국가 건설로서 세계평화에 공헌한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강령

1960년 7월 17일 대회에서는 총 83개 교원노조가 구축되었으며 총 조합원 수가 1만 9,883명이었다. 전국교원의 22%가 노조에 가입했으며, 특히 지구별 가입자 수로는 경북과 경남의 조합원 수가 각각 8,000여 명으로 압도적이었다.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 1960년 7월 29일에는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참여인원이 갈수록 늘어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최대 4만명(당시 교원 8만명)이 가입한 교원노조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학원민주화와 교육의 정치적 중립 보장 등을 요구하였으며 민주화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또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합법화투쟁과 교육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예를 들면 사친회비와 잡부금 폐지, 학원 내 부정부패 척결, 어용교사 배척, 교과서 자유판매, 학생 예술문화 활동 활성화 등을 부르짖었다.

전국적으로 교원노조가 속속 조직되면서, 대한교육연합회의 해체를 주장하는 시위 (1960년 6월 13일, 서울)를 벌이고 대한교육연합회의 해체를 결의하는 대회(1960년 7월 3일, 대구)를 개최하는 등 기존의 교직계의 질서를 위협하자, 당시 이병도 문교부장관은 5월 19일에 발표한 교원노조 불허방침에 따라 교원노조의 해체를 지시했다. 허정 과도정부 또한 "교육공무원은 법에 의하여 일반 공무원과 같은 자격을 가지며 공무원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 는 말로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파일:합법화 투쟁에 나선 교원노조.jpg
이에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정부에 대항하여 합법성 수호투쟁을 전개하였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6월 23일에 대한교원노동조합 연합회의 명의로 문교부장관의 사임을 요구하고, 해체 지시를 철회하지 않으면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구에서는 교원노조탄압 전국조합 궐기대회(1960년 6월 20일)가 열려 정부방침에 적극 투쟁할 것을 결의했고, 진주시에서는 교원노조 해체반대 데모가 일어나 처음으로 가두데모를 벌였다.

정부의 방침이 불허로 기울고 교원노조측의 투쟁이 격화되자 노동계에서도 교원노조를 지원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960년 6월 26일에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교원노조의 합법성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60년 6월 29일에는 노동쟁의 지도위원회에서 문교부노동조합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교원노조의 합법화 투쟁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자 정부도 강경히 대처하였는데, 실제로 1960년 5월 29일 정부는 교원노조를 국가공무원법 위반 및 교육공무원법 위반으로 불법화하였으며 해체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조치에 맞서 교원노조는 항의·규탄시위를 조직하는 등 완강한 합법성쟁취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지원·연대투쟁도 잇따랐다. 그러자 1960년 8월 9일, 경상북도는 경북교원노조에 관련된 교원들을 대거 벽지로 전보 발령했다. 경상북도는 교원노조운동의 핵심세력이라 할 수 있는 경상북도의 초중고 교사 4백여 명을 타지역으로 전근발령하는 노골적인 탄압책을 펼치며 교원노조운동을 탄압했다.

그러자 교원노동조합은 이에 대항하여 8월 16일 경북도지사를 상대로 대구고등법원에 행정조치 집행정지명령 가처분신청을 하고, 동시에 행정처분 무효확인 및 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또 8월 20일에는 대구에서 교원노조탄압 반대 전국조합원 궐기대회를 열고, 강력한 투쟁과 전보부임 거부 및 교직 총사퇴를 결의하였다. 교원노조는 연좌시위, 성토대회, 시위농성, 단식투쟁, 수업강행, 상경투쟁, 법정투쟁 등의 수많은 투쟁을 펼쳤다.


4.2. 장면 내각[편집]


그러다 1960년 8월 19일 허정 과도정부가 무너지고 장면 내각[2]이 들어서게 된다. 여당인 민주당은 교원노조의 필요성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현행법령상 문제 때문에 허가를 할 수 없다는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새 정부가 비교적 미온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동안에도, 지방정부인 경상북도가 취한 교원전보발령 처사에 대해서 교원노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960년 8월 25일 교원노동조합은 교직총사퇴 결행 선언대회를 열었다. 같은 날, 대구고등법원은 경북교원노동조합이 신청한 행정조치 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심의하여, 간부 25명에 대한 인사행정조치 집행을 정지한다고 판정하였다. 이 날 밤, 정부는 야간국무회의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경북교원노조문제에 대하여 대구고등법원이 취한 인사이동발령 행정집행정지 가처분에 대해서는 사태수습을 위하여 불법항고는 하지 말 것

② 교원노조가 합법이냐 불법이냐에 관해서는 정부로서 법조계 · 학계 · 교육계 · 학부형측 등 각계의 의견을 청취하여 정부의 태도를 취하고 상호모순되는 법률간의 조정을 위한 입법조치를 하려 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미 이 문제가 본안소송에 이른 바에는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는 것도 필요하므로 본안 소송을 진행할 것

국무회의 결정사항

1960년 9월 7일정부는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를 합법화시키기 위하여 입법조치와 법령개정을 고려할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1960년 9월 13일, 민의원에서는 일부 극우파 의원들이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를 불법화시키기 위하여 노동조합법개정안을 제안하였다. 이에 자극받아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1960년 9월 14일부터 전국적으로 단식투쟁에 들어갔으며, 졸도자가 생기고 만 여 명의 학생들이 이에 가담하자, 9월 29일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폐기되었다. 그렇지만,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아직까지 인정을 받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10월 18일 전국대표자 회의가 끝난 후, 약 4백여 명의 대표가 문교부국회로 진입하였다.

오천석 장관은 “조직은 허용하되 쟁의권은 부여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문교부장관의 견해에 반발하여 12월 11일에 열린 제4차 전국대의원 회의에서 행정부에 보내는 경고결의문이 채택되었다. 노동조합법 반대투쟁에서 시작된 교원노조의 투쟁은 이제 2대 악법 반대투쟁으로 보다 급진화되었다. 민주당정권은 노동운동과 반정부운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을 입법하려고 하였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는 다른 혁신계와 함께 두 법안을 〈자유당때보다 더한 악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61년 3월 9일대구에서 대표자회의가 열려 2대 악법 철회요구가 결의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전국교원의 동시휴가원 제출을 결의하였다. 당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의 수석 부위원장인 강기철과 선전부장 신동영은 『민족 일보』에 2대 악법 반대 성명서를 개재하였고, 경남지구 교원노동조합연합회 위원장은 시민 궐기 대회에서 연설하는 등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61년 4월 9일에는 전국적 파업을 결의하였다. 교원노조의 정치적 급진성과 관련되는 간접적 사건이 4월 6일 대구에서 발생했다. 이른바 〈대구데모사건〉으로 불리는 2대 악법 반대시위에는 노조측 · 혁신정당 · 학생단체가 가담하여, 가장 격렬한 폭력시위가 발생했다. 여기서 경북교원노조 위원장 김문심은 노조측을 대표하여 일부교원들을 개인 자격으로 참여시켰다.


5. 교사 소모임 시대[편집]



5.1. 박정희 정부[편집]


파일:교원노조 해직자 수.jpg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한 군부세력들은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를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용공분자로 몰아서 강제 해산하고, 3008명의 교사를 단지 교원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해직시켰다. 특히 지역별로는 경남(현재의 부산·울산시 포함)이 763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다음이 경북(현재의 대구시 포함)이 503명, 경기지역이 484명이었다. 3008명 중 초등은 800개 학교에서 1405명, 중등교원은 666개 학교에서 1603명이 해직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조작된 혐의로 유죄를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군사정부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6조'를 소급 입법시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간부 54명을 혁명재판소에 구속기소했다.

