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제도적 지원 및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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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남한 측의 악용
4. 이질적 체제
5. 일부 탈북자의 일탈
6. 탈북 청소년 문제
7. 사회적 지위 하락


1. 개요[편집]


대한민국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제도적 지원 및 관련 문제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

2. 상세[편집]


우선 모든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부적응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대부분은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걸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한국 생활에 만족하는 비율이 전체의 75% 가량으로, 경제적 적응도와 문화적 적응도가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성격이 더러운 사람을 만나 사고나 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니면 가족과 지인에 대한 향수를 빼면 거의 만족한다고 할 수 있다.[1] 이들의 만족도는 미주 한인보다 높다. 주성하 기자는 남한을 거쳐간 3만 3천명 중 월북한 탈북자는 30여명이라고 한다. 남한을 떠나는 것을 생각을 해 본 사람은 16.7%지만, 미주 한인이 역이민을 고려해 보았다는 응답은 40%에 육박한다. 전체적인 이민 통계에서도 떠난 사람 중 40%는 실제로 돌아온다.# # 여기가 싫은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이것이 주목받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는 이들이 한국 사회에 부적응함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의 극단적인 폐쇄성으로 인해 북한 당국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 비해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가치관 등이 잘 알려지지 않아 생기는 문제다. 주성하 기자 같은 경우 기관 등으로 불필요한 지원이 많다며, 정착 제도를 슬림하게 바꾸고 정말 필요한 사람을 중심으로 지원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다. #

2019년 기준으로 주된 이유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어서(30.5%), 일한만큼 소득을 얻을 수 있어서(25.2%), 북한보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21.9%), 가족과 함께 생활할 수 있어서(7.5%),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7.3%)라고 한다.# 소위 '탈남'을 하는 탈북민은 한 해 수십명으로 추정된다. 해외 출국이 아예 탈남으로 잡혀 한 해 700명 이상이 나간다는 오보가 있었다고 통일부가 밝혔다. ##

물론 불만족, 부적응도 문제가 된다. 2019년 남북하나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남한 생활에서 불만족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해서(27.6%),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19%),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남한사회의 차별·편견 때문에(15.4%), 경제적으로 어려워서(13.5%), 남한 사회에 적응이 어려워서(4.7%)를 들었다. # 한국 언론에서는 탈북민의 어려움을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적응의 어려움'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건 북한의 관영 매체가 북한 주민의 사회주의하에서 행복해하는 연기를 보여주어 진짜로 이들이 '사회주의자'인 줄 알게된 것이지 실제로는 어느 이념으로 보아도 한국이 인권을 제대로 보장하기에 체제에 대해서는 자유를 찾았다며 좋아하는 경우도 많다. 가족 문제나 편견이 더 심한 문제다. 평범한 한국인도 겪는 어려움과 북한 출신임에 따른 편견이 더 큰 문제지 체제 부적응 자체는 4.7%로 다른 것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10분의 1도 안 된다. 95%는 한국의 평범한 서민처럼 살고 양 끝의 2.5% 가량의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2.5%의 특별한 사람들도 모든 탈북민을 대변하지는 못하지만, 문제가 되는 2.5%의 사람들도 체제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탐욕, 이기심, 폭력의 문제로 말썽을 피우는 사례가 더 많다.# 2001년의 조사에서는 탈북자들은 통일 후 무엇이 어려울 것이냐는 질문에 “가치관, 사고방식, 생활 습관 등의 문화의 차이”(28.3%), “상호 이해의 부족, 편견 등으로 인한 화합의 부족”(25.0%), “정치 이념, 사상, 제도의 차이”(10.9%), “언어의 차이”(10.0%)를 들었다.

최근의 탈북자들은 한류를 접한 경우가 많아 문화적 부분에서는 달라진 경우[2]도 있지만, 그래도 발전된 경제에서 비롯한 각종 문화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3] 김일성 일가를 찬양하는 식의 정치적 세뇌가 남쪽에서 유지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4]은 편견에 가깝고, 의사소통 방식 같은 것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3. 남한 측의 악용[편집]


2017년 9월에 통일부 소속 6급 공무원이 탈북 브로커에게 탈북자 48명의 이름, 연락처, 주소 등을 1명당 30만 원에 팔아넘기고 1,475만원을 챙긴 혐의로 구속되었다. 당연히 해당 공무원은 직위해제되고 징계위에 회부되었다. 발각된 경위가 참 아이러니한데 이 사람한테 개인정보를 산 탈북 브로커가 이 정보를 탈북자들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데 썼다. 그러다 한 탈북자의 신고로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실토하여 드러나서 덜미를 잡혔다고 한다. 문제의 공무원은 과거 하나원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탈북자 정보에 접근하기 쉬웠다는 점을 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탈북자 정보는 과거 북한에서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국가 보안사항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개인 착복 등의 비리문제도 얽혀 죄질이 상당히 좋지 않다. 잘못하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될 수 있다.#

