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루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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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 노르웨이 칼 15세의 왕비
네덜란드의 루이세
Louise van der Nederlanden


이름
네덜란드어
빌헬미나 프레데리카 알렉산드리나 아나 루이세
(Wilhelmina Frederika Alexandrina Anna Louise)
스웨덴어
빌헬미나 프레드리카 알렉산드라 안나 로비사
(Vilhelmina Fredrika Alexandra Anna Lovisa)
출생
1828년 8월 5일
네덜란드 연합왕국 헤이그
사망
1871년 3월 30일 (향년 42세)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 스톡홀름
배우자
칼 15세 (1850년 결혼)
자녀
로비사, 칼 오스카르
아버지
네덜란드의 프레데릭 왕자
어머니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형제
빌럼, 프레데릭, 마리
종교
네덜란드 개혁교회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어린시절
3.2. 결혼
3.3. 왕세자비
3.4. 왕비
3.5. 사망
4. 후덜덜한 가족관계
5. 가족관계
5.1. 조상
5.2. 자녀
6. 여담



1. 개요[편집]


스웨덴의 베로나도테 왕조 국왕인 칼 15세의 왕비이자 네덜란드의 공주.

빌럼 1세의 아들인 프레데릭 왕자와 프로이센의 루이제의 딸이며, 덴마크의 왕비 루이세의 어머니이자,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10세과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의 외할머니다.


2. 작위[편집]


  • 네덜란드의 공주, 오라녀나사우 공녀 루이세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Louise of the Netherlands, Princess of Orange-Nassau(1828년 8월 5일 ~ 1850년 6월 19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스카니아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Crown Princess Consort of Sweden and Norway, Duchess of Scanie (1850년 6월 19일 ~ 1859년 7월 8일)
  •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Sweden and Norway (1859년 7월 8일 ~ 1871년 3월 30일)


3. 생애[편집]



3.1. 어린시절[편집]


1828년 8월 5일, 네덜란드헤이그에서 네덜란드의 프레데릭 왕자와 프로이센의 루이제의 장녀이자 첫째로 태어났으며 루이세의 조부모는 빌럼 1세와 프로이센의 빌헬미나, 외조부모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였다.[1]

루이세는 매력적으로 생기진 않았지만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그 시대가 원하는 상냥하고 순종적인 여성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사촌 오빠 빌럼 3세의 왕비인 뷔르템베르크의 조피[2]는 루이세가 패션 감각이 떨어지고 소녀적인 취향이라고 평했다. 그래도 루이세는 역사언어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3]


3.2. 결혼[편집]


이후 스웨덴의 칼 왕세자와 결혼하였다. 사실 칼 왕세자는 원래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4]와 혼인이 예정되어 있었다.[5] 하지만 칼 왕세자는 프로이센 방문 후 갑자기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혼담 파기로 칼 왕세자는 친척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고, 동생인 구스타프가 자신이라도 루이제 공주랑 결혼하겠다고 했다.[6]

이후 칼 왕세자의 신부 후보로 네덜란드의 루이세가 떠올랐다. 네덜란드의 루이세가 빌럼 2세의 조카이긴 했지만 당시 부유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공주여서 많은 지참금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이유로 혼담이 진행되었다. 곧 루이세의 지참금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스웨덴 왕실은 그대로 약혼을 추진했으며 1850년 6월 19일 두 사람의 결혼식이 거행된다.


3.3. 왕세자비[편집]


스웨덴으로 시집 간 루이세는 이후 로비사(Lovisa)라고 불렸다. 로비사는 매우 미남이었던 칼 왕세자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칼 왕세자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로비사에게 매우 실망했고 부족한 지참금에도 문제가 생겼다. 이 때문에 칼-로비사 부부의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으며, 칼 왕세자에게는 수많은 정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로비사 왕세자비는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항상 옷을 잘 차려입고 그에게 순종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교양이 매우 풍부해서 글을 쓰고 신문과 책도 많이 읽었지만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대중들 앞에서 나오는 것도 꺼려서 그녀는 스웨덴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로비사는 왕세자비 시절 자녀 둘을 낳았는데 첫째는 로비사 공주였고 둘째는 칼 오스카르 왕자였다. 하지만 칼 오스카르 왕자가 홍역으로 사망하면서 자식은 로비사 공주만이 남았다.

