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롱도르/수상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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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발롱도르의 수상자 선정에 대한 논란을 서술한 문서.


2. 사례[편집]


최고의 선수를 뽑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고, 축구 외적인 부분이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1] 매년 논란이 일어나긴 하나, 그 중에서도 특히 논란의 규모가 크고 수상자와 후보의 차이도 적었던 사례들을 뽑자면 다음과 같다.


2.1. 1977년 알란 시몬센[편집]


1976-77 시즌 케빈 키건리버풀잉글리시 풋볼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끌어 유력한 발롱도르 수상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분데스리가함부르크로 이적한 1977-78 시즌에 신임 감독 루디 구텐도르프가 팀을 말아먹는 가운데 고군분투하자 분데스리가 최고의 공격수였던 알란 시몬센의 지지자가 늘어나게 되었고, 1위 표는 시몬센보다 더 많이 받았지만 2, 3위 표에서 밀리면서 3점 차이로 1977년 발롱도르를 내줬다.

하지만 키건이 이끈 리버풀이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시몬센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은데다, 키건의 하반기 활약상이 그렇게까지 부진한 것은 아니었기에 논란이 되었다. 1977-78 시즌 겨울의 키커 랑리스테 외국인 선수 부문에서 시몬센이 WK-1을 받긴 했지만, 키건은 바로 다음인 IK-2를 받으면서 팀의 부진과는 별개로 개인 기량은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키건에게는 억울했을 결과였다. 당시 양측의 여론전도 매우 치열했으며 IOC 올해의 유럽 축구 선수상은 시몬센이, 옹즈도르는 키건이 나눠서 가져가기도 했다.


2.2. 1978년 케빈 키건[편집]


1978년 수상자인 케빈 키건잉글랜드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탈락해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고, 1977-78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본인의 활약상은 뛰어났지만 소속팀 함부르크가 10위에 그쳐 논란이 됐다.[2]

UEFA 올해의 선수상의 전신인 IOC 올해의 유럽 축구 선수상의 1977-78 시즌 수상자는 리버풀유러피언컵 2연패를 이끈 케니 달글리시였다. 다만 달글리시는 월드컵 1차 조별 리그에서 탈락해 기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발롱도르 투표에서 8위에 그쳤다. 문제는 국가대표 활약을 이유로 달글리시를 거르고 뽑은 선수가 월드컵에 참가조차 못한 키건이었다는 것이다.

옹즈도르에서 키건은 포디움에 들지 못한 반면, 다른 발롱도르 포디움 선수들인 한스 크란클로프 렌센브링크는 여기서도 2위, 3위에 오르며 월드컵 MVP 마리오 켐페스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크란클은 월드컵에서 4포트에 배정된 약체 오스트리아를 8강에 진출시켰고, 그 과정에서 본인의 멀티골로 서독을 꺾기도 했다. 비록 빅리그가 아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뛰긴 했으나 리그 36경기 41골을 기록해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다.

렌센브링크는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으로 이끌고 어시스트 1위, 브론즈 부트를 받는 등 맹활약한 것에 더해 소속 팀 안데를레흐트에서도 UEFA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 우승의 주역이었다.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골고루 최고 수준의 활약을 보여줬음에도 우승자가 되지 못했다. 월드컵도 개최국 아르헨티나의 편파판정을 당하며 우승을 내줬는데 발롱도르까지 놓치는 불운한 해를 보냈다. 후세에 이 결과는 키건이 작년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상 심리가 들어갔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2.3. 1986년 이고리 벨라노프[편집]


1986년 최고의 선수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디에고 마라도나가 꼽히지만 당시 유럽 선수만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3] 발롱도르는 이고리 벨라노프의 몫이었다. 벨라노프는 UEFA 컵위너스컵에서 5골로 공동 최다 득점을 기록하며 디나모 키이우를 우승시켰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16강 벨기에해트트릭 포함 4골을 기록해 브론즈 부트를 수상했다. 이에 따라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서 마라도나에 이은 2위로 선정돼 당시 팬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외신들이 역대 가장 논란이 되는 발롱도르 수상자들을 선정할 때 자주 등장하며 불편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컵위너스컵에선 단독 득점왕이 아닌 공동 득점왕이었고 소비에트 톱 리그에서도 특출난 활약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IOC 올해의 유럽 축구 선수상과 올해의 소련 축구 선수상을 팀 동료인 올렉산드르 자바로프에게 내줬다는 사실도 벨라노프가 키이우의 독보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경쟁자였던 게리 리네커가 그에 밀리는 활약을 보여줬다고 보기도 어렵다. 리네커는 잉글랜드의 에이스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6골을 득점해 월드컵 득점왕에 오른데다 1985-86 시즌 잉글리시 풋볼 리그에서도 30골을 폭격해 득점왕이자 MVP로 선정됐다.[4] 리네커가 헤이젤 참사로 인해 유럽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했음에도 월드컵과 리그에서 벨라노프보다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줬기에 투표 결과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졌다.


