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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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오어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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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하키 명예의 전당 로고.svg
하키 명예의 전당 헌액자(1979)







파일:NHL 로고.svg NHL 관련 수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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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HL 로고.svg 1970, 1972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



파일:NHL 로고.svg NHL All-Star Game(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5)



파일:NHL 로고.svg NHL All-star Game MVP(1972)



파일:NHL 로고.svg NHL Plus/Minus Award (1969, 1970, 1971, 1972, 1974, 1975)



파일:NHL 로고.svg NHL First All-Star Team(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파일:NHL 로고.svg NHL Second All-Star Team(1967)
















국제 대회 수상 이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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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Canada Cup 캐나다 국가대표팀 금메달 & MVP




기타 상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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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캐나다 국기.svg Lou Marsh Trophy(1979)



파일:미국 국기.svg Lester Patrick Trophy(1979)



파일:Order of Canada.png Order of Canada(1979)


파일:바비 오어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jpg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 선수(1970)


Queen Elizabeth II Silver Diamond Jubilee Medal(2012)




파일:NHL 로고.svg 보유 중인 NHL 최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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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콘 스마이스 트로피 2회 수상자(1970, 1972)
시즌 득실 마진(+/-) 최다 1위(6회)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 최다 수상자(8회)
NHL 통산 득실 마진(+/-) 2위(+597)[1]
단일 시즌 득실 마진(+/-) 최고 기록(+124)
디펜스맨 통산 최다 포인트(1393포인트)
디펜스맨 단일 시즌 최다 포인트(139포인트, 1970-71)
디펜스맨 단일 시즌 최다 어시스트(120개, 1970-71)
디펜스맨 최다 100포인트 시즌(6회)
유일한 디펜스맨 아트 로스 트로피 수상자
유일한 디펜스맨 레스터 B. 피어슨 상 수상자
단일 시즌에 4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한 유일한 선수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 아트 로스 트로피, 콘 스마이스 트로피,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 1969-70)
단일 시즌에 아트 로스 트로피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를 동시에 수상한 유일한 선수
디펜스맨 최다 해트트릭(9회)
디펜스맨 최초의 30골 시즌 달성(1969-70)
디펜스맨 최초의 40골 시즌 달성(1974-75)
스탠리 컵 우승을 확정짓는 최단 시간 오버타임 골(40초, 1970년 4차전)



파일:보스턴 브루인스 로고.svg 보스턴 브루인스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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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 시즌 최다 어시스트(102개, 1970-71)
단일 시즌 최고 득실 마진(+124, 1970-71)
득실 마진(+574)




파일:바비 오어.webp

보스턴 브루인스 No.4
로버트 고든 "바비" 오어
Robert Gordon "Bobby" Orr OC[1]

출생
1948년 3월 20일 (76세)
[[캐나다 자치령|

캐나다 자치령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자치령"
행정구
]]
온타리오주 패리 사운드
국적
[[캐나다|
캐나다
display: none; display: 캐나다"
행정구
]]

신체
183cm, 89kg
종목
아이스하키
포지션
디펜스맨

왼쪽
입단
1962년 보스턴 브루인스 계약
소속
보스턴 브루인스 (1966~1976)
시카고 블랙호크스 (1976~1978)
1. 개요
2. 선수 경력
2.1. 데뷔 이전
2.2.1. 1966-67시즌
2.2.2. 1967-68시즌
2.2.3. 1968-69시즌
2.2.4. 1969-70시즌
2.2.5. 1970-71시즌
2.2.6. 1971-72시즌
2.2.7. 1972-73시즌
2.2.8. 1973-74시즌
2.2.9. 1974-75시즌
2.2.10. 1975-76시즌
2.3.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이적과 은퇴
3. 은퇴 이후
4. 기타
5. 연도별 기록
5.1. 정규시즌
5.2. 플레이오프



1. 개요[편집]


