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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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박승희


1. 개요
2.1. 주니어 시절
2.2. 2007-08 시즌
2.3. 2008-09 시즌
2.4. 2009-10 시즌
2.5. 2010-11 시즌
2.6. 2011-12 시즌
2.7. 2012-13 시즌
2.7.1. 월드컵 시리즈
2.8. 2013-14 시즌
2.8.1. 국가대표 선발전
2.8.2. 월드컵 시리즈
3.1. 2014-15 시즌
3.1.1. 국가대표 선발전
3.1.2. 월드컵 시리즈
3.1.3. 세계선수권
3.1.4. 동계체전
3.2. 2015-16 시즌
3.3. 2016-17 시즌
3.4. 2017-18 시즌



1. 개요[편집]


박승희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경력[편집]



2.1. 주니어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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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박승희(왼쪽)
황당한 계기로 스케이팅을 시작했는데 어머니께서 어린 시절 피겨 스케이팅 만화[1]를 보고 감명을 받아, 딸들을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키우려고 큰딸 박승주를 초등학교 4학년 때, 작은딸 박승희를 2학년 때 수원 소화초등학교 빙상부에 등록시켰다.[2] 하지만 학교 빙상부에는 쇼트트랙스피드 스케이팅 반만 있었고, 피겨 스케이팅 반은 없었다. 스케이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어머니는 아이들이 못해서 트랙만 뱅뱅 도는 줄 알았다가 뒤늦게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피겨 스케이팅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언니 박승주와 같이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운동을 시작했고 단거리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빙속 유망주였으나, 초등학교 6학년 때 기록경기인 롱트랙보다 순위 경기인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에 더 흥미를 느껴 쇼트트랙으로 전향했다. 종목을 변경하고 1년도 안 돼서 출전한 동계체전 초등부 500m에서 46.020로 초중고, 대학부, 실업부의 역대 모든 기록을 갱신하는 대회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고 이후로도 단거리 최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장거리는 저질 체력으로 준결승과 결승을 오가는 실력이었다.

2006년 12월 서현중학교 2학년 때 주니어 국가대표에서 3위로 주니어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2007 주니어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여 양신영, 신새봄에 이어 개인종합 3위를 했다. 만 15세 시니어 나이 제한이 풀리는 2007-08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하여, 4월 1차 선발전에서 종합순위 12위로 2차 선발전에 진출했고 9월 2차 선발전에서 종합순위 3위를 하여 만 15세의 나이로 생애 첫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첫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부터 500m 최강자의 면모를 보였는데 1차 선발전 500m 준준결승에서 당시 500m 최강자였던 전지수를 상대로 스타트부터 앞서나갔고, 9월에 열린 2차 선발전에서는 한국 여자선수 최초로 44초대의 벽을 깨고 43.960의 기록으로 500m 1위를 했다.


2.2. 2007-08 시즌[편집]


단거리는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볼모지로 애초에 메달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박승희의 시니어 데뷔는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1차 월드컵 500m에서 단거리 최강자 왕멍과 크게 뒤지지 않는 스타트를 보여주며 은메달을 따면서 단숨에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단거리의 희망으로 주목받았다. 2차 월드컵 1000m에서는 준결승과 결승에서 왕멍을 완벽히 압도하며 금메달을 땄으며, 3차 월드컵에서 마지막에 중국선수 2명을 아웃코스로 제치며 500m 은메달을, 4차 월드컵에선 취약한 종목인 1500m에서 동메달, 5차 월드컵 1000m 동메달을 따며 데뷔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전 종목 메달을 획득했다.

원래 박승희는 국가대표 4위[3]2008 세계선수권 계주 멤버로만 선발되었으나 6차 월드컵에서 진선유가 부상을 당해 선발전 차순위였던 박승희가 세계선수권 개인전 멤버로 출전했다. 시니어 첫 (자국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출전에 긴장했는지 1500m에서 반칙으로 준결승 실격, 500m 준결승에서 셀프 자빠링, 1000m 예선에서 반칙으로 실격당해 전종목 결승진출에 실패하며 최악의 성적을 거둔다. 그러나 3000m 계주 금메달과 팀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성공적인 시니어 데뷔 시즌을 좋게 마무리했다.


2.3. 2008-09 시즌[편집]


2008년 4월에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 첫째 날 여유롭게 500m에서 1위를 했지만 1000m에서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슈퍼파이널에서 6위를 차지하면서 종합순위 6위가 되어 월드컵 멤버로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데뷔시즌 때와는 달리 개인전에서 단 한 번만 결승에 진출해 최악의 성적을 내며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었다. 이는 데뷔 때와 달리 외국선수들의 견제가 심해졌고 단거리 전문이었던 박승희가 대표팀에서 장거리 훈련을 많이 오면서 온 부진으로 여겨진다.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평소보다 많은 체력훈련을 했지만 생각보다 체력이 좋아지지 않아 장거리 성적은 제자리였고 오히려 장점이었던 순발력이 떨어져 단거리 실력이 퇴보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장거리에 대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2009-10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전 종목 결승에 진출하여 500m 보험 1위, 1000m 2위, 1500m 6위, 3000m 5위를 하며 선발전 2위, 올림픽 개인전 출전권을 획득했다.


