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다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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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
마리 소피 프레데리케 다우마
Dagmar af Danmark

파일:0ff9fb964052ba3580bdff584cc45671.jpg
이름
덴마크어
마리 소피 프레데리케 다우마
(Marie Sophie Frederikke Dagmar)
러시아어
마리야 표도로브나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출생
1847년 11월 26일
덴마크 코펜하겐 옐로우 맨션
사망
1928년 10월 13일 (향년 80세)
덴마크 클람펜보르
신체
키 163cm
배우자
알렉산드르 3세 (1866년 결혼 / 1894년 사망)
자녀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게오르기, 크세니야, 미하일, 올가
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
어머니
헤센카셀의 루이제
형제
프레데리크 8세, 알렉산드라, 요르요스 1세, 티라, 발데마르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작위
3. 어린 시절
4. 결혼 전
5. 결혼 생활
6. 황태후 시절
6.1. 고부갈등
6.2. 러시아 혁명
7. 가족관계
7.1. 조상
7.2. 자녀
8. 대중문화에서
9. 여담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황제 알렉산드르 3세황후이자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이며,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후이다. 남편과의 사이에 6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 중 5명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2. 작위[편집]





3. 어린 시절[편집]


훗날 덴마크 국왕이 되는 크리스티안 9세와 부인 헤센카셀의 루이제의 6남매 중 넷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애칭은 미니(Minnie). 아버지 크리스티안 9세는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7세가 1863년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양손자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왕실에서 산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검소한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언니 알렉산드라와는 방을 함께 사용해서 이 자매는 이후 평생 가까운 사이였다. 다우마는 피아노, 하프, 바느질, 소묘, 독일어, 스웨덴어, 프랑스어, 역사 등을 배우며 성장했다.

평소 자녀들의 결혼에 매우 신경 쓰던 어머니 루이제의 노력으로 그녀와 형제들은 당대에 어마어마한 혼사를 치르게 된다. 언니 알렉산드라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1]와 결혼하여 영국왕비가 되었고 다우마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 큰오빠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작은오빠는 그리스 왕국요르요스 1세가 된다.[2]

특히 다우마는 당대 공주들 중에서도 미녀로 유명했는데[3] 훗날 약혼하게 될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다우마에 대해, 자신의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에게 아래에 나오는 아주 분홍빛으로 가득 찬 편지를 썼다.

"다우마는 우리가 지금까지 본 초상화보다 실물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다우마의 눈은 그녀 자신을 대변합니다. 두 눈은 매우 친절하고 지적이고 생기가 넘칩니다."



4. 결혼 전[편집]


그녀는 이탈리아 왕국의 왕태자 움베르토 1세로부터 청혼을 받았지만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그와 결혼하기를 꺼렸다. 어머니 루이제 왕비 또한 다우마가 러시아 황실과 결혼할 가능성을 더 높이 봤기 때문에 꺼렸다.[4] 다우마는 1864년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장남이자 황태자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와 약혼했다.[5]

파일:다우마, 니콜라이.jpg}}}
다우마와 니콜라이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절대적인 애정을 받은 아들로, 알렉산드르 2세는 장남 니콜라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큰 애정을 주지 않았다. 다우마와 니콜라이는 정략혼으로 이뤄진 관계임에도 서로에게 애정을 느꼈다. 당시 니콜라이 황태자가 헤센의 마리에게 쓴 편지를 보면

나는 마치 열병에 걸린 것처럼 여기에 왔습니다(...중략) 그리고 마침내 달콤한 그녀를 보았을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머니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직설적이며 지적이고 경험이 많지만 동시에 수줍음이 많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우리가 본 사진보다 실제로 더 아름답습니다.

라고 다우마의 미모를 칭찬하는 편지를 가득 보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약혼 다음해 발병한 수막염으로 사망했다. 니콜라이는 동생 알렉산드르에게 "다우마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문제는 그때 알렉산드르에겐 이미 사랑하는 여성이 있었다는 것. 알렉산드르는 모후 헤센의 마리의 시녀를 사랑했지만, "당장 가서 다우마와 약혼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다우마와 약혼했다.[6] 그래도 알렉산드르 3세는 다우마와 결혼 후에는 역대 차르들과 달리 흔한 정부조차 들이지 않고, 아내 다우마를 아끼고 그녀에게만 충실하는 화목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리고 조카 며느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5. 결혼 생활[편집]


1866년 결혼식을 올리고 다우마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며 '마리야 표도로브나'라는 세례명을 받게 된다. 다우마는 처음 러시아로 시집 올 때 러시아어를 할 줄 몰랐으나 몇 년 안에 그녀는 러시아어를 마스터하였고, 편지도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러시아어는 힘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음악에서는 이탈리아어, 힘과 풍부함에서는 영어와 같다"며, 덧붙여 그녀는 표현의 간결함을 위해 러시아어는 라틴어와 경쟁하고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것은 그리스어와 동등하다고 말한 바 있다.