캐나다의 前 아이스하키 선수.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를 8년 연속 수상한 내셔널 하키 리그 역대의 최고의 수비수이며, 수비수로서 유일하게 정규시즌 최다 포인트 기록자에게 수여하는 아트 로스 트로피 수상 및 수비수 정규시즌 유일한 최다골 기록자이며, 크리스 프롱거와 더불어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 제정 이후 유이한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 수상자에 빛나는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안타깝게 경력을 일찍 마쳐야만 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조부 세대에 북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아일랜드계 가정이며, 아버지 덕 오어 역시 원래 하키 유망주로서 프로의 관심도 받기도 했지만, 제안을 거절하고 군에서 복무했고 제대 이후에는 다이너마이트 공장에서 일했다. 덕 오어는 바비를 포함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바비는 할머니 엘시 오어가 간호사로 일하던 병원에서 태어났을 때 미숙아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비 오어는 일찍이 하키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으며, 비록 미숙아로 태어나서 체구는 작았지만 그 작은 몸을 이용하여 누구보다도 빠른 스케이팅 실력을 자랑했다. 원래는 윙어였지만, NHL에서 선수로 뛰기도 했던 코치 버코 맥도날드가 오어를 수비수로 전향시켰다. 한편으로는, 수비수로 전향시켰음에도 맥도날드 코치는 오어에게 스틱 핸들러, 스케이터, 스코어러로서의 덕목도 가르치면서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1961년 온타리오주의 하키 토너먼트에 참가하면서, 보스턴 브루인스의 스카우터의 눈에 띄었다. 브루인스의 스카우터 렌 블레어는 오어를 두고 "덕 하비[2]에디 쇼어[3]의 짬뽕"이라는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남겼고, 블레어는 오어의 집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직접적으로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브루인스 역시 마이너 하키 팀에 투자를 하면서 오어를 위주로 한 리빌딩 작업에 나섰고, 명문 3대장 햅스, 립스, 윙스의 관심을 받았음에도 "브루인스의 리빌딩 작업에 합류하고 싶다"며 브루인스와 계약을 체결했다.

마이너 OHA 시절에는 브루인스 산하 오샤와 제너럴스에서 경력을 쌓았고, 만14세의 나이로 18~19세가 뛰는 리그에서 씹어먹으며 매 시즌마다 퍼스트 올스타팀에 선정되는 등 계속 성장했으며, 1966년에는 캐나다 주니어 리그 우승 팀들 간에 치르는 결승전인 메모리얼 컵에 팀을 진출시키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오어의 소속팀이 오어를 볼 마지막 기회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상태에서 사타구니 부상을 입는 악재를 겪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출전을 강행하려했지만, 오어가 추가적인 부상을 입는 것을 원치 않던 브루인스는 당연히 출전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 오어와 가족은 출전 안 시켜주면 브루인스에서 안 뛰겠다고 협박했고(...) 결국 두 손 든 브루인스를 뒤로 하고, 출전하여 메모리얼 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오어야 어떻게든 데려와야하니 맘대로 하게 내버려뒀지만, 이 일로 인해 제너럴스 감독 벱 기돌랭 감독은 경질되었고 스카우터 블레어 역시 신규 창단 확장 프랜차이즈 미네소타 노스 스타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2.2. 보스턴 브루인스[편집]



2.2.1. 1966-67시즌[편집]


파일:바비 오어 브루인스.jpg
브루인스가 힘들게 데려온 오어는, 브루인스가 수비수로서 확신을 가지지 못한 탓에 센터로 데뷔하게 되었다. 프리시즌에는 주니어 때 착용한 2번이 에디 쇼어의 영구결번이기 때문에 27번을 입시로 배번받았고, 시즌 이후에는 브루인스에서 5번을 제의했지만 오어는 5번 대신 4번을 택했다.

1966년 10월 19일,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전에 데뷔전을 치렀고 3일 후에 햅스전에 명골텐더 검프 워슬리를 상대로 데뷔 첫 골을 성공시키면서 보스턴 팬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첫 시즌부터 오어를 견제하기 위한 하드체킹이 많이 들어왔고, 립스전에서 마르셀 프로노보스트의 체킹으로 무릎 부상을 입어 9경기를 결장했다. 오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은 17승 10무 43패에 그치면서 최하위로 꼬라박을 시전했지만, 오어의 활약에 기대한 보스턴 가든의 시즌 관중 수는 41,000명이 증가하였다.