1961년 11월 16일 혁명재판소 심판 제3부 (재판장 김정운)는 강기철 징역 15년(구형 15년), 신동영 징역 10년(구형 12년), 이목 징역 10년(구형 12년), 신우영 징역 5년(구형 1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후 대구교원노조 사건으로 기소된 여학룡(80·대구지부 부위원장) 징역 3년에 5년간 집행유예, 2대 악법 반대 연대투쟁 사건에 기소된 김문심(경북지부 위원장·당시 50세)씨에 대해서는 무기징역(구형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 혁명재판소는 이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교사들에 대해 "북괴의 음계(陰計)수행에 이익이 된다는 사정을 숙지하면서 반공임시특별법안과 데모규제법안에 대한 비판문을 배부"하는 등의 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판결했다. 군사정부은 처음에는 '정권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를 씌웠지만, 경찰조사 과정에서 아무 것도 나오지 않자 용공분자라는 죄목을 씌워서 교단에서 추방하고 감옥으로 보낸 것이다.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간부들은 감옥에서 나온 뒤 유신정권 때인 1975년 '사회안전법'이 시행된 뒤 보안처분대상자로 분류돼 이후 격리처분이라는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특히 강기철은 출소 후에도 19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 1975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지에 몸담으며 민주화 운동을 계속하다가 1977년에 12년간 보안관찰 대상자로 지정되어 공민권 등 사회활동 전반이 가로막혔다. 1987년 7월에 갑자기 보안관찰 대상에서 면제된 뒤 1993년 문민정부가 5.16을 쿠데타로 규정하자 교원노조 사건의 진상규명을 소망하며 이듬해에 '5.16 진상조사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국회에 청원해서 여야 의원 35명이 서명했으나 구성에는 이르지 못했고,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후 생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 보상 신청을 했지만 2001년 11월에 당시 법률상 보상대상을 1969년 3선 개헌 뒤로 잡은 탓에 보상을 못 받았다. 이에 그는 재심청구도 냈지만 2002년 2월에 기각됐다.(2002년 오마이뉴스 기사, 2004년 신동아 기사)

이 사건은 노무현 정부 당시 생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5.16 군사정변 후 벌어진 인권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재심을 권고하였으며, 사건발생 50년만인 2010년 4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제11형사부가 '특수반국가행위'로 기소돼 징역 10년형을 선고(1961년)받았던 이목 교사(89)에게 '무죄'를 선고하며 박정희 군사정부의 조작사건임이 드러났다. 당시 그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이 제정한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조직법에 의해 설치된 혁명재판소의 선고로 10년을 선고받았으며 1965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될 때까지 5년여를 복역하게 된다.

나머지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2017년 9월 검찰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재심을 권고한 73개 사건 가운데 이 사건 등 과거사 사건 모두 6건에 대한 직권 재심을 법원에 청구하며 재심의 길이 열렸다. 이후 2018년 4월 6일, 대구지방법원(제11형사부 손현찬 부장판사)은 1961년 10월 20일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제6조(특수반국가행위)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확정 받은 이종석, 고(故) 강기철, 고(故) 신동영 교사 등 전 한국교원노조 간부 3명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57년 전 선고를 '무죄'라고 바로 잡았다. 함께 재심 피고인 명단에 오른 동료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버려 교사들은 홀로 지팡이를 짚고 다시 재판부 앞에 섰다. 그리고 반세기를 넘어서야 겨우 누명을 벗게 됐다.

재판부는 "교원노조는 교육민주화·교육행정 부정타파를 위해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며 "'데모규제법(집회시위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 등 2대 법안을 반대한 것은 정당한 노동운동과 노조활동을 탄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했다. 또 "남북학생회담 지원 결의안을 작성한 것은 당시 활발히 논의된 남북 통일에 대한 평화적 교류 차원에서 이뤄진 지지 선언으로 그 자체가 반국가단체인 북한 활동을 고무·동조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당시 정부와 반대된 입장의 행위를 했어도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행위이므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이종석 교사는 "내일 모레 아흔인데 오래 살아 남으니 이런 일도 있다"며 "우리 사회의 정의를 입증한 민주주의 승리"라고 기뻐했다. 또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한 일이었다"면서 "지금 그것이 보장된 사회에서 산 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와 재심을 청구한 검찰에도 고맙다"고 했다.

당시 혁신운동 못지않게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교원노조운동은 노동운동을 사무직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다만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기까지 교원노조 설립운동은 약 30년의 단절기간을 겪게 되었다. 당시 군사반란으로 태어난 정부가 교원노조를 해체시킨 이후 공무원과 교원의 노조설립을 전면금지시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단절기간 내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교육의 민주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투쟁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의 헌법 개정 사태이자 1972년 12월 27일에 제3공화국 헌법을 정지시킨 10월 유신 사태가 일어난 뒤, 유신정권은 시위를 효과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유신정권은 학도호국단제의 실시와 군사교육 강화, 교수재임용제, 신임교수의 계약채용제, 서울대학교에 학생의 집회, 데모, 농성, 등교거부를 금지하는 새로운 학칙제정 지시 등 학원에 대한 억압적인 감시·통제정책을 강화했다.

학원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강화는 민주 회복과 학원자유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의 확산을 가져왔고, 1977년 이후부터는 학생들과 경찰의 충돌로 유혈 시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며, 학생들의 구속과 제적 등 대량 학사징계가 뒤따르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학원에 대한 감시와 탄압도 노골화하여 대학 캠퍼스마다 중앙정보부 요원과 사복형사, 형사기동대가 건물을 차지하고 학생들과 교수들을 감시했다.

진실을 말하는 교수들은 교단에서 내쫒기고 권력 당국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하는 어용화된 교수들만 판을 쳤다. 지도교수라는 방식으로 교수들은 학생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 심지어 학생시위를 막는 기동타격대의 보조역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연구활동의 성과보다는 권력기관의 명령에 얼마나 충실한가 하는 충성도에 의해 교수로서의 자격이 평가되고 자리가 주어졌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이 지경이 되자 웬만한 교수들은 교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자체에 모멸감을 느꼈다. 대학의 자율성과 민주적인 교육풍토는 캠퍼스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런 참담한 교육현장에서 침묵하던 양심적인 교수들이 민주교육을 선언하게 된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하였다. 우리의 교육지표는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그런 모순을 집약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특히 독재체제를 합리화시키고 있는 국가주의적 교육사상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파일:우리의 교육지표 사건1.jpg파일:우리의 교육지표 사건2.jpg
서명자 11명은 「우리의 교육지표」가 발표된 그날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로 연행되었다. 교수들이 연행되자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교수 연행에 항의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들은 교수들의 선언서를 낭독, 배포한 뒤 교수 석방과 학원사찰 중지, 어용교수 퇴진을 외치며 도서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하였고 완전무장한 경찰들이 페퍼포그를 쏘며 도서관에 난입,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연행하였다.

다음날 당국은 휴교령을 내렸지만 전남대학교 학생 1천여 명은 광주시내를 돌며 민주교육과 유신철폐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연행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3일간 계속되었다. 3일간의 시위과정에서 500여명이 연행되었고, 학생14명과 일반시민으로 YWCA간사와 선언문을 인쇄해준 인쇄소 주인이 구속되었다. 전남대 학생들의 연일 계속되는 시위에 조선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하였다. 1978년 7월 3일 조선대 학생들은 ‘조선대학교 민주학생 선언문’을 낭독, 배포하고 시위를 벌였고, 이 시위로 조선대학교 학생 4명이 구속되었다. 연행되었던 교수들은 11명 모두 해직되었고, 그 중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소설가인 송기숙 교수는 7월 4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전남대 교수들의 「우리의 교육지표」선언은 탄압받고 감시당하는 대학에서 신분이 보장된 대학 교수들이 투옥과 해직을 각오하면서 유신독재의 반민주적인 교육실상을 용기 있게 폭로한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진실을 가르치기보다는 죽은 지식을 전달하고 학생들이 독재 정권에 항거할 때 이를 제지하고 감시하였다는 신랄한 비난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이들이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교육에 대한 소신을 밝힌 것은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현직교수 11명이 서명한 「우리의 교육지표」선언이 발표되자 대학사회와 시민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면서 운동단체나 재야단체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학생, 종교계 및 양심범가족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등의 지지 시위와 성명이 잇따랐다.

