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현(야구)/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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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치 시절[편집]


은퇴 후 2005년부터 LG 트윈스의 수비 및 주루코치로 임명되며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06 WBC에서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코칭스태프로 합류했다.[1] 이후에도 2013 WBC, 2014 아시안 게임, 2017 APBC,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까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코칭스태프로 차출되었다.

2007년부터 2년간 메이저리그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뒤 2008년 말 귀국해 친정팀 LG의 주루코치로 복귀했다. 미국 연수 시절에는 스포츠경향에 <유지현의 ML식스센스>라는 야구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선수 때의 센스있는 플레이에 비해 주루코치로서의 능력은 상당한 논란이 있었는데, 2011 시즌 유지현의 삑사리 주루 유도로 득점할 거 못하고 돌려야 할 때 주자를 안 돌리고 돌리면 안 될 때 주자를 돌려 대서 주자 횡사를 여러번 시켜서 이래저래 까였다. 아마 유지현 입장에선 "아니 왜 이걸 못 뛰어" 일지도 모른다. 어떻게보면 최태원 코치 이전에 유지현이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2]

박종훈의 뒤를 이어 김기태LG 트윈스 감독이 되면서 최태원KIA 타이거즈 코치가 주루코치로 임명되었고, 그 결과 2011년 10월 14일 LG 트윈스의 수비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수비코치로는 비교적 평가가 좋다. 오지환에게 지옥의 펑고를 쳐 주면서 2013년부터 오지환의 실책 개수가 비교적 줄어들고 있다. 2014~2016년 3년간 오지환의 수비만큼은 리그에서 확실히 인증받은 모습이다. 멘도사 라인임에도 수비장면만큼은 허구연 이효봉 등 해설자들의 극찬을 받고 있으며 ML 스카우터들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고. 이는 반박의 여지없는 유지현의 작품이다.

한편, 2015 시즌 중 최태원이 2군으로 내려가면서 3루코치로 보직변경 되었다. 동시에 박종호가 2군에서 수비코치로 올라왔다. 이후 엘지 경기에서 홈 주루사는 확연히 줄어든 모습인데(괜히 죄태원이 아니다) 아직도 박용택의 경우 감히 유 코치의 신호를 종종 무시하고 뛰다가 돌아가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아마 때부터 본인의 발을 믿고 엽기 주루플레이를 하도 시전하던 터라.. 선수시절 의외로 준족이 아니었음에도 쇼트트랙식 효율적 주루플레이를 시전했던 터라 선수들에게 전파해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2016년 10월 10일 와일드카드전에서 8회말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리는 어이없는 주루지도를 했다.

10월 16일 준PO에서도 어이없는 주루지도가 또...

2017년 8월 10일,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에 내야 및 작전코치로 선임되었다.

2017년 팀의 성적 부진으로 양상문 감독이 최종전을 마치고 물러남에 따라, 사실상 감독으로 확정된 분위기에서 언론지상 및 각종 게시판에 후임자로 언급되었으나 구단이 막판에 류중일 감독으로 급선회하며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하게 됐다. 이유인즉슨 아직 감독으로서 준비가 덜 됐다는 것. 코치 생활 12년차에 아직도 준비가 덜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본인의 입장에서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3] 감독을 조용히 후방에서 잘 보좌하기보다는 이제 리더십 측면에서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2021년 기준으로 보면 구단 관계자가 류지현을 제대로 본 것이다.

다만 이번에 후임 감독 후보로 거론되며 존재감을 보여준 것도 있고, 류중일 감독과는 한양대학교 선후배 사이에다 국가대표팀에서 코칭스태프로 오래 같이 일한 만큼 중한 보직을 맡게 될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맞춰 2018 시즌을 앞두고 류중일 체제의 1군 수석코치를 맡게 됐다. 이제 LG에서 확고부동한 차기 감독 No.1이 된 셈이다. 프런트에서도 LG의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류중일 감독과 선수, 코치진의 가교로 최적의 인물이라 판단한 듯 보인다.[4]

1994 LG 신인 3인방 중 마지막까지 팀에 남은 인물이 되었다. 김재현은 팀과 최악의 형태로 헤어지면서 LG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서용빈은 2017년에도 팀 타선을 망치면서 결국 사퇴했다.

일각에서는 LG의 철밥통으로 분류하는데 그 이유는 구단주가 아끼기 때문이라나... 오죽하면 성적부진으로 코치진 개편을 요구할 때도 '유지현 빼고 다 바꾸라'는 지시가 자주 있었다. 서용빈도 평타만 쳐줬어도 철밥통을 유지했을 텐데, 워낙 코치 시절 팀 타선에 악영향을 준 것이 컸고, 박병호를 때렸던 사례와 같은 전과까지 더해져서 갈렸다는 후문이다.

