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파리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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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파리 공방전
영어: First Siege of Paris
프랑스어: d'abord Siège de Paris
파일:파리 공방전.jpg
시기
1429년 8월 26일 ~ 9월 13일
장소
프랑스 왕국 파리
원인
아르마냑파의 파리 탈환 욕구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800px-Arms_of_Philippe_le_Bon.svg.png 부르고뉴 공국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프랑스 왕국
지휘관
파일:800px-Arms_of_Philippe_le_Bon.svg.png 릴 아담 영주 장 드 빌리에
파일:800px-Arms_of_Philippe_le_Bon.svg.png 질 영주 시몽 모르히에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샤를 7세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잔 다르크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장 2세 달랑송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질 드 레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12세기-13세기).svg.png 장 드 브로스
병력
파리 민병대 4,200명
약 10,000명
피해
기록되지 않음
기록되지 않음.
결과
프랑스군의 파리 공략 실패
영향
프랑스 왕실과 잔 다르크와의 관계 악화

1. 개요
2. 배경
3. 전투 경과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429년 8월 26일 ~ 9월 13일, 프랑스군이 잉글랜드의 통치를 받는 파리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으나 파리 민병대의 저항으로 실패한 공방전. 잔 다르크가 첫번째로 패배한 전투다.


2. 배경[편집]


1429년 7월 17일, 잔 다르크 등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랭스 행진이 성공하면서 랭스에 입성한 샤를 7세는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샤를은 랭스에서 며칠을 보낸 뒤 30km 떨어진 생마르쿨 수도원을 방문해 감사 기도를 드리고 병자들에게 '왕의 치유'를 베풀었다. 프랑스 역대 군주들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한 뒤 생드니로 가서 그곳의 대성당에서 왕관을 쓴 후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에 입성했다. 생드니와 파리 모두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샤를 7세를 프랑스의 진정한 국왕으로 확립하려는 잔 다르크와 아르마냑파의 입장에서는 두 곳 모두 반드시 공략해야 했다. 잉글랜드 측 역시 이 점을 잘 알 고 있었다. 샤를이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 하루 전인 7월 16일,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은 잉글랜드 왕립 의회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의심할 바 없이 그가 대관식을 거행한 후 다음 목표는 파리일 것입니다. 곧 그곳을 차지하려 하겠지만, 그곳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받은 우리의 저항을 받게 될 것입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중세 후기 유럽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인구는 20만에 달했고, 면적은 439헥타르로 센강 양쪽 강둑에 퍼졌으며, 센강 사이에 있는 시테섬에는 노트르담 대성당, 콩시에르주리 등 중요한 건물이 있었다. 센강의 왼쪽 강둑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로서 가톨릭 신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있는 장소로 간주되는 파리 대학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온 학자들이 거주했다. 센강 오른쪽 강둑에는 정육점, 옷가게, 철물점 등을 운영하는 상인과 장인들이 정착했다. 또한 성벽 밖의 수많은 교외 지역에서는 빵과 포도가 재배되었다.

파리 시는 북부 플란데런, 부르고뉴, 피카르디 일대와 센강, 우아즈강, 엔강으로 연결되어 무역이 대단히 성행했다. 파리 시는 이들 지역과 곡물과 옷감을 주로 거래했고 포도주, 어업 무역도 번성했다. 자연히 플란데런, 부르고뉴, 피카르디를 전부 지배하고 있던 선량공 필리프를 위시한 부르고뉴 세력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통제하에 있던 노르망디와도 어업 무역이 성행했기에 잉글랜드와의 관계도 중요했다. 그러면서도 샤를 7세의 지배를 받는 투렌, 푸아투 강과 루아르 강을 따라 무역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 7세를 마냥 배제할 수도 없었다.

이러듯 복잡한 입장이었던 파리 시민들은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심각한 내전과 잉글랜드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으로 인해 갈수록 피폐해졌다. 인구는 80,000명으로 줄어들었고, 많은 이가 도시를 떠나 각지로 흩어졌다. 도시 무역은 쇠퇴했고, 전쟁 당사자들의 끊임없는 습격으로 인해 교외 지역이 황폐화되었으며, 빈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용병과 탈영병 무리가 거리를 활보하면서 치안이 불안해졌다. 절망에 빠진 빈민들은 아르마냑파와의 싸움이라는 구실을 대며 자신보다 잘 사는 이들을 강탈하는 갱단을 결성했다. 갱단의 활동이 갈수록 거세졌기에, 잉글랜드군 및 부르고뉴군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종종 벌여야 했다.

