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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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대륙과 중화권에서 살아온 동아시아의 민족. 중국어를 사용하며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의 민족이다. '한족'이라는 민족명은 중국 문화를 정립한 한나라(漢)에서 유래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이다. 그 숫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한족 인구와 그 외 중국 국외의 화교들의 인구를 합해 대략 15억 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중국 본토뿐만 아니고 4천만 명 이상의 해외 한족 이민자, 즉 화교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퍼져있다. 대표적으로 싱가포르는 화교가 인구의 70~80%이고 화교가 건국한 국가이며, 말레이시아도 전체 인구 중 화교가 20~25% 정도이다.
2. 역사[편집]
과거 한족이라고 볼 수 있는 집단은 주나라가 하남성 북부 은허를 중심으로 세워진 상나라를 정벌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대륙 전역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이민족을 차례로 흡수했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한족이 그들의 기원을 이렇게 본다는 것일뿐, 춘추전국시대까지만 해도 각국의 언어와 풍습이 상이[1] 해서 같은 문화권일 수는 있어도 같은 족속으로 보기는 힘들어, 정말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이르게 잡아도 한나라漢부터이다. 그래서 민족의 이름 또한 한족이 된 것이다.
중화(中華)라는 단어가 고대부터 쓰이기는 하였으나 이 단어가 혈통적 개념 비슷하게 쓰였던 것은 청나라와 중화민국 사이의 혼란기 동안 삼민주의의 원형이 등장하면서 청조의 지배 세력이었던 만주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주나라 시절에 형성된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초기 개념은 "천자의 영향력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이들은 문명인이고 나머지들은 야만인이며 문화가 없다"라는 식의 주장에 더 가깝다. 이마저도 당장에 주나라의 형성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누가 이 천자로서의 자격이 있느냐는 질문 또한 혈통적인 것과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화할 수는 없는 게, 예를 들어 한 흑인이 중국에서 태어나 자라왔고, 중국의 모든 것에 익숙했다고 치자. 그럼에도 이 흑인을 한족으로 인정 못 하는 사람들도 꼭 있다. 한족이 문화적 개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외모가 가까운 동아시아인의 틀 안에서나 해당될 뿐, 겉모습이 대놓고 다르다면 그건 또 별도의 얘기.
상고시대부터 돌궐-몽골-퉁구스 계통의 유목민족들이 침략하거나 대거 이주, 정복 정착해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당·송시대에 이르기까지 선비족과 거란족이 대거 정복 정착하였고 이들은 기존의 한족들과 통혼하고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한족에 동화되었다. 선비족은 아예 한족에 동화되어 수·당제국을 건국했고, 금나라 시기에는 여진족이 중원을 차지했으며, 원나라와 청나라 시기에는 각각 몽골족과 만주족이 중국 대륙을 전부 차지했었다. 장강과 그 이남지역도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몽몐어족. 크라다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동남아와 폴리네시아 계통의 종족들이 주거하고 있었지만 오랜시일이 흘러 묘족, 대만 원주민, 좡족 등 일부 소수민족들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한족에 동화된 상태다.
이와 별개로 21세기 이후의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정착지로 알려진 중원 또한 실제로는 기존 통념과 차이가 있다고 한다.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들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며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한다.[2]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으며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었다고 한다.[3]
3. 혈통[편집]
한족은 오랫동안 중국이라는 역사 공동체 속에서 수많은 종족들을 흡수하면서 만들어진 민족이다. 실제로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으며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4]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들 소장 학자는 중국의 역사는 황허 유역 한족 세력이 남방을 침략하고 정복하는 역사였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와 같은 결과가 빚어졌다고 주장한다. 베이징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자신들보다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이라고 자처했다.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 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왔다”라고 지적했다.
한편, 이들 ‘위장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가운데 절대 다수가 소수 민족으로 남기를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선택한 것도 한족이 늘어난 주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현재 소수민족들은 소수자 혜택으로 대학입시나 계획생육 면제 등의 혜택이 있기 때문에 한족과 소수민족이 결혼하면 소수민족을 선택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한족(아버지)-위구르족(어머니) 혼혈인 시린나이 가오.
