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첼시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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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첼시 해전
영어: Battle of Winchelsea
프랑스어: bataille de Winchelsea
파일:윈첼시 해전.jpg
시기
1350년 8월 29일
장소
영국 남부 해안 윈첼시 앞바다
원인
잉글랜드 왕국 해안을 지속적으로 습격한 카스티야 선박을 격퇴하려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시도
교전국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카스티야 연합 왕국
지휘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드워드 3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흑태자 에드워드
파일:카스티야 연합 왕국 국기(1230-1406).svg.png 파일:800px-Royal_Coat_of_Arms_of_the_Crown_of_Castile_(1284-1390).svg.png 샤를 드 라 세르다
병력
전함 50척
전함 40척
피해
최소 2척의 선박 손실
전함 14~26척 포획
결과
잉글랜드의 승리.
영향
카스티아 해군의 잉글랜드 습격 지속.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50년 8월 29일,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해군과 프랑스 왕국의 편에 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제독 샤를 드 라 세르다의 카스티야 해군이 맞붙은 해전.


2. 상세[편집]


1347년 9월 28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1348년 7월 7일까지 9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한 '칼레 휴전'을 체결했다. 하지만 중세 흑사병 도래로 인해 전쟁을 벌일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양국은 휴전 기간을 잇따라 갱신했다. 그러나 휴전은 그저 이름뿐이었고, 양국 군대는 서로의 영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여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특히 프랑스에 고용된 카스티야 해군은 영국 해협을 지나가는 잉글랜드 상선들을 습격하고 잉글랜드 해안을 수시로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휴전 협약이 체결된 뒤 필리프 6세가 그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않자, 그들은 노골적으로 해적이 되어 잉글랜드 선박들을 계속 공격했다. 이들은 뱃머리와 선미에 목조 탑을 세우고 마스트 헤드에 '까마귀 둥지(Crow's nest)'라는 별명으로 불린 구조물을 설치하는 등 선박을 군함으로 개조했다. 이 카스티야 선박들은 플란데런의 슬로이스 항구에 기반을 두었으며, 대부분 석궁병으로 무장한 수백 명의 플란데런 용병들을 고용했다. 플란데런 백국은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왕국과 동맹을 맺고 필리프 6세에 대항했지만, 각 도시들이 무제한적인 자치를 누리는 정치 체계였기에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많은 플란데런인들은 돈을 벌 수 있다면 동맹국인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1350년 봄, 카스티야-플란데런 연합 함대는 샤를 드 라 세르다 제독의 지휘 하에 보르도에서 잉글랜드 해안으로 항해하던 가스코뉴 왕인 수송 함대를 습격해 물자를 모조리 탈취한 뒤 생포한 선원들을 바다에 던져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에드워드 3세는 극도로 분노해 그해 5월부터 카스티야 해적들을 소탕할 준비에 착수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그동안 영국 남부 해안을 개별적으로 지키고 있던 토머스 호, 조넷 호, 플렌티 호, 이사벨라 호, 가브리엘 호, 미카엘 호, 월페어 호, 마리오테 호, 예루살렘 호, 토머스 보챔프 호, 마리 호, 존 호, 에드먼드 호, 팔콘 호, 부셰 호 등이 모여들었다. 여기에 잉글랜드 북부에 정박했던 함대들도 남부 해안으로 모여들었다. 8월 10일 켄트의 샌드위치 항에 집결한 잉글랜드 함대 규모는 50척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처음엔 월터 마우니에게 함대 지휘권을 맡기려 했지만, 곧 마음을 바꿔 자신이 직접 탑승하여 전반적인 지휘권을 맡았고 월터 마우니는 북부 함대의 제독으로 선임되었다. 여기에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도 동행했고,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를 포함한 잉글랜드의 여러 귀족들이 400명의 기사들과 함께 참여했다. 2척의 선박은 왕의 '홀'과 왕실과 행정부를 위한 숙소인 '옷장'으로 지정되었고, 나무르 백작 존의 아들 로버트 드 나무르가 '왕의 홀'의 선장으로 선임되었다. 에드워드 3세 본인은 가장 좋아하는 배인 토머스 호에 승선했다.