1881년 시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남편이 황제가 되면서 황후가 된다. 이후에는 경호 문제로 겨울 궁전에 들어가지는 않고, 교외의 가치나 궁전과 황태자비 시절부터 머물던 아니치코프 궁전에서 지냈다. 결혼 후에도 친정 식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6명의 자녀를 낳은 애정 어린 결혼 생활은, 남편이 49세로 갑자기 사망하며 헤어지게 된다.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일기에 "나는 완전히 마음이 아프고 낙담했지만 행복한 미소와 그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를 보았을 때 힘을 얻었다."고 적는 등 타고난 밝은 성격으로 곧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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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아이들. 이때의 남편은 탈모가 심해져 머리가 훌렁 벗겨지고 덩치가 더 커졌는데 아이를 여럿 낳은 그녀는 여전히 작은 체구에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애칭 '미니'처럼 여전히 미니미니한 느낌.


6. 황태후 시절[편집]



6.1. 고부갈등[편집]


장남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하고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황태후가 되었다. 며느리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와 사이는 원활하지 않았지만 러시아 황실은 황후보다 황태후의 권한이 더 막강했다. 활발하고 밝은 마리야와 다르게 알렉산드라는 차분하고 침울한 분위기에 성격이나 성향도 내향적이라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7]

다만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사이는 매우 좋아서 순서대로 올가, 타티아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 등 5남매를 낳았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황후가 넷째 아나스타샤까지 줄줄이 딸만 낳으면서 알렉세이 황태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러시아 황실에서 제위를 이을 후계자는 중대한 문제였고 황후도 쏟아지는 압박감에 마음고생했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라 황후가 궁정 사교에서 멀어지고 니콜라이 2세도 거리를 두면서 궁정을 이끄는 마리야 황태후는 그런 며느리를 더욱 못마땅해 했다.

심지어 알렉세이 황태자는 황후와 황태후에게 극진한 애정을 받았지만 불행히도 혈우병 환자로 태어났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유전된 것이었다. 니콜라이 2세 내외는 제위를 이을 아들의 병 때문에 큰 근심에 빠졌고,[8] 그러다가 황태자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나선 타락한 떠돌이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휘둘리게 된다.


6.2. 러시아 혁명[편집]


이미 제정 러시아는 세계 1차 대전에서 겪은 끊임없는 패배와 경제 파탄으로 붕괴 상황이었는데 1917년 결국 러시아 혁명이 터졌다. 장남 니콜라이 2세 일가는 퇴위 후 총살당했고 4남 미하일도 처형되었다. 마리야 황태후는 장남 일가와 4남의 처형 소식을 접하고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했고 러시아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주변의 설득으로 영국에 있는 언니 알렉산드라 왕대비와 그녀의 아들 조지 5세가 보내준 군함 HMS 말버러 호를 타고 1919년 러시아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영국에 머무르게 된 마리야는 평생 죽을 때까지 장남 니콜라이 2세의 죽음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영국에 갔을 때 죽은 아들과 똑 닮은 조카 조지 5세를 보자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파일:Alexandra af Denmark and Maria Feodorovna.jpg
오른쪽이 영국의 왕비가 되는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왼쪽이 러시아의 황후가 되는 다우마(마리야 표도로브나)

이종사촌인 조지 5세와 니콜라이 2세도플갱어라고 해도 믿을만큼 똑같은 외모로 유명했는데, 각자의 어머니인 마리야와 알렉산드라 자매가 서로 쌍둥이처럼 닮아서 그 아들들도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촌 형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니콜라이 2세는 피로연에서 신랑으로 착각한 사람들에게 축하받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어쨌든 러시아 제국의 붕괴 후에도 아들의 생존을 굳게 믿는 마리야를 이용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자식들을 사칭하는 사람들이 자주 나타났다. 하지만 마리야는 그런 사기꾼들의 말을 결코 믿지 않으며 손녀 아나스타샤를 사칭한 안나 앤더슨도 만나지 않았고, 막내딸 올가가 안나 앤더슨을 믿는 듯하자 크게 호통치기도 했다.[9]

