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토야마 이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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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fff 일본국 제100대 외무대신]] 하토야마 이이치로 鳩山威一郎 | Hatoyama Iichir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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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8년 11월 11일 |
도쿄도 도쿄시 | |
사망 | 1993년 12월 19일 (향년 75세) |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100대 외무대신 |
1976년 12월 24일 ~ 1977년 11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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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하토야마 이치로의 장남이자 하토야마 유키오, 하토야마 구니오 형제의 아버지이다.
2. 생애[편집]
1918년 11월 11일 일본 도쿄시에서 하토야마 이치로와 하토야마 가오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등사범부속 소학교 (현 츠쿠바대학 부속 소학교), 구제부립고등학교 고등과 문과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되지않아 해군에 징집되어 해군 주계 중위로 5년동안 복무했다. 1942년 브리지스톤의 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의 장녀인 이시바시 야스코와 결혼했다.
1946년 해군 중위 소집 해제 이후 대장성에 복직하였고, 경제 기획청 장관 관방장, 주계 국장 등의 직책을 거쳐, 1971년 대장성 사무차관에 취임했고, 차관 재임중인 1972년 9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일본 열도 개조론을 배경으로 한 총리의 지상 명령으로서, 1973년 초대형 예산을 짜게 되었다.
이는 1971년 닉슨 쇼크에 따른 인플레이션의 조짐이 보였으나 이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1973년 10월부터 오일 쇼크가 닥치면서, 일본 전후 최악의 물가파동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하토야마는 1971년 닉슨 쇼크 당시에 외환시장 폐쇄론을 주장했지만, 미즈타 미키오 대장대신 등이 주장한 외환시장 개장론이 채용 되었다. 1972년 대장성을 퇴직했다.
대장성 퇴직직후 2년뒤인 1974년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의 공천을 받아 전국구 선거구에 입후보, 당선되었다. 1976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에서 제100대 외무대신에 임명되면서 하토야마 가문의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거물관료 출신이라는 이점까지 더해져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이 기대되었지만, 지병으로 인해 정계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1992년 정계에서 은퇴했고, 1년뒤인 1993년 지병으로 인해 향년 7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3. 선거 이력[편집]
4. 여담[편집]
-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장남 하토야마 유키오와 당선 동기였던 아라이 쇼케이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 1986년 참의원 당선시에 지병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 있어, 중의원에 당선된 두 아들의 부축을 받고 국회의 계단을 올랐다는 후일담이 있다.
순서대로 유키오, 이이치로, 쿠니오.
5. 둘러보기[편집]
하토야마 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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