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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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의 당군이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북한의 국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6]조선인민군은 국가방위의 기본력량, 혁명의 주력군으로서 사회주의조국과 당과 혁명을 무장으로 옹호보위하고 당의 령도를 앞장에서 받들어나가는 조선로동당의 혁명적 무장력이다.
조선인민군은 모든 군사정치활동을 당의 령도 밑에 진행한다.
- 조선로동당 규약 제 47조 (2021년 1월 개정판)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세운 부대(빨치산 등을 규합해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조선인민혁명군')가 일본군을 물리쳐서 8.15 광복이 이루어졌으며, 그 부대가 지금의 조선인민군이 되었다고 허위 선전을[7] 한다. 실제로는 1948년 2월 8일에 창설되었으나, 1978년부터는 조선인민군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선전 효과를 위해 김일성이 항일유격대를 창설하여 이 부대가 조선인민군의 전신이라는 말을 꾸미고는, 그 날짜를 1932년 4월 25일이라고 하여 조선인민군의 창설 시기를 앞당겼고, 해당 날짜를 '건군절'로 지정해 공식화한다. 그런데 2018년 1월 22일 정치국 결정서를 통해 건군절을 둘로 분리하여 4월 25일은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일로, 2월 8일은 조선인민군 창건일로 나누고 2018년 2월 8일 열병식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 2월 8일이 평창 올림픽 개막 하루 전날로 남북한 합동 전야제가 있는 날인데 이와 연계하여 북한 체제 선전을 하려는 목적인 듯하다.
주요 전술로는 총력전, 배합전, 대량 선제 기습 공격 전략, 속전속결 전략이 있다.# 총력전은 우리가 아는 총력전의 의미를 넘어 국가의 모든 분야를 전쟁에 종속시키는 전술이고, 배합전은 전면에서 주력이 남한을 공격하면서 특수부대가 후방을 교란함으로써 상대 전선의 안팎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전술이며, 선제 기습 공격 전략과 속전속결 전략은 전쟁 발발 시 빠른 기동력으로 적을 공격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는 전술로 4차 중동전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8] 군 자체에서 "조선인민군"이라는 신문을 발행한다.
2021년 개정 당규약 서문에는 "조선로동당은 (...) 강력한 국방력으로 근원적인 군사적위협들을 제압하여 조선반도의 안전과 평화적환경을 수호하며 민족자주의 기치,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고 (...)"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북한에 의한 통일을 위한 목적을 명시적으로 갖게 되었다. #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북한군이나 인민군이라고 불리며, 남북간 대립이 한창 심했던 냉전 시대에는 북한괴뢰군이나 북한공산군, 북괴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2. 상세[편집]
조선인민군은 설립 초기부터 김정은 시대 이전까지는 북한 전체의 군대가 아닌, 조선로동당이 소유한 군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북한이라는 집단의 국군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시스템은 공산주의 국가의 당군(黨軍)이나 인민군의 개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데,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국가 수준의 군대는 부르주아지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압제의 도구에 속한다'는 카를 마르크스의 오랜 이론에 근거하여 국군의 개념을 부정했다. 그 대신 혁명의 전위주체인 공산당을 수호하기 위해 노동자와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무력집단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이 당군이나 인민군의 개념이다.
북한도 마찬가지여서 조선인민군은 원래는 북한의 공산당인 조선로동당에 속해있었다. 정확히는 북한의 내각 구조 중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를 만들고 그 조선로동당의 당원 중 하나인 김일성이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면서 김일성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조선로동당의 일원으로 엮여있는 구조였다. 즉 원래대로라면 김일성은 북한 정권에서 군사 부분만 담당하는 당원 중 하나여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혼란한 사회에서 군사권을 손에 쥔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법인지라 이후 김일성이 정권을 휘어잡으면서 내각의 주요 자리들을 '겸임'하는 식으로 북한 정권을 장악하면서 조선로동당 전체가 김일성의 수족이 되었고 조선인민군도 사실상 김일성의 사병 조직이 되었다.
이런 '명목상으로만 조선로동당의 군대이고 실질적으로는 김씨 일가의 사병 조직인' 구조는 김정일 시절까지는 유지되었다가 김정은 시대에 국방위원회를 해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를 신설하여 모든 업무를 이관함으로서 그 구조가 크게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국방위원회가 실질적으로는 이미 북한의 최고 기관이지만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조선로동당의 하위 부서 중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명목상으로도 공개적으로 조선로동당과 아예 별개의 조직으로 독립시키는 의도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의 하위 부서이지 최고권력자의 개인 사병이 아니다'라는 가면조차 완전히 벗어던졌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그동안은 김씨 일가가 국방위원회 대표가 되는 과정에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로동당의 거수 투표를 거쳐야 했던 것을,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이 김씨 일가의 후계자는 다이렉트로 국무위원회 대표 자리를 세습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은 세습 국가가 아니라는 가식도 완전히 탈피하고 점점 더 세습 왕조로 변해버렸음을 입증한 셈. 다르게 본다면 군을 이제는 김씨 일가가 직접 통제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변화가 닥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대 한국에서 6.25 전쟁을 다룰 때 조선인민군을 인민군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에는 공산군이라고도 불렸으며, 이후 냉전 시기에는 소련 혹은 중공의 꼭두각시 군대라는 멸칭으로 북한 괴뢰군,[9] 줄여서 북괴군(北傀軍)이나 아예 괴뢰군이라고 주로 불렀었다. 이 북괴군이란 용어는 1980년대에는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도 등장한다. 군사정권 때까지는 이것이 한국 정부나 한국의 언론 국군에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명칭이었으나 현재는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일반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의외로 북한 주민들도 자국군인 인민군을 공산군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제는 '북한군'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이상할 정도로 장성급 장교의 강등이 자주 발생한다. 장성택, 최룡해, 황병서 등 최고위 장령들조차 조선인민군 차수와 대장 사이에서 진급과 강등을 반복했다.
2.1. 군사적 전술[편집]
- 4대 군사노선
- 전 인민의 무장화
- 전 국토의 요새화
- 전 군의 간부화
- 전 군의 현대화
- 4대 주요전술
- 집결: 한미연합군의 중심부에 전투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작전
- 기습: 휴일이나 야간, 새벽, 평일 출퇴근 시간 때 기습 공격하는 작전
- 전멸: 한미연합군에 대한 반격으로 적군의 부대 재편을 방지하여 전멸, 소탕하는 작전
- 후속 전연군단의 전선을 돌파하여 기계화 군단이 후방을 침투, 점령한다.
- 12대 전투원칙: 사실 상당히 뒤떨어진 원칙이다. 화력을 압도하고, 지형을 활용하는 등 한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나 사용했던 작전으로 현대전에서는 '영공을 점령하는 것'이 승리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공군력이 상당히 처참한 수준이라... 그나마 북한 입장에서 쓸만한 건 항공기의 물량이 대한민국보다 많기에 화력압도와 후방 교란 정도다. 그래서 북한이 지금까지도 열심히 특수부대와 방사포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전멸소탕: 한미연합군의 후퇴로 부대재편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
- 기습돌파: 야간, 악천후를 틈타 기습한다.
- 화력압도: 장사정포 미사일 화력을 전투 초반에 집중적으로 투입해 수도권 주민들의 혼란과 공포심 조장을 위한 목적
- 기동력: 국군이 기동을 중지한 틈을 타 공격한다.
