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명(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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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추존 국왕
의공왕 | 懿恭王

출생
(음력)

820년대 추정[1][2]
신라 금성
사망
(음력)

865년 이전[3]
신라 금성
능묘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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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경주 김씨

계명(啓明)[1]
부모
부왕 희강왕
모후 문목부인
배우자
광화부인
자녀
아들 김응렴, 김위홍
김단의
종교
불교
시호
의공대왕(懿恭大王)
골품
진골(真骨)


1. 개요



1. 개요[편집]


신라 하대의 왕족. 제43대 희강왕 김제륭의 아들로 왕자였다. 동시에 제45대 신무왕 김우징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인 희강왕흥덕왕(제42대) 사후 왕위에 올랐으나 얼마 후 상대등 김명과 시중 이홍이 희강왕을 협박해 자살케 하고 김명이 왕위에 올라 민애왕(제44대)이 되었다. 이후 민애왕을 시해하고 등극한 신무왕희강왕 세력에 의해 아버지였던 김균정이 살해되었으므로 김계명과는 원수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런 상황에서 희강왕의 아들인 김계명이 원수 관계였던 신무왕의 딸 광화부인과 혼인했다는 점이다. 이는 민애왕 즉위 당시의 상황을 통해 유추가 가능한데 당시 상대등으로 있던 김명이 왕이자 김계명의 아버지였던 희강왕을 핍박해 자살하게 했거나 혹은 시해하여 왕위를 빼앗았고 이에 김계명이 김우징 휘하의 청해진으로 합류하여 그의 정변을 도왔기 때문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김계명은 광화부인과의 사이에서 경문왕, 김위홍, 김단의 세 자식을 두었다.

제46대 문성왕 10년(서기 848년) 파진찬에서 시중이 된 것으로 보아 문성왕의 누이이기도 한 광화부인과의 혼인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차후 헌안왕의 왕위 계승에도 큰 영향을 주고, 헌안왕의 뒤를 이어 자신의 아들인 응렴이 경문왕으로 왕위에 오르는 것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가 경문왕 6년에서야 대왕으로 추존된 것으로 봤을 때에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죽은 것이 아닐까 추정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사후 아들인 경문왕 6년(서기 866년)에 대왕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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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희강왕의 추정 생년을 토대로 역산했다.[2] 그의 장남인 경문왕846년생이다.[3] 866년 1월 '의공대왕'으로 추봉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삼국사기》에 실린 경문왕의 혼인 설화를 보면 최소 860년까진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