2.4. 2009-10 시즌[편집]



2.4.1.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편집]


에이스 진선유의 부상 이후 한국 여자 쇼트트랙은 이렇다 할 에이스가 보이지 않아 국제 무대에서 라이벌 중국에게 번번이 지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왕멍-저우양의 전성기까지 겹쳐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대표팀은 역대 올림픽 대표팀 역사상 최약체로 평가받아 개인전 금메달은 현실적으로 힘들고 잘해야 계주 금메달을 바라볼 수 있는 전력이라고 여겨졌다. 4번의 월드컵에서도 중국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선발전 2위를 차지했던 그녀 역시 1000m 동메달 2개를 따내는데 그쳐 여자 대표팀은 질타와 비난을 받게 되었다.

첫 경기인 500m에서 준준결승 때 임페딩 반칙으로 실격을 당했다. 1,500m는 박승희가 취약했던 종목이었고 2007-08 시즌 이후 월드컵 메달도 못 땄기 때문에 조해리이은별의 메달 획득이 더 유력하다고 여겨졌다. 헌데 1,500m 예선부터 월드컵 시즌과는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도 앞에서 끌고 나가면서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으나 캐서린 로이터와 충돌이 일어나는 바람에 속도가 줄어들어 동메달을 수상했다.[4] 경기 내에서 보여준 컨디션이 좋았기에 아쉬울 수 있었지만 생애 첫 올림픽 메달이자 자신의 취약 종목에서 획득한 메달이라서 그녀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역대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은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부터 여자계주 4연패를 했고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5연패에 도전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단 한 차례 중국에 이겨봤고 주위에서는 '너희는 여자 계주에서 새로운 역사를 쓸 팀'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기면 5연패라는 역사를 쓰고 지게 되면 기록이 깨지는 역사를 쓰는데, 져서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조롱이었다. 특히 준결승 성적에서 중국은 한국보다도 앞섰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신기록까지 깨뜨릴 정도였다.

자존심이 상한 선수들은 자진해서 외박까지 반납하면서 훈련을 했고 올림픽 결승전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고 1번 주자로 왕멍과 대등한 레이스를 펼쳤던 그녀는 다른 선수들과 같이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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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 판정 후 여자대표팀의 모습
왼쪽부터 김민정, 박승희, 이은별, 조해리.
하지만 김민정이 중국 선수를 치면서 방해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판정으로 중국에게 금메달을 넘겨준 건 물론이고 세계 신기록까지 빼앗겼다. 실제로는 앞서가던 김민정을 중국 선수가 무리하게 인코스 추월을 시도하다가 부딪힌 것으로 쇼트트랙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고 실격을 준다면 오히려 중국에게 줘야하는 상황이었지만 당시의 심판은 김동성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의 심판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제임스 휴이시.

마지막 경기였던 1,000m에서 그녀는 한국 선수로 유일하게 결승에 올랐다. 같이 겨룬 상대는 왕멍, 저우양, 캐서린 로이터였으며 선두로 나갔다가 왕멍과 저우양의 팀플레이로 비틀거리는 바람에 속력이 줄게돼서 결국 동메달을 땄다.

저우양은 박승희에 대한 반칙이 인정되어 실격을 당했지만, 왕멍은 금메달을 따면서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진선유에 이어 올림픽 3관왕에 올랐고, 한국 여자 쇼트트랙은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이후 16년 만의 노 골드의 수모를 겪었다. 그녀는 메달을 땄음에도 중국 여자팀에게 금메달 싹쓸이를 헌납한 아쉬움에 인터뷰에서 "1등을 하지 못해 언니들에게 미안하다"면서 통곡했다. 비록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녀는 중장거리 부문인 1,000m와 1500m 종목에서 2개의 동메달을 따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


2.4.2. 2010 세계선수권[편집]


올림픽이 끝난 직후 세계선수권에 참가하여 올림픽에서의 활약이 반짝 활약이 아님을 입증했다. 첫 경기 1,500m에서 장거리가 약점이었던 선수라고 생각할 수 없게 경기중반 1위로 치고나가 그대로 들어오면서 금메달을 땄다.

둘째 날 500m에선 준결승까지 갔다. 마지막 날 1,000m에서 순조롭게 준결승에 진출을 했는데, 경기도중 그녀가 코너링 도중 중심을 잃고 넘어질 때 뒤에 있던 저우양과 부딪히면서 큰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박승희는 허리부상을 당했고 저우양은 발목부상을 당했는데, 두 선수 모두 이날의 부상으로 선수생활 내내 고생했다.

3,000m 슈퍼파이널을 앞두고 왕멍은 500m와 1,000m에서 우승해서 68점을 땄고 박승희는 1,500m 우승으로 왕멍의 포인트에 절반이었는데, 박승희가 개인종합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슈퍼파이널을 우승(34점)하고 왕멍이 1점도 따지 못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동점이 되면 슈퍼파이널에서 먼저 들어온 사람이 우선 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왕멍은 1점만 획득하면 세계선수권 3연패인 상황이었기에 1,000m 가산점(5점)을 얻기 위해서 초반에 오버페이스를 했는데 박승희가 쫓아가 본인이 1,000m 가산점을 받았다. 왕멍은 박승희가 초반 오버페이스를 해서 1위를 못 할 것이라 생각하고 꼴찌에서 설렁설렁 스케이팅했는데, 박승희가 막판 스퍼트로 캐서린 로이터를 추월하면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고 왕멍이 9위로 들어오는 바람에 73점(34+5+34)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첫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을 이룬 이때 그녀의 나이는 만 18세였다.

슈퍼파이널 결승선을 통과한 후 똥을 씹은 듯한 왕멍의 표정이 압권이다. 왕멍은 시상식에서 박승희와 악수도 안 하고 애국가가 흐르는 동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서있는 비매너의 절정을 보여줬다. 이렇게 시작된 왕멍과의 악연은 3년 뒤 왕멍의 패악질로 절정에 이른다.