- 후방방어: 전투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안전 지대 확보 목적
- 후방교란: 남한 전력의 분산을 위해 후방을 교란시켜 특수군의 전력을 극대화한다.
- 협동작전: 육해공군의 협동 작전
- 전투편성: 사다리꼴 모양으로 편성한다. (제1선 5/9전방, 제2선 3/9후방, 제3선 1/9예비) 개전 초반에 전력을 집중화하기 위한 목적
- 연합작전: 대한민국 국군의 '소부대 훈련'과 비슷한 개념이다. 대대, 중대, 소대 모든 부대의 통합 작전
- 병참확보: 전쟁에 있어서는 병참 문제가 제일 크기 때문에 병참부대의 병참선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 지형활용: 산악전을 중시한다.
- 사전정찰: 한미연합군 현황을 사전에 정찰한다.
- 핵미사일 타격 목표
- 침투축선
- 투입전력
- 전방지역: 전력의 70% 이상 배치
- 후방지역: 병력 770만 명의 준군사조직 배치
- 전시체제: 집단군 전환
3. 역사[편집]
일제강점기 시절 설립된 의병 조직들에서 시작해서 점차 규모가 커지고 조직화되면서 생긴 의병 조직들 중 주로 좌파 계열 의병 집단[12] 이 그 기원이다. 지금은 열약한 제식 장비를 지닌 군대지만 그래도 1950년대에는 미군이 6.25 전쟁에 참전하자마자 몇 차례 패퇴시키며 경남까지 쫓아낸 경험이 있었다.[13] 창설 초기 인원들 중에 소련군, 일본군, 중국 팔로군[14] 과 동북항일연군, 그리고 독소전쟁에도 참전해 실전 경험도 있었던 데다 북한군이 쓰던 무기는 소련에서 지원받은 강력한 무기였다.[15][16] 또한, 남침을 위해 수년간 소련 고문관이 파견되어 체계적인 훈련과 소련제 제식 장비를 지원받았으니 6.25 전쟁 초창기 북한군이 보여준 전광석화 같은 남침 속도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녔다. 당장 미국도 초창기 북한군의 훈련 수준과 장비 수준을 얕보고 최초 전투를 벌인 스미스 특임대가 오산시에서 박살나고 뒤이어 천안시에서 M24 채피 경전차로 T-34 중형 전차[17] 를 맞상대하려고 했다가 그야말로 참패를 당하고 T-34 쇼크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아시아에서 T-34 수준의 기갑 전력을 체계적으로 제식화하여 보유한 국가는 북한이 유일했다. 극동 소련군은 논외로 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기갑 병력이라고 부르기도 초라한 그레이하운드 장갑차에[18] 일본은 태평양 전쟁 직후라서 군대 자체가 와해된 상황이었고 중국의 경우 국공내전으로 인해 체계적인 기갑 병력 육성은[19] 물론 군대 자체가 체계화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20] 종전 이후 스멀스멀 다시 기어돌아오는 유럽 국가들에 의해 독립하지 못하던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는 말 할 필요도 없다. 당시 아시아 전지역에서 북한의 전력은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기갑전력 뿐만 아니라 공군까지 완편되었고 여기에 더해 소수이지만 일본군 출신 파일럿도 영입한 상태였다. 소련측의 주도로 사단급 훈련도 마쳤고 당시 북한군의 전력은 한국군의 5배였다. 보통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3배의 전력을 갖추었을 때 공격하는 점을 미루어 보면 당시 김일성과 북한 당국이 얼마나 철저하고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1945년 10월 21일 소련 제25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보안대가 창설되고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이 배제된다. 보안대의 임무가 철도안전을 포함한 형태의 임무확대가 되어서 철도보안대가 추가로 창설되는 1946년 1월 16일에 철도보안대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북한군의 기초가 된다. 현재도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신분은 철도보안원을 겸임할 정도로 이 철도보안대가 북한군의 전신이다. 그리고 군내 정치사상 교육과 군사 분야의 간부양성을 위해 1946년 2월 평양학원[21] 과 6월 중앙 보안간부학교[22] 등의 군사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46년 8월 15일 규모가 확대된 보안대를 통합·지도하기 위해 평양에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창설했고, 9월에는 인민집단군 총사령부로 개칭했다. 1948년 2월 4일에는 민족보위국이 설립되었고, 마침내 북한 정부수립 7개월 전인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1948년 2월 8일, 평양역 앞 광장에서 열린 조선인민군 창설식에서 연설하는 김일성과 군악대에 의해 연주되는 올드 랭 사인 애국가.
조선의용군은 1949년 7~8월에 2만 명이 북한으로 들어옴으로써 북한군에 최초로 합류하게 되며, 1950년 5월에 추가로 약 2만 명 가량이 입북한다. 이로 인하여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한 군대 출신인 경우가 많게 된다. 먼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 이탈해 중국 연안 지방으로 간 군대인 조선의용군이 있다. 또 조선의용군과 함께 태항산에서 결성된 화북 조선 독립동맹의 일부 인원도 포함된다. 그리고 만주에서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도 조선인민군에 포함되는데, 이 동북항일연군은 완벽히 통일된 군대는 아니었고 만주 일대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들을 공산당 주도로 통합한 일종의 통일전선 연합체 성격을 띄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제1로군 2군 6사의 대장이었다. 김일성은 이후 만주에서 활동할 수 없는 수준으로 탄압을 받자, 소련으로 넘어가서 소련 극동군 제88 국제여단에 합류한다. 여기에 추가로 소련에서 활동하던 소련 유학파 등이 모여서 형성되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부대의 모태가 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선인민군의 뿌리로 소급하기도 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느슨한 분위기의 군사조직 연합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점을 두고 북한에서는 '민족적 단결을 통한 인민의 군대 창설'로 평가한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이 점령되고 나서 북한군이 서울에 주둔할 때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한 간호사나 의사들의 말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연안파, 다시 말해 조선의용대 출신 인원들이 김일성과 그의 직통 라인인 소련 극동군 88여단 출신 인물들보다 상당히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연안파 군인들은 공공연히 이러한 불만을 표출했다고 전해진다.
이후로도 북한의 무식한 군국주의 정책으로 70년대 초반까지 한국과 1대1로 이길 가능성이 남는 상태의 군사력을 유지해왔으나,[23] 70년대 중후반부터 균형이 서서히 바뀌어 80년대에는 북한이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서울불바다 발언을 마지막으로 고난의 행군과 함께 한국을 군사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북한군 입장의 희망이 꺾이게 되었다.[24]
현재 정규군 약 128만 명과 예비전력 762만 명[25] 총합 약 990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병력 규모만으론 세계 3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수 2,700만 명과 대비하면 대략 35%로 군국주의의 궁극적 표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군인의 비중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하지만 그 인원도 그저 부족한 전투력을 메꾸기 위한 조치로 생각될 정도로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다. 세계에서 4위의 병력을 가지고 있는 그 북한군의 군사력 순위는 기껏해야 20위 후반이었는데 40여 개의 나라가 추가되면서 35위로 또 떨어졌다. 평가된 나라가 68개국에서 106개국으로 늘었다만 세계 상위권 군사력을 가진 국가들은 오래전부터 포함되어 있었기에 국가 비율만큼 순위가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군대의 규모를 무리하게 키우다보니 예산부담이 커져서 군대에서 별도의 사업체를 운영할수있도록하는 체계를 갖추었으며 1990년대 이래로 경제난으로 북한의 예산부족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서 그나마 제대로 돌아가는것이 군대이다보니까 군수기업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경제력이 부실한 북한에서는 거대한 병력수를 유지하는 것은 힘의 균형을 억지로라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어서이기도 하지만,[26]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군수기업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군인들에 대한 수요가 많기도 하고,
6.25 전쟁 당시의 조선인민군과 조선의용군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민군은 북한의 정규군이고 의용군은 6.25 전쟁 당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자원 또는 징집된 인원으로 편성된 군대를 이야기한다. 당연하게도 이 의용군은 북한 정규군에 비해 차별을 받았고, 휴전 후 포로 교환을 할 때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라고 한다.[28]
4. 수뇌부[편집]
조선인민군은 조선로동당의 군대이다. 현재 통수권자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이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무력 최고사령관 김정은이다.
