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륜화경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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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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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자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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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청 황제 · 역대 청 황태자 · 역대 청의 황자
※ 기록이 있는 인물만 기재





固倫和敬公主
고륜화경공주

출생
1731년 6월 28일
사망
1792년 8월 15일(62세)
부왕
건륭제
모후
효현순황후
부군
과이심친왕 박이제길특 색포등파륵주이
(博爾濟吉特 色布騰巴勒珠爾)
자녀
아들 보국공 악륵철특목이액이극파배
(鄂勒哲特穆爾額爾克巴拜)
1. 개요
2. 생애
3. 하가 후 생활



1. 개요[편집]


건륭제의 3번째 딸이자[1] 유일한 중궁 소생의 적출 공주. 생모는 효현순황후 부찰씨이다.

효현순황후의 자식 중 유일하게 성인으로 성장한 자식이며, 청나라가 입관한 이래 가장 오래 산 공주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옹정 9년에 태어났으며 영수궁 근태비에게 양육되기도 했다.

건륭 초년, 지금의 작위인 고륜공주에 봉작되었다. 순서상으로는 건륭제의 황3녀였으나 효현순황후 소생의 동복언니인 황장녀와 철민황귀비 소생의 황2녀가 모두 요절하면서 실질적으로 건륭제의 장녀였다.

건륭 12년 3월에 과이심친왕 보르지기트 색포등파이주이[2]와 혼인하였다. 당시 유일한 적녀였고 건륭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기 때문에 혼사에 대단히 신경을 써줬다. 혼수품도 기존의 적통공주보다 훨씬 많이 받아갔고[3], 최초로 몽골이 아닌 북경에서 남편을 데리고 살았다. 건륭제가 딸을 멀리 시집보내는 것도 꺼렸고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이 굉장히 강대했기 때문에 과이심 친왕과 혼인했더라도 북경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 훗날 같은 고륜공주인 고륜화정공주고륜화효공주도 화경공주의 대우를 넘지 못하였다.[4] 화석공주[5]와의 예고를 참작하여 보내니 이게 건륭제 시절 고륜공주의 표준 대접이 되었다. 훗날 건륭제에게 "유래공주격하혼의례"라는 상서가 있었다고 하나, 후대의 고륜공주들은 단 하나도 이를 따르지 않았다.

과이심 친왕 사이에 딸들과 아들 하나[6]를 두었다. 현대에도 화경공주가 살던 공주부가 남아있다고 한다.

고륜화경공주의 초정 때 건륭제는 보화전에서 몽골 왕공을 하사하였다. 결혼 할 때 건륭제는 여전히 보화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장리(長理) · 호위(護衛) · 전위(典衛) 등 총 8명을 배속시켜 12호를 같이 보냈다. 외명부에서는 화경공주의 어머니인 효현순황후가 장춘궁에서 연회를 배풀었다. 이후 고륜화경공주는 하가했고 연회는 화경공주의 열을 절반으로 줄였다.

3. 하가 후 생활[편집]


화경공주는 경성에 살면서 몽골로 시집간 최초의 공주다.(멀리 시집간 공주는 1000봉, 경성에 시집간 공주는 400봉이 최대) 화경공주는 당시의 친왕(親王) · 패륵부(培爾府)와 이웃사촌으로 지냄과 동시에 청나라에서 유일하게 고륜공주급의 공주부를 가진 공주였다.

화경공주는 부마인 과이심친왕 박이제길특 색포등파륵주이와 금슬이 좋았고 최소 5명의 자식을 낳았다. 건륭 54년의 기록물에는 "대격격(화경공주의 첫째딸)의 출가는 건륭 40년 전에는 조사한 것이 없고, 3격격(화경공주의 셋째딸)이 출가할 때는 은 3500냥, 4격격(화경공주의 넷째딸)이 출가할 때는 은 3000냥을 썼다"라고 적혀있다. 이를 통해 외아들 악륵철특목이액극파배와 최소 4명의 딸을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륜화경공주의 적자 악륵철특목이액극파배가 외할아버지 건륭제에게 받은 총애는 드물게 역사의 기록에도 써있다. 청대의 문인 야오위안즈의 《죽엽정잡기》에 따르면 건륭이 공주의 아들을 위해 직접 지어준 이름인 악륵철특목이액극파배는 고대의 가장 긴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름의 뜻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복을 받고 장수하고 철처럼 튼튼하고 보배처럼 귀하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앞의 3글자인 "악륵철(鄂勒哲)"은 몽골어로 복을 뜻하고 그중 "철의(哲依)"라는 두 글자는 급하게 읽으면 3성의 소리가 나고 특목이(特穆爾)는 장수를 의미하며 액극(爾克)은 잘 붙어있다는 의미이고 마지막 두 글자인 파배(巴拜)는 귀하다는 뜻이다. 대를 이어갈 아들로서 요절하지 말고 오래 살라며 이름 하나도 이렇게 공들여 지었으니 건륭제가 이 외손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건륭 14년 (1749년), 화경공주의 시아버지 다르칸친왕 나복장곤포가 병에 걸리자, 건륭제는 화경공주에게 몽골로 면회를 가 신하들과 함께 돌보라는 명을 내렸다. 건륭 16년 (1751년), 나복장곤포가 병사하자 화경공주는 속히 돌아와 시아버지에게 효를 다하라고 명했다. 청실록에선 건륭은 화경공주의 남편인 부마의 병세에 관심이 많아 어의를 시켜 병영을 진찰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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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1공주와 2공주는 요절해서 사실상 장녀였다.[2] 科爾沁毅親王 博爾濟吉特 色布騰巴爾珠爾[3] 내무부는 공주의 혼수를 장만하고 상자와 장막, 좌요, 호반 등을 추가로 장만하였는데 그 비용이 은 2천 5백냥이었다. 하가하기 전 내무부는 매일 먹는 식사의 예를 마련하고 화석공주와의 급식 예규에 따라 이를 참작하여 고륜공주의 정식 기준으로 정했다. 이런 예는 황귀비를 훨씬 능가하고 황후보다 조금 낮은 급이었다.[4] 같은 고륜공주지만 적녀는 화경공주 뿐이고 나머지는 서녀였다.[5] 청황실에서 후궁 소생의 공주에게 내려지는 작위로 조선 왕실의 옹주와 비슷하다. 당연히 고륜공주는 황후 소생의 적녀에게 내려지는 작위로 조선의 공주에 해당한다. 서녀인 화석공주는 군왕과 같은 지위이며, 적녀인 고륜공주는 그보다 높은 친왕과 같은 지위이다.[6] 보국공 악륵철특목이액이극파배(鄂勒哲特穆爾額爾克巴拜). 건륭제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어머니인 화경공주가 죽은 다음해에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