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스트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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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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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백년전쟁 시기인 1342년 8월 18일, 잉글랜드 함대가 브레스트 앞바다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한 해전.


2. 상세[편집]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작 장 3세가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여조카인 팡티에브르의 잔이 브르타뉴 여공작에 선임되었다. 장 3세는 오래전부터 잔을 후계자로 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조카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킴으로써 프랑스 왕실과 친프랑스파 귀족 및 성직자들의 후원을 받게 했다. 그러나 장 3세의 배다른 형제인 장 드 몽포르가 반발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이 필리프 5세부터 도입한 살리카법에 근거해 여자는 공작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며 자신이 공작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드 몽포르는 잔과 샤를 부부가 필리프 6세를 알현하게 위해 파리로 간 틈을 타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귀족 및 평민들의 지지를 토대로 군대를 일으켜 낭트, 렌, 디낭, 브레스트 등 브르타뉴의 가장 중요한 도시 및 성들을 빠르게 공략했다. 그러나 1341년 10월 샤를 드 블루아가 6,000명의 프랑스 군인과 2,000명의 제노바 용병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군해 샹토소 전투에서 장 드 몽포르를 격파하고 생포했다.

그 후 샤를은 몽포르 가문에 가담했던 도시들을 차례차례 공략했고, 1342년 7월부터 브레스트를 포위했다. 장 드 몽포르의 아내인 장 드 플란데런을 비롯한 몽포르 지지자들은 잉글랜드에 원군을 요청햇지만, 월터 마우니가 이끄는 230명의 잉글랜드 장궁병들이 엔봉 공방전에 투입되어 잔 드 플란데런을 구한 것 외엔 별다른 구원이 오지 않았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재정이 열악해서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기도 버거워서 병력 모집에 차질이 빛어졌고, 병력을 영국 해협 건너편으로 수송할 선박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잉글랜드군이 언제라도 들이닥칠지 몰랐기에, 샤를은 모나코 공작 카를로 그리말디 에게 14척의 제노바 갤리선을 맡겨 잉글랜드 해군이 해상에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1342년 8월 초,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이 이끄는 1,350명의 병사들이 비로소 포츠머스에서 출항했다. 그들은 260척의 소형 선박들을 타고 이동했다. 적군이 출항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 함대가 포츠머스로 달려왔지만 항구가 비어있자 포츠머스에 상륙해 마을을 불태우고 떠났다. 잉글랜드 함대는 포츠머스를 떠난 지 사흘 만에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윌리엄은 적 갤리선들이 펜펠트 강 어귀에 닻을 내린 채 정박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여유롭게 상륙해서 전투를 준비한다면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적 갤리선이 바다로 항해하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하고 병사들에게 적선으로 돌진하라고 명령했다.

잉글랜드 선박들이 접근해오자, 카를로는 제노바 선원들에게 배에 올라타서 적을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해군이 바짝 다가왔을 때 승선이 완료된 배는 단 3척이었고, 그나마도 잉글랜드군을 상대하는 대신 넓은 바다로 탈출했다. 나머지 11척의 갤리선은 빠르게 포위되어 잉글랜드군의 맹공을 받았다. 결국 모든 배가 화염에 휩싸였고, 제노바 선원들은 바다에 불길을 피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리하여 적선들을 모조리 물리치는 데 성공한 잉글랜드군은 브레스트 항구로 진입했다.

샤를은 제노바 선박들이 무력화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260척의 선박들이 몰려온 것을 보고 적군이 적어도 5천 명이 넘을 거라고 오판했다. 그는 즉시 브레스트 포위를 풀고 브르타뉴 북쪽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철수 과정에서 병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제노바와 카스티야 용병들이 더 이상의 복무를 거부하고 부르뉴프로 이동한 뒤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윌리엄 보훈은 브르타뉴 서부 일대를 신속하게 공략했고, 1342년 10월 아르투아 백작을 자칭하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부관으로서 활동하던 로베르가 1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그 후 로베르가 반 공방전에 착수하는 동안, 윌리엄 드 보훈은 2,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모를레에서 샤를 드 블루아와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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