그 외 군 간부들은 조선인민군/장관급 장교 문서를 참조.
5. 내부 사정[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열악한 현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용어[편집]
대한민국 국군에도 은어가 존재하듯이 조선인민군에도 역시 은어가 존재한다.
- 1제대 보병전방감시소
- 4신 기관총
- 762
- 감시초
- 곱배기 훈련 - 반복훈련 또는 기합
- 관총소 - 기관총 소대
- 구명대
- 구분대 - 대대 이하 부대 단위
- 군나부랭이
- 군인상점
- 군호
- 깡티
- 노랭이
- 놀가지 - 탈영병을 포함한 체제 불순분자들
- 다데기
- 닭다리
- 대렬참모
- 도깨비군관 - 출신 성분이 좋아 쾌속 승진하는 정치 군관.
- 도태 상사 - 상사가 되어 언제 제대할 지 모르는 군인.
- 동화 - 방한화
- 두더지
- 뒤진병사 - 이렇게 낙인 찍힌 병사는 없는 존재 취급당하며 무시당한다고 한다. 이외에도 '할아버지 홑바지 같다.'는 표현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관련 기사
- 딱따구리
- 땅크병
- 뗑한 새끼
- 뗑해도
- 만수무강조
- 맵시 전사 - 하사가 되어 멋부리려 한다는 것을 지칭하는 은어.
- 먹세중사 - 사병의 급식을 강탈하는 군관.
- 무력부 - 보급된 군수물자를 횡령하는 상급부대를 지칭하는 은어. 부대의 급에 따라 세부적으로 용어가 달라지기도 한다.
- 무장창격전 - 창격술이라고도 한다.
- 박포소 - 박격포 소대
- 반땅크지탱점
- 반타격
- 반포전파탐지기
- 방위판정법
- 백두산 - 남북군통신선으로 교신할 때 자신들을 지칭하는 은어. 참고로 대한민국 국군은 자신들을 한라산이라고 지칭한다.
- 번개
- 벼락 - 저격여단
- 병실
- 보따리 장사
- 봉대보이라 - 잠수함 건조 기지
- 뵙고싶어 - 배고프다. 어감만 보면 김씨왕조 찬양의 의미가 담긴 듯 보이는 게 특징.
- 불심지
- 불주머니
- 비무장지대초소
- 비행사
- 빈달구지
- 빠골
- 뻥까우리
- 사과나무 - 레이더 기지
- 사포군 - 포병 사단
- 사회사람
- 새 년도
- 생활제대군인
- 수퇘지
- 쏴떨구다
- 쏴쳐박다 - 격침하다.
- 얄개
- 연애 중사 - 중사가 되어 인근 마을 처녀들하고 놀고 다닌다는 것을 의미하는 은어.
- 연탄 - 연대 탄약고
- 염장무 3형제 - 병영식에 나오는 염장무
- 영실 동무
- 영접들어총 - 받들어 총
- 영예 군인
- 우뚜바
- 공기방석정
- 우뢰
- 원포 - 원거리 포병
- 적공사업 - 대한민국 국군을 상대로 하는 대남방송 및 삐라 살포 및 선전활동
- 전연
- 전투정치훈련 - 정치 사상 교육
- 족제비 - 유래는 다람이와 고슴도치.
- 주제비 전사 - 병들은 더럽다는 것을 지칭하는 은어.
- 줄늘이기
- 중무기
- 지하족
- 차단소
- 초기복무군인
- 초대소 - 김씨왕조 전용 특각
- 총탁
- 친정 언니
- 콩 휴가 - 6개월 짜리 장기휴가
- 팔방돌이
- 포알
- 행사도로 - 김씨왕조 전용 도로
- 후방 가족 - 군인 가족
7. 여군[편집]
2015년부터 이스라엘처럼 여성들에게도 병역 의무가 주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여성들은 모두 2년 국방의 의무가 주어진다고 했지만 이것은 루머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만 해도 북한 여성들은 일주일 군사 훈련을 받은 게 전부였다. 예비군에 준하는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31] 사실 2003년 제정된 군사복무법으로 인해 남성 10년, 여성 7년의 복무기간이 명문화되긴 했으나, 기존의 남성들만 징집해도 120만 대군을 유지할 수 있어서 사실상 여성은 징집이 아닌 지원제에 가까웠다. 그러나 후술할 1995년 닥친 고난의 행군의 여파로 인해 여성징병제가 본격 실시된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전면적으로 여성들을 징병 대상으로 바꾸었으므로 이제 북한은 일반 여성들도 남자들처럼 신체검사를 받고 군에 입대하게 되어 7년의 의무 병역을 마쳐야 한다.[32] 물론 여전히 남군(男軍)에 비해 비율은 낮겠지만 기존의 25%라는 수치에서 훨씬 더 높아진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 비율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거의 유례 없는 군국(軍國)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33] 여성징병제를 하는 다른 나라를 보자면 노르웨이는 현역과 예비역 중에서 선택해서 복무할 수 있고 이스라엘은 결혼을 빨리 하면 병역이 면제되는 등 이런저런 방법으로 굳이 현역으로 복무해야 할 필요가 없는 군대인 반면 북한의 조선인민군은 모든 종류의 병역을 당이 정해주는 대로 이행해야만 하는 문제점으로 인해 여성들도 얄짤없이 현역으로 마구 끌려가는데 그 중에서 미모가 뛰어난 편에 속하면 얄짤없이 기쁨조로 징병당한다.
이런 무자비한 징병제 탓에, 북한은 전세계 인구 대비 군인 비율 1위(5%), 전세계 군 내부 여군 비율 1위(30%)라는 세계적 기록을 세웠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와 버린 가장 큰 원인은 고난의 행군이 원인이다. 이 당시의 기근으로 인해서 3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간데다가, 살아남은 사람들도 극심한 영양 부족을 겪었으며, 이 시대에 유소년기를 보낸 세대들의 평균키가 전, 후 세대에 비해 최소 5~6cm 이상 작아서 남성 평균신장은 160cm 초반으로 일제강점기 수준으로 내려갔다. 이 때문에 이들 세대가 징병된 시기인 2000년대에는 신체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병역기간을 늘렸음에도 120만여 명이라는 상비군의 숫자를 충당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탓에 입대 기준을 대폭 낮춰서 키 140cm대인 단신까지 징병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복무 기한을 다 채우고 제대해야 할 병사들조차 도로 붙잡아 놓는 무시무시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북한에서는 이런 명백한 불합리에조차 항의할 수 없다.