2.5. 2010-11 시즌[편집]


2010 세계선수권 우승자로 2010-11 시즌 국가대표로 자동 선발되었고 전 시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우승의 기세를 몰아 좋은 활약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를 받았지만 2010 세계선수권 1,000m 준결승에서 저우양과 충돌하면서 입은 허리부상이 몇 년간 박승희를 고질적으로 괴롭히게 되었다. 비시즌 동안 허리 통증으로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3, 4차 월드컵에서 지난 시즌보다 폼이 떨어진 모습을 보이면서 3, 4차 월드컵에서 1,000m 동메달을 따는데 그쳤다.[6]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1,000m 금메달과 1,500m, 3,000m 계주 은메달을 받았는데[7], 1,000m와 1,500m에서 조해리와 호흡을 맞추며 금/은을 휩쓰는 모습에서 힘으로 밀어부치던 기존 스타일을 벗어나 경기운영 능력에도 눈을 뜬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계주에서는 일본 선수의 무리한 추월로 중간에 다른 한국선수가 넘어져 은메달을 땄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 가서도 대회 내내 허리부상 치료를 받을 정도로 여전히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아시안 게임 이후 참가한 5, 6차 월드컵에선 빈손으로 돌아왔다. 2011 세계선수권 첫날 1,500m 은메달을 받았으나 다른 종목들에서 부진하여 개인종합 메달은 획득하지 못했다.


2.6. 2011-12 시즌[편집]


국가대표 선발전 직전 허리 부상으로 기권한 후 재활에 몰두했다. 광문고등학교 2학년 때 화성시의 고등학교 빙상부 창단과 졸업 후 화성시청 실업팀 창단을 조건으로한 스카웃 제의를 받았고,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수원경성고등학교[8]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2011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화성시는 빙상부 창단을 철회했고, 박승희는 졸지에 무적선수가 되었다. 마침 이 시기에 국가대표가 아니어서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할 수 없었기에 훈련장소도 없었던 박승희는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9] 우여곡절 끝에 2011년 10월 화성시청 빙상부가 창단하여 2011-12 시즌을 화성시청 소속으로 국내대회 여자 일반부에서 뛸 수 있게 되었다. 국내대회에서 무난히 상위권 성적을 거두면서 컨디션 조절을 했고, 2012년 4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종합 2위에 올라 5번째 태극마크를 달았다.


2.7. 2012-13 시즌[편집]



2.7.1. 월드컵 시리즈[편집]


오랜만에 국제무대에 복귀했으나 1~2차 월드컵은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재발하여 출전을 포기했다. 대부분의 한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의 전성기가 고등학교 시절(10대 후반)이므로 대부분은 쇼트트랙 팬들은 2010년의 기량을 되찾을 수 있을지 염려했지만, 3차 월드컵부터 복귀해 예전보다 더 노련해진 경기운영과 스케이팅 기술로 휴식 이전보다 훨씬 발전한 기량을 보여줬다.

특히 월드컵 4차 1000m 결승전에서 경기 초반 3위로 중국 선수들 2명(왕멍과 류추홍)을 동시에 견제하다가, 중반부에 2위로 올라가 1위 엘리스 크리스티 바로 뒤에서 체력을 비축하다가 마지막 반바퀴에서 특유의 인코스 추월로 1위를 하는 모습은 경기운영의 끝판왕이라로 말할 정도. 결승선 통과 후 상당히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부상으로 고생하다 복귀한 뒤 첫 금메달이자 2007-08 2차 월드컵 1000m 금메달 이후 5년 만의 금메달이기에 박승희에게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2.7.2. 2013 세계선수권[편집]


첫째 날 1,500m 결승전에서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가 4바퀴를 남겨두고 아웃코스로 추월하고 바로 부드럽게 인코스로 들어와 심석희를 추월하며 단숨에 1위로 올라섰고 그대로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금메달을 땄다. 둘째 날 500m에서 데뷔초 모습과 같은 스타트를 보여주며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500m 결승에 진출했고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21년 만의 두 번째 은메달을 수성했다.

마지막 날 종합 1위로 1,000m 경기를 시작했으나 준결승에서 중국의 판커신이 아웃코스 추월을 시도하는 박승희에게 고의적으로 다가가 스스로 박승희의 팔에 부딪힌 다음 일부러 넘어졌고 눈이 없는 심판은 1위로 통과한 박승희에게 실격을 줬다. 그 뒤 1,000m에서 왕멍이 우승을 하면서 13점 차이로 종합순위를 역전했으나 밴쿠버 올림픽 이후 1,500m도 힘들어 할 정도로 체력문제를 보여서, 2010년처럼 3,000m 슈퍼파이널에서 그녀가 역전 우승을 할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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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세계선수권 슈퍼파이널 경기 중 왕멍의 반칙.
그러나 슈퍼파이널 도중 왕멍의 반칙으로 인해 6위로 들어와 3점 밖에 못 따내 준우승에 머물렀으며 왕멍은 당연히 실격당했음에도 우승했다.

당시 종합우승 시상식에서 관중들은 왕멍에게 박수를 치지 않았고, 다른 나라 선수들도 박승희에게 찾아가 당신이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위로해 줬지만, ISU는 스포츠 선수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언스포츠맨쉽에 대해 아무런 징계도 가하지 않았다. 박승희는 3년 전 왕멍과 다르게 시상식에서 왕멍과 악수를 하고 축하해주는 매너있는 모습을 보이며 관중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았다. 왕멍과 매너를 비교하는 건 박승희에 대한 모욕 박승희는 이후 본인의 페이스북에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고 "(왕멍은) 선수로써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무시했다"며 돌직구 발언을 꺼냈다.