2.4. 1996년 마티아스 자머[편집]


1996년 발롱도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분데스리가 우승과 독일UEFA 유로 1996 우승을 이끌며 초대 유로 MVP를 수상한 마티아스 자머가 가져갔는데, 투표에서 호나우두와 단 1점 차의 점수가 나는 초접전을 벌였다.[5]

하지만 기량적으로 1996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은 건 호나우두였다. 호나우두는 1995-96 시즌 후반기를 에레디비시에서 보냈지만,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1996-97 시즌 전반기에 월드 사커, 프랑스 풋볼, 돈 발롱 등의 언론사들이 바로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역대급 선수들을 소환해 비교하기 시작할 정도로 경이적인 퍼포먼스와 득점 행진을 보여줬다. 그 결과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RSSSF 올해의 선수는 모두 호나우두가 선정됐다. 발롱도르 1위 표도 호나우두가 자머보다 3개나 더 받았다.

결국 이 해 발롱도르는 팀 성적의 자머와 개인 퍼포먼스의 호나우두의 싸움이었는데, 개인 기량에서는 호나우두가 최고로 인정받은데다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접전이 벌어지면서 아직까지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는 상태다. 지금 생각해보면 빅리그에서 반년가량 활약했다고 유로 MVP보다 위로 볼 수 있다는 게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호나우두가 보여줬던 기량이 당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느껴졌는지 알 수 있는 결과다.


2.5. 2001년 마이클 오언[편집]


2001년은 절대 강자가 없었던 혼돈의 해였다. 당시 수상자는 리버풀에서 FA컵, 풋볼 리그 컵, UEFA 유로파 리그를 우승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예선전인 독일 원정에서 대활약하며 해트트릭을 기록한 마이클 오언이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을 받는 리그와 UEFA 챔피언스 리그는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이 약점이었고, FIFA 올해의 선수상 투표에선 8위에 그쳤다.

라울 곤살레스루이스 피구레알 마드리드라리가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4강을 이끌며 두 대회에서 각자 득점왕과 도움왕에 등극했다. 두 선수는 돈 발롱이 선정한 라리가 자국인 MVP상과 외국인 MVP상을 받기도 했다. 라울은 발롱도르 투표 2위와 FIFA 투표 3위에 올랐고, 피구는 발롱도르 투표에선 6위에 그쳤지만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올리버 칸도 자격이 충분했다. 바이에른 뮌헨의 분데스리가, 챔피언스 리그 더블을 이끌었는데 특히, 챔피언스 리그에서 골키퍼도 에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8강에서 데이비드 베컴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4강에서 라울과 피구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차례로 꺾었고, 결승전은 승부차기 선방쇼까지 펼치며 Man of the Match에 선정됐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올해의 독일 축구 선수상을 받았다. 사실상 클럽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라 봐도 무방했는데, 월드컵 예선에서 오언에게 완패한 임팩트 때문인지[6] 발롱도르 투표 3위, FIFA 투표 7위에 그쳤다.

베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프리미어 리그 3연패를 이끌고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에 오르며 오언에 밀리지 않는 활악을 보여줬다. 베컴은 발롱도르 투표 4위, FIFA 투표 2위에 올랐으며, FIFA 투표에서 우승자인 피구보다 더 많은 1위 표를 얻었다.

그러나 위 선수들에 대한 설명은 이들도 수상 자격이 충분했다는 의미지 오언보다 나았다는 것은 아니다. UEFA 올해의 선수상은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가져갔고, 옹즈도르는 자국 선수인 지네딘 지단을, 월드 사커와 RSSSF의 회원들은 오언을 선택했다. 그리고 언급한 후보들 중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된 선수들은 오언과 칸 2명이다. 눈에 띄는 점은 각 상들의 투표 결과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는 득점 기록이 가장 좋은 라울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반면, 오언은 대표적인 논란의 수상자로 오명을 쓰고 있다. 어느새부턴가 '그때 그 발롱도르를 왜 오언이 받았지?'하는 의견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현재는 아예 잘못된 투표로 취급받고 있다.[7] 그러나 당시 오언에 대한 평가는 높았으며 그럴 만한 순수 퍼포먼스와 임팩트를 보여줬던 것이 사실이다. 다른 후보들과 상당한 차이로 발롱도르 1위 표들을 차지했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오언도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을 자격은 있다는 분위기였다.