첫 시즌에 13골 28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수비수치고는 최고의 루키 시즌을 보내며 신인왕에 해당하는 칼더 메모리얼 트로피 수상과 세컨드팀에 선정되었다.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 투표는 2위에 그쳤지만, 그 해 수상자였던 뉴욕 레인저스해리 하웰은 수상소감에서 "이제부터 이 상은 오어의 몫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2.2.2. 1967-68시즌[편집]


2년차인 67-68시즌을 앞두고 캐나다 위니펙에서 개최된 자선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 부상을 입었고, 설상가상으로 12월에는 프랭크 마호블리치의 체킹으로 쇄골이 탈골되면서 또다시 아웃되었고, 1월에 올스타전에는 어떻게든 맞춰 복귀했지만 왼쪽 무릎 통증으로 또다시 결장했고, 2월에는 결국 왼쪽 무릎 통증으로 경기중에 교체되었다. 결국, 연골 제거 수술을 받고 시즌 말미에 복귀했지만, 시즌 최종 46경기 11골 20어시스트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1라운드에서 햅스한테 피스윕으로 광탈하긴 했지만 1958-59시즌 이후 9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도왔으며 첫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를 수상했다. 비록,오프시즌에는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 재활에 집중하였다.

2.2.3. 1968-69시즌[편집]


무릎 재활을 위하여 프리시즌 경기까지 스킵했고, 경기에 어떻게든 출장할 때마다 아이스팩을 달고 다녀야만 했고, 경기 중에 고통으로 무릎을 비틀어 부여잡고 9경기를 결장하기도 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경기 출장을 강행한 오어는 12월 14일 시카고 블랙호크스전에 커리어 첫 해트트릭을 포함 5포인트 경기를 펼치면서 활약했고, 시즌 최종 21골 64포인트로 NHL 수비수 한 시즌 최다 골&포인트 기록을 갈아치웠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맞딱뜨린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와의 경기는 다른 의미로 역대 최악의 경기 중 하나였다. 정규 시즌 말미에 립스와의 경기 때, 오어가 립스의 골텐더 브루스 갬블에게 퍽 루즈를 유도하려 하자 당시 립스의 루키 수비수 팻 퀸이 오어에게 크로스체킹을 걸어버렸다. 이에 화난 오어가 팻 퀸을 발로 걷어찼고, 퀸 역시 발로 걷어차는 걸로 화답했다. 당시에는 심판이 뜯어말리면서 무마되었지만, 보스턴에서 치러진 플레이오프 1차전부터 퀸이 오픈 아이스 히트(Open-Ice-Hit)[4]로 오어를 고꾸라뜨린 다음에 팔꿈치로 가격하는 엘보잉을 5분이나 한 끝에 오어를 뇌진탕으로 기절시켜버리는 사고를 쳤고, 퀸은 페널티 박스로 들어간 이후 보스턴 홈팬들이 욕하자 하키 스틱을 휘둘러 페널티 박스 유리를 깨고 팬들을 공격했다(...) 이에 성난 팬들이 퀸이 아이스링크 위로 복귀하자 쓰레기를 투척하는 등 경기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오어는 다행히도 뇌진탕 증세를 회복한 후 라커룸에서 쉬게 되었지만, 경기는 싸움으로 얼룩진 저 세상 게임이 펼쳐져서 브루인스가 10:0(...)으로 승리했다. 결국, 오어는 3차전에 복귀했고 브루인스가 립스를 스윕하고 2라운드에 진출하긴 했지만, 햅스에게 2라운드에서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2.2.4. 1969-70시즌[편집]


오어의 기량이 만개한 시즌으로서, 정규시즌에서 무려 120포인트를 기록하면서 팀동료 필 에스포지토가 세운 정규시즌 최다 포인트 기록에 단 6포인트가 모자랐다. 결국, 오어는 4연속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는 물론, 수비수 최초의 아트 로스 트로피 수상, 노리스 트로피 제정 이후 첫 수비수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 수상, 플레이오프에서도 활약으로 팀을 우승시키면서 콘 스마이스 트로피까지 수상하며 전무후무한 한 시즌 4개의 타이틀 획득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9골 11어시스트 20포인트를 기록하며 팀을 이끌었고, 스탠리 컵 파이널에는 창단 첫 시즌부터 글렌 홀을 위시하여 스탠리 컵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저력을 보여준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와 맞붙게 되었다. 1~3차전을 손쉽게 승리한 후, 4차전에서는 오버타임까지 갔는데 오버타임 시작 40초만에 결승골을 넣고 찍힌 그 전설적인 슈퍼맨 공중부양 사진이 이 때의 일이었다.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을 결정짓는 오버타임 골 최단 기록은 덤.
파일:external/sperryhockey.org/Bobby-Orr-the-goal.jpg
글렌 홀(좌측)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고 기뻐하는 바비 오어