2018년 시즌 후반기의 급격한 순위 추락, 포스트시즌 탈락으로 코치진의 절반 가까이가 해임될 때도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류중일 감독 이후의 차기 감독 후보로 유력하긴 하지만, 당초 감독감으로 염두에 두었던 김동수가 2군에서 그다지 신통치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유지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2019년에는 수석 코치 및 수비 코치로 시즌을 출발했으며 등번호를 현역 시절에 달던 6번으로 바꾸었다. 4월 20일 부친상을 당하면서 잠시 1군 엔트리에서 말소 되었다.[5]

2019년 이후 수비 시프트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는 있으나 무슨 생각으로 걸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는 족족 실패하며 실점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2020년 들어 이런 현상이 심해지는 중.[6][7] 이런 점 때문에 2020시즌 후 류중일이 재계약에 실패할 경우 후임으로 류지현이 감독으로 발탁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LG팬들이 제법 된다. 긍정적으로 봐도 류중일 재계약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정도. 다만 이러한 시프트에 대한 문제점을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는지 감독 취임 후 기사에서 시프트에 대한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1.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편집]


초임 코치 시절이던 2006년 제 1회 WBC 대표팀 수비코치를 맡은 걸 시작으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 목록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대표팀 코치를 맡을 때마다 주로 수비코치나 주루코치, 작전코치를 담당한다. 이후 2013년 WBC,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2017년 APBC, 2018년 아시안게임 등 다양한 국제 대회가 열릴 때마다 코칭스태프로 차출된 바 있다.

한편 대표팀에서도 수비 시프트를 적절히 잘 활용하고 있는데,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도 7회 말 대만 린쿤셩이 친 적시타성 타구를 완벽히 지워버리는 수비는 그의 위치 선정 덕분이다.[8]

2023년 6월 9일 발표된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작전코치로 발탁되면서 오래간만에 대표팀 코칭스태프로 합류했다. 마침 대표팀 감독이 류중일이다 보니 2006년,[9] 2013년, 2014년, 그리고 LG 수석코치 시절에 이어 5번째로 류중일 감독과 호흡을 맞추게 됐다.

아시안게임에서만 3개의 금메달을 이끌어냈다.

2. 감독 시절[편집]


LG가 202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후 류중일이 계약만료로 사퇴하면서 차기 감독으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사실 1년전 차명석 단장은 3년만의 포스트 시즌 진출 이후 차기 감독을 류지현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공사 구분 끝에 낙점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20년 11월 13일, 2년 총액 9억원(계약금 3억원, 연봉 3억원)의 조건으로 류중일 감독의 후임 자리에 앉게 되었다.

LG 트윈스 선수 출신 감독으로는 4대 이광은 감독과 8대 김재박 감독에 이어 세 번째이며,[10] LG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모두 활동했던 사람으로는 이광은에 이은 두 번째 사례다. 또 김기태 이후 6년 만에 트윈스 코치진 내부에서 발탁한 감독이기도 하다.[11]

LG와 비슷하다고 종종 인용되는 일본 요미우리식 순혈주의 감독 인사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류지현은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도 모두 서울에서 나온 뒤 서울 연고팀에서만 선수와 지도자로 생활한, 그야말로 서울토박이 야구인이다.[12] 이전엔 삼성 감독 시절의 류중일, 이 쪽의 원조에 해당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도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부임 이전의 오 사다하루 외에는 없었던 매우 드문 사례다. 일본 프로야구의 다른 팀까지 범위를 넓혀봐도 치바 롯데 마린즈후쿠우라 카즈야 정도나 류지현과 비슷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이후 코칭스태프 인선을 진행하고 있는데 최일언, 가득염, 김현욱, 곽현희, 신경식, 김재걸 등 비LG 출신 코치들이[13] 대거 팀을 떠나게 되었다. 신 코칭스태프는 LG 선수 출신 코치들로만 구성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 1군 수석코치에 김동수 2군 타격코치가 선임됐고 김동수의 뒤를 이어 LG 주전 포수를 맡았던 조인성은 2011년 이후 9년만에 배터리코치로 복귀하게 됐다. 그리고 LG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LG 코치 경력이 있는 해태-KIA 출신인 이종범 코치는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코치로 복귀했다. LG에서 선수로 뛴 경력이 없는 코치는 이종범을 제외하면 황병일, 김호, 김민호, 유동훈 등 4명만 남았다.

1990년 LG 트윈스로의 팀명 변경 이후 처음 부임한[14] 역대 LG 감독 중 전년도 혹은 중도 부임시 성적 기준으로 가장 높은 순위에서 감독직을 수행한다.[15]


2.1. 202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류지현(야구)/202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2. 2022 시즌[편집]