스웨덴 왕실에서는 로비사 왕세자비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3.4. 왕비[편집]


1859년에 시아버지인 오스카르 1세가 승하하면서 남편 칼 왕세자가 스웨덴 국왕 칼 15세로 즉위하여 로비사 왕세자비도 스웨덴의 왕비가 되었다. 왕비가 된 로비사는 공식 업무를 이행하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며 자선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남편 칼 15세는 로비사 왕비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외동딸 로비사 공주만큼은 지극히 아끼는 딸바보였다고 한다. 칼 15세가 하나뿐인 딸을 얼마나 아꼈는지 딸이 원한다는 이유로 사이가 안 좋은 로비사 왕비와 함께 가족생활을 하며 자주 어울렸다고. 로비사 공주가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들어줘서 로비사 왕비는 남편이 딸의 버릇을 망친다고 걱정했다고 한다.


3.5. 사망[편집]


1869년 외동딸 로비사 공주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리크[7]와 결혼해서 덴마크로 떠났다. 이듬해 로비사와 프레데리크 부부의 맏아들인 크리스티안이 태어나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로비사 왕비는 딸이 떠난 뒤로는 매우 우울한 나날을 보내다가, 1871년에 심한 독감에 걸렸고 폐렴으로 악화되어 3월 30일 42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1년 후 남편 칼 15세도 사망하여 로비사의 뒤를 따랐다.

칼 15세와 로비사 왕비 부부의 유일한 자녀인 로비사 공주는 스웨덴의 여왕이 되지 못하고 칼 15세의 남동생인 오스카르 왕자가 스웨덴 국왕이 되었다. 당시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동군연합으로 맺어진 연합왕국이어서 스웨덴은 몰라도 노르웨이는 살리카법 때문에 여왕의 즉위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1905년에 이르러 외동딸 로비사 공주의 둘째 아들인 칼 왕자가 독립한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칼 15세와 로비사 부부의 여계 후손[8]이 대대로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4. 후덜덜한 가족관계[편집]


네덜란드의 루이세는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대부분의 일가친척들이 유럽의 왕족이라는 후덜덜한 관계를 자랑한다. 일단 루이세의 친할아버지인 빌럼 1세네덜란드의 초대 국왕이고 친할머니 빌헬미나 왕비는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차녀였다. 외할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프로이센의 국왕, 외할머니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조지 3세의 아내인 샬럿 왕비의 조카였다.

큰어머니(큰아버지 빌럼 2세의 왕비)는 파벨 1세의 막내딸 안나 파블로브나이고, 외삼촌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빌헬름은 프로이센의 국왕, 이중 둘째 외삼촌 빌헬름은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큰 이모 샤를로테 공주니콜라이 1세의 황후였고[9], 그녀의 장남 알렉산드르 2세는 루이세에겐 이종사촌이다. 이러한 어마무시한 가족 관계는 훗날 스웨덴의 왕세자비가 되는 데에도 영향을 줬다.

외동딸 로비사 공주프레데리크 8세와 혼인해 덴마크 왕비가 되어 4남 4녀를 낳고, 장남 크리스티안은 덴마크 국왕, 차남 은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다. 또한 외손녀 잉에보르가 시조카 중 하나인 칼 왕자와[10] 결혼하여 낳은 딸들 중 차녀 메르타는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막내딸 아스트리드는 벨기에의 왕비가 되었다. 이렇게 외손주들의 후손이 번성하면서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노르웨이의 하랄 5세,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 룩셈부르크의 앙리 대공 모두 네덜란드의 루이세의 후손들이다.