사실, 블루스의 수비수 노엘 피카르(Noel Picard)에게 걸려 넘어진 것이었는데, 사진기사 레이 루시에(Ray Lussier)가 절묘한 타이밍에 사진을 찍으며 저런 사진이 탄생하게 된 것. 과정이 어떻든 스탠리 컵 파이널 관련하여 현재까지도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2.2.5. 1970-71시즌[편집]


오어를 비롯하여 브루인스의 전력은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오어는 37골 102어시스트 139포인트로 최다 어시스트 및 득실 마진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5] 139포인트를 기록했음에도, 동료 필 에스포지토152포인트를 기록하는 바람에 아트 로스 트로피는 아쉽게 물건너갔지만, 5년 연속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를 수상하게 되었다. 브루인스에서는 정규시즌 100포인트 기록 선수들에게 골든 퍽을 나누어주었고, 오어 역시 에스포지토와 자니 뷰식, 켄 호지 등과 함께 받았다.[6]

리핏이 확실시되는 막강한 전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골텐더 명가인 햅스자크 플랑트가 사라지니 켄 드라이든이라는 걸출한 신인에게 막히면서 허무하게 1라딱을 당하고 말았다.

2.2.6. 1971-72시즌[편집]


오프시즌동안 오어는 NHL 최초의 총액 $1M 계약을 체결했다[7]. 시즌 최종 37골 80어시스트 117포인트로 여전히 건재한 실력을 자랑하면서 필 에스포지토에 이은 리그 2위를 기록했다. 6년 연속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와 두 번째 하트 메모리얼 트로피를 수상하는 등의 활약으로 브루인스의 지구 우승에 공헌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5골 19어시스트 24포인트로 최다 포인트 득점으로 라이벌 뉴욕 레인저스를 상대로 우승을 이끌었다. 1970년과 마찬가지로 우승 결승골을 넣은 건 덤이고, 또 한번의 콘 스마이스 트로피NHL 최초로 콘 스마이스 트로피를 2회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69-70시즌의 타이틀 4개 획득 이후 이번시즌에는 3개를 획득했고, 특히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콘 스마이스 트로피를 한 시즌에 수상한 것은 이후에도 니클라스 리드스트룀(2002)과 케일 마카(2022)만이 기록했을 정도로 희귀한 편. 경기 이후, 레인저스의 포워드 빅 하드필드는 "우리는 대등하게 싸웠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 쪽에는 바비 오어가 있었고 우리는 없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커리어 초창기부터 발목을 잡았던 왼쪽 무릎 부상의 악화가 심화되어 남은 커리어가 길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2.2.7. 1972-73시즌[편집]


보스턴 브루인스에게는 격변의 한 해였던 시즌. 단장의 교체, 주요 선수들의 WHA이적, 1920년대부터 구단을 소유했던 애덤스 구단주의 구단 매각, 감독까지 경질되어 마이너 시절 오어를 지도했던 벱 기돌랭이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오어는 부상으로 63경기 출장하였고, 기록 역시 101포인트에 그쳤(?)다. 플레이오프는 어떻게든 갔지만 에스포지토의 부상까지 겹치고 오어 역시 2포인트에 그치면서 1라딱으로 허무한 한 해를 보내게 되었다.