하지만 파리는 매우 강력한 요새이기도 했다. 필리프 2세 시대에 건설된 요새는 부유한 상인 지구인 센강 우안을 보호했다. 이 오래된 요새 시스템에는 절단된 돌로 만든 두 개의 성벽이 포함되었다. 외부의 수직 벽의 높이는 9m였고, 내부 벽은 약간 기울어진 형태였으며, 둘 사이의 공간은 시멘트가 섞인 쇄석으로 채워졌다. 전체 두께는 상단 가장자리가 2.3m, 하단이 3m였다. 수비대는 이 두 벽 사이에 있으면서 포위군을 향해 돌과 화살을 퍼부을 수 있었다. 성벽의 바깥 가장자리에는 흉벽이 있었고, 성벽 마다 70m씩 뚫린 좁은 구멍에 원거리 무기를 설치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성벽 각각의 가장자리를 따라 흉벽으로 보호되는 원통형 탑이 있었다. 탑의 직경은 약 2m, 탑 벽의 두께는 약 1.2m였으며, 총 30개의 탑이 있었다. 오래된 성벽에는 7개의 성문이 있었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가 파여 있었다.

이것만 해도 강력한 방어력이었지만, 백년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침략을 우려한 프랑스 왕실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인해 더욱 강력해졌다. 1356년부터 1383년까지 건설된 새로운 성벽은 이전 성벽보다 상당히 길어졌으며 6개의 문이 만들어졌다. 또한 수성포를 꼭대기에 세운 탑들이 수십 개 세워졌으며, 성벽 앞에는 2개의 해자가 있었는데, 각각의 폭은 약 30m였으며 해자 사이에는 성벽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 바깥에 소규모 요새가 여러 개 세워져 도시로의 접근을 차단했고, 내부에도 바스티유, 루브르, 탕플 등 작은 요새들이 있었다. 또한 적 기병이 난입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사슬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설치되도록 했다.

새로운 성벽의 성문은 참나무로 만들어졌고 철로 덮여 있었다. 성벽이 매우 길기 때문에 성문 하나하나를 일일이 감시할 수 없어서, 잠재적인 반역자가 적군을 몰래 들여보낼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시 당국은 적이 도시에 접근할 경우 자물쇠와 열쇠를 즉시 교체하고 성문 담당자를 수시로 교체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성문 일부를 벽으로 막아버리기로 해서, 주민들은 밭과 포도원에 가기 위해 상당히 우회해야 하는 불편을 겪었다. 파리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었고, 각 구역에는 우두머리가 있었다. 이 인물의 임무는 미리 합의된 수의 성인 남성을 징집해서 성벽 일부를 지키고 수리하는 것이었다. 1429년 당시 파리에는 200명의 잉글랜드군과 4,000명 가량의 파리 민병대가 있었다.

이렇듯 막강한 방어력을 구축했지만, 아르마냑파가 잔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은 파리 시민들의 불안을 갈수록 가중시켰다. 그들은 아르마냑파가 파리를 공략한다면 그동안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에 협력한 자신들에게 철저한 보복을 할 거라고 우려했다. 민심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베드퍼드 공작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신과 부르고뉴 공작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파리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릴 아담 영주 장 드 빌리에를 파리 수비대 사령관으로 세우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장교들을 모조리 교체했으며, 질 영주 시몽 모르히에를 파리 상인 지도자로 선정했다. 또한 매일 성모 마리아에게 특별 미사를 봉헌했으며, 도시가 함락될 경우를 대비해 교회 보물을 은신처에 숨겼다. 이후 베드퍼드 공작은 군대를 새로 모집해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도시를 떠나 노르망디로 향했다.

베드퍼드 공작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샤를 7세 정부는 앞으로 어찌 할 지 논의했다. 잔 다르크, 장 2세 달랑송, 질 드레 등은 가까운 시일 내에 파리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적이 거듭된 패배로 상실한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지 말고 공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대관식 때 샤를 7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레노 드 샤르트르 주교,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 등은 목표를 충불히 달성한 이상 부르고뉴파와 협상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때까지 전쟁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파리의 방비가 매우 막강하니 섣불리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볼 것이므로 부르고뉴파를 회유하는 데 중점을 두기를 희망했다.