또한 작은 외삼촌인 빌헬름 1세의 아들로 외사촌인 프리드리히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와 결혼해 4남 4녀를 낳았고, 프리드리히의 여동생 루이제바덴 대공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 혼인해 2남 1녀를 낳았다. 여기서 바덴의 대공비가 된 루이제의 딸 바덴의 빅토리아가 시조카들 중 하나인 구스타프 5세의 왕비가 되었다.[11]

5. 가족관계[편집]



5.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네덜란드의 루이세 공주
(Princess Louise of the Netherlands)
네덜란드의 프리데릭 왕자
(Prince Frederick of the Netherlands)
빌럼 1세
(William I)
오라녀 공 빌럼 5세[12]
(William V, Prince of Orange)
프로이센의 빌헬미나 공주[13]
(Princess Wilhelmina of Prussia)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공주
(Princess Wilhemine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ederick William II)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Princess Frederika Louisa of Hesse-Darmstadt)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Princess Louise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ederick William II)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제
(Princess Frederika Louisa of Hesse-Darmstadt)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trelitz)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Hesse-Darmstadt)


5.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1녀
덴마크의 루이세 왕비
(Louise, Queen of Denmark)
1851년 10월 31일
1926년 3월 20일
프레데리크 8세
슬하 4남 4녀[14]
1남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 오스카르 왕자
(Prince Carl Oscar, Duke of Södermanland)
1852년 12월 14일
1854년 3월 13일



6. 여담[편집]


  • 생전에 자선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의 이름을 딴 로비사 어린이 병원 (Lovisa barnsjukhus)이 지금도 남아있다. 로비사 왕비의 딸인 로비사 공주도 마찬가지로 자선사업에 관심이 많아 덴마크 왕세자비가 되기 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Prinsessan Lovisas minnesfond'이라는 단체를 조성해 어린 아이들을 도왔다고 한다.

  • 언어에 특히 관심이 많았는데 칼 15세와 약혼한 후 스웨덴어를 배워 공식 석상에서 연설할 정도로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남편 칼 15세도 외국어 학습에 재능을 보였고, 딸인 로비사 공주도 부모님의 언어능력을 물려받아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된 문학을 자주 읽었고, 프레데리크 8세와 결혼하기 전 배운 덴마크어도 쉽게 구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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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할머니 프로이센의 왕비 루이제의 고모가 영국조지 3세의 아내 샬럿 왕비이다.[2] 남편 빌럼 3세와는 이종사촌으로 자유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시어머니와 남편, 시누이, 친척들 모두를 신랄하지만 정확하게 깠다.[3] 칼 왕세자와 약혼 후에는 스웨덴 언어와 문화까지 공부해서 스웨덴에서 주최한 공식 환영식에서 스웨덴어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4]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아들 카를 왕자의 딸. 카를 왕자는 네덜란드의 루이세의 외삼촌이기도 했다.[5] 칼 왕세자와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의 혼담을 진행시킨 사람은 칼 왕세자의 어머니 요세피나 왕비였는데, 요세피나 왕비의 이모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왕비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공주였고, 때문에 서로 친하게 지내서 그 계기로 혼담을 추진했다고 한다.[6] 당시 스웨덴의 베르나도테 왕조는 신생 왕조이기에 반드시 통치 가문의 자제와 결혼해야 했다. 타국 왕가와의 혼담을 파기하는 건 베르나도테 왕조의 입지를 매우 불안하게 만드는 행위였다.[7] 유럽의 할아버지로 불린 크리스티안 9세의 장남으로, 그의 여동생들은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비, 러시아의 마리아 황후다. 남동생 요르요스 1세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었다.[8] 칼 15세 > 로비사 공주 > 호콘 7세 > 올라프 5세 > 하랄 5세[9] 러시아로 시집가면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로 개명했다. 이모부 니콜라이 1세는 큰어머니 안나 왕비의 남동생이기도 했다.[10] 시동생 오스카르 2세의 3남.[11] 스웨덴의 구 왕실이었던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후손인 빅토리아와, 신흥 왕조 베르나도테 왕가의 후손인 구스타프 5세의 결혼은 베르나도테 왕가의 정통성을 높여주었다.[12] 조지 2세의 외손자이다.[13]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손녀이다.[14] 크리스티안 10세, 호콘 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