이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에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육지표를 선언한 연세대 해직교수 성내운 등이 최초로 사용한 말로 성 교수는 ‘국민교육헌장’의 비민주성을 일제의 교육칙어(교육에 관한 칙어)에 비유하며 “물질보다 사람을 존중하고, 진실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위하여 학원이 민주화되고 인간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86년 6월 ‘충청 교육민주화선언’ 교사들이 “민족의 미래를 결정짓는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온 우리 교사들은 참담한 교육현실 속에서 침묵을 반성하고 교육자적 양심에 따라 참교육에로의 지향”을 선언했다. 이로부터 참교육은 교사운동의 이념과 방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민주적 학교 조직, 국가의 교육 독점, 궁핍한 교육 재정과 학습조건, 권위적 관료행정 등을 개선하고 이를 위해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교육 주체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사건들을 봤을 때 이 시기의 교원노조 운동은 탄압속 성공이라고 평가받는다. 80년대는 70년대 대학생활을 경험한 소위 진보적인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 밖에서 소모임 운동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야학, 연극 등 개별 비공개 운동으로 유신정권을 타파하려 했고 그 중 지하조직으로 나타난 것이 아람회 사건, 부림사건, 오송회 사건, 남민전 사건 등이 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이러한 운동들이 유신정권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실제로 유신정권1979년 YH 사건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부산·마산 민주 항쟁으로 인해 위기를 맞았고 결국 10.26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붕괴하게 된다.


5.2. 전두환 정부[편집]


유신정권 붕괴 이후 신군부12.12 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았고, 이전 군부정권과 마찬가지로 교원노조를 탄압하는 데 열을 올렸다. 결국 교육운동은 군사정권 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5공 정권의 폭압통치 아래에서 야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신진 그룹들이 대거 교단으로 이동하면서 학교 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 위한 실천적인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학교별·지역별·교과별 소모임이 전국적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들은 1981년 공개 단체인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YMCA 사우회, YMCA 초등교육자협의회 등을 결성하고 활동했다. 이 중 일부 교사들은 1984년 말 운동의 성과를 모은 공식 출판물을 기획했다. 교육현장을 고발하고 교사들의 다양한 실천사례를 소개한 부정기 간행물(무크지) <교육현장>(사계절출판사)과 <민중교육>(실천문학사)을 1985년 4월과 5월에 각각 출판한 것이었다. 두 책은 문화공보부의 납본필증을 교부받은 합법 출판물이었다. 두 책은 외국의 이론이 아닌 우리의 교육현실을 직시한 정책과 실천을 갈급하던 교사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경찰은 <민중교육> 출판기념회를 봉쇄·무산시키고 관련 교사들을 연행·조사했다. 이들을 ‘좌경용공’이라 몰아붙이며 검거했고 김진경·윤재철 두 교사와 송기원 실천문학사 주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관련 교사 20명 가운데 10명을 파면(김진경·윤재철·유상덕·고광헌·이철국·이순권·심임섭·조재도·홍선웅·송대헌), 7명을 강제사직(심성보·강병철·민병순 등), 2명을 감봉, 1명을 경고 조치했다. 이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교사들이 해직되자 전국의 교사들은 분노했고, ‘고통받고 있는 선생님들을 격려하자’며 격려금을 모았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희생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참여해온 광주지역 교사들은 ‘민중교육지 사건은 우리 교육과 직결된 문제’라는 공감대 속에 너도나도 모금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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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울·부산·광주·춘천의 교사들은 오랜 준비끝에 1986년 5월 10일 ‘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했다. 교육민주화선언은 내신제 도입에 따른 반교육적 부작용, 해마다 과열되는 입시경쟁,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의 강제실시, 사학재단의 비리 등 80년대 들어 더욱 심화된 교육모순이 학생들의 잇단 자살 등 교육위기로까지 치닫자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일선교사들의 교육민주화운동이 일정한 결실을 맺은 것이다. 1985년 5월 우리나라 교육현실을 분석,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이며 전국의 교사들이 이 선언을 잇따라 지지하고 나서자 문교부는 선언 주동자들을 파면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섰으나 이는 오히려 교사와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만 불러왔다.


6.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시대[편집]


선언 발표 직후인 1986년 5월 15일 교사들은 <민중교육지사건>으로 해직된 교사들을 중심으로 <민주교육실천협의회>를 결성, 교육민주화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5월 21일 <자살학생위령제>, 7월 17일 <민주교육탄압저지대회>, 8월 29일 <민중교육지사건 1주년에 즈음한 민주교육실천대회> 등의 실천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교사들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국은 탄압조치로 일관, 한국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전국회장 윤영규 등 3명의 전남지역 교사들을 도서 벽지로 전보발령 조치한 데 이어 이에 항의하는 위 교사들을 구속하는 등 1986년 5월부터 1987년 4월까지 11명 구속, 6명 타도전출, 26명 해임, 9명 정직 등 150여 명의 교사들을 교육민주화운동과 관련 처벌했다. 이러한 당국의 탄압에 항의, 재야단체의 교육민주화운동 지지선언이 잇따르고 야당·종교계·재야단체가 연합한 <민주교육탄압저지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는 가운데 교육민주화운동은 전국의 교사·학생·학부모에게 확산되어갔다.

1987년 4월, 민주적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의 열기를 무시한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로 인해 일선 학교가 국민 여론과는 달리 집권세력의 호위병으로 전락하는 것을 목도한 교사들은 ‘정치민주화 없이는 교육민주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체득했다. 이들은 6.10 민주 항쟁에 참여하여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참여하면서 교사들은 보다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전국적 교사단체 건설에 대한 제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6.10 민주 항쟁 이전까지 주로 선진적 소수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교사운동은 항쟁 이후에는 각 학교 단위로 교사들의 대중조직인 평교사협의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7.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시대[편집]


위와 같은 현장의 결정에 따라 1987년 9월 20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가 발족되었다. 창설 주도자는 1985년 <민중교육>지 사건 관련자였던 김진경 등이었다.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사학 민주화라는 외피를 쓰고 교육 민주화, 교원의 노동 3권 보장, 국정교과서 폐지, 교장 선출임기제 실시, 학생 집회의 자유 등을 추진했다. 또한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교사의 노동 3권 보장, 교사의 정치적 자유와 사회지위적 지위 보장, 자주적 교원단체의 결성과 활동 보장, 해직교사의 복직과 구속 학생의 석방, 악질적 교육관료와 사학재단의 퇴진, 어용 대한교육연합회 해체, 교사/학생 및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된 교육자치제의 확립, 심야학습/보충수업의 철폐,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실천 등을 주장하고, 동시에 교육민주화를 가로막는 교육악법철폐운동을 전개했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전국 15개 시·도와 130여개 시·군·구, 600여개의 학교에서 3만여명의 평교사 회원 조직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교육관계법의 독소 조항 개정운동을 주요 사업으로 내걸고 4만여 교사의 서명을 받은 교육법 개정안을 국회에 청원했다. 또한 사학의 해묵은 족벌 비리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 사학 연대조직을 다졌다. 더불어 ‘교과연합모임’ 소속 4,000여명의 회원들이 교과서 내용을 분석·비판하는 연구사업을 벌여 ‘통일을 여는 국어교육’ ‘민족민주교육을 위한 개편 교과서 지침서’를 출간하는 등 자주적인 교과서 개편 활동을 벌여나갔다.

1988년 11월 20일 여의도 광장에서는 ‘참교육 실천을 위한 전국 교사대회’가 열렸다. 전국 14개 시·도에서 상경한 1만여 참가 교사들은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가 이미 교사들의 자주적 단체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의단체에 불과한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교육악법 개정투쟁을 힘있게 벌이거나 개별 학교 차원에서 부당하게 겪는 교권침해 등에 대처하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교육민주화를 열망하는 일부 교사들을 뛰어넘어 교사 전체의 권익을 옹호하는 권익 실현단체로서 질적인 전환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거듭된 토론 끝에 법적으로 보장된 교섭권을 행사하고, 교사들의 광범위한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전국 단일노조의 형태를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회 또한 이를 인식하여 본회의에서 교원 노조법을 상정하여 통과시켰으나 이 교원 노조법은 노태우 대통령거부권 행사에 의해 무산되었고, 이는 앞으로 있을 법외노조로서의 교직원노동조합의 긴 수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이 당시는 노태우 정권이 민주화운동 세력의 괄목할 진출에 긴장하며 대선 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유보하고, 문익환의 방북을 빌미삼아 일대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상황이었다. 딩연히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이에 적극 대응해야 할 책무를 마주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8.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시대[편집]




8.1. 노태우 정부[편집]


위와 같이 교육현장에서의 열기를 밑바탕으로 하여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는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989년 2월 19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대의원회의에서 노동 3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교직원 노동조합의 결성을 결의한 것을 시작으로 5월 14일, 1만 5천명이 모인 가운데 전교조 준비위원회 결성과 발기인 대회가 열렸으며, 5월 28일에 윤영규 교사를 초대 위원장에 앉히며 연세대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이날 연세대에 모인 전국 1,500여명의 교사들은 ‘전교조 깃발 아래 참교육 쟁취하자’는 구호 아래 출범했다. 해당 영상은 아래와 같다.