두 정파의 대립이 가중되고 있을 때,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인 다비 드 브리모가 이끄는 부르고뉴 대표단이 찾아와 15일간의 휴전을 제안하면서, 파리를 샤를 7세에게 넘길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샤를 7세는 파리 진군을 미루기로 하고 루아르 강 주변의 도시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복속시키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루아르 강 주변 지역을 돌며 영주와 주민들에게 샤를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해 열띤 호응을 얻어냈다. 그러나 샤를 7세의 측근들이 잔의 인기가 갈수록 치솟는 것에 깊은 경계심을 품으면서, 잔과 왕실간의 갈등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르마냑파가 이렇듯 가만히 있는 사이, 베드퍼드 공작은 칼레에 상륙한 3,500명의 맨앳암즈와 장궁병들을 이끌고 7월 25일 파리에 입성했다. 여기에 선량공 필리프가 지휘하는 피카르디 병사 700명도 가세했다. 8월 2일, 베드퍼드 공작은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프랑스 지역의 모든 귀족들에게 한 달 안에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프랑스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파리를 떠나 8월 4일 멜룬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잉글랜드군을 쳐부수고자 낭기스로 이동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파리로 돌아갔고,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가 잉글랜드를 저버리고 자신들에게 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측근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루아르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최근에 복종을 표명했던 브레이가 잉글랜드군의 급습으로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불쾌감을 느낀 샤를은 파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진군 과정에서 수뇌부간의 의견 충돌이 거세지면서 행군이 멈추거나 지연되기 일쑤였다. 베드퍼드 공작은 그런 적의 행보를 지켜보다가 파리를 떠나 상리스로 이동한 뒤 샤를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샤를을 "이전에는 자신을 도팽이라 칭하고 이제는 왕이라고 칭하며 정당한 왕에게서 왕좌를 빼앗으려는 자", "남장을 한 방탕한 여인이자 하느님을 거역하는 이단자와 동맹을 맺은 자", "용맹한 장(부르고뉴 공작 장 2세)의 살인자"라고 지칭하면서, 전장에 나와서 분쟁을 완전히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상리스 마을과 노트르담 드 라 빅투아르 수도원 인근에 전투 대형을 세우고, 방어벽과 수송 마차들을 전방과 측면에 잔뜩 세워두고 후방에 강을 둔 채 프랑스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8월 11일 베드퍼드 공작의 서신을 받고 분노한 샤를은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 이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가 먼저 출격했고, 프랑스 본대가 뒤따라갔다. 8월 13일 티에우 마을 인근에서 양측 기병대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8월 15일 상리승 인근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적군이 강력한 방어 진형을 갖춘 걸 보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따. 일부러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서 잉글랜드군이 진영을 떠나서 자신들을 쫓아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잘 훈련받은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속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군이 크레피로 물러나자, 베드퍼드 공작도 파리로 돌아갔다. 한편, 르노 드 샤르트르가 이끄는 프랑스 사절단이 선량공 필리프와 접촉하여 협상을 벌였다.

8월 17일, 샤를 7세는 잉글랜드 수비대를 추방하고 자신에게 항복한 보베 주민들로부터 도시 열쇠를 접수했다. 8월 18일 콩피에뉴에 입성한 그는 잉글랜드군이 떠난 뒤 방돔 백작 루이 1세, 라 이르 등이 상리스를 접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얼마 후 선량공 필리프가 파견한 룩셈부르크의 장과 아라스 주교 등이 샤를을 찾아왔다. 샤를은 부르고뉴 측이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끊고 파리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길 희망했지만, 사절단은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크리스마스까지 센강 북쪽의 아르플뢰르 등지에서의 적대행위를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샤를은 이에 불만족했지만, 부르고뉴 측이 적대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지역에 파리를 넣지 않은 것을 보고 파리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보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콩피에뉴에서 양측의 서명과 날인으로 합의가 이뤄졌고, 샤를은 크리스마스까지 4개월 동안 파리 북쪽의 도시들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잔은 이러한 상황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에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할 유일한 방법은 파리를 공략하는 것뿐이었다. 장 2세 달랑송의 회고록에 따르면, 잔은 그를 자신의 숙소로 초대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훌륭한 공작님, 제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거리에서 파리를 보고 싶다는 사실을 당신의 부하들과 다른 장군들의 부하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장 2세는 잔의 설득에 넘어가 군대를 파리 근교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에 여러 부대가 즉시 호응해 그들을 따라 나섰다. 8월 25일 생드니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관료 및 성직자들이 급히 파리로 도피했기 때문에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입성했다. 샤를은 이러한 군사 작전에 동의한 바 없었지만, 다들 잔 다르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가야 했다. 한편 베드퍼드 공작은 노르망디의 상황이 매우 불온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곳곳에서 잉글랜드의 억압에 반발한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보베와 오마르 당국은 샤를 7세의 사절과 협상했으며, 루앙 시민들은 도시를 프랑스에 넘겨주려 했다. 이에 베드퍼드 공작은 노르망디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다수 잉글랜드군을 노르망디로 이동시켰고, 장 드 빌리에와 시몽 모르히에가 이끄는 파리 민병대 4,200명만이 파리 수비를 맡았다. 그러던 8월 26일 프랑스군이 파리에 도착하면서 파리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편집]