2.2.8. 1973-74시즌[편집]


1973년 11월 15일, 뉴욕 레인저스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3골 4어시스트로 7포인트 활약을 펼쳤다. 그 중 한 골은 블루라인에서 날렸는데, 레인저스의 수비수 '로드 세일링의 하키 스틱을 부러뜨리고 들어갔다(...) 오어는 정규시즌 32골 90어시스트 122포인트로 반등에 성공했으며, 7년 연속 노리스 트로피 수상과 팀을 또 한번의 스탠리 컵 파이널로 이끌었다. 하지만, '브로드웨이의 깡패'라는 별명에 걸맞게 "스케이팅으로 안 되면 상대방들을 두들겨패면 된다"(...)라는 주의로 올라온 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에게 패배하면서 분루를 삼키게 되었다.

2.2.9. 1974-75시즌[편집]


아픈 사람이 정말로 맞는지, 정규시즌 46골 89어시스트 135포인트로 수비수 정규시즌 최다 골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무려 정규시즌 골 1위를 기록했다! 당시에는 모리스 "로켓" 리샤르 트로피는 없어서, 8년 연속 제임스 노리스 메모리얼 트로피 수상과 커리어 두 번째 아트 로스 트로피 수상에 만족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공격수도 아닌 수비수인 오어가 NHL 최초로 6년 연속 100포인트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8] 브루인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을 보내는 에스포지토 역시 커리어 여섯 번째 100포인트 시즌을 보내는 등 분투했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시카고 블랙호크스에게 1라운드 광탈을 면치 못했다.

2.2.10. 1975-76시즌[편집]


1975-76시즌은 5년 계약의 마지막 해여서 시즌 이후에는 FA신분이 될 예정이었다. 물론, 새로 구단주가 된 제이콥스는 프랜차이즈 스타 오어를 붙잡으려 했고, 오어와 구두 합의에 성공하면서 순탄하게 될 것처럼 보였지만...

시즌 개막 직전인 1975년 9월 20일에 수술대에 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부상으로 앞으로의 활약에 의구심을 품은 보험사는 브루인스의 계약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 못박았고, 의사들도 오어가 앞으로 뛰기 힘들 것이라 조언했다. 오어는 에소포지토의 트레이드 다음 날인 11월 8일에 복귀하긴 했지만, 무릎의 통증으로 끝내 복귀하지 못한 채 재수술 및 고향에서의 요양에 들어갔다. 정말로 뛰기 힘들어 보이는 오어때문에 브루인스가 오어를 트레이드시킬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구단 측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오어를 남겨놓기 위해 협상을 진행했다.

2.3. 시카고 블랙호크스의 이적과 은퇴[편집]


앞선 지난 1975-76시즌을 앞두고 브루인스는 10년 $4M 계약에 합의했지만, 오어의 무릎 수술때문에 삭감하여 AAV $295,000 5년 총액 $925,000 또는 보스턴 브루인스의 1980년 6월 시점 주식의 18.6%으로 제안을 변경하였다. 이는 시카고 블랙호크스로 이적한 직후 오어의 법률 대리인 앨런 이글슨의 발표로 공개되었지만, 정작 그는 오어와 협의한 적도 없었다고 1990년에 밝혀졌다(...) 1976년에 보스턴은 다시 오어에게 AAV $600,000으로 크게 인상하여 제안을 했지만, 트레이닝 캠프에서의 피지컬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으며, 보장도 첫 해 한정이었다. 결국, 시카고 블랙호크스로 이적하면서 브루인스의 만남은 결별되었고, 브루인스 단장 해리 신든은 블랙호크스의 탬퍼링을 의심하며 호크스 구단주 빌 워츠에게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 제출(...)을 요구했다.

당시, 브루인스 감독 돈 체리는 재계약 실패에 대해 오어의 이글슨에 대한 전적인 신뢰라고 밝혔다. 오어의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오어가 브루인스 프런트와의 직접적인 협상을 진행하지 않은 탓에 이글슨이 중간에서 오도 및 왜곡이 이루어지는 데 한몫했다. 몇년 후, 이글슨은 NHL회장 존 지글러와 호크스 구단주 빌 워츠와의 유착관계를 맺어 선수들의 연봉을 빼돌려먹었던 것이 밝혀졌고, 오어는 1980년에 이글슨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런 스펙터클한 이적 과정과는 달리, 호크스에서의 기록은 처참하기 그지없었고 1977-78시즌에는 시즌을 통째로 결장하는 등 먹튀로 전락했고, 결국 1978년에 6경기 출장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당시에 풀타임 시즌 거의 10년을 뛰어 270골 645어시스트 915포인트로 역대 최고의 수비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일찍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선수. Mr. Hockey 고디 하우조차 바비 오어를 잃는 것만큼 NHL에게 더한 손실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3. 은퇴 이후[편집]