2.6. 2002년 호나우두[편집]


2002년 수상자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브라질의 5번째 우승을 이끈 호나우두였다. 다만 클럽에서의 활약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투표였기에 논란이 많았다. 호나우두는 장기 부상 끝에 월드컵 직전에야 피치에 복귀했고, 리그에서 불과 10경기에만 출전했다. 출전 수 자체가 적었음에도 단순히 월드컵에서 보여준 포스로만 상을 수여했기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8]

발롱도르는 전통적으로 대회의 위상을 중시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게, 월드컵이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같은 메이저 대회들은 4년 주기로 열려서 희소성도 큰데다 국가대표 경기인 만큼 훨씬 많은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 리그나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한 선수보다 월드컵과 유로에서 활약한 선수가 사람들의 뇌리에 더 짙게 각인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FIFA 발롱도르 시기인 2010, 2014년을 제외하면 월드컵 시즌마다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선수들이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일관적인 역사가 있었고, 월드컵 활약만으로 발롱도르를 탄 사례는 1982년의 파올로 로시도 있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발롱도르의 결과에 그렇게 중요하다면 2001-02 시즌에 거의 모든 경기를 훌륭히 소화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견인하고 월드컵에서도 대활약을 펼친 브라질과 레알 마드리드의 동료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수상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는 의견도 많다. 브라질의 에이스는 호나우두가, 레알 마드리드는 지네딘 지단이 꼽혔지만, 실제로 발롱도르 1위 표는 카를루스가 호나우두보다 7개나 더 많이 가져갔다. 각 팀의 2인자였어도 고려할 만한 팀 내 비중을 차지했기에 나올 수 있는 얘기였다.


2.7. 2004년 안드리 셰브첸코[편집]


이 해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선수는 호나우지뉴였으나 수상자는 안드리 셰브첸코였기에 2001년과 함께 2000년대에 가장 논란이 컸다. 당시 호나우지뉴는 화려하면서도 예측하기 어려운 개인기를 매 경기 선보이며 스페셜을 양산했고 '외계인'이란 별명과 함께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그는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RSSSF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며 축구인, 팬을 가리지 않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기자단은 소속팀 바르셀로나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팀 성적을 본다면 이 해 가장 좋은 성적을 남긴 선수는 셰브첸코가 아닌 데쿠였다. 데쿠는 비록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호나우지뉴에게 팀 내 에이스 자리와 스포트라이트를 내줬으나, 포르투UEFA 챔피언스 리그, 프리메이라 리가 더블과 포르투갈UEFA 유로 2004 준우승을 이끌며 UEFA 올해의 클럽 선수상과 UEFA 올해의 미드필더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티에리 앙리도 셰브첸코의 아래로 보기 어려웠다. 셰브첸코는 세리에 A MVP를 팀 동료 카카에게 내줬지만 앙리는 아스날의 프리미어 리그 무패 우승을 이끌고 MVP, 득점왕, 유러피언 골든슈를 싹쓸이했다.[9] 셰브첸코가 2004-05 시즌 전반기에 경기당 1골에 육박하는 기록을 남기긴 했으나, 이 활약이 다른 후보들을 누르고 발롱도르를 수상할 수 있을 정도의 활약이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부호가 붙는다.


2.8. 2010년 리오넬 메시[편집]


당시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였던 웨슬리 스네이더인테르 밀란트레블을 이끌고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을 기록한데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대회 최다 Man of the Match 및 최다 득점으로 네덜란드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이후 32년만에 결승으로 이끌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월드컵 실버볼과 UEFA 올해의 미드필더상을 수상했고, 모든 대회에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았기에 발롱도르를 수상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리고 스네이더가 수상하지 못하더라도 월드컵에서 최다 기회 창출을 기록하며 스페인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고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사비 에르난데스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수상자는 리오넬 메시가 됐고 스네이더는 사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에 밀려 포디움에도 못 드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경기당 1골에 근접한 우수한 득점력을 포함해 뛰어난 개인 기량을 선보였다. 클럽 활약만 본다면 라리가를 우승하고 라리가,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메시도 수상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회인 월드컵에서 무득점에 그쳤고[10] 8강에서 탈락해 메시가 수상할 것이란 예측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변수는 당시 발롱도르가 FIFA 발롱도르로 개편됐다는 것이다. 스네이더는 기자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해 이전 기준이었다면 발롱도르를 수상했을 것이나 선수와 감독들이 투표를 시작하자 시즌 동안의 활약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기보단 최근의 임팩트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됐고, 하필이면 투표 시기에 스네이더는 팀과 함께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줘 외면받았다.

