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 토시후미

덤프버전 :


}}} ||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 70 다나카 슈타 71 쿠지 테루요시 72 타카하시 켄 73 카네무라 사토루 74 후지모토 아츠시 76 히라노 케이이치 78 히라타 가쓰오
80 키타가와 히로토시 81 시미즈 마사지 82 야마다 가츠히코 83 아라이 료타 84 히다카 타케시 85 후쿠하라 시노부
86 안도 유야 87 나카무라 유타카 88 야노 아키히로 [[감독#s-1.1|{{{#!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8b500; font-size: .8em"
{{{#white
}}}}}}]] 89 후지이 아키히토 90 쿠보타 토모유키 96 쓰쓰이 소
99 이노우에 카즈키
||
||<bgcolor=#000000,#000000>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 ||
||<#fefe01><:><-3>한신 타이거스, 틀:한신 타이거스로 돌아가기 ||



바바 토시후미의 수상 경력
[ 펼치기 · 접기 ]


파일:NPB 로고.svg 일본시리즈 우승

1996
1997

파일:퍼시픽 리그 로고.svg 1995~1996년 퍼시픽리그 3루수 골든글러브



파일:바바토시후미 한신 취임회견.jpg

한신 타이거스 No. 81
바바 토시후미
馬場敏史 / Toshifumi Baba

생년월일
1965년 2월 10일 (59세)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생지
후쿠오카현 미즈마군 오키정
포지션
3루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야나가와고등학교
사회인야구
신일본제철 사카이 (1984~1989)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5순위 (다이에)
소속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0~1993)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4~1997)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7~2000)
지도자 경력
서패스 고베[1] 내야수비·주루코치 (2001~2002)
오릭스 블루웨이브 내야수비·주루코치 (2003)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내야수비·주루코치 (2004~2008)
오릭스 버팔로즈 내야수비·주루코치 (2009)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내야수비·주루코치 (2010~2011)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2군 내야수비·주루코치 (2012)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내야수비·주루코치 (2013)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종합 겸 내야수비·주루코치 (2014)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내야수비·주루코치 (2015)
한화 이글스 작전 및 주루코치 (2016)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내야수비·주루코치 (2017~2021)
고베가쿠인대학 코치 (2022)
한신 타이거스 내야수비·주루코치 (2023~)

1. 개요
2. 현역 시절
2.1. 프로 데뷔 전
2.2. 프로 선수 시기
3. 은퇴 후



1. 개요[편집]


일본프로야구 선수. 現 지도자.

한국 야구팬들에겐 2016년 한화 이글스의 작전 및 주루코치를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현역 시절[편집]



2.1. 프로 데뷔 전[편집]


야나가와 고등학교를 거쳐 사회인야구팀 신일본제철 사카이에서 6년간 선수로 뛰었고, 1989년 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는 주축 타자로써 팀을 대회 4강으로 이끌었다. 당시 회사 야구팀 후배로 노모 히데오가 있었다.

이후 노모가 8구단 1순위 동시지명을 받은 것으로 유명했던 1989년 드래프트[2]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3]의 5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다.

2.2. 프로 선수 시기[편집]


데뷔 1년차인 1990년부터 바로 1군 데뷔를 이뤄냈지만 타율이 2할을 넘기지 못하는 등 빈약한 타격이 발목을 잡으면서 54시합 출장에 그쳤고, 2년차인 1991년엔 아예 1군에 승격하지 못한 채 2군에서만 시간을 보낸 데 이어 다음 해에도 10시합 출장에 그쳤다. 팀이 후쿠오카 돔으로 옮긴 1993년에 67시합(153타석)에 출장하여 타율 .246(138타수 34안타) 0홈런 9타점을 기록하며 백업 멤버로나마 그럭저럭 1군에 정착하나 싶었으나, 시즌 종료 후 타카기 코지와의 트레이드오릭스 블루웨이브에 이적하게 되었다.

오릭스 이적 첫 해인 1994년엔 53시합 출장으로 지난 해와 별다를 바 없는 성적에 그쳤지만, 이적 2년 차인 1995년에 출중한 수비력을 주목받아 주전 3루수로 정착하게 되었고, 그 해 115시합 404타석, 타율 .262(344타수 90안타) 1홈런 33타점을 기록하면서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한 것은 물론 오릭스의 고베 연고이전 이래 첫 우승[4]을 이끈 공로로 골든글러브 수상까지 성공하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다음 해인 1996년에도 타석 수는 1/3 가까이 줄었으나 주전 3루수 자리를 유지하며 111시합 출장 및 개인 최다인 6홈런을 기록했고, 오릭스의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우승 및 19년 만의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끈 공로로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에 성공했다.