2.8. 2013-14 시즌[편집]



2.8.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왕멍 때문에 치른 2013-14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선 주종목 500m 결승전에서 실격되었으나 다른 종목에서 포인트를 많이 얻어서 개인종합 2위에 오르며 6번째 국가대표 시즌이자 2번째 올림픽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선수층이 두껍고 부상과 이른 나이의 은퇴가 많은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에서 이자체로 대단한 기록이며 박승희의 꾸준함과 실력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2.8.2. 월드컵 시리즈[편집]


오랜만에 별다른 부상 없이 시즌을 시작했고, 1차 상하이 월드컵에서 정말 오랜만에 월드컵 500m 은메달을 수상했다. 월드컵 시리즈 1,000m, 1,500m 결승전들에서 심석희, 김아랑과 같이 뛰며 크게 무리하지 않고 은/동메달들을 땄고, 계주에서는 1번 주자로서 역할을 해주었다.

이 시즌에도 어김없이 중국선수들의 집중견제를 받았는데, 특히 3차 토리노 월드컵 1,500m 준결승에서 리지안루의 위험한 반칙으로 넘어질 뻔 했지만 다행히 균형을 잡고 결승 진출을 했다. 그런데 결승전에서 리젠러우가 스타트부터 박승희를 고의적으로 밀며 경기를 시작하더니 경기 도중 무리한 인코스 시도를 하면서 박승희를 잡고 같이 넘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겨우 들어와 은메달을 받았으며 리지안루는 5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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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더티플레이로 화가 나자 경기 후 리지안루에게 항의를 했는데 왕멍이 "왓(what)?, 왓?" 거리면서 여기에 끼어들었다. 처음에 그녀는 이를 무시하고 리젠러우에게 할 말만 하고 돌아섰는데 미친년이 계속 "왓?, 왓?" 거리며 적반하장으로 따지는 바람에 싸움 직전까지 갈 뻔 했으나 김아랑과 중국 코칭스텝이 말리면서 일단락났다. 소위 왓멍사건이다.


2.8.3. 2014 소치 동계올림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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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기인 500m에서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의 원혜경 이후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2번째로 20년 만에 올림픽 결승(Final A)에 진출했다. 박승희는 준결승전에서 좋은 랩타임을 내 결승전에서 1라인에 배정된데다 준결승 반대편 조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인 중국의 판커신이 넘어지는 불운을 겪어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한 행운까지 겹치면서 우승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였다.

실제로 결승전 첫 바퀴에 박승희가 선두로 치고 나갔을 때만 해도 500m 사상 첫 금메달이 손에 잡히는 듯 했지만, 코너링 상황에서 무리하게 인코스 추월을 시도하던 엘리스 크리스티이탈리아의 아리아나 폰타나와 충돌했고, 이 두 선수가 넘어질 때 박승희도 부딪치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미끄러져 펜스에 부딪쳤다.

당시 세 선수가 가까이 붙어 있었다. 폰타나가 인코스를 타면서 박승희를 추월할 기회를 엿보던 참에, 엘리스 크리스티가 마침 붙어 있는 두 선수를 한꺼번에 추월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선두 그룹과 멀찍이 떨어져 4위로 달리던 중국리젠러우어부지리로 1위로 들어오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판커신 대신 결승에 올라오게 된 선수가 바로 리지안루. 2년 동안 세계 대회에서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이 선수는 1000m, 1,500m가 주종목인 장거리 전문 선수였고 이 종목 메달이 본인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메달이었다. 리젠러우의 금메달에 해외 언론은 대이변의 주인공으로 그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지만 국내에서는 반응이 영 좋지 못했다.[10]

박승희는 충돌 직후 곧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지만 너무 서둘렀는지 다시 넘어졌고, 결국 4위로 들어왔지만 비디오 판독으로 충돌의 원인이었던 크리스티가 실격되면서 동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비록 금메달까지 노릴 수 있는 상황에서 불운하게 낙마했지만, 한국 여자 선수들에게 넘지 못할 벽이었던 단거리 종목에서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최초로 올림픽 500m 결승전에 진출해서 자력으로 획득한 첫 메달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동메달은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의 동메달 수상자인 전이경은 파이널 B에서 1등을 한 뒤 결승전에서 2명이 실격당해서 3위로 받아서 박승희의 메달은 큰 가치가 있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박승희는 "우승하지 못해 아쉽지만 동메달 역시 매우 귀중하다. 넘어지는 순간, 앞으로의 일만 생각했다"는 인터뷰를 남겼지만, 넘어지는 과정에서 오른쪽 무릎 안쪽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1500m 출전권을 조해리에게 양보해야만 했다. 2010 & 2013 세계선수권에서 1,500m 금메달을 딸 정도로 이 종목에서 메달 획득이 유력했기에 매우 아쉬운 결과였다.

다행히 치료에 전념하여 1,000m와 3,000m 계주에는 출전할 수 있었다. 올림픽 이후 인터뷰에서, 이 당시 입은 부상이 계단을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고 출전을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했으나 코치진과 동료들의 격려로 붕대를 감고 출전했다고 한다.[11] 1,000m 예선에서 압도적인 1위로 무난히 준준결승에 진출했다.