남자의 병역 의무를 13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이미 실패한 전례가 있어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방향이 됐다고 한다. 현재는 이미 2020년대이므로 이 정책이 진짜 시행되었다면 상당수 여군이 입대하여 이미 복무 중일 것이다. 여담으로 북한은 보통 만 17세에 입대하므로, 2023년 기준 신병들은 주로 2005 ~ 2006년생일 것이다.
아시아프레스의 조사에서는 2020년 기준으로 군 복무가 남자는 11년, 여자는 7년이라고 한다.북한군의 병역 의무
2021년 2월에는 남자 8년, 여자 5년으로 군 복무 기간을 대대적으로 감축했는데[34] 먹여살릴 입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는 것과 더불어 인력이 크게 부족한 북한 내 3D업종인 탄광, 건설노무대, 기타 열악한 직종에 더 빨리 배치시키기 위함이다. 원래도 북한군은 전역자들을 이런 데 자주 집단배치시켰으나 전반적인 저출산과 인구 감소로 인하여 시기를 앞당긴 것. 군인들이 좋아할 것 같지만 여군들을 제외하면[35] 오히려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는데, 그 이유는 군 복무 10년차 이상이 되어야 로동당 추천을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등 군복무에 따른 혜택을 본격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3년 만에 빨리 전역시키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8년 전역으로 별다른 혜택도 없이 3D업종에서 일하라고 강요하면 반발이 커지는 것은 당연지사. 당연히 배치된 곳에서 될대로 되라고 막나가는 전역자들이 많은데 사회안전원들도 답이 없다 보니 대놓고 체제를 거스르는 행위를 하거나 김정은을 욕하는 수준까지만 아니라면 사실상 내버려둔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무리한 징병이 오히려 북한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남자를 8년 이상이나 군대에 가둬 두는 탓에, 가뜩이나 국력도 바닥인데 그나마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일손들을 전부 군대로 내던져 버리니 악순환이 가속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렇게 발악하며 긁어모은 군인들조차 신체기준을 왕창 낮춰 억지로 군에 들여놓은 사람들이다 보니 인적 자원의 질이 형편없다. 더구나 기존의 북한군조차 원활한 보급을 받지 못해 극심한 식량난과 영양실조를 겪고 있는 판에, 유지비가 훨씬 많이 드는 여군이 제대로 된 보급을 받을 수 있을지는 굉장히 의문이다. 다만 북한 여군들은 신체조건 탓에 보통 비전투 병과에 배치하는 편이라곤 한다. 사실 남군들도 체력이 바닥인데 여군들을 전투병과에 배치하는 건 그 북한군 수뇌부도 불가능하단 것을 알 것이다.
8. 대외 참전 / 지원 경력[편집]
8.1. 직접적인 참전[편집]
조선인민군 첫 참전 전쟁으로 북베트남을 소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북한의 슬로건은 '월남(베트남)에서 미군이 100명 죽으면 남조선에 있는 미군이 100명 죽는 것이나 같으므로 베트콩을 도와주어야 한다'였다. 1967년에는 전투기 조종사,[36] 1972년에는 공작원을 베트남에 파견해 게릴라 활동을 지원하였다. 기타 수송병, 화학병, 공병 등의 형태로 소규모 참전하였다. 북베트남은 훗날 조선인민군이 요구한 서방진영 군수품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은 중국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이때 친중국 정책을 취하던 북한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다만 F-5와 A-37 등의 공군 항공기와 M48 전차, M16 소총 등 각종 육군 무기가 북베트남군에 노획되었고, 이 중 일부는 공산국가로 흘러들어간 점 등을 봤을 때[37] 소량이라도 노획품을 제공했을 것이다. 폴란드의 경우 북베트남에게 인계받은 F-5와 A-37을 국영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96년에 귀순한 조선인민군 출신 전투기 조종사는 F-5를 조종한 선임을 맞이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전투기 조종사 지원 말고도 심리전 요원 등이 활동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다만 F-5와 A-37 등의 공군 항공기와 M48 전차, M16 소총 등 각종 육군 무기가 북베트남군에 노획되었고, 이 중 일부는 공산국가로 흘러들어간 점 등을 봤을 때[37] 소량이라도 노획품을 제공했을 것이다. 폴란드의 경우 북베트남에게 인계받은 F-5와 A-37을 국영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96년에 귀순한 조선인민군 출신 전투기 조종사는 F-5를 조종한 선임을 맞이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전투기 조종사 지원 말고도 심리전 요원 등이 활동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1973년 10월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38] 당시 이집트에 미사일 요원 30명과 전투기 조종사 및 정비사 50명을 파견했다. 이때 파견된 사람 중 하나가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을 방문한 조명록 차수(당시 대좌). 이때 북한 조종사와 군사고문단들은 큰 활약을 했다고 한다. 당시 공군 사령관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는 대통령이 된 후 은혜를 갚기 위해 "김일성이 사망할 때까지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를 끝까지 지켜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해인 95년 수교 협정에 서명한다.
다수의 특수부대원과 군사고문단, 기갑 승무원들이 파병되어 있다. 일부는 전투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바샤르 알 아사드의 군대 편을 들고 있다.
비동맹회의에 가입한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에 80년대부터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리비아에도 북한의 군사고문단이 파견되었다. 프란스 알버트 레네 대통령 치하의 세이셸에 전투기 조종사를 파견했다. 동남아시아 브루나이와 캄보디아에서 저격여단 요원들이 경호 업무를 수행했다.
8.2. 무기 수출[편집]
북한은 1960년대부터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중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무기를 수출(내지 밀매)하고 있다. 1980년대의 전성기 때는 연간 5억 달러가량을 벌었으나, 2000년대부터 국제 사회의 감시가 심해지자 연간 1억 달러 정도로 수입이 줄어들었다. 뉴욕 타임스는 "북한의 무기는 저렴하면서도 위력적이기에 경제가 어려운 국가들에게 딱 맞다"고 평하였다. 러시아제도 싸지 않냐는 말이 있지만 이런 것은 러시아군 감축의 부산물인 폐기병기를 밀수한 것이 대부분으로 제대로 규격에 맞춰 생산한 소련/러시아제 무기들은 절대 생각보다 저렴하지 않다. 러시아도 한때 미국과 대립할 정도의 국가였으니 만큼 제대로 만들면 절대 허접하지 않다. 소련 시절에 혁명수출 차원에서 싸게 넘겨준 사례가 많았을뿐더러 1990년대에는 구소련권 전반의 경제가 파탄상태인데다가 많은 국가에서는 이 많은 무기가 더 이상 필요는 하지 않으니 헐값에 팔아치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북한이 수출하고 있는 무기들은 딱히 첨단 기술이 크게 필요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가난한 국가에 판매할 정도의 성능은 되는 듯하다. 애초에 빈국 대부분은 무기의 질까지 따질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는 않은 경우가 많다. 북한제 무기가 아무리 최하급이라 해도, 어쨌든 근본은 제대로 검증된 소련제 설계도를 이용해 공장에서 만들어진 공산품이니 급조 총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성능이 좋을 것이고, 또한 그런 공산품치고 전 세계에서 최고로 싼 가격을 자랑하니 빈국 입장에서는 매우 좋은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에서는,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 치하의 마다가스카르에 고사기관총 등의 무기들을 대여하거나 수출했다. 2007년 1월 비로봉호를 통해 3,400여t의 무기를 콩고민주공화국에 수출했다. 2009년경 콩고를 향하던 화물선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임검당해 T-55 전차 부품 등을 압류당했다.
