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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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토 백색.svg
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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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신사 명칭 및 사격은 근대사격제도가 폐지된 1946년 2월 2일 직전 기준
* 신사의 지리적 위치 순서로 나열(동북 → 서남 → 외지)
사격외
(社格外)



관폐대사
(官幣大社)


























































































































대만신궁(폐사)



조선신궁(폐사)



부여신궁(미진좌)



관동신궁(폐사)



남양신사(폐사)


국폐대사
(國幣大社)













관폐중사
(官幣中社)














































대남신사(폐사)


국폐중사
(國幣中社)














(닛코 · 우츠노미야) 후타아라야마 신사












































































관폐소사
(官幣小社)











국폐소사
(國幣小社)
















































































경성신사(폐사)





대구신사(폐사)



평양신사(폐사)



광주신사(폐사)



강원신사(폐사)



전주신사(폐사)



함흥신사(폐사)



신죽신사(폐사)



대중신사(폐사)



가의신사(폐사)


별격관폐사
(別格官幣社)

























































관폐국폐사등외별격
(官幣國幣社等外別格)









경성신사
京城神社(けいじょうじんじゃ




소재지
경기도 경성부 와조다이초
(京畿道京城府倭城台町)
(現 서울특별시 중구 소파로2길)
제신(祭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개척3신
사격(社格)
국폐소사(國幣小社)
창건
1898년
해체
1945년
예대제
10월 17일
1. 개요
2. 역사
3. 조선신궁과의 관계
4. 섭사



1. 개요[편집]


경성신사(京城神社)는 일제강점기 경성신사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구 숭의여대 자리에 있었다. 1898년에 창건되었고, 1936년 국폐소사로 승격되었다. 주제신은 아마테라스와 개척3신이었다. 경성신사는 1925년에 조선신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조선의 신사를 대표했다.


2. 역사[편집]


1898년 한양에 살던 일본인들이 왜성대(정확히는 현 리라아트고 자리)에 '남산대신궁'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 남산 북쪽 기슭은 일본 공사관에 이어 통감부가 자리잡고 일본군이 주둔하며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된 곳이었다. 일본인 거류민들이 늘어나자 자연스레 신사 건립 요구가 제기되어, 1897년 거류지 남쪽에 왜성대공원을 조성하면서 공원 부지 중 400평의 땅에 신사를 짓기로 했다. 1898년 5월 일본인 거류민 대표가 본국에 건너가 이세 신궁에서 신체를 받아온 다음, 그해 10월 3일에 진좌제를 거행했다.

파일:ksj01.jpg
경성신사 배전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을 경성신사(京城神社)라 개칭하고, 오는 10월 17일에 정천궁(正遷宮)[1]

겸 제전을 집행하기로 현재 준비중이라는데, 경성 거류민단장의 명의로 각 부장과 기타 단체에 대하여 통첩하였다고 한다.

神社祭典과 通牒, 《매일신보》, 1913.9.30.#

1913년에 이름을 ‘경성신사’로 바꾸었다. 1916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정식으로 신사로 허가를 받았다. 1920년대에 이르자 경성의 일본인 수가 늘어나고 신사 규모가 협소해지자 경내를 크게 확장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29년에 서쪽으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숭의여대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하고 개척3신을 합사했다.

여기서 개척3신(開拓三神)이란 오오쿠니누시스쿠나히코나, 국혼신(国魂神)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오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는 일본 신화에서 한 쌍으로 등장하여 일본 각지의 땅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신이고, 국혼신은 특정한 신격이 아니라 어떤 지역이 일본 통치권 아래 들어오기 이전의 토착 신령들을 총칭하거나, 또는 그 지역 자체를 관념적으로 신격화한 것이다. 개척3신은 근대 일본이 어떤 지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며 신사를 세울 적에 모시도록 한 대표적인 신격이다. 오오쿠니누시와 스쿠나히코나는 일본 각지의 땅을 만들고 지명을 지은 신격들이므로, 개척3신을 신사에 봉안함은 어떤 지역이 '개척'되어 일본 영토의 일부가 되었음을 종교적으로 표상한다.

1936년에 부산 용두산신사와 함께 국폐소사로 지정되었다. 각 도에 국폐소사를 하나씩 두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대체로 국폐소사들이 따르는 표준 제의를 따랐으나 특이한 점은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이 되면 일한병합기념제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3. 조선신궁과의 관계[편집]


경성신사와 조선신궁의 위치가 가깝고 모시는 신마저 겹쳤기 때문에, 경성신사가 조선신궁의 부속 신사인 섭사(摂社)가 되리라는 보도도 있었다. 경성신사는 조선신궁의 섭사가 되지 않도록, 또한 참배객들이 어차피 아마테라스를 참배한다면 격이 더 높은 조선신궁으로 가버리지 않도록 애를 많이 썼다. 조선신궁의 체면으로는 허락하기 어려운 신토식 결혼식을 주관한다거나, 심지어 조선인들까지 어울려 놀 수 있는 축제를 연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조선신궁은 일본의 권위를 상징했기 때문에 모든 의례에서 '엄숙'을 강조했으므로 경성신사처럼 민중의 생활에 밀착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경성신사는 신토식 결혼식의 명소로 떠올라 돈을 많이 벌었고, 그 돈으로 시설을 확충하고 경내를 넓혔다. 신사를 후원하는 우지코(氏子)에 조선인들을 참여시키고자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4. 섭사[편집]


파일:ksj02.jpg
파일:ksj03.jpg
경성신사 섭사 이나리사(좌), 노기 신사(우)

[1] 신사의 개축, 수선이 완료되어 신체를 본전으로 천좌(遷座)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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