탈북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문제제기가 있다. 놀라운 것은, 탈북 여성이 북한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비율보다 남한에서 성폭력을 당하는 비율이 더 높다는 설문조사가 있다는 것이다. 2017년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북한이탈여성 폭력피해 실태 및 지원방안 연구’ 용역보고서를 보면, 조사 대상 북한이탈여성 158명 중 25.2%가 “남한 내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4명 중 1명 꼴이다. 탈북 과정에서의 성폭력 피해(26.8%)보다는 조금 적지만, 북한 내에서 성폭력 피해(18.7%)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특히 남한 출신이 성폭력을 하는 경우도 있어 우려가 제기된다.# 이런 행태는 북한에서의 권력형 성범죄자가 하는 짓과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사회는 성폭력은 피해자 책임이라는, 가해자가 만들어낸 정서가 남한 사회보다 강하게 남아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를 악용한 것이라고 한다.

이제는 북한 사회도 주민의 의지로 도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여성 인권이 개선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5]니 북한 주민 일부보다도 퇴행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일부 탈북민은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자체를 알리는 것을 보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많은 탈북민이 2020년 성범죄 후 개성으로 월북한 탈북민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6] 탈북민 인식을 악화시키는 행위다.

여성긴급전화 같은 제도는 커녕 112 신고도 잘 모르는 정도며, 가해자에 대한 실효적 처벌의 존재와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꽤 나쁘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한국의 법과 제도에 익숙치 않은 사례, 외로움을 달래려 정에 휘둘리는 사례를 악용하는 악질적인 경우도 있다. #

탈북민 보호를 맡던 경찰관의 성폭력을 상관에게 신고하자, 그 상관이 '남자라서 참는데 한계가 있다'라고 발언한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

탈북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육군 간부 2명이 보직해임된 뒤에도 월급을 전액 받으면서 '황제휴가'를 누렸다는 지적도 마찬가지다. #


4. 이질적 체제[편집]


백두혈통 정도를 제외하고 북한은 직업을 배치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시장 경제의 발전을 억제하였기에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자유가 없던 환경에서 살다가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니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사회주의 체제가 인민들을 미주알고주알 챙겨주는 복지 개념인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그것은 90년대 이전 고위층에나 해당되는 것이고 굶어죽지 않을만큼만 주고 직업의 자유를 제약하며 노동을 착취하는 관행이 심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본인이 노력해서 돈을 벌고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탈북자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고 자신감을 잃는 경우가 많다. 사실 탈북자들이 가장 정착에 만족하는 이유 중 하나가 능력대로, 노력한만큼 돈을 번다는 것이지만, 반대로 능력이 없어서 걱정거리도 된다.

또한 탈북자들이 법치주의법의 지배의 원리[7]남한식 상거래 등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결국 하류층으로 전락하고 온갖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8] 흔히 탈북자들이 처벌이 강하다는 북한 이미지와 다르게 한국 법은 세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체제에 도전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강하지만, 이런 곳에 공권력이 동원되니 다른 쪽이 약해지는 문제가 생긴다.

체제가 달라 생기는 적응 문제로 신용, 약속, 감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정말 북한 체제가 자본주의 발달을 방해해서 생긴 문제로 평가되는데, 남한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대의 호감, 신뢰를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북한은 독재를 위해 주민 간의 친목과 단결을 방해하고 매번 윗선의 불합리한 지시를 강요하다보니 이웃을 신뢰를 하다간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 이를 조심하라는 말을 듣는 어떤 사람은 그냥 말만 걸어도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경우도 있다.

시간 약속은 과거에는 남한에서도 코리안 타임이라고 지탄받던 문화이나, 경제의 발달로 많이 사라진 문화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2010년대 중반부터야 물류업에서 신뢰, 약속에 기반한 분업을 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안전한 사금융이 등장했다고 한다. # 그러나 아직 덜 깨인 사람들도 존재하여, 시간 약속을 지키라는 교육이나 정착 조언이 많은 편이다. 감사 표현은 좀 안타까운 것이, 수령에 대해서만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을 제대로 쓸 수 있었지, 이외에는 그렇지 못해서 그렇다는 증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고마워도 표현을 잘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교육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탈북자들이 이질적인 이유는 이렇다. 그들을 무시하기에는 꽤 친숙하고 관용하기에는 너무 다르다는 것.