8월 28일, 잉글랜드 함대는 카스티야 함대가 출몰하기를 기다리기 위해 윈첼시 항구 외곽에 정박했다. 당시 카스티야 함대는 영국 해협과 북해에서 잉글랜드 상인을 포획하고 물품을 빼앗은 뒤 슬로이스 항구에서 쉬고 있었다. 샤를 드 라 세르다는 잉글랜드 해군이 윈첼시 항구에 정박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번 기회에 잉글랜드 해군을 궤멸시키고 영국 해협과 북해를 완전히 장악하기로 마음먹고 플란데런 외 여러 국적의 용병을 고용했다. 당대의 연대기에 따르면, 카스티야 함선 수는 40척으로 잉글랜드 함대보다 적었지만 함대에 실린 전사 수는 에드워드 3세의 함대에 승선한 전사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1350년 8월 29일 일요일, 샤를의 함대가 슬로이스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북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잉글랜드 해안을 따라 이동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이른 저녁에 적 함대를 발견하자 닻을 내리고 전투 개시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에드워드는 무장한 기사와 귀족들에게 포도주를 제공하여 긴장을 풀게 한 뒤 친히 함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이후 두 함대는 서로를 향해 접근했다. 그러다가 에드워드가 탑승한 토머스 호가 선두에서 질주하다가 카스티야의 선두 선박을 공격하여 돛대를 부러뜨렸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높은 갑판에서 큰 바위를 떨어뜨리려는 카스티야인들을 화살을 퍼부어 저지했다. 카스티야 선박은 잉글랜드 선박보다 훨씬 높았기에, 잉글랜드 병사들은 사다리를 이용해 적 선박에 올라가야 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카스티야 선박은 점거되었지만, 토머스 호는 카스티야 함선과 정면 충돌한 여파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에 에드워드는 기사들의 설득에 따라 방금 확보한 카스티야 선박으로 갈아탔다.

한편 흑태자 에드워드는 곤경에 처했다. 그가 탄 배는 카스티야 전함과 충돌하여 침몰하고 있었고, 에드워드의 장병들은 적선을 공략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이때 랭커스터 공작이 이끈 함선에 탑승한 전사들이 반대편에서 적선에 올라타자, 에드워드는 병사들을 독려해 적선에 뛰어들게 했다. 결국 에드워드와 장병들은 자기들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적선을 공략할 수 있었고, 카스티야 선원들은 모조리 사살되거나 바다에 던져졌다.

로버트 드 나무르가 이끄는 '왕의 홀'은 더 큰 카스티야 선박과 맞붙었다가 적군이 던진 갈고리에 걸려 끌려갔다. 선원들은 갈고리를 자르려 했지만 적선에서 쇠뇌와 돌을 마구 퍼붓는 바람에 실패했고, 적선에 올라 타려는 시도 역시 실패했다. 그들은 다른 영국 선박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다들 정신없이 싸우느라 '왕의 홀'의 위기를 알아채지 못했다. 이때 로버트의 하인 헨네킨이 손에 단검을 들고 카스티야 배 위로 뛰어 올라 많은 적병을 죽이고 주돛을 무너뜨려 적선을 정지시켰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용기를 얻어 적선으로 앞다퉈 뛰어들었고, 뒤늦게 '왕의 홀'을 도우러 온 잉글랜드 선박들이 호응하면서 카스티야 병사들은 결국 섬멸되었다.

샤를 드 라 세르다가 탑승한 전함은 이날 전투에 참가한 카스티야 배 중 가장 거대하고 전사 및 승무원이 가장 많았으며, 바위를 쏘아보낼 수 있는 투석기도 충실히 갖췄다. 그들은 주변의 잉글랜드 함선들을 공격해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지만, 잉글랜드 선박들이 주위를 에워쏴서 화살비를 퍼붓고 적군이 올라 타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섬멸되었다. 샤를은 쪽배를 타고 가까스로 빠져나와서 전장에서 이탈했고, 아직까지 잉글랜드군에 붙잡히지 않은 선박들도 뒤따라 도주했다.

카스티야 함선 14~26척이 나포되었고, 여러 척이 침몰했다. 잉글랜드 함대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에드워드 3세가 탑승한 선박과 흑태자를 태운 선박이 침몰하고 '왕의 홀'로 지정된 선박이 적군에 거의 나포될 뻔했던 것을 볼 때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투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카스티야인과 플란데런인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습격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배 밖으로 던져졌다.

파일:에드워드 3세의 금화.jpg

에드워드 3세는 윈첼시 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금화를 주조했다. 이 동전에는 돛대를 단 한 척의 배와 영국과 프랑스의 문장이 포함된 왕립 문장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살아남은 카스티야인들은 이후에도 해적 행위를 거리낌없이 자행했다. 잉글랜드와 가스코뉴간의 무역은 꾸준히 이어졌지만, 이들의 습격이 하도 심해서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잉글랜드의 항구를 사용해야 했다. 한편 샤를은 프랑스로 돌아온 뒤 프랑스의 무관장(Connétable)에 선임되었고 장 2세의 심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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