한족은 이렇듯 장기적인 역사적 과정을 통해 ‘복합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한족은 ‘양이 마침내 질을 전화시키듯’, ‘인해 전술’로 표현되는 압도적인 인구의 힘으로써 거대한 문화적 동화력과 함께 중국이라는 국가를 수천 년 동안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지탱하고 강화시킨 확고한 물적 토대로 기능해왔던 것이다.[5]
또 지금까지 한족 사이의 혈통이 남부 양쯔강(揚子江)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갈라진다는 속설이 내려왔으나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북 간 한족 차이는 푸젠(福建)성 우이산(武夷山)과 후난(湖南), 광둥(廣東)을 가르는 난링(南嶺)산맥을 기점으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6] 실제로 중국 대륙의 역사적인 대도시는 전부 난링·우이 산맥 이북에 있었다. 양쯔강(장강) 이남에 자리잡았던 세력도 난링·우이 산맥 이북을 근거지로 삼았다. 즉, 원래 이남 지역은 중국 대륙 역사에서 존재감이 크게 떨어지는 곳이었다. 다만 난링·우이 산맥 이남에 거주하는 객가인은 북방 한족의 일파로서 전쟁 등으로 인해 중원에서 남쪽으로 피난 간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유전적으로 북방 한족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북경과기보(北京科技報)는 중국과학원의 발육생물학연구소 위안이다(袁義達) 연구원의 저서 '중국 성씨:집단 유전과 인구 분포(中國姓氏:群體遺傳和人口分布)'를 소개하면서 "중국 남부와 북부 한족 사이에는 유전자 구조상 차이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이 차이는 남북 한족과 인근 소수민족 간의 차이보다도 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연구 결과를 인용하면서 "생물 유전자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중국의 한족은 단지 문화적인 공동체일 뿐 혈연적인 연대는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또한 북방 한족은 주변의 흉노(匈奴)와 선비(鮮卑), 돌궐(突厥) 및 몽골족과 혈연적으로 합쳐졌으며 남방의 한족들은 원래 그 지역에 거주해 왔던 남월(南越)과 교지(交趾) 등의 민족[8] 들과 피가 섞인 것으로 나타났다.[9]
다만 한족은 그저 합쳐진 종족의 수가 다른 민족보다 많을 뿐, 이렇게 다종족이 융합되어 하나의 민족이 되는 현상은 보편적인 것이다. 유럽의 대부분의 민족들만 해도, 선사 시대부터 여러 종족의 혼합으로 형성되어 각각 "영국인"[10] , "프랑스인"[11] , "독일인"[12] 이라는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족은 그 분포 범위가 넓은 만큼 지역별로 유전적 차이를 어느 정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적인 중원 지역을 포함한 화북, 화동, 화중 지역의 한족은 몽골인, 만주족 등과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하고, 이들이 중국 한족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과거 한나라 시절 화북의 인구 밀도가 압도적이었던 점과 더불어, 현대 중국에도 경제적인 이유와 교통의 발전이 있음에도 화북의 인구 밀도가 여전히 가장 높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다만 화북 같은 지역 구분이 항상 일정하게 정해진 부분은 아니다. 그래도 거의 예외 없이 포함되는 지역은 있기 마련이고, 예를 들어 황하 유역은 항상 화북에 포함된다.
4. 언어[편집]
2019년 이후, 농업의 전파와 함께 어족이 퍼졌다는 가설을 고대부터 현대까지 존재했던 50개의 중국티베트어족에 대한 계통발생학적 연구로 입증하여, 로랑 사가르 등의 국제 합동 연구진과 중국의 연구진은 중국티베트어족이 약 7200년 전 북중국(North China)에 거주하던 기장(millet) 농경민족으로부터 기원했다고 결론지었다.[13][14][15][16]
언어적으로는 크게 7가지 정도의 발음이 꽤 다른 사투리를 쓴다. 다만 발음만 다르고 문법은 거의 비슷하다. 요즘에는 보통화(표준중국어가 대부분의 중국 지역에서 통하며 중화인민공화국 영역이 아닌 곳 (홍콩, 마카오, 대만, 싱가포르) 에서도 표준중국어는 모두 통한다. 현재 한족 중에서 표준중국어, 즉 보통화를 전혀 못하는 사람은 중공정권이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제정하기 전인 1940년대생 이하에 한정된다. 중화인민공화국 뿐만 아니라 중화민국도 민남어를 쓰던 대만 본성인들은 장제스 정권 아래에서 보통화를 억지로 사용했고, 홍콩인들은 원래 보통화를 못했으나, 중국으로 귀속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중국어 방언 화자들은 어떤 한 지역 방언을 모어로 쓴다면, 다른 지역 방언은 그 지역에 이주해서 몇 개월이면 대부분 습득하는데, 최근에는 중국 내의 방언 및 타 언어가 보통화에 밀려 사라진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5. 중화인민공화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편집]
(인구센서스 결과)
- 1953년 - 93.94%
- 1964년 - 94.22%