5. 일부 탈북자의 일탈[편집]


탈북의 이유 또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 폐쇄적인 독재국가에서 탈출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정해져 있다.
  • 자유를 갈망하는 사상범
  • 희생될 위기에 처한 숙청의 피해자 혹은 권력 투쟁의 패배자
  • 생존의 위기에 처한 경제적 난민
  • 어느 사회에서나 처벌될만한 범죄자
  • 탈출을 위장하여 잠입을 시도하는 간첩

그래도 북한 체제가 그럭저럭 굴러가던 1990년대 초반[9]까지는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구 공산권 붕괴로 국제경제체제에서 고립되고, 김일성 사망과 대홍수, 고난의 행군으로 배급시스템이 무너진 1990년대 후반부터는 세번째 경우가 대부분이며, 불편한 진실이지만 북에서 살인, 강절도, 횡령 등 범죄를 저지른 후에 처벌을 피하기 위해 탈북한 사람들도 극소수 존재한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을 보면 범인 윤태식은 자기 아내를 죽인 후에, 북한 대사관을 찾아가서 월북을 시도했었다. 실제 최근까지도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월북을 시도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남쪽에서도 이런데, 헬게이트 북한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당연히 있을 것이다.

물론 탈북자를 전부 범죄자로 모는 행태는 절대 삼가야 한다. 계속 반복되지만 실제 탈북자들의 절대 다수는 먹고 살기 힘들고 북한 체제에는 도저히 희망이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 목숨 걸고 탈출하는 사람들이다.[10]

그리고 이런 류의 범죄자들은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남한에서도 같은 탈북자를 등쳐먹는 식의 범죄를 저지르다가 처벌되곤 한다. 실제로 탈북자들에게서 거액의 투자금을 받아서 도망친 뒤 재입북한 인간도 있을 정도다. 예를 들어 이정연은 자신의 북한군 장교 근무 시절의 이야기를 모아서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를 출판해서 큰 돈을 벌고 매우 유명해졌는데, 이후 40억 가까운 돈을 사기쳐서 중국으로 달아났다. 이정연은 한동안 반공보수 집회에서 고정적으로 나와서 연설도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던지라, 반공보수단체들이나 책을 낸 출판사 플래닛미디어는 피해자들에게 항의와 욕설에 한동안 시달리기도 했다.

탈북자의 범죄율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통일과 평화'라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위의 수치는 1998년부터 2007년 1월까지의 범죄 발생 건수가 1년 안에 발생한 것처럼 계산되어 범죄율이 과장되었다고 통일부와 경찰청이 이의를 제기하였다고 한다.# #

저 주장대로라면 9년 간 통계를 합쳐 1년과 비교해도 2배가 높다는 뜻이므로 생각보다 범죄율이 낮을 수 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을 감안하면 탈북자의 9년간의 인구당 범죄 건수가 일반 국민의 2년 간의 인구 당 범죄 건수와 비슷할 정도로 범죄율이 낮다는 해석마저 가능하다.[11]

사실 이주민은 범죄율이 일반 국민보다 낮아 이상한 주장은 아니다. 게다가 탈북자는 남성보다 완력이 약한 여성이 많기에 강력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적은 편이다.# 범죄를 당한, 범죄 피해율은 한국 평균의 5배 정도인 23.4% 였다고 한다. 이 논문은 이의가 있다고 소개하고 높다는 가정 하에 탈북자의 범죄율이 높을 수 있는 원인을 분석한다. 사실은 범죄를 유발할 수 있는 원인에 가깝다. 상대적 박탈감, 가족과의 이별, 한국 사회의 이방인 취급, 노동시장에서 겪는 차별 대우와 이에 따른 가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또래와의 일탈이 있다고 이 논문은 분석하였다. 위의 논문을 인용하자면 마약범죄와 성매매에도 쉽게 빠져드는데, 이미 북한에도 마약이 상당히 퍼져있다는 것과 여성탈북자들이 대부분 중국을 경유하면서 인신매매와 성매매에 쉽게 노출이 된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약의 경우 약용으로 쓰려다가 적발된 경우가 있다. 다른 범죄 관련 주장에는 이의가 있지만, 이건 정말로 2019년 기준 일반 국민보다 7.5배의 비율로 마약사범이 많다는 통계가 있다. 하나원에서는 눈에 띄는 마약 중독 증세를 보이는 탈북자는 없어 안심하였지만 이런 것으로 보인다. #

2015년 이후 교도소 수감 탈북민의 3분의 1이 마약사범이라고 한다. 그냥 남한을 생각하면 순수 쾌락목적이 아니면 마약을 투약할 수 없고, 언론에서도 마약 투약 원인을 취재하지 않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북한의 의료사정이 상상 이상으로 열악하여 약을 이렇게 구하기도 한다. 왜 마약을 구하려고 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통계는 없으나 이 경우가 많을 수 있다는 증언이 있다. 수사 과정에서 약으로 알았다는 증언이 종종 있다고 한다. #