이후 열린 3,000m 계주 결승전에서도 1번 주자로 스타트에서 자리를 선점한 다음 레이스 도중 여러번 추월을 해주었고, 그 결과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이자 대한민국에 대회 2번째 금메달을 선사했다. 이 메달로 그녀는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들 중 올림픽 전 종목에서 메달을 따낸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반칙에도 불구하고 심석희가 맹활약을 펼치면서 팀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중국 팀은 실격당했으니 4년 전 분패를 완벽하게 설욕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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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소치 동계올림픽 1000m 결승선 통과 직후
2월 21일 여자 쇼트트랙 마지막 경기날 1,000m 준준결승에서 엘리스 크리스티와 같은 조가 되었고 폭주하는 크리스티를 무리하지 않고 뒤에서 따라간 결과 조 2위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제시카 스미스, 말레리 발테, 요리엔 터모스와 한 조가 되었고 여유있게 1위로 들어오면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멤버는 박승희와 심석희, 판커신, 제시카 스미스였는데 사실상 박승희와 심석희의 2파전이었다. 경기 초반 심석희와 번갈아가며 선두 다툼을 했고, 중반에 그녀는 인코스로 1위를 차지한 뒤 무난하게 들어오면서 마침내 본인의 올림픽 개인전 첫 금메달을 받았다.

1,000m 결승전 이후 후배 심석희가 선배 박승희에게 양보한 것이 아니냐는 근거없는 루머가 돌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해 경쟁했으며 양보따위는 전혀 없었다. 심석희는 경기 중반부 이후 앞에 나가 끌면서 뛰어난 체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차이를 벌리며 경기하는 스타일이고, 박승희는 뒤에서 기회를 살피다가 찬스가 생기면 놓치지 않고 추월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결승에서 박승희는 변칙적으로 자신이 중반부터 선두에 섰고 철저히 인/아웃코스를 막으면서 속도를 높였다.

심석희는 중반부에 자신이 앞으로 나설 타이밍을 뺏겼고, 경기내내 추월할 기회를 노렸으나 박승희의 노련한 견제에 체력소모만 하고 추월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심석희가 즐겨하는 아웃코스 추월은 많은 체력이 소모돼서 전체적인 레이스의 속도가 빨라지면 시도하기가 힘들어지는데, 박승희가 평소보다 페이스를 올려 자신의 장기를 펼칠 수 없었다. 마지막 바퀴까지 둘은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고 판커신은 세번째 자리에서 체력을 아끼며 기회를 노리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심석희를 추월한 것이다.

즉, 심석희의 경기 스타일을 잘 파악하고 결승전에 임한 박승희의 노련한 경기 운영이 돋보였던 경기였다. 그리고 부동의 세계랭킹 1위가 질 리가 없다는 말도 나왔는데 이것은 4년에 1번 쇼트트랙을 보는 사람인 것을 인증하는 말로, 7년간 박승희가 쌓아온 커리어나 실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터무니 없는 소리다. 두 선수들 모두 이런 말들에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고 소문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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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판커신은 골인 직전에 대놓고 앞의 박승희의 허벅지를 잡아채려는 개매너 행동을 보여 빈축을 샀다. 박승희는 경기후 인터뷰에서 "접촉이 느껴졌으나 당시 레이스에는 큰 이상을 느끼지 못했고, 영상을 보니 '저렇게까지 해야하나'는 생각이 들었다. (판커신이) 실격이 아닌 것은 이해가지 않는다. 정말 실격이 되어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를 본 개념 없는 중국 네티즌들은 박승희 인스타그램에 온갖 욕과 인신공격을 하는 악플을 달았고 그녀는 잠시 계정을 닫았다가 올림픽 이후 계정을 활성화시켰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내면서 빅토르 안 다음 가는 활약을 보였고, 2번의 올림픽에서 5개의 메달을 따서 이호석, 전이경과 공동으로 한국인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리스트가 되었다.[12] 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종목에서 획득한 메달 개수 순위에서는 아리안나 폰타나, 왕멍의 다음으로 전이경, 양양(A), 양양(S)와 함께 공동 3위의 기록이다.


2.8.4. 2014 세계선수권[편집]


귀국하자마자 동계체전에서 500m에만 출전하여 대회 신기록을 기록하며 우승, 국내 500m 최강자임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러나 3월 세계선수권을 모두 마치고 난 뒤 열릴 예정인 차기 시즌의 국가대표 선발전에 불참할 것이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6년 간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쌓인 피로와 누적된 부상의 회복, 그리고 소속 팀 화성시청 빙상부의 파행 운영 문제 등 복합적인 이유가 겹쳐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박승희도 올림픽 500m 결승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난 뒤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이라는 종목에 대한 회의감이 상당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에 대해서도 아직 확실히 결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항간에는 이번 시즌이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이라는 이야기까지도 있었으나, 다행히도 차기 시즌만 휴식을 취하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도전한다고 밝혔다. 그녀의 스케이팅을 아직 더 보고 싶어하는 팬들로서는 한숨을 놓을 수 있을 듯하다.