- 1982년 - 93.30%
- 1990년 - 91.96%
- 2000년 - 91.59%
- 2010년 - 91.51%
- 2020년 - 91.11%
중국 전체 14억 인구의 약 91.1%를 차지한다. 산아제한 정책에 의해 한족이 중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아래 섹션 참조) 여전히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래서 2021년을 기점으로 한족의 인구가 본격적인 감소세에 접어들기 시작했음에도 소수민족들의 인구는 아직도 증가세인데 한족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 죄다 출산율이 낮은것은 아니지만 4대 직할시나 동북3성은 합계출산율이 1명을 밑돌아 세계 최하수준인데 반해 소수민족들이 사는곳 가운데서도 티베트와 광시자치구는 중국내에서도 출산율이 높은 지역으로 손꼽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한족 다음으로는 좡족(莊), 회족, 만주족, 위구르족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묘족, 이족, 토가족, 티베트족, 몽골족 등이 다음 순위를 차지하지만 한족 인구가 워낙 많아서 각 소수민족의 인구는 중국 인구의 1% 가량이다. (좡족, 회족은 1%가 넘었고, 만주족은 0.8%정도 된다.)
6. 한족과 중화권[편집]
중화권이라하면 해당 지역의 인구 대부분이 한족(화교)이고, 한족 문화권인 지역을 말한다. 국가급 단위로는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마카오, 대만, 싱가포르 등이 있다.
중국의 법률에 따르면 화교(華僑), 외적 화인(外籍華人), 귀교(歸僑), 교권(僑眷), 교속(僑屬)은 각각 다른 개념이다. 화교는 국외에 거주하는 중국인 또는 그 후예로서 여전히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을, 외적 화인은 중국인 혈통을 갖고 있되 거주국의 국적을 취득한 사람을, 귀교는 중국 대륙으로 귀국한 사람을, 교권은 화교․화인․귀교의 직계 친속을, 교속은 화교․화인․귀교의 비직계 친속을 뜻한다(丘立本, 2002:42).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이 다섯 가지 개념의 근간이 되는 ‘화교’라는 말은 1883년에 처음으로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주로 ‘한인(漢人)’ ‘당인(唐人)’‘화민(華民)’ 등의 말이 사용되었다고 한다(庄國土, 2001: 20).
영어에서는 화교와 화인 각각에 대응하는 개념은 없고 단지 화교․화인을 다 포괄하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해외 중국인이라는 뜻의‘overseas chinese'가 그것인데, 최근에는 이산 중국인이라는 뜻의‘chinese diasporas’라는 개념도 사용되고 있다. 이 ‘diaspora'라는 말은 본래 박해받던 유태인의 강요된 탈출, 공통의 고통, 생명력이 강한 자기 정체성, 고국에 대한 동경 등과 연관되어 있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 같은 부정적인 의미보다 운동에 의한 분산과 집중, 이동과 전환 등 적극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Cohen, 1995: 515). 혹자에 따라서는 diaspora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또 홍콩과 대만의 중국인까지 다 포괄하는 뜻을 내포하고 때문에 화교․화인을 설명하는 데는 기존의 overseas chinese라는 개념이 diaspora보다는 낫다고 하고(Wang, 1995: 275), 혹자에 따라서는 가속화하는 탈 국민 국가적 인구 이동과 초 국민국가적 네트워크까지 포함하는 diaspora 개념이 좀 더 적합하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한다(MeKeown, 1999).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 화교․화인의 역사는 한대(漢代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국인들이 해외로 대규모로 이주해 간 것은 근대시기 때이다. 명 롱칭(隆慶) 황제가 1567년 해상무역 금지를 해제한 뒤부터 1842년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해외거주 중국인은 약 1백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아편전쟁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약 1백 년 동안 1천만 명의 중국인이 해외로 빠져나갔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70년대 후반 들어 약 4백만 명이 해외로 나갔다(丘立本, 2002: 41-49). 따라서 화교․화인의 역사의 본류는 최근 1백 50년이고, 이 기간 동안 화교․화인은 거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각 국가마다 독특한 화교․화인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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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가포르 인구의 70~80%가 화교이다. 싱가포르는 화교가 건국한 화교 국가이다.