1절
2절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굴종의 삶을 떨쳐 기만의 산을 옮기고[3]
너와 나의 눈물 뜻 모아 진실을 외친다
보이는가 강물 참교육 피땀 흐르는
들리는가 함성 벅찬 가슴 솟구치는
아 우리의 깃발 교직원노조 세워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만만세
굴종의 삶을 떨쳐 반교육의 벽 부수고
침묵의 교단을 딛고서 참교육 외치니
굴종의 삶을 떨쳐 반역의 어둠 사르고[4]
이제 교육 동지 굳세게 단결 전진한다
함께 가세 이 길 아이들의 넋이 춤추는
함께 가세 이 길 사람사는 통일세상
아 우리의 깃발 교직원노조 세워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만만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이날 교육의 자주성/전문성 확립과 평화통일 실현, 교직원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민주적 권리의 획득 및 여건의 개선, 학생들의 노동계급으로서 노예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실현, 자유/평화/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 단체 및 교원단체와의 연대 등을 골자로 한 강령을 선포했다. 이후 전교조는 한달여 만에 130개 지회, 600여개 분회, 2만 회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교사들의 자주적인 대중조직으로 우뚝 서게 됐다. 4.19 혁명과 함께 조직된 교원노조가 5.16 군사정변으로 해체된 이후 28년 만의 일이였다.

그러나 전교조의 앞길은 결성 전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전교조가 결성되기 전인 3월 25일, 국어교사모임이 <민족 민주교육을 위한 개편 교과서 지침서>를 발간하자, 문교부는 이 지침서가 '의식화 교육'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아 지침서에 관련된 교사와 지침서를 학습 자료로 쓰는 교사까지 형사처벌하려 했다. 이유는 당시 국어교사모임이 머릿말에 "현직 교사들의 수업 경험을 기초로 한 이 책은 앞으로 부교재 및 대체 교과서 개발의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히고 현 교과서의 문제점이 서구 편향을 비롯해 국가 이데올로기 강조, 봉건적 충효이념과 지나친 강조로 인한 민주주의 이념의 유보, 그리고 도시 중심적이고 중상류층 편향이라 하여 이를 대체할 만한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그리고 민중 지향적인 교육 내용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1989년 4월 8일에는 노태우 대통령청와대에서 '좌경세력 척결'을 결정한 뒤, 본격적으로 의식화 사례 수집에 나섰다. 그리고 이를 '학부모 진정'이란 형식을 빌어 일선 기자들에게 흘려 대서특필하게 했다. 또 4월 말에 '의식화 교사' 31명을 내사 중이라고 밝혀 교직원 노조 결성에 대한 방해 공작을 펴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몇몇 교사는 강제로 교단을 떠나야만 했다.

전교조가 결성되자마자 문교부는 전교조는 불법이므로 인정 불가이며, 전교조에 가담하는 교사들은 모두 중징계하겠다고 발표했다. 거기에 정부는 각 지역마다 행정기관,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사, 전국 시/군 교육청과 시/도 교육위원회, 각급 학교 등을 총동원했다. 1989년 9월 국정감사에 따르면 전교조 와해에 동원된 기관이 총 11개 기관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전교조 반대 집회와 여론을 형성키 위해 노력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7월 10일 주례 라디오 방송에서 "노조 결성을 주도하는 일부 교사들이 이른바 '참교육'을 내세워 교실에서 6.25는 북침이니, 현 정부(노태우 정부)는 반통일 세력이니, 노동자/농민/도시빈민/학생과 굳게 연대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고 그릇되게 가르치는 것은 방치할 수는 없다"라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7월 20일 광주시내 20여 개 고교생 1만 5천여 명은 전남대학교광주대동고등학교에 모여 '교원노조 지지 및 징계철회 요구 대규모 연합집회'를 열었다. 서강고등학교, 금호고등학교진흥고등학교 등 광주 북부지역 12개 고교생 8천여 명은 정오 반쯤 우렵에 전남대 5.18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연 뒤 낮 3시 30분쯤 후문을 통해 북구청 앞까지 2백여 미터가량 가두로 진출해 시위를 계속하다 4시 30분 무렵에 자진 해산했다. 또 광주대동고등학교광주광역시 서부지역 고교생 2천여 명도 오전 9시경부터 광주대동고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가두진출을 시도하고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또한 광주 유당학원[5][6] 산하 광주서석고등학교 학생들은 전교조에 가입하신 교사들의 수업만 들을 것이며,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은 교사들에 대해서는 수업 거부 운동을 벌였다.[7][8] 수업 거부 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은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또한 광주 홍복학원(서남대학교 설립자 이홍하가 운영한 또 다른 재단) 산하 옥천여자상업고등학교(현재 서진여자고등학교), 대광여자고등학교, 광남고등학교 등 3개 고등학교 산하 1천여 명은 같은 날 오후 2시에 학부모 총회를 열어 재단측이 교원노조 가입 교사에 대해 징계방침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납부금을 내지 않기로 했다.

실제로 위의 사례들은 잘 알려진 사례들만 적힌 것이며, 실제로는 더 많은 투쟁이 훨씬 격렬하게 일어났다. 거부 운동은 양반이였고, 경찰과 투석전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경찰, 검찰, 안기부, 보안사령부 등의 공안기관은 전교조 집회의 불허, 불법집회에 대한 의법조치, 고발된 전교조 교사의 사법조치, 전교조 관련 사항에 대한 교육위와의 정보교환, 교사와 학생의 농성 등 집단행동의 사전차단, 언론에 대한 보도 등의 사항에 대한 공동협조관계를 공고히 하며 탄압에 열을 올렸다. 거기에 시도 교육위와 시군 교육청, 각급 학교 등 교육기관은 이른바 '건전교사'들이 교원노조를 막을 수 있게 하고, 교원노조의 부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학부모들의 교원노조 반대 집회를 조직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전교조를 비방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이런 정부와 공안기관, 교육기관 삼각라인의 방해와 탄압 공작으로 많은 교사들이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의 절정은 1989년 7월 1일 문교부는 전교조 소속 1519명의 교사를 파면, 해임시킨 것이였다. 이때 해고된 교사들 중에는 도종환[9], 안도현[10] 시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당시 전교조 활동과 관련해 구속된 교사만 47명, 징계위에 회부된 사람이 1,794명이며 전교조에 탈퇴각서를 거부한 1,527명의 교사가 해임되었다.[11]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기약할 수 없는 약속만을 남기고

강물이 가다가 만나고 헤어지는 산처럼

무더기 무더기 멈추어 선 너희들을 두고

나는 또 너희들 곁을 떠나는구나

비바람 속에서도 다시 피던 봉승아잎이 안개비에 젖고

뒤뜰에 열지어 선 해바라기들도 모두 고개를 꺾었구나

세월의 한 굽이가 이렇게 파도질 때마다

다 못 나눈 정만 흥건히 담아둔 채 어린 너희들의 가슴에 잔물지는 아픔을 심는구나

나는 다만 너희들과 같은 아이들 곁으로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달래도

마른 버즘이 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이며

아직도 다하지 못한 나의 말을 자꾸 멈추게 하는구나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이 짧은 세상에 영원히 같이 사는 사람은 없지만

너희들이 자라고 내가 늙어서라도 고맙게 자란 너희들의 손을 기쁨으로 잡으며

이 땅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하나 되어 꼭 다시 만나자.

