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깁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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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깁슨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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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올센추리 팀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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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밥 깁슨
Bob Gibson

포지션
투수
득표수
582,031




파일: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엠블럼(1956~1966).gif 파일:STL1967.gif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1964
1967





파일:MLB 로고.svg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baseballhall.org/Gibson%20Bob%20Plaque%20260_NBL.png
밥 깁슨
헌액 연도
1981년
헌액 방식
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
84% (1회)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8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마이크 맥코믹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밥 깁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톰 시버
(뉴욕 메츠)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70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사이 영 상
톰 시버
(뉴욕 메츠)

밥 깁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퍼거슨 젠킨스
(시카고 컵스)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65 ~ 1973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투수 골드 글러브
바비 샨츠
(시카고 컵스)

밥 깁슨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앤디 메서스미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파일:Bob Gibson.png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No. 45
로버트 "밥" 깁슨
Robert "Bob" Gibson

출생
1935년 11월 9일
사망
2020년 10월 2일 (향년 84세)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출신지
네브라스카 주 오마하
신체
188cm / 88kg
포지션
선발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57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STL)
소속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59~1975)
기록
노히트 노런 (1971.08.14)

1. 개요
2. 생애
2.1. 1968년: 라이브볼 역사에 남다
3. 사망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5. 기타
6. 연도별 성적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메이저리그의 前 투수로, 라이브볼 시대 단일시즌 평균자책점 1위라는 기록의 소유자이다.[1]

통산 성적은 17시즌 528경기(482선발) 3,884.1이닝 255완투/56완봉 251승 174패 2.91ERA/127ERA+ 3,117K/1,336BB(2.74K/BB) 2.89FIP 1.188WHIP 81.7bWAR.[2] 1968년(11.2)-1969년(10.4)에 10을 넘는 bWAR을 기록했다.

2. 생애[편집]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의 흑인 가정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데다 3세때 폐렴, 천식 등을 앓으며 온갖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루병에도 시달리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뛰어난 운동능력을 보이며 고교시절 농구와 야구를 병행했지만 고교 시절에도 심장병에 걸리는 등 고생이 많았다. 그럼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농구 장학금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3], 깁슨은 야구를 더 좋아했고 트리플A팀이 고향 오마하에 있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4천불의 계약금에 합의하고 입단했다. 만능 스포츠맨이던 깁슨은 카디널스와 계약함과 동시에 기예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와도 계약했고 사실 마이너리그 생활을 시작하기 전 1년간 글로브트로터스에서 직업 운동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미국 곳곳에서 공연을 여는 글로브트로터스에서의 잦은 원정 생활 탓에 농구선수와의 병행은 빠르게 그만두었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1959년 13경기, 60년 27경기 등판에 그쳤던[4] 깁슨은 트리플 A에서 자신을 조련한 조니 킨 감독이 빅리그 감독으로 내정된 61년부터 에이스 본색을 드러냈다. 비록 볼넷이 많긴 했지만(커리어 유일 볼넷왕) 첫 풀타임 선발 시즌부터 10완투로 13승을 거둔 것.(221이닝 3.24ERA/136ERA+ 166K/119BB)

그 이후로 영점이 잡히자 매년 200개 내외의 삼진을 기록하며 73년까지 매년 두자릿수 승리와 10~20완투(74년은 11승을 거뒀지만 9완투를 했다.)를 기록[5]하였고 두차례 사이 영 상과 MVP 1회를 차지했다. 월드시리즈에서도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이면서 카디널스의 월드시리즈 2회 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1974년부터 뜻하지 않은 부진을 겪게 되고 1975년에는 다리 부상까지 겹치면서 5점대 평균자책점과 3승 10패를 기록했다. 결국 당시 39세였던 깁슨은 251승을 끝으로 아쉽게 은퇴하게 되었다.

과격한 투구폼에도 불구하고 투수로서 수비도 뛰어나 65~72 8년 연속 골드글러브를 차지했고, 불같은 패스트볼과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슬라이더[6][7]를 앞세워 개인 통산 3,000탈삼진을 돌파했으며[8] 잔부상으로 300승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 명예의 전당 헌액자에 걸맞은 위대한 성적을 기록했다.[9]

2.1. 1968년: 라이브볼 역사에 남다[편집]


파일:투수 최고 시즌.jpg
[10]

그러던 중, 1968년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세운다. 단일 시즌 최고 임팩트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선수이자 이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기록인 편이다.[11]

그의 최전성기인 1968년은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지독한 투고타저 시즌이었다. 오죽하면 정규 이닝 채운 1점대 ERA 투수가 무려 7명이었고 그 해 아메리칸리그에서는 타격왕 칼 야스트렘스키가 3할을 겨우 턱걸이하는 타율을 찍었을 정도.[12][13]