강화된 전력으로 팀을 정규시즌 2위로 이끌고 갔으나, 작년 시즌과 비슷한 문제로 키움 히어로즈를 꺾지 못하면서 PO에서 탈락하여 LG의 20년 만의 한국시리즈 진출 달성에 실패하였다. 결국 구단 수뇌부 측이 분노를 참지못해, 재계약없이 계약이 만료되었고 선수-코치-감독까지 29년간 몸 담아왔던 LG에서 초라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류지현(야구)/202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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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이지만 이 때 대표팀 주장이 이종범이었다. 90년대 유격수 골든글러브 자리를 두고 경쟁했던 두 선수가 코치-주장 사이로 같이하게 된 셈이다.[2] 흔히 스타플레이어가 명코치, 명감독이 못된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현역시절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 코칭을 하거나 작전을 지시하는데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차범근의 경우 자신의 작전지시를 선수가 못 따라하자 스스로 실행해 보였는데, 그게 크루이프 턴에 논스톱 크로스.[3] 같은 내야수 선배들인 류중일 감독은 48세에, 염경엽 감독은 45세에 감독으로 승격했다. 그리고 유지현과 같은 1971년생 동갑내기들인 조원우, 김한수 역시 각각 2015년과 2016년 감독직에 올랐던 바 있다.[4] 유지현이 한양대 재학시절 경북고에서 훈련할 일이 있었는데 때마침 경북고를 방문한 류중일이 “니가 유지현이가? 니 좀 한다매?” 라고 말을 건네며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고 한다. 실제로 유지현도 류중일을 가장 존경하는 선배 중 하나로 꼽았으며 류중일도 유지현을 좋게 평가했는지 대표팀 코칭스태프 인선때마다 유지현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이런게 밑바탕이 되었는지 현재 어느 팀의 감독-수코 보다도 조화롭게 팀을 이끄는 모습이다.[5] 이례적으로 상을 당했는데 엔트리에서 말소된 것을 보면 2019년 신설된 경조사 휴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6] 대표적으로 2020년 홈 최종전 6회초 반즈에게 2타점 동점 적시 2루타를 맞았을 때의 전진수비 시프트. 해당 경기 패배 원인이 1차적으로는 류중일의 안일한 경기 운용 때문이었지만 이 같은 유형의 시프트를 여러 차례 지시했던 류지현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7] 내야수비 시프트 실패는 단타로 끝나지만 잠실에서의 외야수비 시프트 실패는 2루타, 3루타로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치명적이다. 결정적으로 LG 외야수들은 발이 느리다.[8] 참고로 박명환야구TV에 출연한 안지만이 인천아시안게임 결승전 당시 유지현 코치의 수비시프트 덕에 홀드할 수 있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9] 다만 이때는 류중일과 감독-코치 관계가 아니라 같은 대표팀 코치 신분이었다.[10] 1990년 LG의 이름으로 리그에 참가한 이후 입단한 선수 출신으로는 류지현이 최초다. 이광은과 김재박도 LG에서 뛰기는 했지만 MBC 청룡 시절부터 활동했다. 또한 이광은과 김재박은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 팀을 개편하는 과정에서 은퇴하거나 이적했기 때문에 LG의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는 하지만 1990년대 중반 한국프로야구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꾼 LG 신바람 야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었다. 즉 류지현이 이광환 시대에 선수로 활약했던 선수 중 LG 감독이 된 첫 사례다.[11] 김재박이나 류중일 등 거물급 감독을 외부에서 데려온 역사가 있기에 내부 발탁 사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꽤 있다. MBC 시절에는 유백만이 내부 발탁으로 선임된 유일한 감독이고 LG로 간판을 바꾼 후에는 천보성, 이광은, 김성근, 이순철, 김기태 등이 LG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한 이들이다. LG 인수 후 거쳐간 정식 감독이 13명인 것을 고려하면 절반 정도는 내부 발탁 감독인 셈이다. 물론 천보성과 이광은을 빼면 대부분 향후 감독 선임을 염두에 두고 외부에서 데려온 인물이기는 하다.[12] LG 역대 감독을 살펴봐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서울팀에서 선수 생활을 한 감독은 이광은과 류지현 둘 뿐이다. 전신인 MBC 청룡 시기를 제외하면 프로에서 LG에서만 선수, 지도자로 활동한 경우는 류지현이 최초다.[13] 최일언 코치는 1990년 1시즌 동안 LG에서 뛴 것을 제외하면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OB 베어스에서 활동했다. 지도자도 OB-두산, 그리고 선수 시절부터 동료였던 NC 김경문 사단의 일원이었다. OB 원년 멤버로 선수 시절부터 김경문과 함께 했던 신경식 코치야 말할 것도 없다.[14] 따라서 2003년 재부임한 이광환 2기(전년도 준우승)는 제외된다.[15] 1989년 MBC 청룡이 6위로 마친 뒤 백인천이 부임했고 1991년 LG가 공동6위로 마친 뒤 이광환이 부임했다. 1996년 7월 LG가 7위로 추락했을 때 천보성이 감독 대행을 맡은 뒤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으며 1999년 양대리그 합산 전체승률 6위를 기록한뒤 이광은이 부임했다. 그리고 이광은은 2001년 시즌 초 최하위로 추락한 뒤 김성근이 감독대행을 맡다가 정식 감독이 됐다. 암흑기를 거친 뒤 이를 끊은 김기태는 2014년 4월 LG가 최하위로 추락했을 때 사퇴하여 약 1달 뒤 양상문이 감독으로 부임했다. 양상문의 마지막 시즌인 2017년 6위로 PS 진출에 실패한 가운데 류중일이 부임했다. 그리고 류중일이 떠날 때의 순위는 4위였고 준PO 탈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