남동생 박세영과 함께 참가한 세계선수권 첫날 1,500m에서 동메달을 차지했다.[13] 준결승전에서 아리아나 폰타나와의 충돌로 넘어지는 위기가 있었으나 다행히 폰타나의 파울이 인정되어 어드밴스로 결승전에 진출했고, 결승전 골인 직전에 절묘한 인코스 공략으로 발레리 말테를 제치며 3위로 골인했다. 동메달 획득도 기쁜 일이지만,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동계체전, 세계선수권대회에 모두 참가하는 무리한 일정과 아직 무릎 부상 회복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 한 번 크게 넘어지며 우려를 자아냈으나 결승전과 계주 경기를 무사히 소화하며 몸 상태에 큰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더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그리고 다음 날 펼쳐진 500m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 금메달은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선수가 올림픽 혹은 세계선수권 500m에서 거머쥔 사상 최초의 금메달로서, 실로 엄청난 의미가 있다. 특히 준결승전에서는 가장 불리한 4레인을 배정받고도 마지막에 아리아나 폰타나를 제치며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전에서도 스타트, 인코스 추월 모두 훌륭한 모습을 보이며 흠 잡을데 없는 완벽한 경기력으로 뜻 깊은 금메달을 따냈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 박승희는 감격에 북받친 눈물을 흘렸는데, 올림픽에서 아쉽게 놓쳤던 금메달에 대한 아쉬움을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로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한 나름의 감격과 이 종목에서 유독 힘을 못 쓰던 대한민국 여자 선수로서 첫 번째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는 기쁨 때문이었을 듯하다.

마지막 날 1,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000m 준결승전에서 캐나다의 발레리 말테의 아웃코스 추월을 간파하고 크게 스케이팅을 하면서 아웃코스를 완벽히 틀어막는 센스 있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 플레이로 바로 뒷 순위의 김아랑도 큰 도움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김아랑은 마지막에 말테에게 추월을 당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결승전에서도 심석희와 숨막히는 선두 싸움을 벌인 끝에 2위로 골인했다. 한국 선수들이 금, 은메달을 동시에 석권했다는 점에서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이 경기는 두 선수가 뚫고 막는 인코스 공방이 굉장히 치열했던 경기였다. 사실상 심석희와 박승희의 2파전이라 봐도 좋을, 수준 높은 명승부이니 두 선수의 팬이라면 이 경기는 동영상으로라도 한 번씩 보는 것을 권한다.

심석희와 동점인 상태에서 진행된 슈퍼파이널. 전체 1위를 할 필요도 없이 박승희는 심석희만, 심석희는 박승희만 이기면 종합 우승을 차지하게 되기 때문에 레이스 후반까지 앞의 다른 나라 선수들이 치르는 레이스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두 선수끼리만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뛰어난 체력을 자랑하는 심석희의 후반 역주를 박승희는 막을 수 없었고 5위로 골인하며 종합 2위에 올랐다. 마지막 경기인 3,000m 계주에서 심석희의 반칙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이 실격 판정을 받으면서 박승희는 세계선수권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다. 한국 여자 쇼트트랙 역사상 최초인 500m 금메달을 포함, 모든 개인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했고 3위와 압도적인 차이로 개인종합 2위를 하며 2013-14 시즌을 풍성하게 마무리했다.


3. 스피드 스케이팅 경력[편집]



3.1. 2014-15 시즌[편집]


7월 16일 갑작스럽게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규혁이 이끄는 스피드 스케이트 팀에서 훈련 중이며 주종목은 1000m가 될 예정이라고 보도되었으나, 소속사 측에서는 스피드 스케이팅 훈련을 하는 것은 맞지만 종목 변경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현재까지의 커리어로도 쇼트트랙 레전드 반열에 오를만 하고, 바로 전 시즌에 올림픽 2관왕과 세계선수권 준우승의 기록을 낸 선수의 종목 전환인지라 빙상계와 팬들은 여러모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다음 날(17일) 아침 보도에서 박승희의 스피드 스케이팅 전향은 사실이 아니라는 보도가 나왔다. 스피드 스케이팅 훈련은 쇼트트랙에서의 순간 스피드 증진을 위해 하는 훈련일 뿐, 이것이 스피드 스케이팅 전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박승희의 소속사 브리온컴퍼니 측의 해명. 좀 더 보도의 추이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일단 SBS 스포츠 뉴스에서 최초로 보도했던 박승희가 스피드 스케이팅 전향을 확정지었다는 소식은 아직 사실이 아니다. 9월에는 롱트랙 훈련팀과 같이 캐나다 전지훈련을 갔다. 캘거리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프리시즌 대회에 참석해 1000m와 1500m에 출전했는데 참가한 한국선수들 중 1위, 전체 10위권 이내에 드는 기록을 냈다. 세계 정상급과 기록차이가 많이 나지만 스피드 스케이팅 훈련을 시작한지 6개월도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적이다. 요린 테르모르스처럼 두 종목을 병행할지 아니면 이승훈처럼 전향할지는 10월 시즌이 시작해야 알 수 있을 듯하다.

