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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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격제도(近代社格制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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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신사 명칭 및 사격은 근대사격제도가 폐지된 1946년 2월 2일 직전 기준
* 신사의 지리적 위치 순서로 나열(동북 → 서남 → 외지)
사격외
(社格外)
이세 신궁
관폐대사>
(官幣大社)
삿포로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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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신궁(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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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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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신궁(미진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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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신궁(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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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신사(폐사)
국폐대사>
(國幣大社)
게타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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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폐중사>
(官幣中社)
가나사나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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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신사(폐사)
국폐중사>
(國幣中社)
하코다테 하치만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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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코 · 우츠노미야) 후타아라야마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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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폐소사>
(官幣小社)
오쿠니타마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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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폐소사>
(國幣小社)
이와키야마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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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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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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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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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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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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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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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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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죽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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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신사(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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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신사(폐사)
별격관폐사>
(別格官幣社)
우에스기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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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폐국폐사등외별격
(官幣國幣社等外別格)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min(150px,50%)" {{{#!wiki style="margin: -5px -10px" 이세야마 황대신궁



1. 개요
2. 현황



1. 개요[편집]


남양신사(南洋神社)는 남양 군도, 오늘날 팔라우의 코로르(Koror)섬에 있었던 신사이다. 1940년에 창건되었으며, 이는 황기 2600년(서기 1940년) 기념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제신은 아마테라스.

2. 현황[편집]


1997년에 일부 일본인들이 구 남양신사 터에 조그마하게 신사를 지었다. 하지만 본디 남양신사에서 모시던 신체(神体)는 1946년일본 궁내부로 이송되었고, 1997년에 '재건'된 남양신사는 신체를 별개로 모셨기 때문에 신토적인 의미에선 '구 남양신사의 재건'이 아니라고 한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신격을 모신 다른 신사 취급. 게다가 말이 재건이지 구 남양신사 신전과 배전 터만 현지인 소유주에게 임대하여 작은 사당을 세운 정도에 불과하다. 개인주택 부지의 일부가 된 관계로 집주인에게 허락을 받지 않으면 참배조차 하기 힘든 위치라고.

팔라우는 반일감정이 적은 지역이라[1] 재건된 남양신사에 있는 비석 중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일본군을 기리는 문장도 있다.

한편 일본 사이타마현 코시가야시 코시가야(越ヶ谷) 1700번지에 있는 히사이즈 신사(久伊豆神社)[2]에서는 관련 기관들의 협력을 받아 2016년 경내에 '구 관폐대사 남양신사 진좌적지 요배전(旧官幣大社南洋神社鎮座跡地遥拝殿)'이라는 건물을 세웠다. 이름은 '근대사격제도에서 관폐대사였던 남양신사의 터를 요배(멀리서 절함)하는 전각'이란 뜻이다. 해당 건물 옆에는 역사학자이자 신토학자였던 고쿠가쿠인대학 명예교수 사카모토 코레마루(阪本是丸 1950-2021)가 글을 쓴 석비가 있다. 낙성식에는 당시 팔라우의 토마스 레멩게사우 주니어(Thomas Esang Remengesau, Jr.)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1] 팔라우는 일단은 국제연맹 위임통치령인 남양 군도의 일부로서 일본 제국대만이나 조선과 같은 식민지와 비교해서 강압적 동화정책을 펴거나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후나사카 히로시 같은 수많은 반전운동가들이 팔라우까지 와서 반전운동을 벌이고 전쟁 중에 사망한 현지 민간인과 일본군, 미군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차별 정책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있던 반일 감정이 크게 희석된 것도 있다. 물론 식민지에서 징용한 노동자들을 데려와 부려먹긴 하여, 아예 반일감정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2] 신사명 久伊豆를 정식으로는 '히사이즈(ひさいず)'라고 읽지만, 쿠이즈(クイズ)라는 독법도 대중에게 통용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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