투표 기준 변화를 감안해도 인기상 논란이 식지 않는 것은 스네이더가 사비, 이니에스타에게 밀려 포디움에도 못 들어갔기 때문이다. 사비, 이니에스타도 스페인의 월드컵 우승, 바르셀로나의 라리가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곤 하지만, 사실 양 팀에서 독보적인 에이스로 보긴 어려웠다. 당시 스페인은 특정 선수가 잘한 것이 아닌 팀 전체가 잘해서 우승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공식적으로 월드컵 브론즈볼은 다비드 비야가 수상했다. 거기에 바르셀로나 동료인 메시가 많은 표를 가져간 상황이라면 두 선수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낮아지는 게 이치에 맞았다. 반면, 스네이더와 함께 인테르의 트레블을 이끌며 UEFA와 세리에 A의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디에고 밀리토는 포디움은 커녕 후보 23인 명단에도 들지 못해 스네이더의 표가 갈릴 요소가 되지 못했다. 간혹 스네이더를 비판하는 의견들 중 스네이더가 인테르의 1인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그렇다면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아닌 밀리토가 스네이더를 밀어냈어야 했기에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스네이더는 네덜란드에서만큼은 확실하게 에이스 역할을 했고, 월드컵과 UEFA의 시상식에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누르고 개인상을 수상했다. 결국 바르셀로나 3인방에 표가 쏠려버리니 인기 투표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2.9. 2013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편집]


상술된 논란들은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온 것이 주 원인이었는데, 2013년은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바이에른 뮌헨의 트레블을 이끈 프랑크 리베리였다. 최고의 팀 성과를 기록했고 개인 기량과 기록적인 면에서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FIFA 월드컵이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같은 메이저 국제대회가 개최된 것도 아니어서 변수도 없었고, UEFA 올해의 선수상도 리베리가 무난히 수상했다.

그런데 발롱도르 투표가 이미 마감된 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해트트릭을 하며 포르투갈을 본선에 진출시키자, FIFA 회장 제프 블라터갑자기 발롱도르 투표 기간을 연장하고, 심지어 기존 투표도 변경이 가능하게 했다. 이 사상 초유의 재투표 사태에 당연히 리베리와 그의 소속 팀 뮌헨은 대놓고 불만을 표출했고, 언론들도 FIFA의 일처리 행태를 맹비난하며 이 돌발 행동의 원인을 추측했다. 당시 블라터는 호날두를 조롱하는 듯한 언행으로 논란을 일으킨 후 호날두가 공개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발롱도르 시상식에도 불참을 선언하자 적극적인 사과 공세를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투표 기간 연장도 사과 제스처의 일환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리고 재투표 결과, 무관에 그친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가 수상자로 선정되자 또다시 인기상 논란에 휩싸이게 됐다. 심지어 리베리는 재투표로 인해 본인의 표를 대거 호날두에게 뺏긴 결과 리오넬 메시보다도 낮은 순위인 3위까지 내려갔다. FIFA는 연장 재투표 전후로 집계한 순위에 변동은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뮌헨이 연장 재투표 이전의 결과를 공개하라 요구하자 이를 무시했다. 이는 2012년에 무리뉴 감독상과 관련해 일어났던 투표 조작 논란에는 지체없이 투표 용지를 공개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기자단 투표는 예상대로 리베리가 1위로 선정됐고, 투표 기간 연장이 이뤄지기 전엔 도박 사이트들의 배당률이 하나같이 리베리가 1위, 메시가 2위, 호날두는 3위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월드컵 플레이오프 이후 리베리와 호날두의 배당률 순위가 바뀌었다. 투표 기간 연장 재투표와 호날두의 플레이오프 활약이 실제 투표 심리에 영향을 미쳤단 증거로 볼 수 있다.

일부는 호날두의 득점 기록을 보고 호날두의 개인 기량이 가장 뛰어나서 수상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 퍼포먼스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기회 창출 횟수, 드리블 횟수 등이 포함된 세부 스탯을 참고하면 리베리는 득점만 호날두에 밀릴 뿐 전체적인 기량이 호날두에 밀린다고 보기 어려웠다. 애초에 리베리는 호날두처럼 팀 슈팅기회의 대부분을 독차지하는 유형의 선수도 아니다. 이런 기준이면 과거에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줬던 수많은 공격수들도 재평가를 받을 여지가 필요하고,[11] 따라서 현재의 기준이 골게터에만 지나치게 관대한게 아닌지도 논란이 생겼다.