10월 8일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을 공식 발표했다. 체력 훈련을 목적으로 6월부터 롱트랙 훈련팀과 같이 훈련하다가 8월에 종목전향을 결정해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했다고. 10월 9일 캐나다에서 귀국해 10일 태릉국제스케이트장에서 열리는 1차 공인기록회에 출전한다고 한다. 인터뷰에 의하면 어렸을 때 탔던 스피드 스케이팅을 다시 하고 싶은 마음과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10년 만에 스피드 스케이팅에 도전했다고 한다. 친언니 박승주의 조언처럼 밑바닥에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체형과 자세부터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스피드 스케이팅 전향이 확정되면서 쇼트트랙계는 상당히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심석희와 함께 여자 대표팀의 최고 실력자이자, 무엇보다도 박승희가 최근 몇년 간 500m(단거리) 종목에서 상당한 성장세를 보여줬기 때문이다.[14] 쇼트트랙에서 20대 중반이 전성기인 장거리에 비해 단거리는 20대 후반까지 전성기가 더 길게 유지되며, 박승희의 나이가 만 22세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아쉬운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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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5 시즌 스피드 스케이팅 1차 공인기록회
스피드 스케이팅 전향 이후 첫 번째 공식대회 2014 1차 공인기록회 여자 1,000m에 참가해 1분 20초 40를 기록했다. 3개월도 안 된 훈련 기간과 빙질이 안 좋기로 유명한 태릉에서 입국한 지 하루도 안 된 몸상태인 것을 감안하면 준수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2013 스피드 스케이팅 전국남녀 종별 선수권대회의 기록과 비교하면 4위에 해당하는 기록. 10월 22일 2차 공인기록회에서는 500m에 출전해 41초00을 기록했다. 인터뷰에서 1, 2차를 스스로 50점으로 평가하면서, 경험이 부족해서 얻은 점도 많지만 연결구간과 초반 100m에 대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고 밝혔다. 당장 국가대표 선발전에는 "기대보다는 '이번 부분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잘 됐으면 좋겠다. 마음을 비우고 있다. 끝나고 부족한 것만 없었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3.1.1. 국가대표 선발전[편집]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종목별 선수권 대회 겸 2014/15 국가대표 선발전에 500m와 1,000m에 출전했다. 29일 여자 500m에서 1차 40초49, 2차 40초19, 합계 80초 68로 전체 6위를 기록해 2위 안에 들어야하는 국가대표 선발에서 탈락했다. 공인기록회보다는 기록이 단축되었으나 여전히 직선구간이 미숙하고 자세가 흔들려 1,000m에서도 대표팀 선발이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1,000m에서 1분 21초 16을 기록하며, 이상화에 이은 2위로 2014-15 시즌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본인도 기뻐하면서도 얼떨떨해하며 "국제대회에서 많은 기대를 해주시겠지만 성급하게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아직 스케이트를 타야 하는 날이 더 많기에 조금씩 기량을 키워나가겠다"고 밝혔다.


3.1.2. 월드컵 시리즈[편집]


2014-2015 World Cup & World Championships
대회
도시
500m(1)
500m(2)
1000m
월드컵
오비히로
39.33(0)
39.05
1:17.73(3)
서울
39.13
39.35
1:18.57
베를린
39.02
38.98
1:16.93
헤렌벤
38.75
39.02
1:17.24
39.81
40.52
1:18.65
종목별
39.284
39.386
1:17.23
  • 1차 월드컵: 디비전 B 2조 인코스에서 500m 1차 경기를 치러 39.33(0)으로 개인최고기록(PR)을 갱신하며 디비전B 2위에 올랐고, 향후 디비전A 승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날 원래는 1,000m 디비전 B이지만 지난 시즌 김현영의 디비전 A 엔트리가 있어서인지 디비전 A 1조에서 경기했다. 1:17.73(3)로 PR 갱신, 전체 13위로 2차 월드컵 디비전 A에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날 500m 2차 디비전 B 마지막 조에서 39.05 PR을 다시 경신하며 디비전 B 1위를 하였다.

  • 2차 월드컵: 11월 21일 500m 1차 디비전 A에 출전해 21일 인코스 39.13(11위)을 기록했는데, 이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기록에서 1초를 갱신한 것이다. 22일 500m 2차에서 아웃코스에서 39.35(19위)를 기록했다. 1, 2차 모두 초반 100m 10초대에 진입하면서 스타트 부분에서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 날 1,000m에서 1:18.57을 기록하며 최초로 디비전 A 10위 안에 들었다. 10월 30일 국가대표 선발전 기록을 3초 갱신하였다.

  • 3차 베를린 월드컵: 12월 5일 500m 디비전 A 1차 3조 인레인에서 39.02를 기록, 100m 11초대와 18위를 기록했으나 개인최고기록을 갱신했다. 다음 날 1,000m에서 이상화와 같이 6조에 배정되어 1:16.93를 기록, 무려 1달 만에 1초를 단축해 16초대에 진입했고 9위에 올랐다. 500m 2차 3조 아웃레인에서 38.98로 PR을 0.04 소폭 갱신하며 38초대에 진입했으며 18위를 기록했다.

  • 4차 헤렌벤 월드컵: 12월 12일 500m 1차 디비전 A 2조 인코스에서 38.75로 16위에 올랐다. 3차 월드컵에서 갱신한 PR을 다시 0.23초 줄였다. 1000m에서 1:17.24 전체 14위, 500m 2차는 39.02로 19위를 기록하며 성장세에서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 빡빡한 일정과 비시즌 체력 훈련을 늦게 시작한 탓에 체력 저하가 눈에 띄였다.

2014년 12월 23-24일에 열린 국내선수권에 허리 부상으로 기권했다. 2010년부터 고질적으로 괴롭혀 온 부상이 도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스프린트 선수권은 스프린트 세계선수권 선발전을 겸하므로 3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리는 스프린트 세계선수권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2015년 1월 전국남녀 종별종합대회 여자 실업부에 참가해 500m 40.10, 1,000m 1:19.83로 1위를 차지했고 1,500m에도 처음 출전해 2:14.02을 기록했다.