이후 친정 덴마크에 정착하여 살다가 1928년 덴마크에서 사망했다.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죽기 전 "유해를 러시아로 보내 남편 알렉산드르 3세의 곁에 묻어 달라."고 했지만 소련이 들어선 당시 국제정세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덴마크의 왕실 묘당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녀의 유언은 사후 78년 뒤인 2006년에야 이루어져 상트페테르부르크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7. 가족관계[편집]



7.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Princess Dagmar of Denmark)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빌헬름
(Frederick William,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홀슈타인존더부르크베크 공작
프리드리히 카를 루트비히
(Frederick Charles Louis,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Beck)

쉴리벤 여백작 프리데리케
(Countess Friederike von Schlieben)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Carolin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카를
(Prince Charles of Hesse-Kassel)
덴마크의 루이세 공주
(Princess Louise of Denmark)[10]
헤센카셀의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빌헬름
(Prince William of Hesse-Kassel)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Prince Frederick of Hesse-Kassel)[11]
나사우우징엔의 카롤리네
(Princess Caroline of Nassau-Usingen)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Denmark)
덴마크의 왕세자 프레데리크
(Frederick, Hereditary Prince of Denmark)[12]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조피 프리데리케 여공작
(Duchess Sophia Frederica of Mecklenburg-Schwerin)


7.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니콜라이 2세
(Nicholas II)
1868년 5월 18일
1918년 7월 17일
헤센의 알릭스[13]
슬하 1남 4녀[14]
2남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ander Alexandrovich)
1869년 6월 7일
1870년 5월 2일

3남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ke George Alexandrovich)
1871년 5월 9일
1899년 7월 10일

1녀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Xenia Alexandrovna)
1875년 4월 6일
1960년 4월 20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15]
슬하 6남 1녀[16][17]
4남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18]
(Grand Duke Michael Alexandrovich)
1878년 12월 4일
1918년 6월 13일
나탈리야 브라소바
슬하 1남[19]
2녀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Olga Alexandrovna)
1882년 6월 13일
1960년 11월 24일
올덴부르크의 표트르 알렉산드로비치 공작
니콜라이 쿨리콥스키
슬하 2남


8. 대중문화에서[편집]


1956년도 영화 <아나스타시아(Anastasia)>[20]에서 헬런 헤이즈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역을 연기한다. 역사적 사실과 달리 손주들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못 버리고 손주들을 사칭하는 사기꾼들을 여러 번 만나본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전부 거짓으로 드러나자 실망한 나머지 마음의 문을 닫고 칩거하는데, 러시아 혁명 전에 러시아 장군이었던 부닌(율 브리너 분)이 아나스타시야 공주라는 여자(잉그리드 버그먼 분)를 데리고 나타난다. 아나스타시야가 황실 사람들만이 아는 추억을 얘기하자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더는 상처받기 싫어서 거부하지만, 아나스타시야가 마른 기침을 계속 하는 것을 보고 손녀라고 확신하게 된다.[21] 하지만 아나스타시야가 부닌을 사랑하면서도 밀어내는 것을 알게 되고, 어차피 러시아 제국은 망했기 때문에 아나스타시야가 공주로 인정받아 봤자 행복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아나스타시야를 정식 공주로 소개하는 파티가 열리기 직전에 아나스타시야와 부닌을 몰래 떠나보낸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도 등장. 주인공 이선이 러시아 황실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자 충격받는다. 그러나 그 운명이 진실인 것으로 드러나자 이선을 신뢰하며 러시아 혁명에서 살아남은 차르의 4남매가 한국에 망명. 그 중 타티야나가 동양 황실에 시집가자 충격먹지만 러시아 부활을 위해서 받아들인다.[22] 이선이 결혼자금과 차르의 자식들에게 용돈을 두둑히 주고 니콜라이 2세의 손주를 보니까 마음이 크게 풀어진다.


9. 여담[편집]



  • 외향적이고 명량한 성격을 장점으로 삼아 러시아 궁정을 이끌었으며 이로 인해 황족 뿐만 아니라 러시아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황후였다.

  • 공교롭게도 남편과 아들들을 비롯한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단명한 반면, 여자들은 다우마 본인과 두 딸까지 포함한 모두가 80살이 넘을 때까지 장수했다.

