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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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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원나라의 황족이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아들. 황제로 추존되면서 받은 묘호는 유종(裕宗)이며, 시호는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이다. 생전 지위는 황태자.
원세조의 차남이자 원성종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추존황제 순종(順宗)과 현종(顯宗)도 그의 아들들이었다.[1] 여동생 제국대장공주는 고려 충렬왕의 왕비, 손녀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의 왕비, 증손녀 조국장공주는 충숙왕의 왕비, 4대손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의 왕비이다.
황태자비 코코진(闊闊真)[2] 과의 사이에서 위의 문단에 소개된 세 아들을 낳았다.
2. 생애[편집]
칭김은 쿠빌라이 칸과 소예순성황후(昭睿順聖皇后) 옹기라트 차브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칭김의 위에 형으로 도르지가 있었으나 요절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칭김은 부황 쿠빌라이 칸을 섬긴 한인 관료 요추와 두묵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중통 4년(1263년)에 1자왕인 연왕(燕王)에 책봉되었다.
1273년, 칭김은 쿠빌라이 칸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칭김은 한인 관료들에게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유교적 정치 이상을 꿈꾸고 있었으며, 한족 대신들을 존중했다. 1281년, 칭김의 어머니인 소예순성황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쿠빌라이 칸은 색목인 관리들을 양성하며 몽골인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색목인 관료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아흐마드 파나카티라는 권신이 있었는데, 태자 칭김은 아흐마드의 간악함을 싫어하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흐마드의 악행을 지적하여 때린 일이 있기도 했다.
아흐마드가 암살된 후 아흐마드의 잔당들과의 다툼으로 전전긍긍하던 칭김은 결국 1286년[3] 에 부황 세조보다 먼저 죽었으며, 후에 아들 성종 테무르가 즉위하자 유종(裕宗) 문혜명효황제(文惠明孝皇帝)로 추존되었다. 칭김 사후 원나라 키야트 보르지긴 황실에 분열이 나타났음을 상고하면, 칭김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3. 가족관계[편집]
- 부황 세조 쿠빌라이 칸
칭김은 3명의 아들을 두었고, 모두 휘인유성황후 옹기라트 코코진의 소생이었다. 칭김 사후 후계자로 유력시되었던 다르마발라는 1292년에 요절했고, 훗날 칭김의 손자이자 다르마발라의 아들인 무종 카이샨이 1311년 즉위한 뒤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칭김의 장남인 카말라도 1323년 태정제 이순테무르가 즉위한 뒤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쿠빌라이 칸 사후에 즉위한 테무르는 칭김의 3남이었다.
4. 창작물에서[편집]
쿠빌라이의 태자였던 까닭에 징기스칸 4에도 당연히 등장하였다. 카라코룸의 장수로 챕터 2의 원나라 스타팅 멤버다.[4] 능력치는 정치/전투/지모 순으로 72/46/58이며, 내정특기는 농업, 문화가 있으며, 전투특기는 없는 전형적인 내정형 장수다. 생애 항목에서 앞서 읽었듯이 칭김은 유교적 정치 이념을 추구하였고, 한족들을 존중하고 중용하여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음을 반영하여 정치 능력에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 특징이다. 다만, 고증대로 그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인게임에서도 수명이 짧다.[5] 인게임에서의 이름은 ‘징김’이다.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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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은 각각 카말라(甘麻剌), 다르마발라(答剌麻八剌). 카말라는 진종이, 다르마발라는 무종이 각각 추존했다.[2] 후에 휘인유성황후(徽仁裕聖皇后)로 추증됨[3] 음력으로 1285년 12월이다.[4] 카라코룸에는 쿠빌라이 칸의 장남이자, 칭김의 형인 도르지도 있다. 다만 능력치는 좋지 않다. 정치 24, 전투 56, 지모 44이며, 내정 및 전투특기는 전혀없는 왕족이라는 신분빼면 쓸모가 없다…[5] 칭김을 심적으로 크게 괴롭혔던 아흐마드도 원나라 장수로 등장한다. 성도의 이슬람 출신 타향 장수로 정치 74, 전투 23, 지모 67이고, 내정특기가 농업, 상업이다. 돈을 굴리는데 있어 달인인지라 상업 특기가 들어간건 당연할 수도. 게임상에서의 이름은 ‘아후마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