도종환 시인의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 중 일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눈물이 떠난다는 생각을 얼핏 떠올렸을 때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애착이나 억울함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부정하고 부정해도 끝내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 하나 아주 여리고

아주 작던 그래서 많이도 고통스러웠던

지금까지 나를 끌고 온 그런 것 하나를

역시 버릴 수 없어서 아팠다

도종환 시인의 <겨울 금강>(1998) 중 일부

정부는 전교조 가입 교사의 시한부 탈퇴일을 8월 5일로 정했는데도 전교조를 탈퇴하는 교사들의 수가 저조하자, 검찰문교부는 지금까지 불법노조 결성이란 차원에서 다뤄 오던 전교조 문제의 방침을 바꾸어 전교조의 근간을 이룬 교육 이념에까지 문제삼기 시작했다. 검찰 측은 전교조의 참교육 이념인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 북한의 민족해방 이념인 '삼민이념(민주/민중/민족)'과 똑같다고 몰아 전교조에 이적단체 혐의를 씌웠다. 거기에 문교부는 전교조의 참교육 구호가 위장구호라고 선동했다.

전교조 합법화 이후인 2002년에 해직 교사들 중 상당수가 국무총리 직속기구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찬성 5, 반대 3, 기권 1을 거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는데, 당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와 전국중등교장협의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보수 언론 등지에선 우려 입장을 표했다.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V. 언론·노동편' 보고서에 따르면 '전교조 조직탈퇴 및 와해 공작'이라는 항목에서 "위 청와대 대책문서와 당시 안기부 내부 보고 자료에 의하면 안기부는 전교협에 대한 정보 분석을 바탕으로 교원노조에 대한 정부차원의 정책 대응방안과 시기별 대책방안을 제시하는 등 교원노조 대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안기부는 전교조 출범전후에 관계기관대책회의를 통해 대책방안을 제시하고 전교조에 대한 이념공세와 지역대책협의회를 주도하 였다. 또한 안기부의 대책은 전교조 조직 와해를 목적으로 한 가입교사에 대한 탈퇴공작 ෹참여교사 징계심사 ෹복직교사나 신규임용 교사에 대한 보안심사를 통해 단순시위 경력자들조차 교원선발과정에서 탈락시키는 것 등이었다. 또한 대량해직 이후 정부정책으로 제시된 ˄교원양성과 임용에 관한 종합대책안 마련에도 안기부의 조정력이 행사된 것으로 파악되었다."라고 밝히며 국정원의 종북몰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보고서 369페이지)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보고서 6권을 전부 보고 싶으면 국회전자도서관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전교조 조직탈퇴 및 와해 공작' 항목은 5번째 보고서 366페이지부터 시작한다. pdf 뷰어로 직접 보고 싶으면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I. 총론,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II. 주요 의혹사건편 上권,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III. 주요의혹사건 下권,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IV. 정치·사법편,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V. 언론·노동편,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VI. 학원·간첩 문서를 참조할 것.(모종의 이유로 3권은 열리지 않으니 직접 링크를 참조할 것.)

강성호 교사는 1989년 당시 정부당국이 전교조 결성을 막고 전교조 교사들을 ‘빨갱이 교사’로 낙인 찍기 위해 저지른 공안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피해자다. 그는 제천 제원고(현 제천디지털전자고)로 발령받았으나 교사 발령 석 달을 다 못채우고 1989년 5월 24일 '북침설'을 가르친 교사라는 누명을 쓰고 구속된다. 1990년 1월 25일 청주지방법원은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으며(청주지방법원 89노563) 징역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그대로 형을 확정하였고 1990년 6월 22일 직권면직되면서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는 경남 진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충북에서 갓 교단에 선 초임 교사였던 그는 안기부에게 좋은 타겟이 되었다.

당시 대질심문에서 그에게 6.25는 북침이라고 가르쳤다고 제천경찰서 대공과에서 대질심문 중 진술했던 그들은 그 수업이 있던 날 결석한 사실이 출석부와 같은 반 학생들 증언으로 드러났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당시 검찰은 그런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고 법원은 그런 증언을 증거로 채택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경찰에서 그 수업을 듣지도 않은 6명의 학생이 형사에게 저러한 진술을 하였고, 이에 반발해 600명의 학생들이 탄원서를 제출함을 물론 교내 집회를 열어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으나 6명의 진술만이 받아들여졌다.

그는 1993년 사면 복권되었지만 1994년 전교조 결성으로 인해 해직된 교사들이 복직할 때 국가보안법 관련 해직자로 분류돼 복직대상자에서 제외됐다. 이후 해직 10년 4개월 만인 1999년 9월 1일에 복직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89년 형을 산 지, 3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는 그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강성호 교사는 2019년 5월 28일, 구속된지 30년 만에 청주지방법원에 재심 신청을 했다. 청주지방법원은 2019재노7호로 사건을 접수하였으며 재심 개시 여부에 대한 심리를 한 끝에 2019년 11월 28일 재심을 개시하기로 결정하였다. 2020년 1월 30일 첫 재심이 열렸고 6차례 공판 끝에 2021년 6월 10일 결심공판이 열렸다. 이날 검찰은 강 교사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자격정지 1년을 명령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강 교사는 최후 진술에서 "당시 초임교사였던 저는 교과 내용(일본어 교사)을 재밌고 의미 있게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단지 "백두산과 금강산, 일본 후지산 사진 등을 보여주며 아름다운 북녘 산하를 가보지 못한 안타까움과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전해주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런 수업을 좌경의식화교육으로 뒤집어씌운 당시 학교장 태도는 스스로 교육자이기를 포기한 행위"라며 "교장이 담당교사를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도 전에 경찰에 먼저 신고하는 일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를 살아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야만과 광기가 지배하던 군부독재 시절, 체제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짓밟혔던 저와 제자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달라"며 "시대가 남긴 아픔을 치유하고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시대를 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하며 최후진술을 마쳤다. 최후진술 중 처음으로 교단에 선 자신을 향해 제자들이 불러 준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강 교사의 동료와 지인 등은 '강성호 교사의 무죄판결을 촉구합니다'라고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재판을 방청했다.

강 교사 변호인 측은 이날 결심 공판에서 그동안 이어졌던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임의성이 없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북침설 교육을 들었다는 일부 학생들의 증언을 믿을 수 없고, 당시 안기부(국정원의 전신)가 전교조 와해에 개입했다는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 자료('과거와 대화, 미래와 성찰')를 들며 강성호 교사는 공안당국에 의한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선고 공판은 9월 2일 오후 2시 열린다. 전교조 충북지부는 청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침설 교육 조작사건으로 강성호 교사는 무죄"라며 "진실이 승리하는 재심 판결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노동과 세계, 오마이뉴스1, 오마이뉴스2, 충북인뉴스, 중부매일, 한겨레신문, 가톨릭프레스, 오마이뉴스3, 뉴스1

그리고 9월 2일, 청주지법 형사항소2부(부장판사 오창섭)는 국가보안법 위반(찬양·고무) 재심에 부쳐진 강 교사의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 중 피고인에 대한 불법 체포·구금 중에 작성된 일부 진술서와 경찰 피의자신문조서, 압수물, 압수조서, 참고인 일부 진술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다"며 "학생들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6·25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 아니고, 미군이 먼저 북한을 침범해 일어난 것이다'라는 피고인의 발언 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수업 도중 북한에 관련한 발언도 교육 목적 아래 시사적인 문제에 관해 개인적 의견을 표명한 정도에 불과하다"며 "피고인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거나 반국가단체에 이로울 것이란 인식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부연했다. 뉴시스, 뉴스타파, 오마이뉴스, 충청일보

이로써 당시 안기부가 전교조 창립 날짜에 맞추어 전교조 가입 교사들을 상대로 ‘좌경 교사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치밀하게 조작해 그해 5월22일, 24일, 26일 세 차례에 걸쳐 교사 세 명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체포한 뒤 이틀 간격으로 공안 사건을 조작해 언론에 파상적으로 유포함으로써 ‘전교조에는 빨갱이가 많다’는 프레임을 확산시키려 한 시도는 사법부가 무죄를 선고하며 진상규명이 되었다. 당시 체포된 교사는 서울에서 두 분, 그리고 충북의 강성호 선생님이었다.알려진 탄압은 ‘새 발의 피’,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다시 뭉친 이유, ‘촌지 안 받고 열심히 가르치면’ 전교조 교사라고?