중동에서는,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스커드 미사일, 곡산형 자주포[39] 를 이란에 수출했다. 곡산형 자주포 중 일부는 이라크군에 노획되어 이라크 전쟁에 사용되었으며, 최소 2문 이상이 밀수를 통해 한국군에 넘어갔다. 1987년 4월 이란에 차호급 경비정(80t대) 3척을 수출하였다. 1990년 11월경 타막골호를 통해 시리아에 스커드 C 미사일 80여 기를 수출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에 M-1985 240mm 다연장로켓을 수출하였으며, 이는 이스라엘군과의 전쟁에 사용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아프가니스탄군이 북한제 140mm 다연장로켓 BM-14를 사용했다. 2009년 미얀마에 M-1991 240mm 다연장로켓을 최소 14문 이상 수출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런 '알려진' 수출 행위 외에도 비밀리에 '수출'을 행하는 경우도 빈번히 있다. 2009년 무기를 수출하려다가 태국군에 의해 압수되었다. 목적지는 이란, 스리랑카, 우크라이나 등으로 추측되고 있다. RPG-7, 맨패즈, M-1985 240mm 다연장로켓, 대포동 2호의 부품 등이 발견되었다.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 당시 벌어진 리비아 내전 도중 리비아 정부군이 퇴각하면서 놓고 간 북한산 무기가 잔뜩 발견되었다. 불도저 부품이라는 식으로 위장 포장을 해서 들여온 건데 포장지에 당당하게 북한의 국명이 영문으로 적혀있는 데다가 완제품 무기에도 한글이 적혀있어서 의심의 여지도 없게 되었다.
또한 북한이 헤즈볼라, 하마스를 대상으로 무기 장사를 한다는 게 확인됐다. 기사.
미국의 대북제재가 심화된 근래 상황에서 무기 수출로가 막히자 소말리아 해적에게 연어급 잠수정을 팔아먹으려던 정황도 포착되었다. 판매는 못했지만 가능성이 확인된 셈. 연어급 잠수정은 나름 천안함을 격침시킨 놈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잠복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북한이 러시아에 무기와 탄약을 판매했다는 뉴욕 타임즈 보도가 있다. #
8.3. 군사 훈련[편집]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 치하의 마다가스카르에서 대통령경호여단을 훈련시켰다.
1983년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치하의 짐바브웨에 교관 130명을 파견해 대통령경호여단[40] 을 훈련시켰다. 이 여단이 무가베의 반대 정파에 대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전과 때문에, 2010년에는 일부 짐바브웨 국민들은 북한을 증오하고 있다. 무가베는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2위)와 김정일(3위)보다 더한 세계 최고의 독재자로 선정된 인물로, 짐바브웨의 인플레이션을 세계 1위로 만들었다. 짐바브웨는 끝내주는 친북 국가로, 관공서에는 주체사상 전집이 놓여 있다든가 무가베의 사진과 김일성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든가라는 흠좀무한 국가다. 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부통령을 위원장에 임명하여 추모위원회를 만들었고, 심지어 매년 김일성이 사망한 달을 애도 기간으로 지정해놓고 행사를 연다고 한다.
IRA, 하마스와 헤즈볼라, 소말리아 군벌 등의 무장단체를 훈련시켰다.
2007년 5월 콩고민주공화국의 정부군을 훈련시켰다.
현재에도 캄보디아의 왕궁 경호원들을 훈련시키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8.4. 기술 이전[편집]
1994년~1998년경 이란은 북한의 '로동 1호' 개발비 전액과 부품을 제공했다고 알려졌다. 그 대가로 기술 이전을 통해 이란의 탄도미사일 샤하브-3, 파키스탄의 탄도미사일 가우리-1가 만들어졌다. 이 외에 미얀마 등 제3세계 국가들에게도 미사일 기술을 전파하고 있다는 의혹이 있다.
8.5. 외국과의 조약/관계[편집]
조-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은 전쟁 상태에 놓일 때 중국이 자동개입하도록 되어 있다. 다만 중국으로서도 미국과의 전면적 대립은 피하고 싶은 상황인 만큼 북한이 핵이나 생화학 무기등을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에 사용할 시에는 이탈할 가능성도 있다. 계속되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인해 북중관계가 나날이 악화되어 중국 내부에서도 "북한을 포기하라" "군사개입 조항을 삭제하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조약에 의거하여 중국 인민해방군의 교육기관에서 북한군 장교들이 교육 이수를 받는 등 인적교류를 하고 있으며 공공연한 비밀로서 중국의 비공식적인 군사원조 혹은 지원을 받고있다.
특히, 2조 조항의 의미를 많이 상실을 했는데, 제2조는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3월 인줘(尹卓)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미·일 동맹과 달리 북·중 동맹은 군사 동맹이 아니라는 뜻을 밝히는 등 이 조항은 이미 중국 정부 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인줘 소장은 당시 “중국이 북한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느냐. 중국이 북한 인민군을 지휘하느냐”고 반문했다.
1조에서 ‘조약 당사국 쌍방은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각국 인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글대로 계속되는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으로 인해 접경지역 주민들이 짜증이 가득하며, 조약에 위배되는 사항이다.
기타로 모잠비크, 리비아, 쿠바, 몽골 등과 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그 외에도 미얀마 군사정부와 모종의 관계를 설립했다. 두 국가 모두 서방권과는 왕따된 형편.
러시아는 과거, 소련시절에 조소우호협력및상호원조조약을 맺었지만 보리스 옐친이 김일성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41] 대한민국과의 외교 관계 개선으로 소련-북한간 조약을 무효화 시켰다.