북한에는 의약품이 부족하니 개인이 키울 수 있는 아편을 쓰는 경우도 있고, 에너지 드링크나 커피 같은 것이 보편화되지 않아 주먹구구식으로 필로폰을 쓰는 경우가 있다. 필로폰은 개발 당시 자양강장제 등으로 쓰였다가 부작용이 극심해 각국에서 마약으로 지정된 약물인데, 북한에서도 불법은 맞지만 그냥 쓰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통편이라는 아편 성분 약은 아예 한국에서 불법인데, 이를 반입하다가 마약 사범으로 붙잡힌 경우가 있다. 이런 마약 성분에 내성이 생기다보니 한국 약이 듣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의약품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어 문제가 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 대처로 입국 후 의사의 권유를 통해 정통편과 같은 약의 복용을 중단하고 다른 처방의약품을 대신 복용하게 하면 된다는 의견이 나온다. ###

2020년 7월 한강 하구를 통해 개성으로 월북한 탈북민이 성폭행 혐의를 받았고, 북에서는 성폭행을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탈북자와 북한 전반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하고 있다.# 일단 사람의 됨됨이를 따지면 탈북자끼리도 그를 비난한다. 성범죄 뿐 아니라 동료 탈북자가 차를 빌려주었더니 팔아버리고 도망갔다는 신고도 하였으며, 월북도 신고했다는 주장이 있다. 탈북민끼리도 바보 같다는 여론이 있다는 기사도 있다.# #

물론 사법체계가 고무줄처럼 느슨하고, 권력형 성범죄[12]가 많다는 것은 휴먼라이츠워치라는 국제인권단체에게서도 지적된 사실이지만, '성폭행'은 아동 대상인 경우 주민의 비난을 감안하여 무기징역도 선고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강간 같은 건 북한에서도 형법 상의 범죄다. 대검찰청은 북한은 음란물을 보기만 해도 처벌한다는 글을 올린 적도 있다.# # #

가정폭력에 따른 처벌은 2019년의 것[13]이 처음으로 추정되고, '성추행'은 가볍게 여기는 정황[14]이 있다. 당국이 공개한 강간 처벌 건수가 1년에 10건도 안되는데, 휴먼라이츠워치의 보고서에서는 이 수치를 보고 당국자들이 북한을 '지상락원'이라고 여기는 태도가 있으며, 오히려 대응에 실패한 것이 아니냐면서 지적하고, 좀 더 신뢰도 높은 자료를 공개하라고 촉구한다.

2010년대 이후로는 경찰 체계가 느슨하여 처벌하려고 해도 못 잡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즉 북한이 범죄율이 낮은 게 아니라, 민생 치안에 동원할 경찰 행정 여력이 없기 때문에 수치가 낮은 것이다. 물론 범죄는 단호히 예방해야 하지만, 저런 연구와 보고서에서 범죄 예방을 위해 대한민국에 요구하는 내용은 '모든 탈북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라'가 아니라 탈북민에 대한 부당한 편견은 없애고, 성 관련 문제는 주민들에게 전달될 가능성 있는 매체를 통해 그 심각성을 알려주는 정보를 제공하고, 효과적인 교육을 시키며, 안일한 북한 정부에 압력을 넣으라는 것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6. 탈북 청소년 문제[편집]


탈북자의 한국 사회 부적응 문제와 함께, 탈북 청소년에 대한 문제 또한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2000년대 후반[15]부터 탈북자의 규모가 늘어남에 따라 탈북청소년의 규모도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2005년에 421명에 불과하던 탈북청소년의 규모는 2020년 현재 2,437명(교육부 탈북학생 통계, 2020)으로 약 5배 이상 증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탈북청소년의 증가에 따른 다양한 문제들을 지원하기 위해 교육부를 중심으로 탈북 청소년에 대한 교육지원 정책, 통일부를 중심으로 각종 생활 지원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16]

이러한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2008년 기준 10.8%에 달하던 탈북청소년의 학업중단률은 많이 낮아져서 2015년 기준 한국 학생에 비해 2배 정도 수준까지 낮아졌다. 2019년에는 3% 가량으로, 한국 학생의 0.94%보다 3배 정도 수준을 기록했다. 최근에는 학생들의 학업 적응 뿐만 아니라, 진로 탐색이나 사회 적응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