한편, 안기부와 별도로 1989년 문교부에서 일선 교육청으로 내려보낸 공문에 담긴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신동아 7월호에서 보도했다.
파일:전교조 교사 식별법.jpg

1.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2. 학급문집이나 학급신문을 내는 교사

3.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4. 신문반, 민속반 등의 특할반을 이끄는 교사

5.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6. 반 학생들에게 자율성, 창의성을 높이려 하는 교사

7. 탈춤, 민요·노래,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8. 생활한복을 입고 풍물패를 조직하는 교사

9. 직원회의에서 원리 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

10.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

11. 자기 자리 청소 잘하는 교사

12. 학부모 상담을 자주하는 교사

13. 사고친 학생 정학이나 퇴학등 징계를 반대하는 교사

14. 한겨레 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전교조 교사 식별법

정원식 문교부 장관 휘하의 문교부는 친절하게(?) 전교조 교사 식별법까지 만들며 전교조 탄압에 앞장섰다. 당시 해임조치로 수많은 해직교사들의 생활고가 극심해졌다. 이에 대해 정원식 문교부 장관 본인도 "제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으나 젊은 교사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데 대한 자책을 떨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전교조를 이끈 것은 당시의 처참한 교육 현장과 이에 책임이 있는 기성 교사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젊은 교사들이었으며 이 때문에 당시 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 당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린 교사들 중 일부가 사교육 업계로 진출했는데, 박승흡, 이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들 알다시피 <르몽드 코리아>와 스카이에듀를 창설한 그 사람들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n86세대의 교육 항목을 참조할 것. 물론 저렇게 학원에서 성공한 인물은 극히 일부이고 대다수는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복직하거나 끝내 복직하지 못한 사람이 대다수이다.구체적인 사례

이들 중 일부는 1994년,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해임 전 동일 학교에 복직할 수 없다는 것과 단체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 후 복직되었다. 나머지는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복직이 되었으나 100% 복직이 되지는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특별법을 통한 복직이 추진되고 있으나 아직 국회에서 특별법이 통과되지는 못했다. 법안 내용이나 진행상황은 [2105440] 해직교원 및 임용제외 교원의 지위 원상회복에 관한 특별법안(강득구의원 등 113인) 문서를 참조할 것. 김영삼 정부 당시 복직은 정원식 문교부 장관도 비슷한 시기 서울대 동기인 오병문 문교부 장관에게 복직을 건의했다고 한다. 완고하게 탄압을 했으나 자책감과 동정심은 있었다...는 정도의 일화이다. 이 일로 세종대, 덕성여자대학교, 부산대학교 등에서 강하게 야유를 받으며 그 유명한 밀가루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게 당시 보수정부를 구원하는 히든카드가 되었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여튼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교조 운동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전교조는 다양한 방식의 교사 모임과 '참교육 학부모회'를 비롯한 지원역량을 조직하고, 다른 재야세력과의 연대활동을 통해 전교조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전개했다. 또 조합원의 비공개로 조직의 사수에도 성공했다. 단적인 예로 1990년 초에 교육부 측은 "이제 현역 교사 중 전교조 교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발표했으나, 전교조 통계에 따르면 1990년 7월 기준으로 145개 지회에 조합원 수만 14,000여 명에 이르렀고 이중 12,000여 명이 현직 교사였다.

노태우 정부가 끝난지 한참이 지난 2020년 3월 31일 30년 이상 경과한 외교부 기밀문서가 공개되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노태우 정부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를 인정하지 않고 노동탄압을 했던 실상이 국제 사회에서 쟁점화될 것을 우려해 1990년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보류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82년부터 공식 옵서버자격으로 노사정 대표단이 참석한데다 재외공관을 총 동원해 ILO 가입에 나섰던 정부가 1990년 총회가 열리기 6개월 전에 돌연 ‘가입 보류’를 결정했던 내막은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었는데 그 이유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때문이었던 것이다.

1989년 12월 27일 청와대, 국무총리실, 안기부, 노동부, 외무부 등이 진행한 관계부처 회의 문서를 보면, 정부는 1990년 6월 예정인 ILO 총회에서 가입 추진을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총회가 열리기 직전까지 ILO 가입을 위해 득표 운동을 했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유엔(UN) 회원국은 ILO 자동회원이 될 수 있으나 유엔 비회원국인 우리 정부는 ILO 총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가입이 가능한 만큼, 각 국가의 지지가 중요했다. 문서에는 “최근 노사문제, 특히 전노협, 전교조, 공무원노조 결성 문제 등이 ILO에 가입할 경우 국제적으로 쟁점화되고, 이에 따라 국내적으로 부담을 가중시킬 소지가 있다”고 적혀있다. 또 “정부의 전노협, 교원노조, 공무원 노조 불허 방침 및 국내법상의 복수노조 결성 금지 규정 등이 ILO 기본정신인 결사의 자유 원칙에 위배된다”고 언급돼 있다.

정부의 불안은 문서 곳곳에 나타난다. 문서에는 “국내 노동단체들의 ILO 이의·진정 제기와 이에 따른 ILO의 대정부 의견제출 요구, 사실 조사단 파견, 위반사항 시정 권고 등 사태 빈발 예상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 “전교조, 공무원노조, 전노협 인정할 수 없는데 ILO가 이를 문제 삼을 경우 곤혹 치루게 될 것”이라며 “최근 정부의 노동운동에 대한 강경 대응 방침에 비춰 국내 노동운동에 대한 ILO 간여는 국내 정치·경제에 큰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담겨있다.

정부도 ILO 가입을 보류한 진짜 이유가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대외 설명 요지’도 따로 만들었다. 그동안 한국의 ILO 가입을 지지했던 국가들에게 설명할 때 참고하라고 적혀 있다. 문서에선 “ILO 협약상 유엔 회원국이 될 경우 가입 의사 통고로만 가입이 가능함에 비춰, 현 시점에서 다대한 외교력 동원이 요구되는 ILO 가입을 서두르지 않고자 한다”고 밝혔다. 또 “ILO 가입을 반대하고 있는 북한의 적극적 방해 책동이 예상되고, ILO 가입 요건이 워낙 까다로워 ILO 가입은 여전히 용이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노동부: 노동부로서는 국제노동기구 가입이 최대의 국제사업으로 매년 국제노동기구 가입을 희망해온 것이 사실임. 그러나 우리나라가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할 경우 국내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전노협이 국제노동기구에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보이며, 전교조, 공무원노조 등 문제 또한 국제노동기구에서 이슈화될 것으로 보임.

안기부: 노사문제 향방 불확실한 상황에서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함으로 국내 노사분규가 국제문제화 될 수도 있으므로 내년(90년)도 가입 추진 보류하는 것이 좋겠음.

총리실: 국제노동기구 가입으로 국제적 지위가 격상되는 것은 추상적인 것임.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에 봉착한다면 1~2년 연기하는 것이 좋겠음.

외무부: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해 국내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면 국제노동기구 가입 추진 재검토해야 할 것임.

청와대: 국내 노사문제가 국제노동기구에서 새삼스럽게 거론될 가능성도 있으므로 노동부 의견대로 일단 가입 추진은 유보하는 것이 좋겠음

외무부: 노사관계가 안정되면 가입 문제를 재검토해 보겠으나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내년도 가입 추진은 보류하기로 함.



8.2. 김영삼 정부[편집]


김영삼 정부1994년 3월 1일자로 전교조 해직 교사 1329명을 복직시켰다.# 복직 이후에는 전교조를 위해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전교조를 기존 노동조합이 아닌 별도의 교원단체로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특별법 제정’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전교조는 특별법 제정에 강하게 반발하며 철야농성, 교사선언 등을 하며 노동조합법에 따른 노조 합법화를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이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교사들이 해직과 복직, 그리고 또다시 해직을 반복하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나 이 시기에도 전교조는 여전히 합법노조로 인정받지 못했고, 1997년 6월 13일 국제노동기구(ILO) 이사회가 전교조 인정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등 정부와 국제사회와의 마찰도 여전했다.


8.3. 김대중 정부[편집]


그러다가 1998년 10월 31일, 1997년 외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구성된 2기 노사정위원회가 '교원노조법안' 에 합의했고, 1998년 11월 23일 국무회의에서 교원노조법안이 의결되어 국회에 제출되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1998년 7월 16일 해직교사들에게 준법서약을 받은 후 복직을 허용했다. 이후 1999년 다시 한 번 복직을 허용했다.