8.6. 북한의 핵개발 [편집]
1997년에 망명한 황장엽은 회견에서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미 북한 내부에서 핵무기 보유는 상식화되어 있고 지난 85년 소련 측이 핵개발을 문제 삼자 김일성 부자가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자신은 핵관련 시설을 직접 본 적은 없으나 92년 국제 원자력 기구의 특별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 확산 방지조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로동당의 비서들은 모두 핵 보유를 믿게 됐다"고 밝혀, "북한의 핵 개발계획이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고 이미 북한이 핵무기까지 보유했다는 것(1997년 당시)으로 북한에서는 모두들 이렇게 알고(믿고) 있다"고 폭로하여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KBS, MBC, 조선일보, 또한 당시 김정일은 "북한이 없는 지구는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북한이 망하면 세계와 함께 자폭하겠다는" 극언을 내뱉었다고 황장엽은 증언했다. 또한 당시 북한 당국에서는 "지금까지의 전쟁에서는 미국에 포탄하나 떨어진 적 없지만 앞으로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다르다"라며 "미국에도 북한군이 상륙할 수 있다"라고 주민들에게 선동하고 있다며 증언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1985년 당시 소련 측이 북한의 핵개발을 문제삼은 이 내용은 지난 1994년 러시아 관계자들에게도 나온 이야기였다. 1994년 러시아 국가안보 연구소 블라디미르 쿠마초프 고문에 의하면 "북한은 그들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독자적으로 완성한 발사 차량을 가지고 있으며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특정한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북한이 그러한 핵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련도 85년부터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음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북한에 있던 핵전문가들을 본국으로 송환했다"고 밝혔다.(조선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1994년 7월 27일, 북한에는 이미 핵무기를 5개나 보유하고 있으며 핵무기를 5개나 더 개발한 뒤 이를 국제사회에 발표하고 미국에 알릴 예정이라고 북한 정무원 교원 강명도 씨와 김일성대학 상급교원 조명철 씨가 귀순기자회견에서 밝혀 큰 충격을 안겼다. 그들은 북한은 핵탄두개발과 함께 핵탄두를 탑재할 로켓개발에 열중하고 양산체제로 들어갈 것이며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타개할 방법은 핵무기의 완성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핵무기 5개로는 북한에 충분하지 않으며 공개될 경우 국제적 압력으로 더 이상의 핵개발이 불가능해질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KBS, MBC,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이러한 강씨의 회견에서 국내 언론들은 믿을 수 없었으나, 북한이 5개나 보유한 것이 가능한가라는 반응을 보였고 미국과 일본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조선일보, 경향신문1, KBS, MBC, 경향신문2)
당시 회견에 대해 월리엄 페리 미국 국방장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1개~2개 즈음 보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발표하고 미국 PBS와의 인터뷰에서도 이같이 밝혔다.(MBC, 조선일보, 동아일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북한 핵 개발에 대해서 미국 정부는 아주 단호하고도 강경한 입장을 취하겠다고 경고하면서 결코 묵인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북한은 핵무기를 손에 쥐면 이를 써버릴 위험이 높은 정권이기 때문에 북한의 핵 개발은 엄청난 악몽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클린턴 대통령은 머지않아 이란과 이라크가 핵 개발에 성공해 미국에 대항할 것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북한의 핵 개발이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개발의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곧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돼 이 지역의 안정이 크게 위험해 지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KBS, MBC)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사용하려 할 경우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며 강력 경고했다.(KBS, MBC)
9. 군복[편집]
자세한 내용은 군복/조선인민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군장[편집]
자세한 내용은 군장/조선인민군 육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계급[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계급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 편제[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편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1. 육군[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육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2. 해군[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해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3. 공군[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공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4. 전략군[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전략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5. 특수작전군[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6. 준군사조직[편집]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군 준군사조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2.7. 예술단[편집]
군가 목록에 대해서는 군가/북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3. 관련 문서[편집]
- 4대 군사노선
- 근위대(조선인민군)
- 북한/대남 도발
- 서해교전
- 어디에다 대고 신성한 우리 영해에 불질이야
- 연평도 포격전
- 창격전투
- 천안함 피격사건
- 서부전선 포격 사건
- 한국군 vs 북한군
- 군복/조선인민군
- 조선인민군/계급
- 조선인민군/차량
- 열병식/북한
- 남북통일/군사 문제
- 북한의 핵개발
- 북한의 미사일 개발
-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
- 징병제/북한
- 조선인민군(신문)
-
테러 - 6.25 전쟁
- 조선인민군 전반에 대한 정보
- 편제
14. 출처 목록[편집]
- 논문
- 함택영, 1997, 「남북한의 군사력 - 사실과 평가방법」, 국제정치논총.
- 최성빈 외, 2005. <북한 군수 산업 개황 보러가기
15. 대중매체에서[편집]
의외로 세계 미디어물에서 자주 나온다. 대부분 악의 축으로 등장하며,[45] 각 나라의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중국군이 북한군으로 대체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중국을 악당으로 묘사하면 중국 시장 수출길이 아예 닫혀버리거나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무리수를 둬서라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현대를 배경으로 등장해 전투를 벌일 경우 현실의 열악한 북한군을 그대로 반영해 등장시키면 쉽게 털릴 것이 뻔하기에 긴장감을 위해 일부러 엄청난 강군으로 묘사해 1류 군대도 쩔쩔매는 강군으로 묘사한다.[46] 앞에서 말했듯이 사실 미국이나 서방세계의 가장 큰 적국은 러시아와 중국인데, 러시아는 독재국가지만 민주주의나 자유가 제한적으로나마 있고, 그래도 서양답게 좀 널널한 구석이 있어 자기들이 악으로 묘사되어도 관대하고 그걸 또 수입하기도 하며, 독일과 일본도 2차대전을 다룬 미디어를 잘 수입하나, 중국은 조금이라도 거슬리게 자신들이 묘사되면 수입 금지를 때린다.[47] 그래서 다 만들어놓고 스킨이나 설정, 이름만 바로 북한으로 바꾸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열세인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서 비대칭 전력과 함께 특수전 전력에 미친듯이 투자를 한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 특수부대들이 탈인간급 초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총알도 비껴갈 수준으로 빨리 달리고 고층에서 추락해도 멀쩡히 일어나며 칼이나 맨손으로 총을 든 상대 여럿을 제압하는데다 피탄 당하더라도 상처 부위를 부여잡고 버티며 전투를 이어나가는 말도 안되는 체력과 정신력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보통 남성향의 액션 위주면 북한 강경파를 비롯한 악역들을 물리치는 내용이고, 여성향 드라마, 영화 등지에서 잘생긴 미남 조선인민군과 남한 여성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클리셰화되었다. 기존에는 남남북녀라는 이미지 성향이 강했다. 이런 멜로 이야기까진 아니더라도, 사실 소련 등 구 공산권 국가 출신의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는 선악을 막론하고 말쑥하고 유능한 미남/미녀로 묘사한 사례는 흔하다. 007 시리즈가 그 예.[48]
^표시는 타국에서 북한으로 설정변경된 작품이다.
15.1. 영화 및 드라마[편집]
한국전쟁 시기의 북한군을 묘사하는 영상물에서는 전통적으로 케피 형태의 전투모를 쓰고 PPSh-41, 통칭 따발총으로 무장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바로 한국인들이 북한군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그러나 실제로 북한군이 철모 없이 전투모만 쓰고 다니고 거의 전 병력이 PPSh-41만으로 무장한 것은 아닌데, 이런 이미지가 생긴 것에는 사정이 있다.
첫째는 독재정권 시기 만들어지던 흑백 반공 영화에서의 피아식별 문제. 흑백영화에서는 군복의 색으로 소속을 구별하기 어렵다. 북한군을 소련제 СШ-40 철모를 쓰고 모신나강 소총을 든 모습으로 묘사할 경우에는 미국제 M1 철모를 쓰고 M1 개런드 소총을 든 국군과 구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국군과 딱 봐도 다르게 생긴 전투모를 쓰고 PPSh-41로 무장한 모습으로 북한군을 묘사하게 되었고, 이런 반공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것이 북한군의 이미지로 고착화되어 컬러 영상물에까지 이어지게 된 것.