탈북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학교라는 환경에서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은 신변안전상의 이유로 탈북자 출신이라는 사실은 숨기는데, 한번 어떤 이유로든 탈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주변 학우들이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사실 숨긴다고 오래 숨길 수도 없다. 북한 특유의 말투와 또래 문화를 쉽게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에서 보이는 도발이나 사회, 정치적 문제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 '너희 나라는 맨날 왜 그러냐?' 는 부당한 비난을 받고 심지어 빨갱이라는 비난도 듣는다. '너희 나라'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그냥 한국어 쓰는 외국인 취급이다. 그리고 북한이 싫어서 빠져나온 아이들한테도 당연히 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애시당초 집단괴롭힘에 합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뭔가 트집거리 잡을 게 하나라도 생기면 즉시 그 대상이 된다. 결국 탈북 청소년도 엄연히 감수성이 있는데, 이런 차별은 성인보다 더 뼈아프게 느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계속 감정적인 차별에 시달리며 성장할 경우 이들이 갖게 될 대한민국 체제에 대한 반감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일반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경우에는 탈북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안학교인 한겨레중고등학교에 진학하기도 하고, 검정고시를 통해서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하기도 한다. 다만 어린 시절에 한국 일반 학교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탈북 청소년들의 사회적응이라는 측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이들의 적응에 국가와 민간 양측이 별도로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탈북 청소년을 다문화 가정 범주에 넣어서 다루는 것이 전부이다. 게다가 다문화 가정의 자녀를 지원하는 단체에서 탈북 청소년까지 지원해주고 있는 상황이다. 애초부터 혼혈도 아니고, 타 문화권 출신도 아닌데 다문화 취급하는 것 자체가 개판이지만, 정말 현실은 시궁창인 것은 탈북 청소년한테 그나마 이 정도 관심이라도 보여주는 단체는 이들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정치적 견해에 따라 갈리는 문제다. 북한과 같은 민족으로 묶이는 것에 혐오감마저 느끼는 사람도 있고, 같은 민족이거나 기타 국익을 위한 이유로 잘 대해줘야 한다는 시각도 있는 건 사실이다. 민족주의 정서가 강한 탈북자들은 한국인으로 대우해주는 것을 꽤 반기는 편이다.[17]

이 문제에 대해, 탈북자 출신 영화 감독이자 일베저장소 이용자로 유명한 정성산이자스민 전 의원 관련 혐오발언을 참고할 만 하다. 70년 가까운 분단기간동안의 이질화로 '언어만 통하는 타 문화권'이 된 남북간의 차이와, 이로 인하여 다문화 지원 단체에서 탈북 청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현실에도 불구하고 유명 탈북자가 도리어 다문화 수용을 조롱한 것이다. 이 점은 정성산의 지역차별 조장 발언 등과 함께 탈북자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악화시키는 일부 탈북자의 잘못된 행태의 사례로 눈여겨볼 만 하다. 비유하자면 상황이 나빠져서 친척집에 신세지러 온 사람이 친척의 부인을 보고서는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닌데 왜 우리 집안 일에 끼어들게 하냐' 라고 욕하고 친척 형제간의 싸움에 끼어들어 한 쪽 편을 들며 다른 쪽을 '저런 놈은 우리 집안 사람도 아니니 쫓아내자' 라고 욕하는 격이다.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오랜 분단으로 인해 남북한간에 심한 문화적 이질화가 발생한 것이 현실이고, 이로 인하여 북한이탈주민이 남한 사회 내에서 이방인과 같은 처지가 된 것 역시 현실인데, 이런 현실을 차근차근 이해와 적응을 통해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주류로 보이는 세력에게 영합하여 그 세력과 갈등하는 다른 세력을 덮어놓고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한국 사회에 있어서도 좋지 못한 일이지만 해당 탈북자들 자신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성산의 칠시민국 발언을 보더라도, 어지간히 뼛속까지 지역감정에 찌든 인간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한국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전라도든 경상도든 지금까지 살 비비며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인데, 새로 들어온 사람이 지금까지 같이 살던 사람을 욕하면 '와 우리편 생겼다!' 라고 기뻐할까? 아니면 '얘는 뭔데 내 이웃을 욕하냐?' 라고 기분나빠할까?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이후 교육부를 중심으로 탈북 학생들의 경우 다문화 학생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교육 지원 및 학비지원, 대학(정원 외)특례 입학 등의 지원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한국 사회에 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탈북자임을 숨겨야 하는데, 국가의 교육지원 정책의 수혜를 받기 위해서는 탈북자 출신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공개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