불꽃같은 짧은 커리어를 마치고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빚더미였다(...) NHL 최고의 연봉 수령자였던 오어는 담당 회계사의 폭로로 자산이 $456,604인데 빚이 그보다 많은 $469,546이라고 밝혀진 것. 이 과정에서 오랫동안 함께했던 이글슨과 싸우며 1980년에 결별했으며, 이글슨이 오어의 은행 대출을 갚기 위해 오어의 자산을 $620,000에 매입하기로 하고 관계가 끝났다.

오어는 시카고에서 코치 생활을 하기도 하고, 하트퍼드 웨일러스의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호크스가 오어의 남은 계약금을 주려고 하지 않자 오어는 법정 공방 끝에 1983년 $450,000을 뜯어냈고(...) 이 중 20만불은 세금과 소송 수수료로 사용했다.

또한, 그의 법률 대리인이었던 이글슨의 만행이 드러난 데 가장 큰 공헌을 하기도 했는데, 이글슨이 계약조건을 선수들에게 오도하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오어의 후광으로 선수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여 자금을 불법적으로 횡령한 사실이 조사끝에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이글슨은 1998년에 사기 및 횡령, 공갈 협박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하키 명예의 전당에서 이글슨의 이름을 빼지 않으면 명전에서 나가겠다고 강경하게 나오면서 이글슨은 자진 사임하면서 NHL판을 떠나게 되었다. NHL 회장 및 구단주들과의 유착이 있었던 이글슨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1991년에는 NHL 선수 연금 문제로 NHL과 소송에 휩싸였는데, 오어와 전 브루인스 동료 데이브 포브스의 노력으로 소송에서 선수협이 승소하였다.

1996년에는 하키 선수들을 위한 에이전트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선수들을 위한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다.

파일:오어 클라크.webp
2010년 NHL 윈터 클래식 보스턴 브루인스필라델피아 플라이어스 경기에서 바비 클라크와 함께 참석하여 퍽드롭을 맡았다. 2023년 펜웨이 파크에서 개최된 윈터클래식에서도 퍽드롭 세레머니를 맡았다.

2012년에 캐나다 정부로부터 고디 하우 등과 함께 'Queen Elizabeth II Silver Diamond Jubilee Medal'에 서훈되었으며, 2013년에는 자서전 'Orr:My Story'(아마존)을 발매했다.

4. 기타[편집]


  • 최고의 실력과는 달리, 성격은 매우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렸다고 한다. 전 동료였던 테리 오라일리는 "오어는 매우 사적이고 부끄럼쟁이이다. 그는 우연찮게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하키 선수가 된 것."이라 인터뷰한 적 있으며, 브루인스의 언론 관계자 네이트 그린버그는 "내가 가장 고역이었던 일이 바비 오어를 트레이닝 룸에서 끄집어내 기자회견장에 데려가는 것이었다"고 증언했을 정도. 2013년까지는 그의 일대기를 서술한 전기 출판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라고.

  • 미시간주 출신인 부인과는 오프시즌 중 플로리다주의 휴양도시 포트로더데일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만났고, 1972년 크리스마스에 약혼, 1973년에 오어의 고향 패리 사운드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아들이 둘 있는데, 아들 중 하나는 오어가 설립한 오어 하키 그룹에서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다.

  • 브루인스 출신 동료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데릭 샌더슨이 알콜 중독 및 마약 남용으로 알거지가 되었을 때, 오어가 그의 재활을 돕기 위해 손뜻 돈을 썼고, 샌더슨은 재활에 성공한 후 오어와 함께 하키 선수들의 재정 관리를 도왔다. 데뷔 시즌 룸메이트였던 존 포리스톨이 1994년 알콜 중독으로 탬파베이 라이트닝에서 경질되었을 때,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포리스톨은 뇌암 판정을 받았으며, 1년 후에 사망했다고. 그의 장례식에 오어 역시 참석해서 애도를 표했다.