- 말레이시아 인구의 20~25%가 화교이다.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이주한 중국인들이 개척한 도시이고, 그래서 화교 인구가 많다. 이 외에 화교 인구가 많은 도시로는 풀라우피낭, 사라왁 등이 있다.
- 오세아니아의 크리스마스 섬에서도 화교가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한다.
동남아시아에서 화교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동남아시아 상류층의 대부분은 화교라고 봐도 될 정도로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경제 장악 정도는 매우 심해서, 동남아시아 각 국가의 자산가 대부분이 화교이며, 규모 있는 기업은 대부분 화교 자본 소유이다. 사실 근대 이후에 이주한 화교가 아니라 그 이전에 이주했던 중국계 혈통 전체로 확장한다면 정도는 더 심해진다.
화교는 전 세계 각지에 정착해 살아가는 중국계 혈통을 말한다. 최근 발간된 화교화인(華僑華人)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 분포한 화교는 6000여만 명이며, 이 중 동남아 화교가 4264만명으로 전체 화교의 73.5%를 차지했다. 화교 중에서도 동남아 출신이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올해(2019년)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한 동남아 10대 부자를 살펴보면 9명이 화교 기업인이었다. 동남아 화교자본만 1조 달러를 훌쩍 넘는다. 화교가 운영하는 기업들이 동남아 지역 주식시장 상장사의 70%를 차지한다는 통계도 있다.
화교 인구만 1000만 명에 육박하는 태국이 대표적이다. 태국 총자산의 최대 90%를 화교가 장악한다는 연구조사가 있을 정도다. 포브스가 올해 발표한 전 세계 500대 부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태국 부자 7명 중 4명이 화교다. 그러니 화교 없이는 태국 경제도 없다는 말도 나온다. 최대 소매유통 그룹인 CP그룹을 운영하는 다닌 치아라와논드 회장이 대표적이다. ‘태국의 국민맥주’로 불리는 창(Chang) 맥주그룹을 운영하는 짜런 시리와타나팍디도 화교다. (에너지 음료 레드불로 유명한 태국 화빈그룹의 옌빈 회장도 화교)
인도네시아도 20대 기업 중 18개가 화교 기업이다. 1, 2위는 인도네시아 최대 민간은행 BCA은행과 인도네시아 대표 담배기업 자룸(Djarum)을 운영하는 화교인 하르토노 형제가 차지했다. (인도네시아 살림그룹의 기틀을 마련한 린샤오량도 대표적인 화교 기업인) 말레이시아 10대 갑부 중 8명도 화교다. 말레이시아의 호텔왕, 설탕왕으로 불리는 곽씨형제그룹을 운영하는 로버트 콱은 2006년부터 1위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도 화교 출신 갑부가 1, 2위를 차지한다. 1위는 부동산개발업체인 파이스트을 운영하고 있는 로버트와 필립 응 형제가 꼽혔다. 2위는 페인트 재벌 고청량이다.
필리핀 경제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전체 인구에서 화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1%가 조금 넘지만 현지 경제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올 1월 94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필리핀 최대 재벌 SM그룹 헨리시 회장이 대표적이다. 신발가게로 시작해 오늘날 필리핀 소매유통시장의 절반을 장악했다. SM의 이름은 말 그대로 신발가게(Shoe Mart)에서 따왔다. 2위인 식품회사 JG서밋홀딩스의 존 고콩웨 회장도 필리핀의 리카싱(홍콩 최대 갑부)으로 불리는 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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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의 화교라 하면 경제적인 부분만 생각하기 쉽지만, 정치적인 장악도 또한 크다. 동남아시아의 거물급 정치인 중에는 화교 출신과 중국계 혈통이 상당히 많다. 몇몇 예를 들자면 태국의 탁신 친나왓 총리와 잉락 친나왓 총리 남매가 화교이다. 미얀마의 독재자였던 네 윈도 화교 집안 출신이었고,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도 중국계 혈통이었다. 그리고 필리핀의 정치 명문가인 아키노 가문도 화교 가문이다.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베니그노 아키노, 코라손 아키노 등) 또한 2021년 기준 필리핀의 대통령인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할아버지가 중국인이다. 단, 중국계 혈통을 지닌것이나 실제로 화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무조건 펼친것은 아니었다. 네윈은 화교출신인 주제에 화교상인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고, 마르코스도 중국계 학교를 폐쇄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7. 여담[편집]
한족 중에는 자연적으로 새끼발톱이 갈라지는 특성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속설이 있다. Accessory nail of the fifth toe 이를 일명 '며느리 발톱'이라고 하는데,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다. 당연히 한족에게만 생기는 건 아니고, 다른 민족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작은 신발을 신으면 후천적으로도 생길 수 있다고 한다. #
중국사 중 한족 왕조 시대에 한민족 국가를 침공한 예는 거의 없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엄밀히 따지면 과장은 아니다. 한나라는 한족이라는 말의 어원이 될 만큼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한족 왕조다. 그리고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침공했으므로 한족 왕조가 한민족 국가를 침공한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위나라의 경우 공손연 정벌때 고구려와 협력하긴 했지만 이후 국경이 맞닿아 급격히 관계가 흐트러지고 나중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쟁이 발발해 관구검에 의해 고구려의 전 국토가 피해를 입었다.[18] 그런데 위나라는 통일 정권이 아니었으므로 논외.