특히 탈북 청소년들은 남한의 학교 수업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북한의 수업 내용은 수학, 과학 과목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김일성 찬양에 맞춰진, 즉 거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세뇌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북자 중에는 북한에서 수학교사로 일하다가 남한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학원 강사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외국어 공부는 영어도 의외로 김정은 이전에도 가르쳐주는 경우는 있긴 하다. 그리고 김정은 시대에는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나 한국식 외래어와는 거리가 먼 영국식 영어를 가르친다. 언어의 이면에 담긴 외국 제도, 정세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특히 인터넷, 상업 등 현대 문물에서 파생된 어휘는 그런 게 있다는 것도 알려줄 수 없다. 그래서 외래어를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이 존재한다. # #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야 하는' 환경에서 가치관이 형성된 채 평생을 살던 이들이 갑자기 이성논리로 따지며 탐구하는 남한의 수업을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물론 장기간의 탈북과정을 거치면서 장시간의 교육 단절로 인한 것도 있다. 짧게 걸리면 한두달 내로 남한으로 들어오기도 하지만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허다. 그 기간에 공부가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북한이 남한과 사이가 안 좋고 막 나가는 위협을 계속할 때는, 상술된 경솔한 태도로 "니네 나라는 맨날 왜 그러냐" 라고 막말을 한다. 결국 차별하고 혐오하는 분위기는 점점 강해지고 탈북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입지가 좁아지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죄 없는 탈북 청소년들에게 푸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감정적인 고립이 실제로 어떤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그래서 위의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인진 몰라도 남한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북한이탈주민들 중에서도 남한이 아닌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싶어하는 경우가 주목받는다. 2016년 김수암 등의 조사에서는 16.7%가 그렇다고 하고, 82.7%가 아니라고 하지만 사안의 심각성 때문에 언론이나 학계에서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후술하듯이, 그나마 북한이탈주민을 자국민으로 맞아주는 한국 밖의 나라에서 북한이탈주민은 그냥 흔하디 널린 그 나라말 못하는 외국 난민에 불과한 수준이기에, 적응은 더더욱 쉽지 않다. 사실 이 정도 응답은 오히려 만족도가 높은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데, 2019년 일반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을 떠나고 싶다'라는 응답을 한 비율이 19~34세는 75% 가량, 35~59세까지의 기성세대는 65% 가량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이다. #

이곳은 최근 탈북자는 약자를 보살피는 면에서는 오히려 북한보다도 사회주의적 기준으로도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고, 이런 이유로 자신이 너무 풍요롭게 사는 것에 죄책감이 들어 가족에게 송금하거나, 이들을 데려오거나, 아니면 통일되면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이를 악무는 경우가 지배적이다.


7. 사회적 지위 하락[편집]


다만, 북한 내에서 대학이나 고등전문학교와 같은 곳에서 고등교육까지 받고 북한 사회의 주류에 있었던 이들이 오히려 그렇지 못한 이들보다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20년이 넘게 북한 정권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를 강제로 주입받고, 북한 내에서 주류 사회에 편입되었다는 것인데, 이들이 완전히 체제가 다른 사회에서 새로운 생활 방식을 익히는 것은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사고 체계를 뜯어 고쳐야 하는 것이라서 오히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들보다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외부 정보나 북한 선전의 진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계층도 북한의 주류 계층이기에 이들의 적응이 쉽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2015년 해경에 구출된 북한 주민 5명 중 노동당원은 모두 귀순, 비당원은 북한 잔류를 고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북한 내에서 중산층 이상의 지위에 있던 이들도, 북한 내에서 가졌던 사회적 지위가 남한에서도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에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상당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제도적 적응과는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 북한에서 이공계 분야 최고의 대학인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정부 기관에서 기술관료로 근무하던 사람이 남한으로 탈북한 뒤엔 민간 건물에서 일개 설비기사를 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러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한 사례도 있다. 이외에도 북한에서 교원대학을 졸업하고 중등교원으로 근무했는데, 탈북하고 나니 식당 종업원이나 건물 청소부 등을 전전하다 범죄자로 전락한 사례도 있다.[18] 실제로 한국은행 국장급인 북한의 중앙은행 조직부장으로 일하던 탈북자가 모 대형 할인 마트에서 계산원을 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태영호도 국정원 자문을 그만두고, 책을 출간한 뒤 빵집, 세탁소를 운영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 있다. #