[151502]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안(정부)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교원노조법안 제출 이후 정부1999년 6월 8일1999년 6월 26일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과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을 제정해 세부적인 사항을 규정했다. 또한 국회는, 1998년 12월 3일 전교조를 합법화하는 내용을 담은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회부하였다. 이후 1998년 12월 2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통과, 1999년 1월 6일에는 본회의에서 통과시켜 1999년 1월 15일 정부로 이송시켰다. 정부는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과 대통령령인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시행령 하위 조항인 고용노동부령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켜 1999년 7월 1일부터 발효시켰다. 전교조는 1999년 7월 1일 오전 9시 조합원 62564명으로 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하였고, 다음날인 1999년 7월 2일 고용노동부가 설립신고를 수리해 신고증을 교부하였다. 국민의정부 이해찬 교육부장관 아래에서 전교조는 결성한지 10년만에 합법화 되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도 합법화되었다.#


8.4. 노무현 정부[편집]


그리고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전교조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정부와의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2003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통일위원회가 소속 교사들이 수업시간에 활용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반전평화 공동수업’ 자료집에 부시 미국 대통령과 이라크 전쟁에 대해 비판한 내용들이 문제가 되어 노무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특정 교원단체가 국가적 공론이 이뤄지지 않은 사안을 가르쳐도 좋은 것인지 검토가 필요하며, 사실여부를 파악하여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교육부에 지시하였다. #

2003년 노무현 정부교육행정정보시스템 도입을 추진했는데, 구축 초반에 학생의 사생활 침해 논란과 함께 보안 사고 우려 및 법률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교조 측은 국가 비상상황을 제외하면 국민의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전교조 측은 인적 사항과 성적을 비롯하여 키와 몸무게 등 보건 관련 사항도 일괄 입력되어 학생들의 정보권 침해 문제가 있는 점, 교육의 행정화[12]를 이유로 들어 이 교육행정정보시스템 도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 반발이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전교조 교사들이 수업 거부 파업을 결의, 연가 투쟁에 들어갈 정도였다. 하지만 교사공무원이기 때문에 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는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법적인 대응 대신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을 통해 교사들을 직접 만나 교육행정정보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설명하여 교사들을 설득을 해나갔고, 이후 교육행정정보시스템 구축에 성공했다. 이후 문재인 정무수석은 자신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 제3부 8.사회적 갈등관리라는 부분에 교사들은 서리가 내리는 한겨울에도 굽히지 않고 옳음을 위해 꼿꼿이 투쟁하는 대단하신 분들이라고 저술했다.

다만 참여 정부는 과거 정권의 교원노조와 전교조 탄압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적극적으로 해나갔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발족시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탄압 사건에 대해서 2009년 10월 13일 ‘진실규명’으로 결정했다. 5ㆍ16 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 3페이지부터 참고할 것. 이 진실규명은 보수정권 당시 한참동안 이목 교사를 제외하고는 재심이 미루어지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검찰 과거사위원회를 법무부가 발족시켜 과거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사건의 직권재심을 청구하여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그러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노태우 정부 당시 전교조 대량 해직 사건은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가 아닌 단순 해직 사태라고 판단해 각하했다. 그렇지만 참여 정부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를 발족시켜 노태우 정부 당시 전교조 조직탈퇴와 와해공작 당시 국정원의 개입에 대해서 조사를 하였다. 실제로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V. 언론·노동편'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전교조 조직탈퇴 및 와해 공작'이라는 항목을 통해 국정원의 전교조에 대한 종북몰이와 탈퇴 및 와해 공작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위원회에서 발간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보고서 6권을 전부 보고 싶으면 국회전자도서관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전교조 조직탈퇴 및 와해 공작' 항목은 5번째 보고서 366페이지부터 시작한다. pdf 뷰어로 직접 보고 싶으면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I. 총론,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II. 주요 의혹사건편 上권,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III. 주요의혹사건 下권,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IV. 정치·사법편,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V. 언론·노동편, 국정원 진실위 종합보고서-VI. 학원·간첩 문서를 참조할 것.(모종의 이유로 3권은 열리지 않으니 직접 링크를 참조할 것.)

다만 대체로 전교조는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일례로 전교조는 노무현 정부교원 성과급제 도입을 추진하자 이를 반대하며 참여 정부와 갈등을 빚는 사건이 있었다. 또한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 관련해서도 갈등을 빚었다. # 이는 운동권 출신이자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문재인 정부 대통령직속 국가교육회의 대입제도개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진경 당시 교육문화비서관이 전교조를 "교육발전에 방해가 되는 세력"이라 비판하면서 극에 달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386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학원 장사를 해 떼돈을 번다. 이들이 사교육 시장을 키운 주범이다.라고 공개적으로 저격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n86세대 문서의 교육 항목을 참조할 것.


8.5. 이명박 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법외노조 갈등과 소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정부는 대입 논술고사를 폐지하고 국영수 과목을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학 자율화' 방침을 밝혔다. 또한, 초중고 자율을 확대한다는 정책으로 0교시 보충수업 허용, 우열반 편성 허용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학생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전교조 교사측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정부와 갈등을 맺게 하였다.

전교조 측에서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대도시의 학생 기준으로 난이도가 점점 올라가고, 이로 인해 지방 소도시 및 농촌 지역의 교육 소외지역의 경우, 학생들의 수준을 높이고자 부득이하게 0교시, 7교시 심지어는 야간 보충수업자율학습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한다고 보았다.관련기사 특히 시험치는 과목인 국영수만 집중적으로 이수하며,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예체능, 도덕[13] 과목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수업이 힘들어진다는 시각을 보였다. 게다가 일제고사는 교육의 주체인 일선 교사들과 피교육자의 의견이 전혀 수렴되지 않고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는 것이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법외노조 갈등과 소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따라서 이명박 정부에 반해 전교조 교사들은 줄세우기 교육은 잘못되었으며, 학생들은 골고루 배워야 하고 충분히 쉴 권리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그러자 교육청은 일제고사에 반대하며 답안지 제출을 거부하고 현장학습을 실시한 14명의 교사들을 해직시켰으며,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들을 지위에 나누어 징계 조치를 내렸다. 또한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해 교사들에 대한 수사를 실시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이명박 정부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늘 반대하는 전교조와 본격적으로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결국 전교조에 대해 불법적으로 제약을 걸었으며(국정원 검찰 경찰 등을 통한 사찰 등) 전교조는 이에 저항하면서 긴 갈등이 시작되었다.


8.6. 박근혜 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법외노조 갈등과 소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3년 10월 24일 고용노동부가 전교조에 해직교사를 조합원으로 뒀다는 이유로 전교조에 교원노조법상 노조가 아니라는 통보를 하였다. 이후 다시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이어진 법외노조 갈등이 지속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법외노조 갈등과 소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4년 2월에는 경찰이 전교조 간부들과 진보 교육감들을 감찰했다는 의혹이 나타나 충돌이 일어났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법외노조 갈등과 소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5년 양승태 대법원이 전교조 행정소송을 상고법원 도입을 매개로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일어나 후일 검찰수사와 당시 대법원장의 구속기소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15년 11월 20일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와 법외노조 탄압 저지를 위해 실시한 연가투쟁이다. 특히 전교조는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성명을 내고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성명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제2 유신 선언이다! 교사 1만5000명,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선언 실제로 당시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는 정반대 성향인 교총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강하게 나오는 등 문제가 많았다.# 결국 정부가 바뀌고 난 지 3일만에 국정교과서 정책이 모두 폐기되었다.


8.7. 문재인 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법외노조 갈등과 소송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전교조는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선축하 논평을 내고 법외노조 조치를 직권으로 철회해 줄 것을 대통령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이는 후에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법외노조 소송 과정 참조. 결론적으로는 전교조가 행정소송에서 승소하면서 법외노조 통보가 취소되었다.