이후로는 드물긴 하다. 한민족 국가를 침공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통일 중원 제국'은 맞지만 왕조와 정권 핵심부가 모두 선비족인 탓에 '순수 한족 제국'이란 점에 대해서는 매우 애매하다.[19] 물론 문벌귀족[20] 세력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이들 정권은 훗날 등장하는 요나라, 원나라, 금나라, 청나라 정권처럼 뚜렷하게 민족색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찌어찌 '한족 통일 제국'으로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문벌귀족들은 한반도 침공을 반대했고, 별 이득도 없는 전쟁을 강행한 건 엄연히 그 선비 혈통의 정권 핵심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또한 매우 애매한 부분이다.
당나라가 쇠락한 이후 등장한 송나라는 300년 역사 동안 고려와 접경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고려를 침공한 요나라의 경우 엄연히 거란족의 나라였고 그 후에 원나라의 침공이 있긴 했지만 원나라 또한 엄연히 몽골 제국의 색채가 매우 강한 몽골족의 '정복 왕조'였으며 무엇보다 요나라와 몽골의 침입 당시에는 중원에 송나라가 아직 생존한 상태였었다. 명나라는 고려 및 조선과 접경하긴 했지만 오이라트나 북원, 여진족의 동향에 더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큰 갈등은 없었던 고려나 조선에 무력으로 침공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들을 보내주기까지 했었다. 청나라의 경우에도 조선을 침공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산해관 입성 전의 침공이었으며 청나라는 엄연히 만주족들의 나라였었고 무엇보다 청나라의 침공 당시에 중원에는 명나라가 아직 생존한 상태였었다.
중화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당시 일본 제국에 맞서 같이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사이였기에 '혈맹'으로까지 불릴 정도였고 현재까지도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대만에 친근하다.(특히 장제스가 윤봉길의 성과에 매우 감명받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물론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전후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유였다고 봐야겠지만, 일본 제국이 무너지고나니 정작 장제스의 국민당도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이주했고, 중국 대륙에는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이 중화인민공화국은 이후 6.25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여 한국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따라서 '한족 정권일 때는 한민족 국가를 침공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주장은 한족과 한민족이 서로 접하게된 2000년이 넘는 역사에서 한과 위, 중화인민공화국 단 세 차례 밖에 없었으므로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송나라, 명나라, 중화민국처럼 서로 동맹에 가까운 적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족 정권이든 북방 유목민들이든 외부 세력들이 쳐들어 올 때마다 한반도가 크게 굴곡진 운명을 겪어야 했다는 점은 서로 동일하다.
"한반도 = 한민족의 땅"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고려시대 이후로는 그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다시피 한 한반도의 역사와는 달리, "중국 = 한족의 땅"이라기엔 무척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역사적으로 한족이 명확하게 현대 중국 영토를 전부 차지한 것 자체가 얼마 안된다. 애초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나 간쑤성, 내몽골, 티베트, 북만주 일대는 청나라 때 편입된 영토이다.
흔히 중원이라 불리는 땅도 마찬가지다. 한족이 형성된 한나라 건국 기원전 200년대 이후만 쳐도 한나라(약 400년), 삼국지 시절과 이후의 위~서진(약 100년), 송나라(약 300년), 명나라(약 300년), 중화민국(약 30년)[21] , 중화인민공화국(약 70년)으로 절반도 채 안되는 약 1100년 언저리 밖에 안된다. 그 외에는 오호십육국, 송/요 또는 송/금으로 서로 나뉘어있었으며, '비한족 통일 정권'도 수(약 30년)[22] , 당(약 300년), 원(약 100년), 청(약 300년)으로 그에 버금가는 무려 730년이나 중원을 지배했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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