이런 문제들이 북한에서의 학력을 인정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문제라는 말도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것이 합심센터에서 탈북자들의 학력을 검증하고, 등재하는 과정이 있다. 만일, 학력 증명 서류의 원본이 있는 경우에는 즉시 인정[19]되며, 정황증거[20]를 제시하는 경우 검증을 통해 학력을 인정한다. 물론, 법조인[21], 의사, 교원 등과 같은 전문직이나 국가 공인 자격의 경우도 검증을 통해 자격이나 면허를 인정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며, 실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의사, 교사, 약사, 안경사, 조리사 등의 자격면허들이 (일부는 무시험 검정으로, 일부는 남한에서 주관하는 재교육을 이수하거나 시험에 합격하여) 주어진 경우도 있다. 의치한약수에 대한 북한 면허가 적법하고 적절하게 취득된 것이 국정원 조사에서 확인되면, 국시 응시 자격이 있는 것으로 본다. 다만, 바로 국시에 응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직급과 직역[22]에 따라 6개월에서 1년 가량의 재교육을 이수한 후 응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재교육에서 많은 이들이 학술적, 임상적 한계를 느껴 대학 진학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23] 대학 진학을 하는 경우에는, 예과 과정을 면제받고 본과로 직편입하게 된다. 다만 경제적, 시간적 여유의 부족으로 인해, 탈북 의료인들이 이렇게 남한에서도 의료인을 계속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실제, 북한에서 산부인과 의사였던 탈북자는 인천의 한 건물에서 유리창 청소일을 했으며, 열악한 근무 여건으로 인해 산업재해를 당해 사망하고 말았다. #

일단 수적으로도 탈북자들의 상당수가 생계형 탈북자가 많기 때문에 탈북자 교육 및 지원 정책이 이들 위주로만 맞추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라, 출신 계층별 교육 체제, 지원 체제 등을 확충하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직업군 중에서, 탈북자가 제일 많은 분야는 군인공무원이지만 군인 출신 중에서는 아직 장성이 없고 공무원도 거의 다 특채로 고시 출신은 없다. 그나마 군인은 조선인민군 복무 중에 탈북하여 그대로 계급을 인정받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10대에 탈북한 이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군필 탈북자들은 나이 때문에 국군에서 직업군인으로 재복무가 어렵다.[24]