* 6차 헤렌벤 월드컵: 2015년 2월 7일 디비전A에서 500m 1차 39.81로 최하위 20위, 1,000m에서 1:18.65로 18위를 기록했다. 8일에는 500m 2차 40.52로 다시 20위를 기록해 시즌 초반에 비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3.1.3. 세계선수권[편집]


2월 13일 1,000m에서 1:17.23로 14위를 기록, 14일 500m에서는 1차 39.284로 22위, 2차 39.386로 21위를 기록했다. 6차 월드컵의 부진한 모습을 벗어나 1-5차 월드컵과 비슷한 성적과 순위를 보여주었다. 종목을 전향한 후 첫 세계선수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만족할 만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3.1.4. 동계체전[편집]


제96회 동계체전 실업부에 참가해서 25일 500m 40초60으로 2위, 26일 1,000m에서 1분20초14로 1위를 기록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자세를 교정하는 훈련에 집중한다고 밝히며, 직선구간에서 골반을 활용하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3월 14일 고빙상인추모대회 일반부에 참가하여 500m 40.19, 1000m 1:19.99를 기록. 빙속 국가대표 팀이 월드컵 파이널 전원 불참을 함으로써 스피드 스케이팅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3.2. 2015-16 시즌[편집]


2015-16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 500m와 1000m에 출전하였다. 500m 1차 40.41, 2차 40.18, 종합 80.59로 6위를 하였다. 작년에 비해 크게 향상되지 않는 기록이며, 국가대표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29일 1,000m 3위이내에 입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종목 1,000m에서 특기인 코너 워크를 살려 1:20.03으로 이상화에 이은 2위를 기록, 2년 연속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이 시즌은 전향 첫 시즌에 비하여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에 비하여 기록 향상이 정체되었고, 고질적인 허리부상이 또다시 재발하여 시즌 초반 월드컵에 결장하였다. 코너워크 장점을 살리기 위하여 1,500m에 출전하기 시작했고, 2016년 창단된 스포츠토토 빙상단에 입단하여 안정적인 지원을 받게된 것이 긍정적인 면이라고 볼 수 있다. 시즌을 마무리하며 전향 후 슬럼프는 예상했으며 이겨낼 것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3.3. 2016-17 시즌[편집]


3년 연속 국가대표에 선발되었다. 2017년 2월 10일 열린 2017 종목별 세계선수권 여자 500m에서 개인 최고기록인 38초 52를 기록하면서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줬다. 생애 두 번째 아시안 게임인 2017 삿포로 동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1,000m에서 6위에 올랐다.


3.4. 2017-18 시즌[편집]



3.4.1. 월드컵 시리즈[편집]


1,000m 출전권을 획득하며 한국 빙상 선수 최초로 쇼트트랙-스피드 스케이팅 두 종목 올림픽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올림픽 종목은 아니지만 스피드 스케이팅 월드컵 팀 스프린트 종목에서 한국 최초로 금메달을 따내며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팅 두 종목에서 월드컵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4.2. 2018 평창 동계올림픽[편집]


파일:shp2018.png
1,000m 직후 올린 인스타그램
1,000m 9조에 출전해 1분 16초 11를 기록하며 경기 전 밝힌 목표인 개인 최고기록 경신을 이루었다. 이후 인터뷰와 본인 SNS에서 은퇴를 밝혔다. 2018년 5월 10일 은퇴식을 가졌으며 패션 디자이너가 목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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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22:10:43에 나무위키 박승희/선수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마키무라 사토루가 1978년부터 슈에이샤의 잡지 마가렛의 별책 부록을 통해 연재했던 순정만화인 '사랑의 아랑훼즈'이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초반에 여학생들 사이에서 해적판이 인기를 끌었고 이후에 정식 발간이 되기도 했다.[2]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만화에 대한 인식이 개망인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비범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식들한테 직접 시키는 경우는 드물다.[3] 선발전에서는 3위를 했으나 진선유가 2007 세계선수권 우승자로 자동선발되었기에 국가대표 전체에서는 4위였다.[4] 이은별은 은메달을 받았으며 조해리는 5위를 차지했다.[5] 추후 이 세계신기록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파이널 B에서 동메달을 땄던 네덜란드가 갈아치웠다.[6] 동계 아시안 게임 준비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유럽에서 열린 1, 2차 월드컵에 불참했다.[7] 아시안 게임 개인전 종목별 출전 멤버 2명을 선발하는 자체 타임 레이스 500m에서 넘어져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남자부 500m 최강자인 성시백도 타임 레이스에서 넘어져서 출전을 못했으니 당시 선발 방식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는지 보여준 사례이다.[8] 2013년 홍익디자인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으며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소재. 홍익대학교 재단 산하의 고등학교다.[9] 쇼트트랙 특성상 제대로 훈련을 하려면 동호회나 학교 운동부 단위로 빙상장을 대관 예약하는 수밖에 없는데(일반인 이용 시간엔 선수는 커녕 아마추어 수준의 활주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사람이 많다. 속도를 내지 말라고 한다.) 대관도 이른 새벽이나 저녁 하루 1~2시간이 고작이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무조건 쓸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거기다 이때 박승희는 무적 상태였으므로 답이 없는 상황이라고 느꼈을 것이다.[10] 그도 그럴 것이 이 선수도 다른 중국 선수와 마찬가지로 더티 플레이가 심했기 때문이며 이 선수는 정작 주종목인 1,000m에서는 실격당했고 1,500m에서는 완주 자체를 못 했다.[11] 500m 결승전 이후 동계체전까지 오른쪽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이 무릎 부상 때문에 2014-15 시즌은 국가대표로 뛰지 않고 부상 회복에만 전념한다고 한다.[12] 하계올림픽까지 통합하면 김수녕의 6개에 이은 공동 2위의 기록이다.[13] 금메달은 심석희, 은메달은 김아랑이 획득하면서 한국 선수들이 1,500m에 걸린 3개의 메달을 독식했다.[14] 2014 소치 동계올림픽 500m 결승에서도 엘리스 크리스티의 무리한 인코스 돌파 시도가 아니었다면 우승했을 정도로 스타트를 좋게 끊었었고, 2014 세계선수권 500m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단거리 종목 강자라는 걸 제대로 입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