8월 26일 파리에 도착한 장 2세 달랑송은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파리에 사절을 보내 도시를 개방한다면 어떠한 약탈이나 살육을 하지 않을 것이며, 샤를 왕에게 반역을 저지른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알렸다. 시민들이 이에 응하지 않자, 프랑스군은 북쪽에서 도시로 접근하면서 도시 교외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이후 파리 성벽 앞에서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고, 장 2세와 잔은 모든 전투에 참여해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파리 민병대의 무장과 전술은 물론 도시의 방어 상태를 점검했다. 잔은 샤를에게 어서 이곳으로 와서 군대를 친히 이끌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샤를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9월 1일, 장 2세가 직접 샤를을 찾아가서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9월 5일 장 2세가 재차 찾아가 설득하자, 샤를은 그제야 요청에 응하기로 했고, 파리 근교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9월 6일, 생 드니에 주둔한 군대는 도시에 더 가까운 라 샤펠로 이동했다. 그들은 "성녀가 이번에도 왕을 파리에 입성시킬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잔은 생 드니 드 라 샤펠 예배당에 들어가서 하느님께 이번에도 승리로 인도해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파일:잔 다르크 파리 공성전.jpg
파리 공성전 당시 잔 다르크
(Jeanne d'Arc, at the siege of Paris, 앙리 엠마뉘엘 펠릭스 필리포토(Henri Emmanuel Felix Philippoteaux) 작, 1858, 판화)


9월 8일, 잔과 장 2세, 질 드 레, 장 드 브로스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파리의 성문 중 하나인 포르트 생토노레(Porte Saint-Honoré)를 공격하기 위해 라 샤펠에서 출발했다. 잔은 생 로크 언덕에 컬버린(Couleuvrine: 소형 대포)을 설치하고 포병대를 친히 이끌면서 아군이 성문을 공격하는 것을 지원했다. 포병들은 정밀하게 성벽을 강타했고, 성벽 위에 설치된 대포들을 잠재웠다. 하지만 파리 민병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생토노레 성문이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이에 잔은 공격을 일시 중지시킨 뒤 군기를 흔들며 성벽으로 다가가며 파리 시민들을 향해 외쳤다.

"이 도시를 프랑스 왕에게 넘기십시오!"


그러나 시민들이 자신을 향해 "창녀", "마녀", "암캐" 등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으며 끝까지 싸우려 들자, 잔은 공격을 재개하게 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첫번째 해자를 메웠고, 뒤이어 외부 성벽 하나를 돌파했다. 뒤이어 두번째 해자 앞에 선 잔은 깃대로 깊이를 측정한 뒤, 공성포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그 때, 알려지지 않은 궁수 한 명이 그녀를 향해 석궁을 발사했다. 화살은 그녀의 허벅지를 관통했고, 잔은 바닥에 쓰러졌다. 프랑스군은 이에 분노해 거센 공격을 가했지만, 민병대의 결사적인 항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철수했다. 잔은 도랑 앞에 누워 있는 채로 병사들에게 계속 공격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이번에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장 2세 등이 그녀를 억지로 말에 태운 뒤 라 샤펠 마을에 있는 프랑스 숙영지로 데려갔다.

다음날 새벽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잔은 절뚝거리면서 장 2세에게 가서 병사들을 소집하고 말에 안장을 얹어서 새로운 공격을 시작하라고 설득했다. 장 2세는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했지만, 질 드 레 등은 무의미하다고 여겨 따르지 않았다. 장 2세와 잔을 따르는 프랑스군은 이번에는 남쪽으로 은밀히 이동하여 파리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다리가 사전에 이미 끊겨 있자, 프랑스군 내부에서 적과 밀통하는 자가 있다는 의심이 퍼졌다. 이때 앙주 공자 르네가 달려와서 모든 장군이 군대와 함께 생 드니로 철수하라는 샤를 왕의 명령을 전했다. 왕명을 감히 어길 수 없었기에, 프랑스군은 즉시 숙영지를 철거하고 생드니로 후퇴했다.

9월 13일, 샤를은 생드니에서 부르주로 철군하기로 했고, 잔은 생드니를 떠나면서 자신의 갑옷을 성모 마리아와 성 디오니시우스 성당에 바쳤다. 그녀가 파리를 공략하지 못했다는 것에 깊이 슬퍼하자,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달랬다. 이리하여 파리 공방전은 부르고뉴-잉글랜드 측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성녀로 칭송받던 잔의 위상은 이때를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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