  • 내성적인 성격으로 잘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자선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고 한다.

  • 사생활이 매우 깨끗한 선수로 알려져있는데, 술 담배, 클럽 등을 일절하지 않았다고.


5. 연도별 기록[편집]



5.1. 정규시즌[편집]


정규 시즌 기록
소속
시즌
GP
G
A
P
+/-
PIM
PPG
PPP
SHG
SHP
GWG
OTG
S
S%
FO%
BOS
1966-67
61
13
28
41
1
102
3
15
1
3
0
0
262
4.96
-
1967-68
46
11
20
31
28
63
3
11
0
0
1
0
173
6.36
-
1968-69
67
21
43
64
55
133
4
18
0
2
2
0
285
7.37
-
1969-70
76
33
87
120
54
125
11
51
4
5
3
0
413
7.99
-
1970-71
78
37
102
139
124
91
5
49
3
13
5
0
392
9.44
-
1971-72
76
37
80
117
83
106
11
35
4
9
4
0
353
10.48
-
1972-73
63
29
72
101
55
99
7
35
1
5
3
0
282
10.28
-
1973-74
74
32
90
122
84
82
11
35
0
4
4
0
384
8.33
-
1974-75
80
46
89
135
80
101
16
52
2
4
4
0
384
11.98
-
1975-76
10
5
13
18
10
22
3
9
1
2
0
0
57
8.77
-
CHI
1976-77
20
4
19
23
6
25
2
14
0
0
0
0
55
7.27
-
1978-79
6
2
2
4
2
4
0
0
0
0
0
0
18
11.11
-
NHL 통산
(12시즌)

657
270
645
915
582
953
76
324
16
47
26
0
3058
8.8
-

5.2. 플레이오프[편집]


플레이오프 시즌 기록
소속
시즌
GP
G
A
P
+/-
PIM
PPG
PPP
SHG
SHP
GWG
OTG
S
S%
FO%
BOS
1966-67
4
0
2
2
-1
2
0
1
0
0
0
0
16
0
-
1968-69
10
1
7
8
9
10
0
3
0
0
1
0
32
3.13
-
1969-70
14
9
11
20
24
14
3
7
1
4
2
1
78
11.54
-
1970-71
7
5
7
12
-2
25
1
3
1
2
1
0
38
13.16
-
1971-72
15
5
19
24
20
19
3
10
0
2
1
0
61
8.2
-
1972-73
5
1
1
2
-4
7
0
1
0
0
0
0
20
5
-
1973-74
16
4
14
18
7
28
1
6
0
1
2
0
96
4.17
-
1974-75
3
1
5
6
7
2
0
1
1
1
0
0
17
5.88
-
NHL 통산
(8시즌)

74
26
66
92
60
107
8
32
3
10
7
1
358
7.3
-

[1] 캐나다 2등급 훈장.[2] 오어의 데뷔 이전 제임스 메모리얼 트로피 7회 수상에 빛나던 당대 최고의 수비수.[3] 1930년대 브루인스를 이끌던 당시 팀 최고의 레전드 공격수.[4] 몸으로 있는 힘껏 들이받는 행위.[5] 시즌 최다 어시스트 기록은 1980-81시즌에 웨인 그레츠키가 109어시스트로 경신했지만, 수비수로서는 현재까지도 유효한 기록이다. 또한, 시즌 득실 마진 +124는 현재까지도 NHL 레코드.[6] 나중에 자신과 가족의 법률 관련 문제를 해결하던 변호사 앨런 이글슨에게 골든 퍽을 주었는데, 이글슨은 2007년에 경매에 붙여 16,500 캐나다 달러에 낙찰되어 팔았다.[7] AAV $0.2M 5년 계약[8] 오어를 제외하면 수비수가 정규시즌 100포인트를 기록한 것은 단 8회에 불과하다. 폴 커피가 5회(1983-84, 1984-85, 1985-86, 1988-89, 1989-90), 드니 포트뱅(1978-79), 앨 매키니스(1990-91), 브라이언 리치(1991-92)가 각각 1회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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