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운(1961)

덤프버전 :

파일:1144925_278023_3946.jpg

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운동권 시절
2.2. 정치활동
2.3. 전향 이후
2.4. 근황
3. 선거이력
4.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다. 1961년 12월 22일생(62세).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운동권 시절[편집]


1961년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청주남일초등학교, 운호중학교, 청주고등학교 졸업 후인 1981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1]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 제헌의회그룹 간부가 되어 여러 시위에 참여했고 1985년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되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1987년 1월 8일 후배 박종철의 집에 들러 조직 재건을 위한 연락책 임무를 전달하고 현금 1만 원을 빌렸다. 이 사실을 파악한 경찰은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안다고 판단했고 1월 14일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후 고문하여 숨지게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비공개 지하조직인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시 재야 민주진영을 이끌고 있던 이부영, 김충환 라인을 따라서 이들의 지역구 기반인 서울 강동구에서 활동했다. 민선 1기 구청장으로 당선된 김충환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기타 강동구청에서 몇몇 업무를 본 것으로 보인다.


2.2. 정치활동[편집]


2000년에 정식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사실 이 시기 한나라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나라당의 전신 신한국당은 김영삼이 주도해서 만든 정당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독재 대 반독재,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 대립의 구도보다는 정치지형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 3당 합당김영삼통일민주당이 한 축으로 참여해서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정국 안정과 범보수연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통합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선후보로 당선하였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하에서 하나회 숙청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 등 문민개혁이 이루어졌으며, 1995년 12월 민주자유당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종필은 당에서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한나라당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과 DJ세력이 모두 빠져나간 反/非 DJ 성향의 민주당이 합당한 정당이었다. 이회창은 권위주의 정권과는 차별화된 정치인이었고, 권위주의는 물론 3김정치의 청산을 기치로 내걸었다. 아울러 이부영, 김충환은 모두 反DJ 성향으로서 한나라당에 합류한 경우였고, 박종운도 이들과 함께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후 인터뷰들을 보면 단순히 이들과 함께 움직인 것 외에도 1990년대 초 소련 해체와 동구권 붕괴에 영향을 받아 사상적 전환이 있었던 듯 보인다.

이러한 정치적 행보와는 관계 없이 박종철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는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기 전에는 박종철 군의 부모님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했으며, 명절마다 인사를 드리러 찾아가고 결혼인사는 물론 결혼식에서 폐백을 드리고 가족사진을 찍는 정도였다.#

이후 정치활동을 계속하면서 박종철의 가족과는 과거처럼 가까이 지내긴 어려워졌지만 매년 박종철 추모회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2018년 1월 서울시 관악구의 박종철 거리 선포식 때는 초청도 받지 않았음에도 일부러 찾아와서 말없이 지켜보다 돌아갔다고 한다.# 박종철 추모 관련 행사에는 거의 대부분 참석한다고 보면 된다. 다만, 본인의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전면에 나서거나 다른 참석자들과의 교류는 못하고 말 그대로 자리만 지키다 가는 듯.

그러나 썰전 253화에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 새로운 정치비전으로 당을 택하고 자기생각을 펼치는 것 자체는 변절이다 뭐다 할 게 아니고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박종운씨 문제는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것이 박종운이 당시 입당하였을 때 고인의 유가족이 받은 상처가 매우 컸다. 종철이를 죽인 그 사람들에게 갔다는 것 때문에. 박종철의 동지인 박종운과 이한열의 동지인 우상호는 선택의 자유가 없다. 동지의 목숨을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동지의 가족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없다." #


2.3. 전향 이후[편집]


2000년대에는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부천시 오정구에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새천년민주당 최선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참여정부가 출범한 후, 한나라당 내의 反/非DJ 계열 개혁적, 민주계 인사들이 자신들과 과거 뜻을 함께 한 노무현과 정치적 명운을 같이 하기로 하면서 이부영은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김충환과 같은 경우에는 한나라당에 잔류했다. 그리고 박종운도 한나라당에 잔류했다. 그의 잔류가 이부영보다 김충환에 더 가까웠던 개인적 이유였는지, 아니면 사상적 전환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부천시의 한나라당 조직을 김문수, 차명진, 임해규 등 과거 민중당 계열에서 활동한 운동권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 모두가 한나라당 잔류를 택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들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받았거나 그 흐름과 함께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서울대 선배이자 부천시의 터줏대감 원혜영에게 패하고 낙선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범친이계로 분류되었으며 본래 출마했던 같은 선거구에 재도전했으나 역시 원혜영에게 밀려 낙선하였다.[2]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받지 못했다. 이렇게 박종운은 16대~18대 총선에 연속으로 3연패를 하면서 '오정의 낙선왕' 이라는 야유와 함께 정계를 떠났다. 그 이후로는 미디어펜의 논설위원으로 재직하였다.


2.4. 근황[편집]


최근에는 자유시민TV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지만, 영상을 활발히 업로드하지는 않고 있다. 현재 택시기사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선거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부천 오정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652 (32.81%)
낙선 (2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216 (28.05%)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4,831 (42.32%)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당 1990년 글자.svg

1990 - 1991
정계 입문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991 - 1995
합당[3]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995 - 1997
합당[4]

[[무소속|
무소속
]]

1997 - 2000
탈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0 - 2012
입당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 2020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20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자유통일당|
파일:자유통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창당

[[자유공화당|
파일:자유공화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20
합당[5]

[[무소속|
무소속
]]

2020 -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9 21:07:55에 나무위키 박종운(1961)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MBC의 오보로 사회복지학과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사회학과 81학번이 맞다.[2] 참고로 당시 같은당 소속으로 부천 지역에 출마한 임해규(원미구 갑), 이사철(원미구 을), 차명진(소사구)는 당선되었는데, 본인만 낙선하였다. 물론 원혜영은 아예 부천이 고향이었고, 지금까지 본인이 태어난 동네에 쭉 살고 있기 때문에 부천토박이인데다 맹주이기 때문에 지역기반도 상당히 탄탄했다.[3]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4]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5] 우리공화당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