둘째는 실제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기억하는 북한군의 이미지가 전투모와 따발총이었다는 것. 전쟁 초기 북한군 사진을 보면 소련제 СШ-40 철모 혹은 일본제 90식 철모를 착용했으나, 전쟁 기간의 대부분이었던 1951년 이후의 사진들을 보면 철모를 쓴 북한군이 거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주력군이 박살나면서 보유 중이던 철모 대부분을 손실했고, 이후 주력이었던 중국 인민지원군조차 철모를 못 쓰는 마당에 북한군의 철모는 보급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렸을 것으로 보인다. 즉 전쟁 후반의 북한군 묘사가 전투모를 쓴 모습이라면 고증에 맞지만 전쟁 초반부터 전원이 전투모만 쓰고다니는 것은 틀린 것이다. 또한 북한제 PPSh-41의 품질이 조악했다고는 해도 당시 국군은 자동화기 보유 수량이 턱없이 부족했기에 근거리에서 총알을 흩뿌리는 PPSh-41, 즉 따발총은 굉장히 위협적인 무기였다. 때문에 국군의 것보다 열세였던 북한군의 다른 무기들에 비해 이 따발총은 참전용사들의 기억에 더 강하게 남았을 것이고 따발총+전투모라는 고착화된 이미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제작비 문제로, 국내에 넘치는 M1 철모와 달리 북한군 엑스트라들에게 구하기 어려운 СШ-40 철모를 씌워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국군의 무기가 아닌 PPSh-41도 마찬가지지만, 대충 전투모로 퉁치면 되는 철모와 달리 따발총은 북한군의 상징과도 같아서 제작비를 위해 생략할 수는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로는 이러한 클리셰도 어느 정도 깨지고 있어 제대로 철모를 쓰고 따발총 외의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북한군들이 등장하고 있다.
- 강철비
- 강철비2
- 공동경비구역 JSA
- 공조 시리즈
- 007 어나더데이
- 솔트
- 스텔스
- 스폰
- 레드 던^
- 백악관 최후의 날
- 천군
- 태양의 후예, 용의자 - 회상으로 짤막하게만 나온다.
- R2B: 리턴 투 베이스
- 연평해전
- 창공에 산다
- 꿈☆은 이루어진다
- SEAL team
- 6.25 전쟁을 소재로 삼은 영화
- 6.25 전쟁을 소재로 삼은 드라마
- 사랑의 불시착
- 더킹 투하츠
-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15.2.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 군인RPG
- 민간인 통제구역
- 하이브 시리즈(데드퀸 포함) - 단, 벌들에게 감염된 상태로 나온다.
- 70
- 데미지 오버 타임 - 직접 등장하지는 않고, 작 극후반에 언급된다.
- 반도 프리퀄 631 - 휴전선 인근으로 이동한 631 부대에게 포격을 날리는 것으로 간접 등장.
- 제2차 한국전쟁
15.3. 게임[편집]
- 홈프론트^
- 홈프론트: 더 레볼루션
- 크라이시스^
- 콜 오브 듀티: 어드밴스드 워페어
- 워게임: 레드 드래곤
- 로그 워리어
- DMZ North Korea
- 모던 컴뱃 3: 몰락한 제국 - 명목상으로는 러시아 군벌과 파키스탄 테러리스트와 함께 연맹군을 맺고 미국을 침공한 건데 사실상 북한군의 비율이 압도적이라 사실상 북한이다.
- 워 썬더 - 조선인민군이 직접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중국이 북한에 판매한 선양 F5가 등장한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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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 헌법, 제 103조[2] 국무위원회 산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성의 수장. 얼핏 보면 한국 국방부에 대응되는 포지션 같지만, 군령권과 군정권을 모두 지닌 국방부와 동등한 수준의 권한과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세한 것은 해당문서 참고. 군 관련 대외업무, 행정통제, 후방사업(보급 등) 다만, 군사건설, 교육-훈련, 후방사업과 외화벌이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물론 총정치국 보위국에서도 따로 수행하고 있다. 때문에 일반행정통제권만 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3]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중앙위 산하 조직지도부, 군정지도부 및 중앙군사위원회의 통제. 인민군 내 당조직 및 정치사업 관장, 군 인사권 담당[4] 대한민국 국방부 추정치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탈북자 출신의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북한군의 실제 병력은 많이 쳐주어야 70만 정도라고 주장한다. # 정확히는 북한 정부의 인구 부풀리기에 대해 폭로하면서 함께 언급했다. # 특히 학자들의 추정치도 주성하의 주장과 비슷하다. 게다가 2021년 2월 들어 북한은 군 의무 복무 기간을 감축했다. 남성 10년에서 8년으로, 여성 7년에서 5년으로 줄였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도 군대의 규모가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MBC 통일전망대 영상(5분 17초부터 확인 가능): # 아시아프레스는 김정은 정권이 70만 북한군 병력 중 14만명을 제대시켜서 북한군 규모가 56만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취지로 보도하였다. #[5] 교도대, 노농적위군, 붉은청년근위대 등 포함한 숫자. 어마어마한 규모 같지만 이 역시 사실상 과장된 수치로 실제 전시에 전투 가능한 전력은 30~70만명 정도 밖에 안 된다.[6]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기존의 '국가'는 무산자들을 착취하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르주아를 대변하는 기구로써 간주되며,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은 기존의 국가 및 군대 개념을 형식적으로나마 부정했고, 평의회에서 선출되어 '무산자들의 뜻을 철저히 대변한다'는 공산당이 인민들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방위대라는 개념을 내세웠으며, 북한도 어찌되었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하여 세워진 국가였으므로 이러한 형태를 취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국군과 다를 바가 없긴 했지만. [7] 한국에서는 중학교 수준 상식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군은 38선 북쪽을 소련군이, 남쪽을 미군이 무장해제시켰다. 김일성은 자신이 어떤 부대를 만든적 조차도 없다. 소련과 중국의 외국 조직에서 장교로 복무했기에 그에게 해방이 되자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8] 이상우 『북한 40년: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특성과 변천』, 을유문화사, 1990, p337.[9] 한자로 풀이하면 北韓 傀儡軍[10] 공교롭게도 이들과 대치 중인 국군 또한 5군단이다. [11] 북한군 창건 당시 사용된 깃발이다. 인공기 도안을 바탕으로 하여 별 대신 북조선인민위원회(당시는 북한 건국 이전) 및 북한의 국장이 그려진 형태이며, 당시에는 근위대를 제외하면 육군, 해군, 공군 3군 공통으로 해당 도안의 군기를 사용하였다.[12] 반대로 우파 계열 의병 집단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하로 들어가 광복군이 되어 오늘날의 한국군의 기원이 된다.[13] 주의해야 하는 것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연이어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군 조직을 축소시켰다. 이에 50년 당시 한반도에 미군은 소수의 고문관과 연락관이 전부였고. 전쟁 발발 후 일본에서 유유자적 지내던 미군을 급하게 한반도에 투입했고 이러한 상황에 한국의 지형도 모르는 불상사까지 겹치면서 낙동강까지 밀렸다. 이후 다시 재건된 부대들이 투입되면서 제대로 된 전쟁을 하나 싶었지만 중공군의 공격에 또 다시 굴욕적인 상황을 맞이하였다.