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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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52년 5월 ~ 7월, 칼레와 인접한 피카르디 지방의 긴(Guînes) 요새를 놓고 벌어진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의 공방전.


2. 상세[편집]


1346년 1차 캉 공방전 당시 캉의 수비를 맡았다가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힌 에우 백작 라울 2세 드 브리엔은 런던으로 끌려가 4년간 억류되었다가 1350년 몸값 5만 리브르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가석방되었다. 그 돈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소유한 긴 성을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긴 성은 잉글랜드가 1차 칼레 공방전을 통해 확보한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인 칼레에서 9.7km 떨어진 요새로, 칼레 주변의 프랑스 국경지대의 요충지였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곳을 확보한다면 칼레에 대한 프랑스군의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라울 2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1350년 8월 22일 아버지 필리프 6세가 사망한 뒤 9월 26일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프랑스 국왕이 된 장 2세는 라울 2세가 그런 거래를 제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다. 그는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라울 2세를 체포한 뒤 11월 19일 즉결 처형했으며, 라울 2세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긴 성 역시 프랑스 국왕의 소유지로 편입되었다. 이에 잉글랜드 측은 긴 성을 자기들 것으로 삼을 기회를 엿보았다.

1352년 1월, 돈캐스터의 존이라는 이름의 향사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가 긴 요새 공략에 착수했다. 돈캐스터의 존은 전쟁 초기에 포로로 잡힌 후 긴에서 강제 노역하다가 풀려난 후 잉글랜드로 돌아갔다가 폭행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갇혔다가 에드워드 3세의 칼레 원정에 동행하는 대가로 풀려난 뒤 칼레 수비대에 배석되었다. 그는 긴 요새에서 노역하면서 그곳의 수비 상태를 눈여겨봤기 때문에, 그곳의 약점에 대해 잘 알았다. 그와 동료들은 밤중에 해자를 건너 성벽을 기어올라가 보초를 죽이고 성채를 습격한 뒤, 그곳에 갇혀 있던 잉글랜드 포로들을 석방하고 성 전체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프랑스 수뇌부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긴 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위그 드 벨콩로이는 잉글랜드군을 피해 도망쳤다가 북동부 전선 사령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에게 체포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장 2세는 1월 15일 에드워드에게 사절을 보내 휴전 중인 상황에서 긴 성을 빼앗아간 것을 강력히 규탄하며 당장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 전면 전쟁을 벌일 준비가 안 됐고 명분상으로도 밀란다고 보고 긴 성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철수시키려 했다. 하지만 1월 17일 소집된 의회에서 많은 의원들이 전쟁을 강력히 지지하자, 에드워드 3세는 곧 마음을 돌렸다. 의회는 3년간의 전쟁세를 승인하기로 결의했고, 에드워드는 존 드 돈캐스터를 완전히 사면하고 보상을 해줬다.

잉글랜드 측이 이렇게 나오자, 장 2세는 실력 행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1352년 5월, 장 2세로부터 긴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접수한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1,500명의 맨앳암즈와 많은 이탈리아 석궁병을 포함한 4,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토마스 호그쇼가 지휘하는 잉글랜드 수비대 115명이 지키는 긴 성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긴 성은 공략하기가 까다로운 곳이었다. 습지대가 성 주변에 깔려 있고 많은 수로가 있어서 대부분의 방향에서 접근하기 어려우면서도 수비대가 물을 공급받기 용이했다. 조프루아는 지형을 꼼꼼히 살펴본 끝에 요새 정문을 똑바로 공격하는 것만이 요새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정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수녀원을 요새로 개조하고 투석기와 대포를 배치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5월부터 7월까지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쉽사리 정문을 돌파하지 못했다. 그러던 7월 중순에 수천 명의 잉글랜드군이 긴 인근에 도착했다. 이들은 야간에 프랑스 진영을 기습 공격했고, 이를 대비하지 않았던 프랑스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고 수녀원 주변에 쳤던 방어벽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결국 조프루아는 요새를 공략할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철수했다. 다만 칼레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프레툰에 새로 건설된 잉글랜드 탑을 기습 공격해 점거하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파비아 출신의 용병대장 아이머리(Aimery)를 체포한 뒤 생오메르로 끌고 가 도끼로 쳐죽였다.[1]

잉글랜드군은 조프루아를 격퇴한 뒤 칼레 주변 습지를 통과하는 모든 진군로에 요새를 건설해 칼레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칼레 인근 마을 60곳에 요새를 설치했다. 그 후 양자는 몇 달 동안 대치하다가 굣황 인노첸시오 6세의 중재에 따라 1353년 초 긴에서 휴전 협상을 시작했고, 1353년 4월 6일 긴 휴전 협약 초안을 마련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절들은 교황 앞에서 조약을 비준하기 위해 그 해 겨울 아비뇽을 방문했다. 그러나 장 2세가 협약 조건을 자기에게 좀더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전쟁을 재개하기로 하면서, 휴전 협약은 성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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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프루아는 아이머리의 배신으로 인해 잉글랜드군에 생포된 뒤 런던에 끌려가 18개월간 억류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자세한 내용은 칼레 전투 참고.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