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앙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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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루앙 공방전.jpg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418년 7월 31일 ~ 1419년 1월 19일, 헨리 5세의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의 핵심 도시인 루앙을 공략한 공방전.


2. 상세[편집]


1417년 9월 20일 2차 캉 공방전을 통해 공략에 성공한 헨리 5세는 기세를 이어가 아르장탕, 팔래스, 셰르부르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공략했다. 이후 바이외, 코탕탱, 에브뢰, 쉴부르, 알랑송 등지의 주민들이 앞다퉈 귀순하면서, 노르망디 대부분이 헨리 5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헨리는 그 해 겨울 동안 노르망디에 머물면서 점령지에 행정관들을 파견해 지배력을 강화했다. 1418년 봄 원정군을 재차 일으킨 그는 프랑스에서 파리에 이은 2번째 도시였던 루앙을 향한 공세에 착수했다.

1418년 6월, 루앙으로 진군하던 중 루비에르를 공략한 헨리 5세는 루비에르의 포로들 중 자신의 막사에 포탄을 명중시킨 프랑스군 포병 8명을 끌고와 전부 교수형에 처했다.[1] 뒤이어 퐁드라르슈도 함락시키고 여러 요새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뒤 7월 31일 루앙에 당도했다. 그는 루앙 시가지를 둘러보고는 무력으로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 성벽은 매우 두꺼웠고 각각 3개의 대포가 포함된 60개의 탑과 바비칸이 보호하는 6개의 성문이 있었고, 수비대는 4,000명에 달했다. 잉글랜드군은 백년전쟁 기간 동안 여러 공성전을 치렀지만,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성을 공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헨리는 섣불리 공격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느니 16,000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루앙을 완벽하게 봉쇄해 굶겨죽이기로 마음먹고, 4개의 요새화된 숙영지를 건설하고 철 사슬로 루앙 주변을 지나는 센 강에 설치해 누구도 도시를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루앙 수비대와 시민들은 파리 정부가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가는 대도시이며 프랑스 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 도시를 버릴 리 없다고 믿고 구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에겐 불행하게도, 1418년 5월 29일 아르마냑파를 몰아내고 파리를 공략한 부르고뉴 공작 장 1세는 헨리 5세와 밀약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회피하고 있었다. 그는 구원을 호소하는 루앙 대표단에게 500명의 무장병, 1,000명의 궁수, 12,000명의 파리 민병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보내주지 않았고 단지 600명의 민병대만이 루앙에 찾아왔다. 이후 루앙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전령이 지원을 호소하자, 장 1세는 냉랭하게 답했다.

"너희 자신을 스스로 돌봐라."


이렇듯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았지만, 반 잉글랜드 정서로 똘똘 뭉친 루앙 시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했다. 프랑스의 연대기 작가 앙게랑 드 몽스트렐레(Enguerrand de Monstrelet)는 이들이 잉글랜드 왕의 뜻에 복종하기보다는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살아남기로 맹세했다고 밝혔다. 이후 양자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진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루앙에 보관된 식량이 12월 초부터 바닥을 드러내면서 기근의 위협이 엄습했다. 이에 루앙 시민들은 "쓸모없는 입"으로 간주된 여성, 어린이, 노인들을 도시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추방자들이 잉글랜드 진영으로 밀려와서 자신들을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헨리 5세는 누구도 포위망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엄명했다. 결국 이들은 성벽 근처에 파헤쳐진 도랑에서 살아야 했다. 많은 잉글래드 병사들이 이들을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나눠주려 했다가 헨리 5세에게 걸려 처벌받았다. 다만 헨리는 1418년 크리스마스 때 성직자 2명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특별히 주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구호는 이것 뿐이었고, 추방자들은 도랑 안에서 서서히 굶어죽었다.

수비대는 포위망을 뚫기 위해 수차례 출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헨리는 생포된 프랑스 장병들을 수비대가 지켜보는 앞에서 집단 처형했다. 수비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잉글랜드인 포로들을 성벽에 내걸어 목이 졸려 죽게 했다. 이후 수비대와 시민들은 말을 잡아먹었고, 말이 사라지자 개, 생쥐, 고양이 등을 먹어치웠다. 1419년 1월 2일, 기사 16명이 헨리 5세를 찾아와서 조건부 항복을 타전했지만, 헨리는 어떤 타협도 거부했다. 헨리 5세의 입장을 전해들은 시민과 수비대는 도시를 모조리 불태운 뒤 최후의 돌격을 하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첩보원으로부터 이같은 정보를 입수한 헨리는 루앙이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면 자신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임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인질 80명을 넘기고 금화 3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한다면 집과 재산을 지킬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루앙의 많은 시민이 잉글랜드에 충성을 맹세하길 꺼렸지만, 며칠간의 격렬한 논의 끝에 1월 19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기로 결의했다. 구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고, 루앙은 1월 19일 헨리 5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헨리는 루앙에 입성한 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문장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했으며, 자신을 "Henrycus Rex Francorum"(프랑스의 헨리 왕)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자신에게 끝까지 항전한 루앙 수비대 장교들 중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세 장교를 참수하기로 했다. 그가 지명한 희생자는 루앙 대주교의 대리인이었던 로베르 리베, 포병대장인 장 주르댕, 그리고 석궁병 지휘관 알랭 블랑샤르였다. 로베르 리베와 장 주르댕은 재산 일부를 헨리 5세에게 지불함으로써 목숨을 구했지만, 블랑샤르는 이를 거부하고 참수형에 처해졌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처형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재산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을 갖는다고 해도, 잉글랜드인이 불명예스럽게 만들게 하느니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잉글랜드는 루앙을 공략하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할 수 있었다. 이후 루앙은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군 주요 기지가 되었고, 헨리 5세는 이를 기반으로 파리를 향한 공세에 착수했다. 1419년 8월 잉글랜드군이 파리 성벽 밖에 이르자, 그때까지 내전을 벌이던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는 뒤늦게 힘을 합쳐 잉글랜드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아르마냑파 수장인 샤를 도팽과 부르고뉴파 수장인 장 1세가 회담을 가졌을 때, 아르마냑파 기사들이 장 1세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파리에 있던 선량공 필리프는 파리 성문을 개방하여 잉글랜드군이 파리에 입성하게 했다. 1420년 5월 21일, 헨리 5세와 필리프 2세는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헨리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이자 샤를 6세의 섭정이 되었으며, 샤를 6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잇게 되었다. 이리하여 헨리는 프랑스의 왕권 마저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그 후 헨리는 샤를 도팽과 손을 잡고 잉글랜드 북부 지역을 공격한 스코틀랜드를 응징하러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클라렌스 공작 토머스가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에 남았다. 그러나 토머스는 1421년 3월 22일 보줴 전투에서 샤를 도팽과 스코틀랜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는 프랑스로 귀환한 뒤 샤를 도팽을 끝장내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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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부 문헌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포로를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한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