[14] 화북에 있던 조선의용군 출신과 만주에 숨어서 저항하던 소수의 독립군들은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들어왔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은 이들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15] 다만 북한군이 정말로 소련제 무기만 100% 사용한 건 아니다.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중국제 무기도 많이 사용하였으며, 심지어 일본군이 두고간 무기를 접수해서 쓰기도 했다. 통념과는 달리 북한도 초반에는 한국처럼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실패하여 친일파 중에서도 잽싸게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지원을 꼬박꼬박 제공한 친일파들은 잘 먹고 잘 살았고, 북한이 열심히 때려잡았다는 친일파들은 촌 동네 지주 같은 만만한 중소 친일파들만 골라서 보여주기식으로 때려잡은 쇼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이 자신의 경쟁자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친일파 출신 고위직들도 전부 숙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심영이 있다.[16] 또한 이때 친일파 뿐만 아니라 남로당, 친소련파, 친중파 같은 친 외세 성향 출신들도 대거 숙청되었다.[17] 정확히는 1944년에 업그레이드 된 T-34/85[18] 그마저도 소수였다.[19] 노획한 일본군의 97식 전차나 극소수의 국민당군 소속 미제 전차가 전부였다. 두 전차를 모두 합쳐도 유의미한 기갑전력은 구축하지 못했다.[20] 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냉전 내내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다가 90년대부터 현대화 작업에 착수한 중국군은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붕괴하기 전의 북한군보다도 약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21] 1949년 1월 인민군 제2 군관학교로 개편되었다.[22] 1948년 12월 제1 군관학교로 개편되었다.[23] 6.25 때처럼 대승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군사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24] 북한군의 장비를 살펴보면 김일성 사후 김정일 시대에는 핵폭탄과 미사일을 제외한 재래식 무기의 개발과 배치가 김일성 시대나 이후 김정은 시대와 비교해 봐도 현저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2-94년이 북한군이 재래식 군사력의 기둥뿌리나마 유지하고 있던 마지막 시기이기 때문. 김정은 시대에 들어 재래식 병종에도 신무기가 배치되고 있지만 90년대에 이미 남쪽으로 기울어버린 재래식 군사력의 균형을 뒤집을 가능성은 요원하다.[25] 교도대 60만여 명, 노농적위군 570만여 명, 붉은청년근위대 100만여 명, 기타 호위사령부, 사회안전성 및 기타 준군사조직 32만여 명.[26] 러시아나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는것도 다 외화가 있어야 가능한데, 당연히 둘다 남한과의 교류가 활발한데다가 북한의 외환보유고야 말 안해도 뻔한 상황이라서 북한에서 이를 대규모로 도입하기 어렵다.[27] 물론 각종 비리로 군인들이 부실한 식사를 하는 경우는 많았고 그것이 어느정도 현재진행형이지만, 고난의 행군 시대에는 타 직장에서 근무해봐야 점심밥조차 제대로 주지 않아서 그 부실한 밥이라도 주는 군대에 있는 것이 더 나았다.[28] 물론 그 이전에도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를 뿌리로 하는 조선의용군이 존재했지만 이건 다른 군대다. 이들이 광복 후 북한에 돌아와서 연안파를 형성한다. 조선의용군의 주요 인물들이 바로 김두봉과 김무정이다.[29] 최고사령관 직책과 더불어 조선로동당 내 군부 통제기관인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직도 겸한다. 2020년 10월 10일 열병식 때 직함을 총사령관(국무위원회 위원장이 겸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30] 북한은 국가원수가 군 최고위직까지 겸한다. 군 참모총장의 직속상관인 각 군 장관을 군복무 경력이 없는 민간인 위주로 임명하는 미군의 안티테제다.[31] 의무가 아니라는 것뿐 군대를 다녀와야지만 노동당에 입당 자격이 생기고, 출세를 하든 시집을 잘 가든 뭘 좀 하려면 당원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원입대하는 여자들이 꾸준히 존재하긴 했다.[32] 지금은 5년으로 줄긴 했다.[33] 흔히 세계사의 군국주의 국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대 스파르타와 나치 독일, 일본 제국도 여성까지 징집하지는 않았다.[34] 동아일보의 주성하 기자도 유튜브로 보도했다.#[35] 전역 후 집단배치는 남자들만 해당된다. 여성들도 공산국가에서는 일자리를 강제배정해주지만 남자들처럼 철저하게 집단으로 돌아가는 수준은 아니고 어느 정도는 봐주는 편인데 북한도 여군 전역자들은 그냥 집으로 보내는 것으로 보인다.[36] 비행 연대 2개[37] M16 소총은 입수 루트가 워낙 다양하긴 하지만 북한도 상당량을 가지고 있다. 국군으로 위장해 침투했다가 703 연대와 조우했을 때 위장한 부대가 갖고 있지 않은 M16으로 무장했던 탓에 공비라는 것이 들통나 실패했던 적도 있을 정도다.[38] 욤 키푸르 전쟁[39] M-1978, M-1989[40] 폭풍여단 또는 짐바브웨 제5여단.[41] 옐친은 개인적으로 북한을 굉장히 싫어했으며 남한에 호의적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옐친은 젊은 시절부터 북한이 어떤 뻘짓을 해댔고, 그 적인 남한은 어떻게 성장해 나갔는지 다 지켜본 인물이다. 북한이 하는 꼬라지를 수십년간 지켜보다 못해 정나미가 떨어진 셈이었다.[42] 그 외에 해군과 공군의 사령부 직속인 해군사령부협주단과 공군사령부협주단이 있으며, 준군사조직 중에서도 인민보안부와 조선인민내무군 직속의 협주단과 취주악단이 활동하고 있다. 기타 군단, 사단급 부대에도 약간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예술소조-한국의 동아리 개념-활동을 겸하는 공연 단체를 두고 있으며, 각 단위의 경비소대/중대에는 소규모 군악대가 조직되어 의장대 역할도 겸하고 있다.[43] 문제는 '폭풍호' 떡밥 등을 볼 때 이 책에 대한 신빙성이 0에 가깝다. 일단 저자부터가 사기 치고 중국으로 도망친 양반. 따라서 포병, 기갑 부분의 상당 부분은 제외했으며, 북한군 내에서 상식적일 것 같은 부분만 게재했다.[44] 김정일 유모이던 강보비의 조카. 김일성의 외사촌 친척이며 강성산 정무원 총리의 사위이기도 했다. 장성택 실각설 이후에 교수 직함으로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비롯한 종편에 자주 출연하고 있다.[45] 사실 당장 미국의 대통령들이 공화/민주 안 가리고 북한을 악으로 묘사한 바가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를 제외하면 미국의 최근 대통령들은 북한을 항상 비판하고 경계했었기 때문. 그 트럼프마저도 2018년에 북한이 갑자기 화해무드로 돌아서기 이전인 집권 초기에는 다른 대통령과 비슷했다.[46] 크라이시스에선 미국이나 개발할 만한 첨단 강화복을 만드는 사기국가로 묘사된다.[47] 사실 이는 6.25 전쟁을 다룬 미디어가 세계적으로 잘 나오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엔 잊혀진 전쟁으로 취급했다가 현재는 존재감이 커졌지만, 6.25 전쟁은 시작은 한국VS북한이었지만 점차 미국+UN VS 중국+소련으로 옮겨가며, 현대 중국이 서방국가랑 대놓고 싸운 전쟁인 데다, 중국은 현재 UN 상임이사국 소속인데 6.25전쟁은 당시 중국이 UN을 어기고 침략국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역사왜곡 및 미화에 걸림돌이 된다.[48] 007의 경우 대부분 적국 첩보요원과 상대했다는 점도 이유의 하나. 그 가운데에서도 고골 장군이나 로자 클렙 같은 고위급들의 경우는 나이도 많고 전혀 잘 생기지 않았다.[49] 원본이 중국제이여서 중국 트리에 배치되어있지만 운용국가가 북한으로 표시되기에 조선인민군 항공군 소속 기체가 맞다.