2020년 12월 10일, 이부영 전 전교조위원장(76·전 송곡여고), 황진도 교사(69·전 인천인화여고), 이주영 교사(66·전 장충초교), 윤병선 교사(63·전 서울고), 양운신 교사(63·전 부천소명여고)가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전교조 대량해직 당시 교사들을 상대로 자행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태우 정권이 자행한 전교조 탄압의 실상이 3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대로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전교조에 대한 공권력의 주도면밀한 ‘공안 프레임’ 씌우기와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탄압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결과 아직도 사회 일반에 교육민주화 운동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교조 참여 교사들에 대한 대규모 해직과 구속뿐 아니라 은밀히 자행된 국가폭력으로 인한 무수한 인권유린 피해가 철저히 외면당해왔다고 호소한다. 알려진 탄압은 ‘새 발의 피’, 전교조 해직 교사들이 다시 뭉친 이유

이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기 진실화해위가 전교조 사건이 조사 대상으로서 형식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며 2차례 각하했던 것과 달리 노태우 정권 시절 1천500여명이 파면·해임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탄압 사건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과거 2009년 10월 1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사건에서는 ‘진실규명’으로 결정했다. 5ㆍ16 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 사건 보고서 3페이지부터 참고할 것. 이 진실규명은 보수정권 당시 한참동안 이목 교사를 제외하고는 재심이 미루어지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검찰 과거사위원회를 법무부가 발족시켜 과거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사건의 직권재심을 청구하여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그러나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당시 전교조 대량 해직 사건은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가 아닌 단순 해직 사태라고 판단해 각하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의 법적 근거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정리법)이 1기와 2기 사이에 개정됐지만, 위원회 조사 대상을 정리한 제2조 진실규명 범위의 주요 내용은 바뀌지 않아 같은 위원회가 동일 사건을 다르게 판단한 셈이다. 이에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관계자는 "인권 개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기 때보다 인권이 한층 더 중요한 가치로 대두되고 감수성도 높아지면서 '해직도 인권침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소위원장인 이재승 상임위원은 "2005년 만들어진 과거사정리법을 현재 시점으로 가까이 가져올 필요가 있다"고 했다. 2소위는 전교조 탄압 사건을 비롯해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춘재 연쇄살인 사건/8차 등 인권침해 사건이 배당된 조사2국을 관할한다. 전교조 탄압 사건 조사의 초점은 노조 탄압 과정에서 정부 기관이 위법하게 공권력을 사용한 사실이 있었는지 등 인권침해 전모를 밝히는 데 맞춰질 전망이다. 신청인 측 관계자는 "국가가 해직교사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판단으로 조사가 개시돼 감사하다"며 "진상이 최대한 빨리 정확하게 밝혀지면 좋겠다"고 밝혔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를 위한 자료수합을 위해 12월 29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본부 사무실에 방문했다. 전교조 탄압 사건 등을 조사하고 정리하는 있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관계자는 현재 전교조 89년 해직교사 백서편찬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백서 진행 현황을 물었다. 이유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입장에서는 피해사실진술서에 담길 내용과 대동소이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내년 5월 10일 출간 예정인 백서에는 89년 해직교사들이 왜 교육민주화운동에 참여했는지, 왜 전교조에 가입하고 이후 국가폭력으로 인한 고초를 겪은 이야기를 300여 명의 해직교사가 직접 쓴 글이 담길 예정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관계자는 12월 현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전교조 관련 사건과 국가보안법 등 기타 여러 사건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은 교사들을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는 89년과 90년 당시 안기부가 기획한 교원노조대책반 관련 문서들을 중심으로 조사 중에 있다. 이는 2007년도 국정원과거사위원회에서 한번 정리된 것이기도 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관계자는 당시 보고서의 기초자료가 되었던 국정원 생산문건의 내용을 담고, 국가기록원에 있는 각 시도교육청이 생산한 전교조 교사 징계관련 문건 자료 등을 수합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이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_ 원상회복특별추진위원회는 전교조 탄압이 주로 자행됐던 결성전후인 88년부터 90년까지 전교조 신문기사를 발췌한 자료 등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에 전달하고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 필요한 자료제공에 적극 협조하기로 했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는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취소 및 직권면직된 교원 전원 복직과 단체교섭 재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시행령에서 법외노조 통보 조항 철폐, 국제노동기구 필수협약 협약 비준,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 개정(해직 교원의 노조 가입 허용)을 비롯한 노동관계법률 및 시행령과 시행규칙 전면 개정, 과거 교원노조[14]와 전교조 탄압에 대한 진상규명, 전교조 사건 재판거래에 대한 검찰 수사와 기소, 이명박 정부 국가정보원의 전교조 와해공작, 이명박근혜 정부 국군기무사령부의 불법사찰, 이명박근혜 정부 경찰의 전교조 불법정보제공 등에 대한 검찰 수사와 기소 등을 모두 실시했다.

다만 저 중 일부는 대법원의 판결과 국제사회의 통상 압박이 원인이었으며,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전교조 자체와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대법원 판결 전까지는 노동조합 전임자 휴직조차 허용하지 않았으며 전교조가 요구한 법외노조 통보 직권취소도 해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법외노조 소송 당시에는 법외노조 통보가 타당했다는 의견을 밝혔으며, 전교조의 기조인 학생부 교과 확대와 자사고, 외고의 일반고 전환은 받아들였으나 대학수학능력시험 위주의 정시전형 축소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확대하였으며 수능 절대평가 전환은 거부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처럼 전교조를 탄압하지는 않았으나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타 기관이나 국가 및 국제기구로부터 요구받은 부분에 대해서만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과거처럼 탄압했다가는 후일 검찰이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망에 오를 수 있고, 과도하게 거리를 가까이 했다가는 반대측의 반발을 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행정집행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8.8. 윤석열 정부[편집]




9. 참고/관련 자료[편집]


  • 경향신문 <실록 민주화운동> 제94회 (2005년 3월 16일자)
  • 교사를 위한 변명: 전교조, 스무 해의 비망록 - 윤지형 저. 우리교육. 2009.
  • 대한민국 50년사 2권 - 임영태 저. 들녘. 1998.
  • 대한민국사 1945~2008 - 저자/출판사 동일. 2008.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육 민주화운동 30년의 기억 - 이성대 저. 우리교육. 2022.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4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1] 여담으로, 참가한 대표 중에는 가수 김광석의 아버지인 김수영씨도 있었다. 지부장 자리와 교원노조 회지의 집필자로 활동하는 등 교원노조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 3차 개헌으로 들어선 정부이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의원내각제를 채택했다. 대통령은 윤보선이였으나 큰 권한을 갖지 못했고, 실질적인 권한은 장면 총리에게 있었다.[3] '산을 옮긴다'는 구절은 성서에서 나온 표현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오의 복음서 17장 20절),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3장 2절)[4] 1986년에 작곡자 주현신이 작사까지 다 한 '한반도의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라는 민중찬양의 가사에도 '반역의 어둠 사르는 순교자의 불길로'라는 표현이 나온다.[5] 유당 최상옥 이사장이 세운 재단[6] 계열사로는 남화토건주식회사(건설업), 남화개발주식회사(건설업), 유당농원(종합영농), 센트럴 상호저축은행 (금융업), 유당농산(종합축산), 한국케이블TV 광주방송, 재단법인 유당문화재단)[7] 광주서석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시자 모교에서 윤리를 가르치신 교사에 따르면 교실 문을 걸어잠그고 교사와 대치하였으며, 결코 교사를 교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8] 전교조에 있다가 면직되신 그 당시 교사에 의하면 이사장님이 한 명 한 명 찾아가 교육당국에 맞서 전교조에 가입한 사실을 잠시 숨겨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사들은 완고했고, 결국 면직되었다. 당시 근무하던 화학 교사에 의하면 광주에서 가장 많은 8명의 교사들이 전교조 가입으로 인해 해직되었다.[9] 이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16번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까지 올라서게 된다.[10]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가 터지자 내 이름은 없을까 걱정되었다는 발언을 하며 블랙리스트를 비꼰 그 시인이다.[11] #[12] 전교조는 학교 자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단체이다.[13] 다만 고등학교부터는 도덕에서도 이데올로기와 사회사상 등 사회학에 들어가는 내용이 속속 등장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확 오른다.수능때 응시할수 있는 과목인만큼 더더욱.[14] 과거사위는 노무현 정부 당시 출범해 이명박 정부 초기 결론을 내렸으나 검찰에 재심 청구를 한 것은 문재인 정부 들어와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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