  • 다우마의 아들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 때 민영환도 참석했는데 이때 통역으로 채용된 연해주의 이주민인 김도일은 한국인인데 한국어 실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다우마를 황태후라고 통역해야 하는 대목에서 황제 에미라고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래서 민영환은 니콜라이 2세를 직접 만났을 때는 김도일을 통역으로 쓰지 않고 윤치호를 통역으로 대동해서 갔다고 한다.#


  • 당시 러시아에서 다우마의 시녀였던 나데즈다 본랴를랴르스카야(Надежда Вонлярлярcкая, 영어명은 Nadine Wonlar-Larsky)는 회고록에서 "다우마의 미소는 모두를 기쁘게 했고 그녀의 우아한 태도는 항상 고용인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개인적인 감정을 암시했다. 또한 다우마는 얼굴이나 이름을 결코 잊지 않는 값진 왕실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 며느리가 될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외삼촌.[2] 다우마의 남편 알렉산드르 3세의 사촌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다.[3] 언니 알렉산드라와 여동생 티라도 미녀로 유명했으며 이 세 자매는 거의 쌍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똑같은 외모를 자랑했다.[4] 이 시점이면 이탈리아 왕국 선포 직후로, 베네토 지방과 교황령의 병합이 이루어지기 이전이라 이탈리아 통일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이미 러시아 황태자와의 혼담이 긍정적으로 논의되던 상황에서, 아직 입지가 불안정한 신생국의 왕비 자리보다는 이미 열강 반열에 들어있던 러시아 제국의 황후 자리가 더 낫다고 여긴 듯 싶다.[5] 당시 대두되던 슬라브 민족주의를 염두에 두고, 독일인이 아닌 황후를 맞으려는 의도로 진행된 국혼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 이래로 러시아 황후들은 대개 독일어권 국가에서 배출되었다. 다우마가 당시 그리스 국왕의 여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발칸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6] 다만 황태자가 아니었을 때는 어차피 자신이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하더라도 황위는 형이 이을 테니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무조건 왕족과 동등한 결혼을 해야했기에 알렉산드르 3세의 입장에서도 형의 죽음으로 본인이 확정상속인이 된 이상 황위를 이어받으려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7] 다우마와 알렉산드르 3세알릭스가 러시아 황후로서의 올바른 성품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우려했다.[8] 영국이나 에스파냐에선 니콜라이 2세의 장녀 올가 여대공이 계승할 수 있었겠지만, 살리카법이 적용되는 러시아 제국에서는 여성의 제위 계승이 불가능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이런 러시아의 왕위계승법을 모르고 시집왔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독촉받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9] 1989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발견되고 유전자 검사까지 거친 결과 그들은 모두 1918년에 총살당해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으니 결국 마리야의 판단이 옳았던 것. 안나 앤더슨 역시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아나스타샤는 커녕 로마노프 왕조와 일체 혈연 관계도 없는 폴란드인 사기꾼으로 밝혀졌다.[10] 프레데리크 5세의 3녀이자 조지 2세의 손녀이다.[11] 조지 2세의 외손자이다.[12] 프레데리크 5세의 3남이다.[13]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다.[14]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여대공, 러시아의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15] 니콜라이 1세의 4남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6남 1녀 중 사남이다. 아내인 크세니야에겐 친당숙부가 된다.[16] 장녀이자 고명딸이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살해자로 알려진 펠릭스 유수포프의 아내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이다.[17] 크세니야 본인은 러시아 혁명기인 1919년 어머니 다우마와 동생 올가 여대공과 같이 영국으로 망명해 어머니와 여동생과는 달리 죽을 때까지 영국에 정착한다. 본인의 결혼 선물이었던 보물이 사촌 올케인 메리 왕비의 손에 들어갔음에도 이를 발설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존재한다.[18] 형인 니콜라이 2세가 혁명으로 퇴위한 이후 잠시 차르가 되지만, 왕정이 폐지된 후 볼셰비키의 비밀경찰에게 처형당했다. 니콜라이 2세는 당시 혼란스럽던 러시아 상황 속에서 동생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던 것이었지만,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차르를 내려놓길 권고했고 미하일도 형처럼 백성들에게 욕 들어먹을 짓을 할 수 없다며 단번에 거절했다. 특히 러시아 국민들은 왕정을 더이상 원하지 않는터라 미하일도 니콜라이 2세와 다를게 없다며 거부했다.[19] 자동차 사고로 2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20] 한국에서는 <아나스타샤>, 그리고 <추상>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21] 아나스타시야 공주가 어린 시절 긴장할 때마다 기침을 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22] 처음에는 자기 고향 덴마크로 데려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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