당시 깁슨의 성적은 34선발 304.2이닝 28완투/13완봉 22승 9패1.12ERA/258ERA+ 268K/62BB 1.77FIP .853WHIP 11.2bWAR. 스핏볼이 금지되고 공인구가 교체되어 라이브볼 시대가 개막된 이래 유례가 없는 평균자책점 1.12로 라이브볼 시대 1위를 기록했는데, 이는 데드볼 시대까지 합칠 경우에도 MLB 역대 4위[14]에 해당하는 놀라운 기록이다. 데드볼 시대에는 투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므로 이런 기록이 나오기 상대적으로 쉬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1968년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MLB 사무국은 이런 미칠듯한 투고타저에 대한 대책으로 이듬해 69년부터 마운드 높이를 15인치에서 10인치로 낮추고 스트라이크존을 좁히는 등 룰을 개정하였고 실제로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이 2.99에서 3.60으로 오르는 성과가 있었다. 거기에 리그 확대로 인해 팀이 각 리그별로 2개씩 늘어남에 따라 선수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15] 또한 한 몫 했다. 깁슨 역시 평균자책점이 오르긴 했지만 1969년에 314이닝 2.18ERA 10.4bWAR을 기록했다. 이 규정 변경의 제일 원인제공자가 깁슨이었으므로 이를 '밥 깁슨 룰'이라 부르기도 한다.


2.2. 월드 시리즈의 전설[편집]


깁슨의 업적으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월드시리즈에서 보여준 맹활약이다. 세 차례 월드시리즈에 출전하여 총 9경기를 선발로 출장했고, 도합 81이닝 8완투 2완봉[16] 1.89ERA 92K/17BB 7승 2패였다. 또한 그가 나간 3번의 월드시리즈는 모두 7차전까지 진행되었다.

첫 월드시리즈는 64년으로, 요기 베라가 감독으로 재직하고 미키 맨틀로저 매리스의 M&M 포가 가동되던 뉴욕 양키스였다. 처음 등판한 2차전에서 8이닝 4실점으로 패전했지만 시리즈 전적 2-2로 맞선 5차전에 10이닝 2실점(무자책) 완투승을 거뒀고, 이틀 후 등판한 7차전에서는 5실점을 했지만 완투승을 거뒀다. 당연히 MVP 수상.

두번째 월드시리즈는 67년 보스턴 레드삭스전.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타구에 다리를 맞아 시즌의 3분의1을 결장했지만 깁슨은 1차전 1실점 완투승과 4차전 완봉승에 이어 7차전 2실점 완투승으로 다시 한번 MVP에 올랐다.

마지막 월드시리즈는 역사에 남는 시즌을 보낸 68년. 1차전에서 깁슨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최후의 30승투수' 데니 매클레인과 대결하여 월드시리즈 기록인 17개의 탈삼진을 곁들인 완봉승을 따냈다. 4차전 매클레인과의 리턴매치에서도 1실점 완투승. 하지만 최종 7차전에서는 이전과 달리 완투패의 멍에를 쓰고 말았는데, 7회 중견수 커트 플러드[17]가 평범한 플라이 타구를 2타점 3루타로 만들어준 탓에 3점을 내줬고 결국 4실점 완투패를 당했다(세인트루이스 4-1 패배). 실책으로 기록되지 않은 플러드의 판단착오가 없었다면 3연속 월드시리즈 7차전 승리라는 대기록을 만들어냈을 지도 모른다.


1968년 월드시리즈 1차전 동영상. 역동적인 투구폼과 압도적인 구위가 인상적이다. 바로 이 경기에서 17탈삼진을 잡으며 완봉승을 거뒀다.

이 세 차례 월드시리즈에서의 위대한 업적은 역사상 최고의 포스트시즌 활약으로 평가되며, 클리프 리가 2009~10 포스트시즌에서 맹활약할 때[18]나 2014년 매디슨 범가너가 월드시리즈에서 무쌍을 찍을 때 처럼 투수가 포스트 시즌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일때 자주 회자된다.

3. 사망[편집]


2020년 10월 2일 지병인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언론에 따르면 2019년부터 1년간 췌장암 투병을 했고 이 날 고향인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서 향년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것이다.