유튜버는 있지만 프로게이머는 단 한명도 없다. 있다한들 특히 중국에서 열리는 프로리그에는 온라인 아닌 한 절대로 갈 수 없는 리스크가 있다.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라면 중국에서 열리는 리그라 하더라도 동북 3성 지역에서 열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곳으로 게임하러 갔다가는 경찰이나 보위부에게 잡혀 북송당할 수 있다.
[1] 국민의 대다수는 탈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88.3%는 힘들어서 탈북함을 이해하겠다는 응답이 있다. # 가끔 집단 중 성격이 못된 사람을 일반화시켜 국민 전체, 탈북자 전체로 여기는 시각이 일반 국민과 탈북자 모두에게 존재하는 경우도 있으나 사람으로 탈북자나 국민을 이해하려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이다.[2] 생일 케이크를 먹는 문화가 한국에서 수입된다든가, 한국 남편이 아내에게 잘 대해준다는 소문이 도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3] 가설 중 한가지다. 이외에도 남북이 서로를 정확히 알 기회가 적다보니 서로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시각이 있다.[4] 이런 식의 주장은 한국 사회에 이미 반박 자료가 많아 진실을 깨닫기 쉽다. 다만 북한군의 정신력이 뛰어나다는 등의 생각은 버리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타우러스 미사일, 아파치 헬기 같은 국군의 강력한 무기나 전쟁 시 잃을 것이 극심한 국군의 심리 등은 북한에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알아도 고집을 피운다기보단 북한군은 잘 알아도 국군에 대해 모르니 저런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도 2021년 기준 한류, 새로 생겨난 군 입대 기피 현상 등으로 탈북자 사이에서 싸움도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퍼진다. #[5] 남편이 아내에게 국경일 이외의 날에 선물을 주는 사례, 집안일을 해준다는 사례가 있다. 남성은 물론, 여성도 행복해야 가정과 사회가 평안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최근 사례다.[6] 성폭력은 피해자 책임이니, 가해자는 성폭력을 해도 괜찮은게 아닌가하고 여길 수 있다. 인간이라기 보다는 도덕윤리로 자신을 통제할 줄 모르는 짐승과 비슷해진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성폭력 문서에 이런 인식이 나쁜 이유가 설명이 되어 있다.[7] 칼을 휴대한다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쳐야 할 생활습관에서도 이것은 거론이 되지 않는다.[8] 2011년경 기준, 탈북민이 모여사는 곳의 한 지구대에서는 일반 주민에 비해 112 신고가 오히려 적다고 밝혔다. # 다만 구체적인 범죄율 통계는 구하기가 어렵다.[9] 이 시기 북한은 풍족하진 않더라도 모든 주민들에게 의식주, 교육, 보건의료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면서 최소한 제3세계에선 괜찮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물론 '무리배치'라는 강압적인 직장 배치나, 신분에 따라 의식주와 받을 수 있는 서비스 등이 달라지는 아파르트헤이트 같은 모습을 모르는 것이었다.[10] 2000년대 이후론 북한에서도 귀찮은지, 월북자들은 다시 남한으로 송환해버린다. 심지어 두만강을 건너서 넘어간 월북자한테 북한 보위부 간부가 차비하라면서 100달러 줘서 다시 중국으로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11] 한 해에만 집중적으로 탈북자가 들어왔다면 이렇게 비교해도 된다. 98년부터 2007년 1월까지의 탈북자와 한 해의 탈북자의 수가 거의 같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가장 많은 2006년에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가 2026명이고 2002년 이후 일관되게 1000명 이상이 입국하여 이 가정을 할 수 없다. 집중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연도가 있었다면 다른 연도에는 적었어야 범죄 발생 건수가 통계와 일치한다.[12] 상당히 수준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일가가 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을 위한 계층의 일탈은 무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3] 15년 유기형이었다고 전해진다. 형법에 규정된 최고형보다 형량이 높았다고 한다.[14] 한국에서 성희롱이 법제화된 것이 1999년이다. 정보 유입이 어려운 북한에서 성추행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이론 상 가능할 것이다. 보고서에서도 도시 지역, 국경 지역으로 갈수록 외부 정보를 접하기 쉬워 성관념이 농어촌보다는 선진적이라고 한다.[15] 1990년대 후반 매년 탈북자의 규모가 100여명에 불과했으나, 2000년대 초반 이후 매년 1000여명을 넘어서고 있는 수준[16] 담당 부처는 통일부, 교육부가 있으며 실무 기관으로는 남북하나재단과 한국교육개발원에 탈북 청소년 교육지원센터가 존재한다.[17] 간혹 중국에서 태어나고, 아버지가 중국인이고 어머니가 북한 출신인 경우는 한국어도 잘 못하고, 한국 문화보다 중국 문화에 익숙한 사례도 있다. 정서적으로 정말로 타문화권 출신이 되어버려 북한에서 자란 사람보다 오히려 적응이 힘든 경우다. 부모 양계혈통주의에 따라 한국 국적으로 취급되는데 탈북민의 지원은 받지 못해서 이들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18] 박인숙과 같은 대부분의 재입북 사례가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19] 이 사실이 현재는 북한 내의 탈북 고려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어, 탈북 시 학력 증빙 서류를 철저히 챙겨서 탈북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주성하김일성종합대학의 졸업장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자가 될 수 있었다.[20] 국정원 DB에는 북한의 소학교 단위까지 상세한 정보가 있다.[21] 북한 내에서 판사, 검사, 변호사와 같은 법조 직업을 가진 탈북자는 약간 명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이 북한의 법조인 자격을 대한민국에서 승계 인정 받은 사례는 없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북한 검사, 변호사 출신 탈북민이 대한민국의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경우는 있다. 제도상으로는 북한 내 법조인 자격을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인정받아 관련 직종에 종사할 수 있으나, 실제 직종의 업무 범위와 차이가 워낙 커서 그들 스스로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북한/사법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북한의 변호사는 대한민국으로 치면 행정사나 그나마 법률 수요가 있는 도시에선 법무사정도의 업무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22] 북한의 의사 자격은 6급에서 1급까지로 나뉘어 있는데, 학부 졸업을 하고 한국의 국시에 해당하는 보건성 시험에 합격하면 6급 자격을 받는다. 등급을 올리기 위해선 보건성 주관의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4~3급 자격은 한국의 전문의에 해당한다고 본다. 1~2급은 의학박사 학위나 의학대학의 교수들이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다. 북한의 의사 양성과 관련된 연구에 따르면, 탈북 의사들의 기초의학 지식은 큰 흠결은 없으나, 최신 임상의학 지식이나 실제 임상 경험은 한국에 비추어 볼 때 꽤 부족하다고 한다. 재교육에서는 이런 측면에 대한 교육이 이뤄진다.[23] 2010년대의 북한의 의학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들에 따르면, 기초의학 교육에 엄청나게 치중되어 있다. 전체 6년의 교육과정 중 5년 이상을 기초의학교육에 할애하고, 나머지 1년동안 대학 부속 병원에서 아주 기본적인 임상 실습만을 하는 정도이다. 임상의학 교육은 박사원(대학원)에서나 접할 수 있다. 의료 인력 양성 체계가 이렇다보니, 의료인 출신 탈북자들은 대한민국의 의학 교육에 꽤나 놀라는 편이다.[24] 단 김신조 같이 전 간첩일 경우 한국의 특수부대인 강철부대, HID보다 북한 현지화가 잘 된 탈북자는 우대를 받는다. 왜냐면 북한의 전직 간첩들은 북한 전역에 쫙 깔린 보위부 상대로도 사투리에 능한데다가 한국의 특수부대 보다 북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산을 타는 능력은 떨어질지 언정 정찰이나 후방교란에 관해선 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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