2013년 발롱도르는 FIFA 발롱도르의 신뢰성 논란에 기름을 부었고 결국 3년 후인 2016년부터 다시 예전처럼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가 분리되는 계기가 됐다. 투표 결과 공개 이전 발롱도르 장식장까지 사놨던 리베리는 현재까지도 호날두에게 발롱도르를 강탈당했다는 인터뷰를 할 정도다.


2.10. 2020년 미시상[편집]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발롱도르 시상이 취소됐다. 그러나 일부 리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주요 대회들이 정상적으로 마무리됐고, 코로나 자체가 문제라면 더 베스트 FIFA 풋볼 어워드처럼 화상통화로 시상식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었기에 굳이 시상식을 취소할 필요가 없었고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프랑스 풋볼이 자국 리그인 리그 1이 조기에 종료됐다는 이유로 시상식을 취소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바이에른 뮌헨트레블을 이끌고 득점왕 트레블을 달성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였다. 포포투가 102개국의 기자들에게 연락해 발롱도르와 같은 방식으로 한 해 최고의 선수를 가린 결과 레반도프스키가 2위 케빈 더 브라위너의 5배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압도적인 결과로 선정됐고, 정상적으로 진행된 UEFA 올해의 선수상, FIFA 올해의 선수상도 모두 레반도프스키가 수상했다.

이 사건은 분데스리가 선수에 대한 차별 논란으로 이어졌고 2021년 시상식까지 논란을 번지게 했다. 선수들의 2020년 활약상을 2021년 시상식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게르트 뮐러 트로피를 신설한 의도가 레반도프스키에게 발롱도르를 주지 않기 위해 대체품을 만든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등장했다. 이는 결국 레반도프스키가 뮌헨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계기로 이어졌다.

[1] 연구 시기가 2010년부터 2016년까지로 7년 중 6년이 가장 논란이 컸던 FIFA 발롱도르 시기이긴 하나, 투표자와 선수의 국적, 언어, 종교, 인종은 물론 출생지역이나 식민지 여부에 따라서도 결과가 편향된다는 연구 결과가 유명하다. 이는 사람에 따라 인기 투표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보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단 의견이 있다.[2] 팀은 부진했지만 키컨은 유일하게 여름과 겨울의 키커 랑리스테에서 모두 WK 평가를 받으며 리그 MVP급 활약을 했다.[3] 당시 비유럽인은 애초에 수상 대상자가 아니었기에 마라도나와 관련된 논란은 크지 않았다. 문제는 같은 유럽인 선수들과 비교해도 과연 활약상이 가장 뛰어났는가 하는 것이다.[4]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받았다.[5] 발롱도르 수상자와 경쟁자의 투표 점수가 1점 차가 난 사례는 이번이 역대 2번째다. 역대 최초는 1966년의 바비 찰튼인데 찰튼의 경우, BBC 올해의 스포츠 선수상은 바비 무어가 가져갔지만, 프랑스 풋볼과 레키프의 기자들이 선정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의 MVP로 뽑히는 등 월드컵 최고의 선수로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다.[6] 이전 해에 있었던 1차전 원정에선 클린 시트를 기록했지만 2차전에서 오언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5실점을 하며 패배했고 결국 9조 1위 자리를 잉글랜드에게 내줬다.[7] 특정 선수들의 팬덤끼리 논쟁을 할 때 '발롱도르를 받았다고 무조건 위면 오언이 앙리, 라울보다 위냐?'라는 의견이 단골로 나올 정도로 논란 많은 발롱도르의 대표적인 예가 돼버렸다.[8] 요한 크루이프는 2002년 발롱도르 결과에 월드컵의 비중이 과도하게 들어갔다고 비판하며 당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티에리 앙리가 수상하는 것이 옳았다고 평했다.[9] 앙리는 37경기 30골, 셰브첸코는 32경기 24골을 기록했다.[10] 다만 골든볼 10인 후보에 포함됐고 우승국 감독 비센테 델 보스케는 메시가 골든볼을 수상해야 된다고 말했을 정도로 경기력은 뛰어났다.[11] 플레이메이커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의 그늘에 가려져 1회 수상에 그친 골잡이 게르트 뮐러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사실상 발롱도르를 그냥 득점왕 상으로 취급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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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30 02:06:28에 나무위키 발롱도르/수상 논란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