한편 같은 날 카디널스는 2020 NLWC 3차전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게 패배하면서 탈락했는데, 경기 직후 별세 소식이 들려와 카디널스 팬들의 슬픔은 배가 되었다. 팀 후배인 카디널스의 포수 야디어 몰리나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에서 "경기 하나를 질 수는 있지만 깁슨같은 사람을 잃는건 정말 힘든 일이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4.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블랙잉크
그레이잉크
HOF 모니터
HOF 스탠다드
밥 깁슨
20
207
222
54
HOF 입성자 평균
40
185
100
50

  • JAWS - Starting Pitcher (14th)

career WAR
7yr-peak WAR
JAWS
밥 깁슨
89.9
61.6
75.8
선발투수 HOF 입성자 평균
73.9
50.3
62.1


5. 기타[편집]




  • 세인트루이스 시의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헌액되기도 했고 1985년부터 1989년까지 지역 방송국에서 카디널스 전속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2011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자 1차전이 시작하기 전 부시 스타디움에서 시구를 했다. 같이 나온 이들은 역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멤버로 카디널스의 영구결번자인 브루스 수터토미 존 서저리로 2011년을 통째로 결장한 당시 에이스 아담 웨인라이트.[19]





  • 빈볼을 굉장히 잘 맞추는 투수들 중 하나였고, 이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편이다.[20] 그럼에도 당시 공을 몸에 맞은 타자들 중 심하게 항의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깁슨이 싸움을 워낙에 잘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21] 실제로 깁슨은 아마추어 복싱 대회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경험도 있었다. 다만 당대 최강의 싸움닭이란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현역 시절 리그 사구왕이 된 적은 한번도 없었고 통산 사구 순위에서도 81위(102개)에 머물러 있다. 다만 이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입을 털었던게 바로 어니 뱅크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타격 실력이 좋아 1965년과 1972년에는 5홈런씩 기록했다. 통산 24홈런 144타점 400루타 7.5bWAR.


  • 김광현이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진출에 성공하고 시즌이 끝난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밥 깁슨의 골든글러브 등의 용품이 전시 되었다.해당 기자회견 영상

  • 비록 암으로 사망하긴 했으나 생전 엄청난 동안이었다. 메이저 야구선수들 중 동안 끝판왕이라고 봐도 될 정도이며, 특히나 야구선수가 자외선으로 인하여 동안이 되기 힘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깁슨은 MLB 버전 박정진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이다. 80대를 넘긴 나이에도 얼굴에 주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사망 1년 전, 그의 나이 80대 중반의 모습. 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쳐줘도 70대 정도로밖에는 안 보이며 이마저도 미노년이다.

6. 연도별 성적[편집]


파일:MLB 로고.svg 밥 깁슨의 역대 MLB 기록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59
STL
13
3
5
0
0
75⅔
3.33
77
4
49
1
48
1.533
127
1.3
1.5
1960
27
3
6
0
1
86⅔
5.61
97
7
48
1
69
1.673
73
1.1
-0.6
1961
35
13
12
1
0
211⅓
3.24
186
13
119
6
166
1.443
136
3.9
4.4
1962
32
15
13
1
0
233⅔
2.85
174
15
95
10
208
1.151
151
6.0
5.6
1963
36
18
9
0
0
254⅔
3.39
224
19
96
13
204
1.257
105
4.4
2.3
1964
40
19
12
1
0
287⅓
3.01
250
25
86
9
245
1.169
127
5.8
6.0
1965
38
20
12
1
0
299
3.07
243
34
103
11
270
1.157
126
5.1
6.3
1966
35
21
12
0
0
280⅓
2.44
210
20
78
5
225
1.027
148
6.0
6.1
1967
24
13
7
0
0
175⅓
2.98
151
10
40
3
147
1.089
110
4.3
2.5
1968
34
22
9
0
0
304⅔
1.12
198
11
62
7
268
0.853
258
8.6
11.2
1969
35
20
13
0
0
314
2.18
251
12
95
10
269
1.102
164
8.8
10.4
1970
34
23
7
0
0
294
3.12
262
13
88
4
274
1.190
133
9.8
8.9
1971
31
16
13
0
0
245⅔
3.04
215
14
76
7
185
1.185
119
5.2
5.0
1972
34
19
11
0
0
278
2.46
226
14
88
3
208
1.129
139
6.4
7.1
1973
25
12
10
0
0
195
2.77
159
12
57
3
142
1.108
133
4.5
3.9
1974
33
11
13
0
0
240
3.83
236
24
104
5
129
1.417
94
1.0
0.5
1975
22
3
10
1
0
109
5.04
120
10
62
4
60
1.670
75
-0.2
-0.3
MLB 통산
(17시즌)
528
251
174
6
1
3884⅓
2.91
3279
257
1336
102
3117
1.188
127
82.3
81.6


7. 관련 문서[편집]