그러나 1997년엔 크리스 도넬스, 사타케 마나부 등의 대두로 출장기회가 급감했고, 시즌 도중 이와사키 히사노리와 함께 오구라 히사시, 히로나가 야스타카[5]와의 2:2 트레이드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하게 된다. 이는 오릭스의 리빌딩 구상과 더불어 1995년 일본시리즈 당시 바바의 출중한 수비력에 주목한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영입 계획이 맞물린 결과였다.

야쿠르트 이적 직후엔 이케야마 타카히로, 도바시 카츠유키와의 주전 경쟁과 함께 3루수, 2루수를 병행하며 57시합[6]에서 타율 .271(140타수 38안타)/OPS .727, 3홈런 18타점으로 커리어하이급 성적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 결과를 냈고, 야쿠르트의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7] 우승에도 공헌하면서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후에도 준주전이나 백업으로 야쿠르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나 이와무라 아키노리 등의 대두가 겹치면서 결국 2000년 시즌 종료 후 675시합 출장, 타율 .242/OPS .616, 328안타 12홈런 119타점의 통산 성적을 남기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은퇴 후[편집]


은퇴 후 오릭스, 야쿠르트, 요코하마, 세이부 등에서 내야수비 및 주루코치를 역임했고, 2016년엔 김성근 감독이 이끌던 한화 이글스의 작전 및 주루코치로 취임했으나 한 시즌 만에 코치직에서 사퇴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2023년부턴 한신 타이거스의 1군 내야수비 및 주루코치를 맡게 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22 14:07:22에 나무위키 바바 토시후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000~2008시즌까지 오릭스가 부동산회사 아나부키 공무점에 2군 명명권을 매각하여 당시 아나부키 공무점이 내세우던 맨션 브랜드 '서패스'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 서패스 고베로 구단명을 바꿨고, 이후 2006년에 고베를 뺀 서패스로 구단명을 바꿨다가 2009년에 아나부키 공무점이 경영악화로 오릭스와의 계약 연장을 거절하면서 구단명을 원상복구했고, 직후 아나부키 공무점은 파산과 함께 오릭스의 자회사인 다이쿄의 자회사로 흡수되었다.[2] 노모 외에도 후루타 아츠야, 사사키 카즈히로, 신죠 츠요시, 사사오카 신지, 코미야마 사토루, 이리키 사토시, 요다 츠요시 등 이후 프로에서 출중한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을 다수 배출한 드래프트로 유명하다.[3] 당시 다이에도 노모를 1차 지명했으나 킨테츠 버팔로즈에게 교섭권을 내주면서 대체 1순위로 모토키 다이스케를 지명했는데, 요미우리 입단을 원했던 모토키가 다이에의 지명을 거부하면서 그대로 1차 지명권을 날려버렸다.[4] 이 해 오릭스는 개막 전인 1월에 터진 한신 아와지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연고지 고베 팬들을 위로 및 격려하는 뜻에서 힘내자 고베(がんばろうKOBE)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며 시즌에 임했고, 시즌 내내 엄청난 호성적으로 쾌진격을 거듭하여 고베 팬들에게 퍼시픽리그 우승을 안겨주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다만 일본시리즈에선 아쉽게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게 우승을 내줬다.[5] 바바와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팀메이트이기도 했던 선수로 선수 생활 동안 준주전, 백업을 전전한 외야수였다. 다만 현역 시절엔 백업 이하를 전전한 것과는 별개로 역대 최초 개막전 데뷔 첫 타석 홈런 및 헤이세이 시대 퍼시픽리그 제1호 홈런 등 여러 굵직한 기록을 만들어 낸 선수로써 유명세를 펼쳤으며, 오릭스 이적 후인 1998년엔 치바 롯데 마린즈의 프로야구 연패 신기록(17연패)을 결정짓는 대타 끝내기 만루 홈런을 쳐내기도 했다. 1999년 시즌 종료 후 은퇴.[6] 시즌 종합 성적은 오릭스에서 출장했던 18시합까지 더해 75시합 출장. 다만 오릭스에선 출장기회를 별로 받지 못해서 이 해 대다수의 타격 성적을 야쿠르트에서 기록했다.[7] 다만 일본시리즈에선 3경기에서 대타 및 대수비로만 출장하면서 미미한 성적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