[1] 1968년 ERA 1.12[2] 투수 81.7+타격 7.5= 89.1.[3] 한편 이는 당시 대학 야구팀들이 흑인 선수들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재키 로빈슨 등이 야구계 인종분리의 벽을 깼다고 당시 사회에 만연하던 인종차별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4] 이후 깁슨은 인터뷰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솔리 헤무스의 인종차별주의 때문에 선발 출장 기회가 제한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5] 실력과 체력도 당대 최고였지만 전투근성과 자존심도 매우 강해서 경기 중 감독이 교체를 위해 올라올 때면 분노를 담은 눈빛을 교환하다 마지못해 공을 내줬다고 한다(...) 특히 가끔 조기강판될 때면 덕아웃이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고.[6] 특히 바깥쪽 슬라이더를 공략하기 위해 플레이트에 바짝 붙은 우타자들은 언제 몸쪽으로 날아올지 모르는 무지막지한 구위의 패스트볼에 대비해야 했다. 깁슨의 빈볼이 두려워서 깁슨의 등판일이면 상대팀은 카디널스 선수들이 아니꼬운 행동을 해도 어떻게 보복을 하지도 못한채 치를 떨어야 했다.[7] 역시 사상 최고의 슬라이더를 던졌다고 평가받는 스티브 칼튼의 1994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참석했을 때 현역 시절 칼튼과 깁슨의 슬라이더를 모두 캐치했던 절친한 포수 팀 매카버는 축하 연설에서 칼튼이 역사상 최고의 슬라이더를 던졌다고 말했는데 옆에 홀연 나타나더니 "좌완 중에서는 최고지"라고 말했다(...) 명예의 전당 입성 헌액식에서 당사자에게. 하여간 자존심은 끝내줬다.[8] 1974년 달성했으며, 1923년 월터 존슨이 사상 처음으로 3,000탈삼진을 기록한 이후 51년만에 처음으로 3,000탈삼진을 돌파한 투수가 되었다.[9] 또한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고 투수 순위를 선정할 때 보통 7위 안에는 안정적으로 안착하며, 아무리 저평가받아도 10위 안에는 무조건 들어간다. 2005년 폭스 스포츠 선정 역대 투수 5위, 2006년 ESPN 선정 역대 투수 4위, 2013년 ESPN 선정 역대 투수 9위, 2016년 ESPN 역대 투수 7위에 선정되었다. 주로 언급되는 라이브볼 투수는 놀란 라이언, 그렉 매덕스, 톰 시버, 스티브 칼튼, 랜디 존슨 정도.[10] 밥 깁슨의 전성기와 함께 언급되는 두 단기 임팩트 최강 투수들인 드와이트 구든페드로 마르티네스. 보면 알겠지만 셋 다 단일 시즌 내에서 무시무시한 대기록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다.[11] 기존에 단기 임팩트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대투수였던 샌디 코팩스는 한 시즌이 최강이었다기보단 여러 시즌이 골고루 훌륭했던 선수였다. 물론 밥 깁슨도 여러 시즌이 골고루 훌륭했지만, 1968년은 확실히 다른 시즌을 능가하는 독보적 활약을 했다.[12] 이 시즌 야스트렘스키의 타율은 .301. 빌 제임스는 이 시즌의 극악한 투고타저를 감안, 야스트렘스키의 3할이 빌 테리의 0.401의 타율과 같다고 평했다.[13] 다만 내셔널리그는 그 상황이 그나마 덜해서 피트 로즈, 펠리페&마티 알루 형제, 알렉스 존슨 등이 3할을 기록했다. 그 결과 아메리칸리그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찰스 핀리 구단주가 지명타자 제도를 주장하게 된다.[14] 2011년 중에 1880년 팀 키피가 .857의 ERA를 기록한 것이 밝혀져서 기존의 1,2위였던 더치 레너드의 .961과 모데카이 브라운의 1.038이 한단계씩 밀렸다. 조정 평균자책 1위였던 2000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291) 역시 1880년의 팀 키프(293)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15] 실제로 2개의 신생팀(시애틀 매리너스, 토론토 블루제이스)이 추가로 리그에 참가하기 시작한 1977년 아메리칸 리그의 리그 평균 OPS는 0.735로 이전 해(1976년)의 OPS 0.681에 비해 무려 0.054가 올랐고, 리그 평균자책점도 3.52에서 4.06으로 상승했다.[16] 9이닝 경기 7회, 8이닝 경기 1회, 10이닝 경기 1회[17] FA 제도의 유래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소송을 진행했던 그 선수 맞다.[18] 2010년 클리프 리의 포스트시즌 활약 당시 espn에서 마련한 'Best playoff pitchers of all time' 이라는 특집기사에서 1위에 선정되었다. 클리프 리는 8위였는데 기사가 나간 후 월드시리즈에서 바닥을 기었다(...) #[19] 이후 웨인라이트는 부상 재활 후 재기에 성공하여 깁슨의 계보를 이은 21세기 카디널스 최고의 투수이자 현역 최고의 노장 투수로 거듭난다.[20] 돈 드라이스데일이랑 함께 이 부문에서 굉장히 악명높았던 편이다.[21] 알버트 벨과 함께 이 부분에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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